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 로마가 있는 이탈리아와 일리리아, 갈리아, 에스파니아, 북아프리카를 서(西)로마로,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 그리고 이집트를 포함한 오리엔트 지역을 동(東)로마로 나누어 각각의 정제(正帝, 아우구스투스)가 다스리게 하고, 동서 로마는 다시 한 사람씩의 부제(副帝, 카이사르)가 다스리는 독립 영역을 가짐으로써 네 사람의 황제와 네 개의 제국이 분립된 것이다.
그것은 로마가 겪고 있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회심의 조치였다. 일단 제국의 국경은 너무나 길고 사방에서 몰려드는 적은 너무도 많았으므로, 한 사람의 황제가 중앙에서 동시에 대응하기는 무리라고 여겨져 네 사람의 황제가 각기 맡은 쪽에서 효과적으로 방어하도록 했다. 또한 본래는 중앙에서 파견된 ‘점령군’이었던 로마 군단이 세월이 지나며 파견된 지역에 뿌리를 내려 토착화되고, 머나먼 중앙과의 연결고리가 희미해졌으므로 더 이상 로마에 앉아서 여러 변방을 효과적으로 통치할 수 없는 점도 고려되었다. 5현제 시대까지 팽창과 집중화를 계속했던 로마는 이제 분산과 분열의 흐름을 타고 있었던 것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사분치제(四分治制)는 나름대로 효력을 발휘하여, 갈리아와 이집트의 대반란이 평정되고 페르시아에게도 승리하여 아르메니아를 되찾았다. 그러나 이 사분치제는 한 가지 뚜렷한 모순을 안고 있었다. 네 사람의 황제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난다면? 어느 한 황제가 다른 황제의 지배영역을 탐낸다면?
콘스탄티누스는 사분치제의 한 축을 맡고 있던 콘스탄티우스 부제(서로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리고 바로 사분치제의 모순을 어떻게든 막아보려는 조치의 일환으로, 서로마의 정제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보내져 사실상의 인질이 된다. 젊은 콘스탄티누스는 이 개혁적인 황제를 따르며 많은 것을 배웠는데, 다만 그가 로마의 전통을 되살리고자 추진했던 기독교 박해만은 공감하지 못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 헬레나에게서 받은 영향도 있었고(아들이 황제가 된 후, 그녀는 예루살렘으로 순례 여행을 가서 이른바 ‘예수가 못박혔던 진짜 십자가’를 발견한다), 당시는 이미 제국의 하층민뿐 아니라 귀족, 학자, 군인 등이 속속 기독교로 개종하고 있던 상황에서 이미 힘을 잃은 옛 종교에 매달리는 일은 현명치 못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타고난 승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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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콘스탄티누스는 ‘인품, 외모, 체력, 키’ 모든 면에서 남들을 압도했다고 한다. 그를 최고의 영웅으로 묘사한 유세비우스의 말인 만큼 덜어서 들어야 할지 모르지만, 이미 청년기에 그의 명성은 로마에 자자했던 것 같다. 특히 훤칠하게 큰 키가 인상적이었다는데, 누구도 그를 감히 ‘패배자’로 낮춰볼 여지가 없었을 것 같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전 생애에 걸쳐 승리자로 살았다.
이 ‘타고난 승리자’로서의 운명이 태동되던 때는 305년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자신이 이룩한 사분치제가 권력투쟁으로 엉망이 되지 않도록 스스로 옥좌를 내놓고 물러난 것이다. 그러자 그가 동로마 정제로 추대한 막시미아누스도 할 수 없이 물러났으며, 두 부제, 콘스탄티우스와 갈레리우스가 정제로 올라섰다. 그런데 이 때 갈레리우스의 니코메디아 궁전에 머물고 있던 콘스탄티누스는 음모에 휘말릴까 두려워 야반도주하여 불로뉴에 있던 아버지에게 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