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사르는 갈리아 정복 시 자신이 참전했다는 표시로 늘 진한 붉은색 망토를 입고 전투에 나갔다고 한다. 카이사르는 비록 갈리아를 정복했지만, 이후에는 보복적인 정치보다는 복속한 켈트족들에게 우호적이었고, 켈트족에게 정치적 자율권을 주고 농경을 전파해 경제를 일으켰으며 자신에게 충성하는 켈트족은 적극적으로 로마 시민화하기도 해 반발을 없애고 충성을 다짐받았다.
갈리아 정복은 카이사르에게 여러 면에서 이점을 가져다 주었다. 정복에서 얻은 약탈로 부유해졌으며 오랫동안 변방지역을 괴롭혀왔던 켈트족을 복속시켜 로마에서 인기가 치솟았다. 더불어 그는 7년 동안 전투로 단련된 노련한 군인들을 자신의 휘하에 두게 되어 그 누구보다 강력한 군대를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복속된 갈리아 켈트족들의 충성과 넓은 영토도 카이사르에게는 든든한 힘이 되었다. 문필에도 재주가 있었던 카이사르는 자신의 갈리아 정복기를 <갈리아 전기>로 남기기도 하였다.
갈리아에서의 승승장구로 카이사르는 로마 원로원 귀족들로부터 더욱 경계를 받았다. 협의롤 통해 로마 정치를 이끌어가던 귀족들은 카이사르의 독주가 장차 귀족권을 약화시키고 1인 독재의 시대를 불러 올 것이라 우려하였다. 키케로와 카토 등 공화정을 지지하던 귀족들이 본격적으로 카이사르를 견제하려고 나섰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즈음 삼두정치를 이끌던 크라수스가 파르티아(현재 이란 북동부지역)와의 전쟁 중에 전사하고 폼페이우스와 결혼했던 카이사르의 외동딸 율리아가 아이를 낳다가 죽는다. 카이사르, 크라수스, 폼페이우스 3명이 이끌던 삼두정치가 붕괴될 조짐을 보이자, 로마 귀족들이 먼저 손을 쓰기 시작했다. 그들은 폼페이우스를 자기편으로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 혼인으로 이루어진 인척 관계가 끊어지자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와 결별하고 귀족 세력과 손을 잡았다. 원로원의 귀족들은 카이사르에게 즉시 군대를 해산하고 갈리아 총독에서 물러나 단신으로 로마로 돌아올 것을 명령하였다. 카이사르에게 무장해제하고 죽으러 오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카이사르는 몇 차례 귀족들과 협상을 하려했지만, 폼페이우스의 군사력을 믿고 있던 귀족들은 이를 무시했다. 이 와중에 카이사르의 편을 들던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가 있는 갈리아로 도망쳐온다. 카이사르는 협상의 테이블은 이미 깨졌다는 것을 직감하고 내전을 불사하기로 한다. 그는 갈리아에서 단련된 자신의 정예부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격했다. 갈리아에서 로마로 들어가는 루비콘 강을 건너며 카이사르는 자신의 병사들 앞에서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는 유명한 연설을 한다. 이 말은 내전만은 피해보려 했던 카이사르의 노력이 물거품이 된 후 마지막 결단이 로마진격이었던 것이고 그 결단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것임을 명백히 한 것이다.
카이사르 군대의 재빠른 움직임에 로마귀족들과 폼페이우스는 당황했다. 그들은 카이사르의 군대에 맞서지 않고 로마를 비운 채 국외로 나가 전열을 가다듬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폼페이우스와 로마 귀족들의 오판이었다. 그들은 카이사르보다 몇 배나 되는 군대를 가졌으면서도 제대로 한번 맞서지 못하고 카이사르의 군대에 밀렸다. 폼페이우스의 군대는 히스파니아(현재 스페인지역)와 그리스에서 카이사르 군대에 대패하였다.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건너가 훗날을 도모하지만 피난 중 암살당하고 말았다.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쫓아 이집트로 건너가게 되고 그곳에서 운명의 여인을 만난다.
클레오파트라 7세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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