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세계)

카이사르의 어린 후계자 아우구스투스

지식창고지기 2010. 1. 21. 11:34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가 공화파 귀족들에게 암살당한 후 공개된 그의 유언장은 로마 귀족 사회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카이사르는 그의 재정적, 정치적 후계자로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은 옥타비아누스(훗날 아우구스투스)를 지정했다. 아들 카이사리온이 카이사르의 후계자가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클레오파트라 7세와 카이사르를 오랫동안 보필했던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유언장에 배신감을 느꼈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친인척이라는 사실 외에는 로마 귀족사회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는 훗날 로마의 전권을 장악하고 제정 로마시대를 여는 초대 황제가 되어 세상에서 가장 존엄한 자를 뜻하는 아우구스투스로 불렸다.

 


카이사르의 어린 후계자

옥타비아누스의 태어날 때 이름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였다. 그의 어머니 아티아가 카이사르의 조카로 귀족 신분이었지만, 아버지가 평민이었기 때문에 그도 역시 평민신분이었다. 옥타비우스가 귀족신분이 되는 것은 카이사르의 후계자 되고 나서부터이다. 옥타비우스 4살 때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 아티아는 재혼하고 옥타비우스는 외할머니(카이사르의 누나) 율리아 카이사리스의 손에 자라났다.

 

합법적인 결혼을 통해 태어난 아이가 없던 카이사르는 영민하고 총명한, 누나의 외손자 옥타비우스를 눈 여겨 보았다. 성장하면서 몇 차례 후계자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준 옥타비우스를 카이사르는 유언장에 제 1 후계자로 지정하였다. 카이사르가 나이 어린 옥타비우스를 후계자로 정한 것은 자신이 그토록 일찍 암살당할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긴 시간을 두고 옥타비우스를 후계자로 다듬어 갈 계획을 세웠던 카이사르의 느닷없는 죽음은 19세 옥타비우스에게는 시련이자 새로운 기회였다.


 

카이사르의 암살 당시 옥타비우스는 로마에 있지 않았다. 일리리아의 아폴로니아에서 공부와 군사 훈련을 병행하고 있던 옥타비우스에게 카이사르의 암살과 후계자가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를 보필하던 장교들은 로마에서 이미 권력을 장악한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우스를 살해 할 것이라고 보고 피신을 권유했다. 그러나 옥타비우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과 권리를 버리지 않았다. 그는 피신하기는커녕 오히려 로마로 돌아가 자기를 중심으로 카이사르의 병사들을 결집했으며 카이사르의 유언을 왜곡하는 안토니우스에게 당당히 맞섰다.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과연 카이사르가 선택한 후계자다웠다. 옥타비우스는 일단 카이사르의 이름을 물려 받았다. 그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라는 이름 뒤에 자신의 이름 옥타비우스를 옥타비아누스로 고쳐 붙였다. 그리고 실권을 장악한 백전노장 안토니우스와의 대결을 차근차근 준비하기 시작했다.

 

 

2차 삼두정치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후계자라는 사실 외에는 모든 면에서 안토니우스에 열세였다. 안토니우스는 군사력과 재력, 경력과 인맥 면에서 카이사르가 죽은 로마에서 최고였으며 심지어 옥타비아누스에게 상속된 카이사르의 재산까지 움켜 쥐고 돌려주지 않았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를 죽인 공화파 귀족들을 벌하지 않고 타협하였으며 카이사르의 신격화도 방해했고 카이사르의 독재 권력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에 골몰하였다.

 

 


궁지에 몰린 옥타비아누스를 구제 해준 것은 뜻밖에도 카이사르 생전에 평생의 정적이었던 키케로였다. 그는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를 흉내 내며 독재권을 가지려 하자 그를 신랄히 비판하고 나서 옥타비아누스의 숨통을 틔워주었다. 그는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성적 대상이었기 때문에 후계자가 되었다는 안토니우스의 비난을 막아 주었으며 안토니우스가 로마에서 평판을 잃고 갈리아 지역으로 이동하게끔 만들었다. 옥타비아누스에 대한 키케로의 뜻하지 않는 호의는 안토니우스에 대한 경계심 때문이었다. 안토니우스가 제 2의 카이사르가 되려고 하자 이를 막기 위해 본의 아니게 옥타비아누스의 편을 든 것이다. 이것은 옥타비아누스의 진정한 야망을 미처 파악하지 못한 키케로의 경솔함이었지만 안토니우스에 비해 너무나 약세였던 옥타비아누스에게는 가뭄에 단비와 같은 성장의 기회였다.

 

그러나 카이사르를 따라 다니며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가 쉽게 대항할 상대가 아니었다. 어느 정도 힘을 기른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에게 섣불리 맞서기 보다는 일단 그와 손을 잡고 다음을 도모하는 방법을 택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누이를 안토니우스에게 시집 보내 인척 관계를 맺은 다음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2차 삼두정치를 시작했다. 이것은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의 1차 삼두정치와는 달리 공식적 협약이었다. 이를 2차 삼두정치라고 한다.

 

2차 삼두정치는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동상이몽과도 같았다. 각자가 주인공이 되는 독재권, 나아가 황제권을 꿈꾸던 그들이었지만 일단은 눈앞의 정적 제거가 시급했던 두 사람의 전략적인 제휴였던 것이다. 2차 삼두정치를 시작하면서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공화정을 지지하는 귀족세력을 대거 숙청하였다.

 

이때의 숙청으로 옥타비아누스든 안토니우스든 권력을 장악하는 자가 누구든 더 이상 원로원 귀족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전제황제권을 확립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손잡고 반 카이사르 세력도 모두 제거하였다. 어느 정도 상황이 정리되자 옥타비아누스도 안토니우스도 자신들의 욕망을 숨기지 않았다. 먼저 레피두스를 실각시킨 그들은 2차 삼두정치를 끝내고 본격적으로 상대를 향해 적의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안토니우스 vs 옥타비아누스


2차 삼두정치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얻은 또 하나의 성과는 카이사르를 신격화시킨 것이다. 카이사르를 신격화시킴으로써 카이사르의 양자인 자신도 신격화된 것이다. 신격화의 상징성은 상징에만 그치지 않고 옥타비아누스의 세력 확장에 큰 힘을 보탰다. 2차 삼두정치에서 각자 맡은 지역도 옥타비아누스를 유리하게 했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와 서방을 맡았고 안토니우스는 경제적으로 풍부했던 이집트와 동방을 맡았다. 이 지역 분할은 언뜻 보기에는 우수한 경제력을 택한 안토니우스에게 유리해 보였으나, 근간이 되는 로마지역을 놓치지 않은 옥타비아누스가 진정한 로마의 지도자라는 이미지를 심어줌으로써 옥타비아누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했다.

 

 

게다가 이집트에서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와 사랑에 빠져버린 안토니우스는 자신이 로마의 장군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듯 보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클레오파트라 7세를 건실한 로마의 영웅을 망치는 요부로 소문 내고 안토니우스는 이미 로마를 버렸다고 선전해 안토니우스의 인기를 떨어뜨렸다. 실제로 안토니우스의 행동이 옥타비아누스의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기도 했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 7세와 결혼하기 위해 옥타비아누스의 누나 옥타비아와 그 사이에 태어난 자녀까지 버렸고 아르메니아 지역을 정복하자 이를 로마에 귀속시키지 않고 클레오파트라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알렉산드로스 헬리오스를 왕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클레오파트라 7세에게는 왕들의 여왕이라는 호칭을 주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 사건을 꼬투리 잡아 안토니우스가 로마를 배신하고 이집트에 붙어 로마를 위태롭게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신전에 남아 있던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을 공개했다.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에는 로마가 정복한 영토는 자신의 아들들을 왕으로 삼아 다스리게 하고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7세가 묻힐 영묘를 알렉산드리아에 호화롭게 건설하라고 쓰여 있었다. 이 유언장의 내용은 로마인들에게 충격 그 자체였으며 안토니우스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기원전 32년 말, 원로원은 안토니우스의 집정관 권한을 공식적으로 박탈하고 클레오파트라 7세가 다스리고 있는 이집트에 선전 포고하였다.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피할 수 없는 일대 격돌이 시작된 것이다. 이는 로마의 운명과 역사의 향방을 결정지을 전쟁이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원래 장군으로서의 역량은 부족한 편이었다. 그는 뛰어난 전사가 아니었다. 태생이 군인이었던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의 이런 약점을 항상 비웃었으며 얕잡아 보았다. 그러나 안토니우스가 간과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옥타비아누스가 뛰어난 군인은 못되었지만 탁월한 지략가이며 카리스마를 가진 리더였다는 점이다. 일찍이 옥타비아누스의 부족한 부분을 알고 있던 카이사르는 옥타비아누스의 청소년 시절에 친구 삼아 부관 삼아 아그리파라는 불세출의 장군감을 붙여 주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아그리파를 뛰어난 장군으로 키웠으며 그에게 군사지휘권을 맡겨 안토니우스에 버금가는 군사력을 키우도록 하였다. BC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신예 옥타비아누스와 아그리파는 전장에서 뼈가 굵은 안토니우스의 군대와 경제력이 뒷받침하고 있던 클레오파트라의 이집트 군대에 맞서 이겼다. 옥타비아누스가 역사의 주인공이 되는 순간이었다.

 


가장 존엄한 자

안토니우스를 이긴 옥타비아누스는 이제 로마의 최고 1인자가 되었다. 2차 삼두정치 때 공화파 귀족들을 제거하였기 때문에 옥타비아누스를 방해할 어떤 세력도 없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집정관과 독재관을 초월하는 그 위의 존재가 되었으며 로마에서는 그 누구도 맞설 자 없는 막강한 재력과 군사력으로 원로원을 압박하고 제어했다. 원로원은 BC 27년 옥타비아누스에게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올렸다. ‘아우구스투스’는 존엄자란 뜻이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유일의 가장 존엄한 자가 된 것이다. 비록 아우구스투스의 권력이 황제권력이었다 할지라도 아우구스투스는 명목상 로마를 공화정으로 남겨두고자 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아우구스투스의 통치는 황제정의 시작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임페라토르‘라고 불리는 군 통수권을 가졌으며 ‘프린켑스’라는 원로인 1인자 칭호를 받음으로써 귀족 원로원을 장악하였다. 여기에 더해 평민 출신이 담당하던 호민관 자리의 특권을 가져 민회소집, 입법권과 거부권의 권한까지 가졌다. 그는 언제나 카이사르의 후계임을 자처하였으며 카이사르로 불리기를 원했다. 그는 자신의 후계를 직접 정함으로써 권력의 상속도 제도화시켰다. 아우구스투스 이후 로마는 카이사르의 후손을 자처하는 1인에게 모든 권력을 집중시키는 실제적인 황제국가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로써 카이사르는 이후 로마 황제뿐만 아니라 나아가 전제적 권력을 가진 황제를 뜻하는 말이 되었다.


아우구스투스 이후 로마는 200년간 계속 평화를 누리며 발전하였다. 변경의 수비도 견고하였고, 이민족의 침입도 없었으며, 국내의 치안도 확립되어 교통물자의 교류도 활발하였고, 로마제국 내의 각지에서 도시가 번영하여 전 로마인이 평화를 구가했다. 이 시기를 팍스로마나라고 한다.


 

 

주제로 인물 엮어보기탁월한 능력으로 스스로 황제가 된 사람들

아우구스투스 아우구스투스
고대 로마의 초대 황제
나폴레옹 1세 나폴레옹 1세
(1769~1821) 프랑스의 군인에서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름
살라딘 살라딘
(1137~1193) 아이유브 왕조의 창시자. 대제국을 형성하고 이슬람 세계의 통일을 회복
명태조 주원장 명태조 주원장
(1328~1398) 홍건적에서 두각을 나타내 각지의 군웅을 누르고 명나라를 세움
태조 왕건 태조 왕건
(877~943) 개성지방 호족에서 고려를 건국, 후삼국을 통일함
 

 

 

김정미 / 시나리오 작가, 역사 저술가
글쓴이 김정미씨는 대학원에서 역사를 전공, 역사적 사건과 인물에 관심이 많다. 역사 속 인물들의 면면에서 영화적 캐릭터를 발견하고 시나리오를 옮기는 작업을 하는 한편 역사관련 글쓰기도 병행하고 있다. [역사를 이끈 아름다운 여인들] [천추태후-잔혹하고 은밀한 왕실 불륜사] [어린이 역사 인물사전]등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