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세계)

고대 이집트의 문명과 람세스의 역사[2]

지식창고지기 2010. 2. 2. 19:01

카데시 전투

카데시 전투는 이집트와 히타이트, 양 대국에서 가장 많은 장병들이 참전한 대규모 전투로서 그 중요성을 갖고 있다. 이집트는 전차병을 포함하여 2만 명의 장병을 동원했고 히타이트도 3 5천 명이나 동원했다.람세스 2세는 직접 5천 명의 장병으로 구성된 아몬 사단을 지휘하였고 역시 각각 5
명으로 구성된 라, 프타, 세트로 이름지은 세 개의 사단이 뒤따르도록 했다. 각 사단은 250명으로 구성된 20개의 중대로 나뉘어져 있었다. 람세스 2세오는 카데시 남쪽에 있는 산악 지대에서 멈추었다가 북쪽에 있는 샤브투나라는 도시로 진행했다. 그 도시의 남쪽에는 오론테스 강을 건널 수 있는 여울목이 있었다
.


이때 두 명의 베두인이 람세스에게 다가와서 투항했다. 그들은 히타이트 군대가 북쪽의 아주 멀리 있는 알레포 부근에 있다고 알려주었다. 람세스 2세의 아몬 사단은 카데시를 통과한 상태였고 나머지 세 개의 사단은 매우 뒤 처져 있었지만 그는 걱정하지 않았다. 투항한 베두인의 정보로 보아 적은 매우 멀리 있었으므로 람세스 2세는 곧바로 전투 태세를 갖추지 않고 진을 치기 시작했다
.


그러나 베두인은 무왓탈리시가 보낸 첩자였다. 히타이트 군대는 실제로 람세스 2세와 지척인 카데시 북동쪽 성채 안에 집결해 있었다. 그들은 우선 람세스 2세와 후발(
後發) 사단을 분리시킬 계획으로 2,500대라는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전차병을 투입하여 아몬 사단을 뒤따르던 라 사단을 급습하였다. 레 사단이 히타이트 군의 공격으로 궤멸되자 무왓탈리시는 곧바로 람세스 2세가 지휘하는 아몬 사단을 공격했다. 이 급작스러운 공격으로 람세스 2세의 아몬 사단 역시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람세스 2세는 곧바로 침착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자신의 신인아몬을 의지하여 고함을 지르면서 전투에 참가하여 직접 장병들을 독려했다. 다행하게도 지원군인 나아룬 군과 파 사단이 도착하여 꼼짝없이 사로잡히기 직전의 람세스 2세를 극적으로 구출하였다. 나아르 군은 가나안인 외인 부대 병사들로 구성된 특공대로, 이들의 도착은 람세스가 미리부터 계획해 둔 작전이었는데 절묘하게 그 시기가 맞아 들어간 것이다. 포위망에서 구출된 람세스 2세는 오히려 공격으로 나서 히타이트 전차병들을 카데시 남쪽으로 몰아낸다
.


그러나 히타이트의 무왓탈리시는 자신의 군대가 쫓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 8천 명에 달하는 주력 부대를 투입하지 않았다. 일부 학자들은 무왓탈리시의 이 이상한 조치를 이미 이집트 군의 일부가 궤멸되었기 때문에 협약으로 끝나는 외교를 예상하고 전력을 다하지 않은 것으로 추측한다. 즉 자신의 목적은 달성한 데다가 이집트를 궤멸시킨다고 해서 이득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무왓탈리시는 양국의 지리적인 위치로 보아 이집트를 점령한다고 해도 문제가 생긴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우선 현 터키 지역에서 이집트까지를 일사불란하게 통치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히타이트의 동쪽에는 아시리아가 강국으로 떠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약에 아시리아가 공격해 오면 전선이 길어져 양 지역을 방어하기에 힘들므로 차라리 이집트와 협정을 맺어 아시리아의 공격에 대비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


여하튼 이 당시의 전투에 대해서는 수많은 자료가 있다. 우선 람세스 2세는 건축의 대왕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수많은 건축물을 건조했는데 그는 자신이 세운 건물 거의 모두, 즉 아비도스, 카르나크, 룩소르, 아부심멜, 라메세움 같은 여러 대신전과 누비아에 있는 두 개의 성소, 즉 아부심멜 대신전과 데르 대신전의 벽에 카데시 전투에 대해 기록했다. 이 벽화는 전투에 임하는 람세스 2세와 전투 상황을 자세하게 적었다
.


람세스의 공적과 전사들의 전투 장면으로 활기가 넘치는 구성은 고대의 상투적인 전쟁화(
戰爭畵)와 비교해 볼 때 혁신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하부의 부조 벽화는 전투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하나 정교하게 기록하고 있고, 전투에 대한 독창적인 내용을 전달하는 글도 첨가되어 있다. 내용은 당연하지만 람세스 2세가 이 전투에서 철저하게 적을 패배시키고 자신의 권력을 국제적으로 과시했다는 것으로 추후에 어느 국가에서나 있었던 개선 장군의 기록과 같다.


전투의 전말


카데시 전투는 양쪽 군대의 전략과 배치 상황을 알 수 있는 역사상 최초의 전투였다. 전투 날짜까지 기록되어 있는 이 군사보고서는 전투에 직접 참전한 병사들의 진술을 토대로 작성된 것으로도 최초이다.꼼꼼하게 기록된 날짜들을 계산해 보면, 이집트 원정군이 카데시 근처에 도달하기까지는 한 달이 걸렸다. 람세스 2세는 피람세스를 출발하기 전에 이미 여러 곳에 전투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할 조치를 취하고 있었고 히타이트 군에 언제든지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


람세스 2세는 카세시 전투에서 자신이 승리한 것으로 기록했다. 그러나 학자들은 이 기록이 역사적으로 기록된 가장 오래된 전쟁이지만 전쟁의 결과는 그가 설명한 것과는 반대라고 생각하고 있다. 즉 람세스 2세가 고의적으로 거짓말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


사실 유사 이래 한 쪽이 철저히 패배하여 완전히 그 민족이나 국가가 소멸되기 이전에는 전쟁의 결과는 항상 과장되기 마련이므로 과거의 전투 기록의 옳고 그름을 확실하게 확인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카데시 전투만은 승리자라고 적은 이집트의 기록만이 아니라 패배자라고 적힌 히타이트 측의 기록도 있으므로 전쟁의 결과를 유추할 수 있다
.


학자들은 양측의 자료를 철저히 분석한 결과 카데시 전투에서 람세스 2세가 승리한 것이 아니라 완패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카데시 전투 이후 시리아의 중부와 북부를 히타이트가 지배했기 때문이다.이집트가 승리했다면 당시 역사상 최대의 전투 현장을 히타이트에게 내어주었을 리가 없다. 또한 람세스 2세가 이집트로 돌아갈 때 가지고 간 전리품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그나마 얼마 안 되는 전리품도 주로 적의 시체에서 걷어낸 무기와 말 따위가 전부로, 이것은 카데시 전투 이후 람세스 2세가 곧바로 후퇴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


전투 장비를 보아도 보면 히타이트가 이집트보다 월등하였다. 히타이트는 당시 철로 된 무기를 생산하고 있었는데 이집트는 이와 반대로 청동제의 무기를 사용했다. 히타이트의 하튜샤 제철소에서는 상질(
上質)의 철제 무기, 갑옷, 철제 기구 등을 생산했다. 철제 무기가 청동제 무기를 가진 이집트군을 괴롭혔을 것은 상상하고도 남는 일이다.


특히 히타이트의 가장 큰 무기는 전차(
戰車)는 일반적으로 마부 1, 사수 1, 전투병 1명이 타고 전광석화와 같이 적군을 공격했다고 한다. 반면에 이집트군은 한 전차에 두 사람씩 탔다. 대부분이 장교인 전차 주인 한 사람과 마부 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당시 히타이트는 3만 여명의 상시군(常時軍)이 있었다.


이와 같이 카데시 전투의 진상이 제대로 알려진 것은 이집트의 기록에 걸 맞는 히타이트의 기록 역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 기록이 발견된 것은 고고학 사상 가장 믿기 어려운 우연과 행운 때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