한편 농업도 발달해, 풍부한 밀 생산량은 무역을 하지 않아도 자급자족이 가능하게 해 주었을 뿐 아니라 상대적으로 빈곤한 유럽 중서부에 수출까지 할 수 있었다. 카르타고는 이런 막강한 국력을 믿고 동지중해까지 판도를 넓히려 했다. 그 시작으로써 서쪽 절반만 지배하고 있던 지중해 중부 시칠리아 섬의 나머지를 손에 넣으려 했다. 그러나 그 시도는 뜻밖에 연이은 암초에 부딪쳤다. 먼저 한니발의 언급에서 나오는 사람, 그리스 국가 중 하나인 에피루스의 왕이던 피로스가 카르타고의 야심을 막아냈다. 그리고 그 다음 암초는 바로 로마였다.
로마는 기원전 8세기경 성립되어 삼니움, 갈리아 등 이민족과 대결해 가며 차차 세력을 넓혔고, 3세기에는 마침내 이탈리아 반도 통일을 달성했다. 통일의 마지막 장애물이 바로 에피루스의 피로스였는데, 그는 카르타고와는 반대로 동지중해를 기반으로 서쪽을 정벌해 세계를 통일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이탈리아에 상륙해 로마를 매섭게 공격했으나 여의치 않았고, 그 다음 원정에서 시칠리아의 카르타고를 무찌르고는 다시 로마와 겨루었으나 패퇴하고 그리스로 돌아갔다가 전사하고 만다.
피로스가 사라지자 지중해의 패권을 노리는 카르타고를 막을 세력은 로마뿐이었다. 로마의 국력은 카르타고에 비하면 약세였고, 특히 육전에는 강해도 해전에서는 카르타고에게 명함도 못 내밀 정도였다. 그래서 로마 원로원도 동맹을 맺고 있던 시칠리아 동부의 도시들이 카르타고의 침략에서 구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과연 우리가 바다 건너 외국에서 싸워 이길 수 있을까?’하고 무척 망설였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원정대가 로마를 출발했고, 이로써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에 제1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된다(기원전 264년).
의외로 카르타고 편이던 시칠리아 도시들이 배반하여 로마 편을 드는 바람에 로마군은 시칠리아에서 우위에 설 수 있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해군력 열세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고 여겨, 총력을 기울여 새 함대를 건조했다. 그래도 카르타고 함대의 규모에는 못 미쳤지만, 로마의 새 군함은 적함에 걸쳐 놓고 보병대가 돌격해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적교를 갖추고 있었다. 이렇게 하면 카르타고 해군의 우수한 조함술을 따라잡을 수 있고, 바다에서도 로마의 장기인 백병전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효과는 확실해서, 로마는 기원전 260년 시칠리아 북부 해안에서 카르타고 해군을 격파한다. 이후 카르타고 본거지에 대한 공격에서는 참패했지만, 다시 시칠리아를 무대로 벌어진 공방전에서 결국 승리를 거두어 제1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끝난다(기원전 241년). 로마는 이로써 카르타고에게 거액의 배상금을 받는 한편 시칠리아 전체를 차지했고, 여세를 몰아 사르디니아와 코르시카까지 손에 넣는다.
한니발, 로마의 등에 칼을 꽂다
제1차 포에니 전쟁 때 시칠리아에서 용병대를 조직해 로마군을 집요하게 몰아붙여, 한때 로마를 패배 직전까지 몰고 갔던 카르타고 장군이 있었다. 그는 하밀카르 바르카스라고 했는데, 패전 후에는 이베리아로 건너가 정복지를 넓히고 은광을 개발하기도 하며 카르타고의 손상된 국력에 보탬이 되고 있었다. 그러다가 기원전 229년 그만 암살당하는데, 배후에는 로마가 있었다. 그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맏아들이 바로 한니발 바르카스였다. 하밀카르는 어린 한니발에게 “네가 자라면 반드시 로마를 멸망시켜야 한다. 신과 아버지 앞에 맹세하거라.”라고 했다고 한다. 어린 한니발에게 로마는 아버지가 반드시 멸망시키고 싶어했던 나라요, 아버지를 죽인 나라였다. 그리하여 그가 기원전 221년에 26세의 나이로 이베리아의 카르타고군 총지휘권을 손에 넣자, 이베리아 북부를 공략 중이던 로마와는 날카롭게 대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로마는 지중해 연안의 도시 사군툼을 속령으로 선언하고, 카르타고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러나 한니발은 사군툼을 공격해서 점령해버렸다. 기원전 218년의 일이었고, 이것으로 제2차 포에니 전쟁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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