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우스를 이긴 옥타비아누스는 이제 로마의 최고 1인자가 되었다. 2차 삼두정치 때 공화파 귀족들을 제거하였기 때문에 옥타비아누스를 방해할 어떤 세력도 없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집정관과 독재관을 초월하는 그 위의 존재가 되었으며 로마에서는 그 누구도 맞설 자 없는 막강한 재력과 군사력으로 원로원을 압박하고 제어했다. 원로원은 BC 27년 옥타비아누스에게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올렸다. ‘아우구스투스’는 존엄자란 뜻이다. 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유일의 가장 존엄한 자가 된 것이다. 비록 아우구스투스의 권력이 황제권력이었다 할지라도 아우구스투스는 명목상 로마를 공화정으로 남겨두고자 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아우구스투스의 통치는 황제정의 시작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임페라토르‘라고 불리는 군 통수권을 가졌으며 ‘프린켑스’라는 원로인 1인자 칭호를 받음으로써 귀족 원로원을 장악하였다. 여기에 더해 평민 출신이 담당하던 호민관 자리의 특권을 가져 민회소집, 입법권과 거부권의 권한까지 가졌다. 그는 언제나 카이사르의 후계임을 자처하였으며 카이사르로 불리기를 원했다. 그는 자신의 후계를 직접 정함으로써 권력의 상속도 제도화시켰다. 아우구스투스 이후 로마는 카이사르의 후손을 자처하는 1인에게 모든 권력을 집중시키는 실제적인 황제국가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로써 카이사르는 이후 로마 황제뿐만 아니라 나아가 전제적 권력을 가진 황제를 뜻하는 말이 되었다.
아우구스투스 이후 로마는 200년간 계속 평화를 누리며 발전하였다. 변경의 수비도 견고하였고, 이민족의 침입도 없었으며, 국내의 치안도 확립되어 교통•물자의 교류도 활발하였고, 로마제국 내의 각지에서 도시가 번영하여 전 로마인이 평화를 구가했다. 이 시기를 팍스로마나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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