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세계)

고대 이집트의 문명과 람세스의 역사[7]

지식창고지기 2010. 2. 2. 19:21

신왕국

이집트의 신왕국시대는 제18~20왕조(BC 1567?∼BC 1085?)를 말한다. 이 시 대는 이집트 역사상 고왕국
·중왕국에 이어지는 세 번째의 융성기로, 영토도 아시 아까지 확대되어 제국시대라고도 불렸다.

18왕조 초기의 국왕들은 힉소스를 추 방한 후에도 계속하여 팔레스티나 방면으로 파병하였는데 그것은
곧이어 전리품 을 목적으로 한 제국주의적 침략으로 변하였다. 당시의 서아시아 정세는 각 민족 이 분립 ·항쟁하는 시대였다. 곧 이집트도 그와 같은 국제정세 속으로 말려들어갔 다.

한편 투트모세 1세는 제3폭포까지 파병하는 등 남방(
南方) 경영도 게을리하지 않 았다. 하트솁수트 여왕은 내정에 힘쓰고 광산을 개발하였으며, 푼트 지방에 배를 보내어 향료(香料) ·상아(象牙) ·목재 등을 수입하였다. 또한 테베 서쪽 교외의 델 엘 부하리에 거대한 장제전을 건립하기도 하였다.

여왕과 공동통치를 하였던 투 트모세 3세는 여왕의 사후, 아시아에 대한 침략을 개시하였다. 이때 카데시
의 왕이 지휘하는 동맹군과 메깃도에서 싸웠는데 그 승리가 이집트 번영의 기초를 다졌다고 한다. 왕의

출병은 20년간 전후 17회에 이르렀고 북은 유프라테스강(
) 연안에서 남은 제4폭포까지 지배하에 두게 되어 이집트의 영토 는 사상 최대가 되었다. 방대한 전리품과 많은 노예를 얻게 되었고 각지에서 물자가 집결되었으며, 미탄니 ·아시리아 ·크레타 등이 조공하였다. 따라서 테베에는 웅 장한 신전 ·왕궁,
귀족의 저택 ·상점 등이 들어서 번화하였다
.

귀족은 충실한 가신(
家臣)으로서 왕을 받들었으며, 그들을 고급관리로 하는 관료 조직이 정비되었다. 트모세 3세는 이제까지 한 사람이었던 재상을 두 사람으로 하여 상 ·하 이집트의 내정에 전념시켰다. 정으로 획득한 영토를 유지하기 위하 여는 강력한 상비군(常備軍)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직업인이 출현하 였고 곧 세력을 가지게 되었다. 또 용병의 수가 많아지자 그들의 생활을 유지하는 일이 큰 문제로 되어, 이것은 국력을 피폐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한편 승리는 신의 힘에 의한 것이고 그것은 신 자신의 승리이며, 국가의 번영은 아 몬신의 번영이라고 생각되었다. 국왕이나 귀족은 신에게 토지를 기증하고 신전을 잇달아 건립하였다.

따라서 신관단(
神官團)은 관료 ·군인에 못지 않은 큰 세력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방대한 신전령(神殿
)
은 신관의 사복을 채웠고 곧이어 왕위 계승에도 간섭하였다. 투트모세 3세의 사후 시리아에 대반란이 일어났으나, 아멘호테프 2세는 미탄니를 토벌하였고 다음의 투트모세 4세는 미탄니와 동맹하여 그 왕녀를 왕비로 맞았다.

이 무렵부터 아시아에서는 히타이트의 세력이 신장하였는데, 이집트도 그 동향에 무관심할 수 없었다.
멘호테프 3세의 시대는 표면상으로 이집트가 가장 안정되 고 융성한 시대였다. 왕은 거의 외정(
外征) 하지 않고 다만 신전 등의 건축공사 에 부()와 힘을 쏟았다. 왕은 아시아제국과 서한 및 기증물을 교환하여 친교를 맺었기 때문에 여기에 일종의 국제주의시대가 도래하였다(아마르나시대). 아멘호테프 4세는 절대 세력을 갖게 된 테베의 아몬신관단에게 반발하여, 태양신 아톤을 시신(市神)으로 하는 신도(新都)를 오늘날의 텔 엘 아마르나의 땅에 조영 하여 아케타톤(아톤의 지평선이라는 뜻)으로 명명(命名)하고 스스로도 이크나톤 이라고 개명하였다.

왕은 아톤찬가(
讚歌)의 제작과 예술활동에 전념하고 국정을 돌보지 않았으므로 아시아에서는 반란이 잇달아 일어나고 정정(政情)이 불안하게 되었다. 결국 왕의 이상은 실현되지 않아 사후에 아몬신앙은 부활되었으며 신도 (新都)는 파괴되었다.

그러나 예술면에서는 고정화된 종래의 전통이 타파되고 개 방적인 분위기가 감돌았으며 외국과의 문화교
류도 행하여져서, 사실적이고 밝은 성격의 아마르나 예술을 낳았다. 이것은 투탕카멘 왕묘의 출토품에서 엿볼 수 있 다. 투탕카멘 왕은 18세 때 죽고 군인출신의 호렘헤브가 왕위에 즉위하여, 18왕 조는 끝났.

19왕조의 초대는 호렘헤브가 선택한 군인 출신의 람세스 1세이고, 그의 아들 세 티 1세는 재차 아시아
에서의 이집트의 우위를 어느 정도 회복하였다.

그의 아들 람세스 2세는 전형적인 파라오로 67년 동안의 오랜 치세에, 각지에 다수의 신전을 건축하였고
북쪽 또는 남쪽으로 원정군을 파견하였다. 아시아 경영 때문에 신도 를 삼각주지대의 타니스에 건설하였. 건축 사업 중에는 테베의 서쪽 교외에 세 운 장제전 라메세움이나, 누비아의 아부심벨의 대소 2신전

대표적이다. 그러나 남하하는 히타이트를 카데시전투(BC 1286)에서 막아냈고, 곧이어 아시리 아의 세력
에 대처하기 위하여 하투실리시 3세와의 사이에 우호조약을 맺었다. 왕은 그 후 아시아 진출을 단념하였.

다음의 메르엔프타흐왕 시대부터 아시아는 또다시 민족이동의 소용돌이 속에 빠 졌고 제20왕조의 람세스
3세 때 이미 히타이트는 멸망하여 없어졌고 이 무렵부터 삼각주지대는 자주 리비아인 등의 침입을 받게 되었다. 또한 신관단의 세력에 대 하여, 왕실의 세력은 쇠퇴하여 왕위는 신관(
神官) 헤리호르에게 찬탈되었다.

신왕국시대의 문화를 대표하는 것은 테베에 조영된 카르나크 ·룩소르 등의 많은 신전과 여러 왕의 장제
, 그리고 테베 서쪽 교외의 벼랑을 뚫고 매장한 국왕과 귀족 ·고관의 연도분(
羨道墳)이다. 이것은 모두 엄청난 부와 권력, 그리고 풍부한 노예노동력에 의한 것이지만 높은 수준의 건축기술과 벽면의 부조(浮彫)에서 볼 수 있는 뛰어난 예술상의 재능은 오늘날에도 그 유적을 통하여 충분히 알 수 있 다. 문학은 구어체(口語體)를 사용하여 민중의 감정을 솔직하게 이야기한 작품이 만 들어졌다. 농민의 생활을 묘사한 《두 형제 이야기》, 교훈적인 작품 《정의와 허 위의 이야기》 등이 있고 이외에도 고관의 분묘에 남겨진 자전적(自傳的)인 묘비 명(墓碑銘) ·전승가, 아몬신 ·아톤신의 찬가, 격언(格言) ·연가(戀歌)도 남아 있다. 또 《사자(死者)의 서》를 비롯한 종교적인 작품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