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세계)

고대 이집트의 문명과 람세스의 역사[1]

지식창고지기 2010. 2. 2. 18:58

고대 이집트의 문명과 람세스의 역사

ksm012015 님의 답변

 

람세스에 대하여.
이집트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인 피라미드를 보고 놀라는 것은 이상한 일은 아니다. 바닥 면적이 5헥타르나 되며 2.5톤의 석회석 돌덩어리가 230만 개나 사용된 쿠프의 대 피라미드에 케프렌, 미케리노스의 피라미드가 합쳐진 위용은 고대인들은 물론 현대인들도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


그러나 피라미드를 본 관광객들은아스완의 아부심벨 신전을 보았을 때 다시 한 번 놀란다. 아스완에서 남쪽으로 320킬로미터 떨어진 돌산의 벽면을 깎아 만든 아부심멜 신전의 정면은 파라오의 모습을 한 4개의 거상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각 조상은 높이가 20미터, 얼굴의 귀에서 귀까지의 거리가 4미터, 입술의 폭이 1미터에 달하는 엄청난 크기이기 때문이다. 정면 조각 뒤로 돌산을 파서 만든 신전은 매년 춘분과 추분에 아침의 햇빛이 신전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태양신과 파라오의 조상을 환하게 비치도록 설계되어 있다
.




이 신전을 건설한 사람은 이집트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인 제19왕조의 제3대 파라오였던 람세스 2세이다. 그가 통치하던 시대는 이집트의 최절정기로 일명제국 시대라고 불린다.람세스 2세 시대의 이집트 및 오리엔트 지역은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국력을 갖고 있던 이집트와 지금의 터키 지역에 있던 히타이트가 양분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대의 번영기를 구가하던 이집트, 인류 역사상 최초로 철기를 사용한 강력한 히타이트. 두 제국 사이에 거대한 충돌은 당연한 것이었다
.

그것이 바로 카데시 전투이다
.


히타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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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 중반까지 히타이트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고대의 국가였다. 히타이트가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888년에서 1892년에 걸쳐서 독일의 고고학자 루우샨을 중심으로 하는 조사단이 터어키의 동남단 진지르리에서 독특한 스타일의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를 발굴한 데서부터 시작한다. 이곳이 바로 핫투사스라는 동서 1킬로미터, 남북 2킬로미터의 히타이트 왕국의 수도였다. 핫투사스에서 발견된 수많은 점토판이 해독되고서야 비로소 히타이트의 존재는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기원전 17세기 후반에 현 터키 지역을 통일한 핫투시리시 1세는 통일 왕국의 수도를 키질강 만곡부의 중심 지점으로 옮기고 자기의 이름을 따서 핫투사스(Hattusas)라고 명명(
命名)했다. 핫투시리시 1세는 통일 왕국을 핫티 왕국이라고 불렀고 스스로를 핫티의 왕이라고 칭했지만, 역사학자들은 지명과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히타이트 왕국이라고 부른다.

히타이트는 점차로 세력을 키웠고, 기원전 1530년경에는 무르실리시 1세가 군사를 이끌고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남진하여 함무라비 왕의 후손이 통치하고 있던 바빌로니아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히타이트 왕실 내부에서 권력 투쟁이 일어나자 히타이트는 바빌로니아 통치를 단념하고 본국으로 철수하지만 왕은 암살된다
.

그 후 1세기 반 동안 침체해 있던 히타이트는 기원전 15세기 후반부터 1세기 동안 인접 지역의 강국 미탄니와 격렬한 전투를 계속한다. 히타이트의 동쪽에 위치한 미탄니가 가장 번성할 때는 미탄니 군이 히타이트의 영토 내에 깊숙이 침입하여 간신히 수도 주변만 부지할 때도 있었다
.

이때 나타난 영웅이 슛필룰리우마시 1세로 그는 수도에 거대한 성을 쌓아 본거지를 튼튼히 하고 후방 지역의 여러 소국과 동맹을 맺어 후방의 위협을 배제한 다음 미탄니를 공격했다. 이 공격은 주효하여 미탄니의 수도는 함락되었고 그곳에 친(
) 히타이트 정권을 수립하여 동부의 방위를 철저히 하였다.

이때 히타이트와 맞설 수 있는 국가는 남부의 이집트뿐이었다. 당시 이집트의 세력권은 가나안까지 미치고 있었다. 히타이트가 미탄니를 정복하자 이집트와 히타이트는 국경에 접하게 되었고 두 대국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당시 이집트를 지배하고 있었던 람세스 2세는 통치 초기에 광대한 건축 설계에 몰두해 있었다. 그는 북쪽의 나일 강 삼각주에 있는 타니스로부터 남쪽 누비아 지방의 아부심벨에 이르기까지 이집트 전역에 걸쳐서 방대한 도시들과 기념물들을 건설하여건축의 대왕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

그러나 세계 정세는 그를 추후에 이름이 붙는건축의 대왕으로만 놔두지는 않았다. 그로서는 이집트와 국경을 마주보고 있는 히타이트로 하여금 어떠한 경우라도 이집트를 침략하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에게 이집트가 강력하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할 의무가 있었다
.

그는 이집트의 국경과 마주치고 강력한 제국 히타이트와 전쟁의 대 서사시이자 기록으로 남겨진 전투 중에서 가장 오래된 카데시 전투를 벌이기 위해 재위 5년 여름에 피람세스(세티 1세가 델타 동부에 세운 도시)를 떠나 가나안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