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세계)

고대 이집트의 문명과 람세스의 역사[6]

지식창고지기 2010. 2. 2. 19:16

1,2 중간기

7~10왕조(BC 2181?∼BC 2050?) 6왕조 말부터 왕권은 쇠미하였고, 노모스 의 지사는 세습화되어 봉
건군주와 같이 되었다.

한편 관료정치에 강한 반감을 품 어오던 민중이 봉기하여, 사회는 혼란하였다. 이와 같은 국내의 분열과
혼란에 편 승하여 사막으로부터는 이민족(
異民族)이 침입하였다.

일시적으로 질서가 회복되 기도 하였으나 오래 가지 않았으며, 헤라클레오폴리스에서 문학이 번성했던 것
밖 에는 일반적으로 학문 ·미술이 모두 쇠퇴한 불모의 시대였다.

13~17왕조(BC 1750?∼BC 1567?) BC 1750년경 제12왕조는 붕괴되고 이집 트는 또다시 혼란의 시대로
들어갔다. 많은 왕이 교대로 즉위하였고, 때로는 병립 하기도 하였다.

이 혼란을 틈타 아시아에서 힉소스인이 침입하여, 삼각주지대의 아바리스에 성채를 구축하고 약 100년 동
안 주로 하(
)이집트를 지배하였다.

이것은 이집트 역사상 최초의 이민족에 의한 지배이다. 힉소스의 침입은 당시의 서아시아에 일어난 민족
이동의 일환이었고 문화 정도는 이집트에 비해 훨씬 낮 았으나, 그들은 말과 전차를 도입하여, 그 이후 의 전술에 일대 변혁을 일으켰다. BC 1600년경이 되자 테베를 중심으로 하여 제17왕조의 제왕(
諸王)에 의한 반항 이 기도되어 장기간의 항쟁 끝에 카흐모스왕의 아우 아모세가 아바리스를 함락하 고 결국 힉소스를 아시아로 추방하였다. 그는 귀국 후, 아모세 1세로서 제18왕조 를 일으켰다


중왕국


이집트의 중왕국시대는 제11~12왕조(BC 2050?∼BC 1750?)시대를 말한다. 1중간기의 말, 북의 헤라클
레오폴리스에 웅거한 제10왕조에 대하여 테베에 웅 거하는 안테프의 제11왕조가 독립하여 서로 대립하였.

오랜 항쟁 후에 이집트 는 멘투호테프 2세 치하에서 다시 통일되었다. 이후 테베는 약 1,000년 동안 이
집 트의 정치 ·종교의 중심지로서 번영하였다.

왕은 또한 장기간 방치되었던 누비아에 원정하여 콥토스에서 와디 함마마트에 이 르는 도로를 정비하고
시나이 반도와 푼트 지방에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그는 테 베의 서쪽 교외 델 엘 부하리의 벼랑에 붙은 새로운 양식의 장제전(
葬祭殿)을 건 설하였다.
의 후계자들은 통일을 유지할 힘이 없어 국내는 한때 혼란하였으나 최후의 왕 때의 재상 아메넴헤트 1
가 제12왕조를 열었다. 이 무렵부터 테베의 시신(
市神)인 아몬신()이 유력해졌다.

아메넴헤트 1세의 아들 세소스트리스 1세는 제3폭포까지 군대를 파견하여 금광을 개발하였다. 그러나 지
방의 세력은 여전히 강하였다.

노모스의 세력을 장악하고 참된 의미에서 국토통일을 완성한 것은 세소스트리스 3세의 시대에 이르러서였
. 그는 북상하는 니그로를 토벌하여 누비아를 지배하였고 각처에 성채(
城砦)를 설 치하고, 팔레스티나에 원정하였다. 이 시대의 교역은 시리아 ·크레타에까지 미쳤 다. 다음의 아메넴헤트 3세는 국내의 정치에만 힘썼는데, 특히 댐과 관개용수로를 만들었고, 파이윰 지방을 개척하여 경지의 증대에 성공하였다.

12왕조의 왕들은 파이윰의 북동에 있는 리셰트로 도읍을 옮겼기 때문에 리셰트 ·하와라 등지에 피라미
드나 신전이 조영되었다.

이 시대는 민중이 귀족에 대신하 여 힘을 얻어 관리에 등용되었고 농노에서 자유민으로 되는 길도 열리
는 등 이집 트의 역사 가운데서 비교적 민중의 힘이 인정되었던 시대였다.

이러한 경향은 신 앙상에도 나타나 사후의 세계는 왕이나 귀족들의 독점물이 아니고, 민중들도 미라 가
되어 공동묘지에 매장됨으로써 영원한 생명이 약속되었다.

종교 ·문학면에서도 피라미드 텍스트에 대신하여 관(
)의 주위에 표시된 코핀 텍 스트는 일반인을 위
한 것이기도 하였다. 또한 중왕국시대는 일반 문학(산문)이 가 장 발달한 시대이기도 하다
.

세계 최고(
最古)의 모험기행이라고 할 수 있는 《시누 에의 이야기》는 이집트문학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며 그 밖에 푼트 교역을 취급한 《난파선 이야기》와 사회적 관심을 나타낸 《능변의 농부 이야기》 등 이 있다. 이것은 시대를 반영하고 서사(書寫) 재료로서 파피루스의 두루마리가 사용되었고 , 서체도 쓰 기 쉬운 행서체로 옮겨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밖에 파피루스는 《기하학서》(린도 파피루스) 《외과서》(에드윈스미스 파피루스) 《치병(治病) 의 서》(에베루스 파피루스) 등 학술적인 것에까지 미치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