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세계)

고대 이집트의 문명과 람세스의 역사[8]

지식창고지기 2010. 2. 2. 19:24

후기 왕조

이집트의 후기 왕조시대는 제21~30왕조(BC 1085?∼BC 332)시대를 말한다
.

테베에서 헤리호르가 왕위를 찬탈할 무렵, 북부에서는 네지바다두트(스멘데스)가 타니스에 제21왕조를 열
어 이집트는 양분되었다. 그후 리비아 출신의 일족이 중 부 이집트의 헤라클레오폴리스를 중심으로 세력을 폈으며 곧이어 시샤크(셰숑크) 는 삼각주지대의 부바스티스를 근거로 제22왕조를 일으켰다.

그 후의 제23 ·24왕 조는 리비아인이 지배하였는데 분립의 기운은 삼각주지대까지 미쳐, 22 ·23
조는 병립하였다. 25왕조는 나파타에서 일어난 에티오피아인의 왕조이다.

BC 671∼BC 664
년 이집트는 세 번에 걸쳐 아시리아의 공격을 받아 테베는 두 번 점령되었다. BC 664년 프
삼티크 1세가 삼각주지대의 사이스에 제26왕조를 열었다.

그는 그리스인의 힘을 빌려 아시리아인을 추방하고 삼각주지대를 통일, 곧 남부에 까지 손을 뻗쳤다.
은 그리스인들의 삼각주지대에서의 식민(
植民)을 허용하였 으므로 곧 나우크라티스가 번영하였다.

왕은 또한 고왕국시대를 본보기로 하여 일종의 복고정책을 취하였기 때문에 사이스왕조는 한때 예술면에
서도 우수한 복 고적 작품이 나왔다.

그러나 네코 2세는 카르케미시에서 신바빌로니아에 대패하여 세력을 잃었다. BC 525년 페르시아의 캄비세
스에 의하여 이집트는 페르시아의 한 속주가 되었다 (27왕조).

그 후 한때 이집트는 세력을 회복하였으나 모두 짧은 기간으로 재차 페르시아의 세력하에 놓여졌으며 결
BC 332년 정복되어 이집트인에 의한 왕조 시대는 끝났다.


프텔레마이오스 왕조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왕조시대는 BC 305∼BC 30년까지를 말한다. 알렉산드 로스 대왕이 바빌론에서 죽
,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는 대왕이 임명한 이집트 태수(
太守) 클레오메네스를 추방하고 스스로 신왕조를 건설하였다. 신왕조 밑에 서 이집트는 재차 번영을 되찾았다.

왕은 수도를 알렉산드리아로 옮기고 학자 ·상 인 ·공장(
工匠) ·용병(傭兵)을 그리스에서 이주시켜 이
곳을 헬레니즘 세계의 중심 지로 삼았다. 그 때문에 유리와 금속공업이 발달하였고, 각지와의 무역도 성
행하 였다.

또한 아카데미나 부속의 대도서관을 세움으로써 학예면에서도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

그러나 국토의 지배에 있어서는 이집트 종래의 노모스를 단위 로 하는 통치기구를 그대로 물려받아 장관
에는 그리스인을 임명하였다. 그리스어 (
)가 공용어로 되었으나 일반적으로는 종래의 토착어가 사용되었고, 종교면에 서도 많은 외국풍의 신들이 이집트로 도입되었으나, 그 이름이 이집트 고래의 신 의 이름에 적용되는 데 그쳤다.

몇 개의 대신전이 이 시대에 건립되었으나 신전에 새겨진 왕들은 이집트왕의 칭 호를 채용하였고, 그 이
름은 카르투슈(
王名額子)에 기록되었다.

이와 같이 그리 스 문명이 도입되었다고 하지만 얼마 안 되어 그리스세계와의 접촉도 차차 적어 졌기 때
문에 결국 이집트의 체질을 개선하지 못하였다. BC 30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클레오파트라 7세의 사망으로 끝나고 이집트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로마제국치하(BC 30∼641) BC 30년 로마의 옥타비아누스가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한 이후, 동로마제국
(비잔틴제국)의 치하를 포함하여 약 700년 동안, 이집트 는 로마의 속주였다.

그 동안에 이집트는 로마에 대한 곡물과 기타의 공급원의 역 할을 하였다. 농민의 생활은 고통스러웠으
, 특히 로마제국의 재정이 궁핍하게 되자, 탈취는 극심해졌다. 그 때문에 도망자가 늘고 국유지는 황폐하여 점차 대토 지 소유자에게 옮겨갔다.

297
년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는 이집트를 몇 개의 주(
)로 분할하였다. 로마인은 프톨레마이오스왕조의 행정 ·재정 ·사법을 그대로 채용하여 정책면에서도 프톨레 마이오스왕조의 것을 발전시켰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그리스어와 라틴어가 공 용어로 채용되었으나 일반 민중에게는 관계가 없었다. 그러
나 알렉산드리아는 철학 ·문헌학 ·종교학 ·수학 ·공학 ·의학 등이 크게 발전하 여 학예분야에서는
지중해에서 중심적 존재였다. 그리스도교도 밀라노 칙령의 포 고와 함께 이곳에서 발전하였다
.

특히 이집트인은 미술분야에서 그것을 꽃피웠는 데 아라비아인은 이집트의 그리스도교도를 콥트인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이 미술 을 콥트미술이라고 한다. 그것은 특히 이집트 북부를 중심으로 5~6세기경에 번영 하여 건축 ·조각 ·회화 ·공예(자수 ·직물 ·도기)에서 뛰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