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일본)

"문학이야기 - 일본"

지식창고지기 2010. 2. 10. 17:07

블로그 유쾌한 걸에서 가져 옴

 

"문학이야기 - 일본"

 

1 개요

상대(上代)에서 현대까지 약 1,400년 동안 일본인이 일본어로 쓴 문학의 총칭.일본문학은 원시사회의 제사나 종교적인 행사와 결부되어 발생했다. 고대 일본민족에게는 문자가 없었으므로 문학은 구송적(口誦的)인 형태로 발생·성장해왔으며 6세기말에서 7세기초에 대륙으로부터 한자가 들어오고 표기방법이 발전하면서 기재문학의 시대가 열려 현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따라서 문학의 전개양상을 서술하는데 적절하게 시대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종래 일본문학의 시대구분은 문학형성의 지역적 기반과 배경이 되고 있는 정치·문화의 중심지에 따른 구분, 계급에 의한 구분, 순수한 시대별 구분 등 여러 가지 구분법이 시도되어왔다. 이 구분법에는 각각의 장단점이 있으나, 여기서는 상대·중고·중세·근세·근대(현대 포함)의 5기로 구분하여 서술하기로 한다.

2 상대(야마토 시대)

794년 헤이안쿄[平安京 : 지금의 교토 시[京都市]]로 천도하기까지 대체로 야마토[大和 : 지금의 나라 현(奈良縣)]가 일본의 정치·문화의 중심이었으므로 이 시대를 야마토 시대라고 부른다.7세기 초엽 중국문화와 더불어 들어온 한자의 음훈(音訓)을 원용한 표기방법이 고안·발전됨에 따라 구송되어오던 문학을 문자로 기록할 수 있게 됨으로써 기재문학이 일본에 출현하게 되었다. 8세기 이후에 성립된 문헌 〈고지키 古事記〉· 〈니혼쇼키 日本書紀〉· 〈후도키 風土記〉 등에 남아 있는 구송문학의 흔적에서 일본문학의 원형을 찾아볼 수 있다. 국가의 강력한 의지에 의해 기재문학이 싹트게 되었다. 일본 최고의 문헌인 〈고지키〉·〈니혼쇼키〉는 국가통일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황실 중심으로 기록·편찬된 것으로, 여기에 기재된 많은 신화·전설·가요는 원시사회의 유산이 아니라 율령국가(律令國家)의 정치적 의지에 의해 인위적으로 체계화된 것이다. 〈고지키〉는 712년 겐메이 천황[元明天皇]의 명을 받아 오노 야스마로[太安萬侶]가 찬록(撰錄)한 것인데 일본의 국문체를 살린 한문으로 기록되어 있다. 상·중·하 3권 중 상·중 2권은 거의가 신화·전설이고 하권 끝에 역사적인 기술이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상권은 신대(神代)를 다룬 것으로 다카마가하라[高天原]에 조화삼신(造化三神)이 출현하는 데서 시작하여 남신 이자나기[伊邪那岐]와 여신 이자나미[伊邪那美]에 의한 국토창조가 서술되어 있고, 이어 오쿠니누시노미코토[大國主命]에 의한 이즈모 구니[出雲國]의 헌납, 천손(天孫) 니니기노미코토[瓊瓊杵尊]가 휴가[日向] 지방 다카치호 봉[高千穗峰]에 강림하여 국토를 경영하는 데서 끝맺고 있다. 중권에는 역대 조정과 부족의 계보, 진무 천황[神武天皇]의 동방정벌, 일본 국토 건설의 영웅인 야마토타케루노미코토[倭建命]의 원정, 그리고 이와 관련된 수많은 전투와 연애를 소재로 한 가요가 수록되어 있다. 하권에는 닌토쿠 천황[仁德天皇]에서 스이코 천황[推古天皇]에 이르기까지의 전설과 닌토쿠 천황을 중심으로 한 많은 가요가 실려 있다.720년에는 덴무 천황[天武天皇]의 셋째 왕자 도네리 친왕[舍人親王]이 칙명을 받아 〈니혼쇼키〉 30권을 편찬했다. 신대로부터 지토 천황[持統天皇]까지를 편년체(編年體)로 엮은 것으로, 〈고지키〉가 국내적·전통적 입장에 선 것임에 반해 〈니혼쇼키〉는 대외적 의식이 강하며 중국 역사서를 본떠 정연하게 구성되어 있다. 〈고지키〉·〈니혼쇼키〉에 실려 있는 약 200수의 가요는 고대인의 생활을 담은 민요적 성격의 소박한 가요이다. 713년에 내려진 칙명을 받아 지방의 여러 구니[國]에서 찬진(撰進)한 〈후도키〉는 나라 시대[奈良時代]의 것으로 보이는 〈이즈모후도키 出雲風土記〉를 비롯하여 하리마[播磨]·히타치[常陸]·히젠[肥前]·분고[豊後]의 5개 〈후도키〉 외에 여러 구니의 〈후도키〉 일문(逸文)이 전해지고 있다. 〈후도키〉에도 신화·전설·설화가 많이 수록되어 있는데, 〈고지키〉·〈니혼쇼키〉에 비해 민중의 생활을 많이 전하고 있다. 일본의 신화는 구성요소가 복잡하면서도 통일성이 있다. 그것은 국가와 왕실을 향한 구심적(求心的)인 정신이 작용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며 따라서 산문적·비예술적이다. 고대인의 생활에서 신앙이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 신에게 드리는 기도가 점차 의식화됨에 따라 노리토[祝詞]· 센묘[宣明]가 출현했다. 노리토는 종교의식에서 신에게 드리는 기도문이며 센묘는 국가의 중대사가 있을 때 왕이 신과 문무백관 및 국민에게 고하기 위해 발포하는 칙서(勅書)이다. 노리토의 문장은 반복·대구·열거 등의 수사법을 구사하여 장중하다. 센묘는 용언의 어미나 조사·조동사 등을 일자일음(一字一音)의 만요가나[萬葉假名 : 한자의 음만을 따서 표기한 것]로 작게 표기하는 표기법을 썼는데 이를 센묘가키[宣命書き]라고 한다.

2.1 〈만요슈 萬葉集〉의 성립

귀족과 지식인 사이에 개인의식이 싹트고 문학적 자각이 뚜렷해지는 한편, 한자가 보급되면서 일자일음식의 만요가나가 발달하여 개인의 심정을 단카[短歌 : 음수율 5·7·5·7·7의 정형시] 또는 조카[長歌 : 음수율 5·7·5·7……5·7·7]에 담은 와카[和歌 : 한시에 대해 일본 고유의 시로서 주로 단카를 말함]가 융성하게 되었다. 마침내 〈만요슈〉 와카의 특색인 웅대하고 힘찬 가풍의 이른바 만요초[萬葉調]가 형성되었고 6, 7세기경에는 5·7조 정형(定型)이 확립되었다. 이 시대의 와카를 집성한 것이 일본 최고의 가집 〈만요슈〉(759년 이후 성립)인데 전20권으로 4,500여 수가 실려 있다. 작자층은 천황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며 지역도 전국에 걸쳐 있어 매우 복잡하고 다양하다. 작가(作歌)연대는 약 130여 년 간으로 629~759년, 즉 7, 8세기의 노래가 대부분이다. 아마도 여러 사람의 손에 의해 편집된 것으로 보이나 오토모 야카모치[大伴家持]가 최종적으로 집대성한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수록된 와카는 소몬카[相聞歌 : 이성을 연모하는 노래]·반카[輓歌 : 죽은이를 애도하는 노래]·조카[雜歌 : 주로 궁정의 공식행사와 관계가 있는 노래] 등으로 분류·편찬되어 있다. 〈만요슈〉는 시풍에 의해 4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아직 상대 가요의 소박함이 남아 있는 시대로, 대표 시인으로는 여류시인 누카타노 오키미[額田王]를 들 수 있으며, 특히 왕실 시인이 많다. 제2기는 덴무[天武]·지토[持統]·몬무[文武] 3대 왕에 걸친 시기로서 개인의 의식이 두드러지고 표현기술도 진보하여 만요 시풍이 확립한 시기이다. 대표 시인인 가키노모토 히토마로[ 本人麻呂]는 특히 조카에 뛰어났으며 일본 와카 사상 최대의 시성(詩聖)으로 인정되는 시인이다. 제3기는 나라 시대 전기로 만요 최성기이다. 주정적인 노래에서 객관적인 노래로 옮겨가는 시기로, 개성적인 시인이 배출되었다. 대표 시인으로서는 단카와 서경가(敍景歌)에 뛰어난 야마베 아카히토[山部赤人], 야마노우에 오쿠라[山上憶良], 오토모 다비토[大伴旅人] 등이 있다. 제4기는 나라 시대 후기로, 시풍은 이지적·기교적이어서 다음 헤이안 시대로 이행하는 징조가 보인다. 오토모 야카모치가 대표적인 시인이다. 각 시대에 따라 시풍의 변천은 있으나 전체적으로 일상생활에서 오는 소박한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한 남성적인 시풍이라 할 수 있다.

2.2 한시문(漢詩文)

율령문화가 전개됨에 따라 궁정귀족 사이에서 한시문이 활발히 씌어졌다. 〈가이후소 懷風藻〉(751)는 나라 시대까지 약 100년 동안 제작된 작품 120편을 수록한 한시집으로, 대부분이 육조시(六朝詩)의 영향을 받은 5언시(五言詩)여서 독창성이 부족하다. 772년에는 중국의 시론을 일본 단카에 적용하여 와카의 이론화를 꾀한 후지와라 하마나리[藤原浜成]의 〈가쿄효시키 歌經標式〉가 성립되었다.

3 중고( 헤이안 시대)

나라에서 헤이안쿄로 천도한 794년부터 다이라 씨[平氏]가 멸망한 1185년까지 약 400년간이 중고, 이른바 헤이안 시대이다. 이 시대 문학의 담당자는 궁정도시 헤이안쿄를 본거지로 하는 귀족계급이었으므로 이 시대를 궁정문학시대 또는 귀족문학시대라고도 부른다.

3.1 한시문의 융성

중고시대 전기(8세기 말엽~10세기 중엽)는 대륙문화의 모방시대이다. 도성(都城)의 규모를 비롯해 궁정의례 전반이 당풍(唐風)으로 장식되었으며 남성 관료들이 다투어 한시문을 씀에 따라 한시문 융성시대를 맞기에 이른다. 8세기 초엽에는 왕명에 따라 한시문 3집인 〈료운슈 凌雲集〉(814)·〈분카슈레이슈 文華秀麗集〉(818)·〈게이코쿠슈 經國集〉(827)가 잇달아 출현했으며 이 칙찬(勅撰) 한시문집 이외에 개인 시집인 사가집(私家集)이 다수 나왔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요시미네 야스요[良岑安世], 후지와라 후유쓰구[藤原冬嗣], 오노 미네모리[小野岑守], 구카이[空海] 등을 들 수 있다. 주목할 만한 저서로는 구카이의 시문집 〈쇼료슈 性靈集〉(835)와 시문의 수사법을 논한 〈분쿄히후론 文鏡秘府論〉(819)이 있다. 9세기 후반부터 10세기에는 미야코 요시카[都良香], 스가와라 미치자네[菅原道眞], 기노 하세오[紀長谷雄] 등이 활약했는데, 특히 스가와라 미치자네의 시문집 〈간케분소 菅家文草〉(900)·〈간케코슈 菅家後集〉(903)가 주목할 만하다.

3.2 모노가타리 문학[物語文學]

9, 10세기는 정치사적으로 괄목할 만한 전환기였다. 후지와라 씨[藤原氏]에 의해 추진된 율령정치가 후지와라 씨의 권세를 강화시켜 사적 섭관정치(攝關政治)의 길이 열리게 되는데, 상층 귀족의 권력투쟁의 그늘에서 중·하층 귀족은 불안하게 부침(浮沈)하는 사태에 놓였다. 이러한 현실적 상황에 대응하여 여러 형태의 산문문학이 발생했다. 모노가타리 문학의 원조라 일컫는 〈다케토리 모노가타리 竹取物語〉(9 세기말~10세기 전반)는 고래의 전승을 바탕으로 허구의 세계를 전개한 전기적(傳奇的) 이야기인데, 상층 귀족의 생활을 풍자적으로 묘사하면서 지상의 인간의 무력함과 미의 영원성을 추구하는 작가의 낭만적인 사상을 표현한 작품이다. 같은 시대에 성립된 〈이세 모노가타리 伊勢物語〉(10 세기 중엽)는 당시의 귀족이며 시인인 아리와라 나리히라를 주인공으로 하여 그의 와카 제작의 연유에 관한 이야기를 집성한 것이다. 이처럼 귀족의 생활과 결부된 와카를 둘러싼 항간의 구전설화를 흡수·편성한 것을 우타모노가타리[歌物語]라고 한다. 그밖에 많은 모노가타리가 출현했으나 대부분 산실되고 말아, 모노가타리 문학의 최고 걸작인 〈겐지 모노가타리 源氏物語〉 이전에 나온 장편으로는 〈우쓰호 모노가타리 宇津保物語〉·〈오치쿠보 모노가타리 落窪物語〉·〈이세 모노가타리〉의 계통을 잇는 〈헤이추 모노가타리 平中物語〉·〈야마토 모노가타리 大和物語〉가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우쓰호 모노가타리〉(10세기 후반)는 전20권으로 된 최초의 장편으로 전기적 성격과 사실적 성격을 교차시키면서 귀족사회 여러 계층의 전형적인 인간상을 생생하게 묘사해냈다. 〈오치쿠보 모노가타리〉는 명석한 주제와 면밀한 구상으로 당시의 세태를 상세히 묘사한 현실적인 모노가타리이다. 이 모노가타리를 집대성한 것이 〈겐지 모노가타리〉이다. 〈다케토리 모노가타리〉에서 〈우쓰호 모노가타리〉로 발전한 신비적인 낭만성, 〈우쓰호 모노가타리〉나 〈오치쿠보 모노가타리〉의 현실적인 사실성, 그리고 〈다케토리 모노가타리〉와 〈오치쿠보 모노가타리〉의 희곡적 성질 등이 모두 〈겐지 모노가타리〉에 포괄되어 있다. 특히 〈이세 모노가타리〉 전편에 흐르는 와카를 중심으로 한 서정성은 〈겐지 모노가타리〉의 기조(基調)를 이루고 있다. 근세의 고전 연구가인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는 〈겐지모 노가타리〉의 본질을 '모노노아와레'(もののあわれ)라고 보는 견해를 피력했다. 모노노아와레란 객체적 대상과 주체적 감정의 융합에서 일어나는 감동으로,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과 공명(共鳴)을 나타낸다. 이는 중세 이래 종교적·도덕적 견해에서 〈겐지 모노가타리〉를 해방시킨, 인간 본연의 감정을 근저에 둔 획기적인 문예론이었다. 〈겐지 모노가타리〉는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라 불리는 여성에 의해 11세기 초엽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전 54첩(帖)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내용상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는 주인공 겐지[源氏]의 출생에서부터 그의 화려한 청·장년기를 그린 41첩까지이며, 제2부는 다음 42~44첩으로 초월자인 겐지가 불안과 고뇌 속에서 생을 마감하는 내용이다. 제3부인 마지막 10첩은 겐지의 자손들의 이야기이다. 〈겐지 모노가타리〉를 정점으로 모노가타리는 다시 비현실적·전기적 경향으로 흐르게 되었다. 헤이안 말기의 수작으로는 〈요와노네자메 夜半の寢覺〉와 단편소설집 〈쓰쓰미추나곤 모노가타리 提中納言物語〉가 있다.한편 섭관정치가 급속도로 쇠퇴하면서 모노가타리를 창작·감상하던 궁정의 문화적 기반 역시 위축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허구적 모노가타리는 쇠퇴한 대신에 헤이안 말기의 회고적 풍조는 과거의 사실에서 소재를 찾아 구상을 새롭게 한 문학을 발생시켰는데, 그것이 바로 〈에이가 모노가타리 榮花物語〉·〈오카가미 大鏡〉·〈이마카가미 今鏡〉 등의 레키시 모노가타리[歷史物語]이다. 특히 〈오카가미〉는 강한 비판정신을 나타낸 수작이다.〈만요슈〉 이후 헤이안 시대 초엽의 약 100여 년 동안 와카는 한시문에 가려져 공적인 세계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었으며 민간 또는 사적인 세계에서 명맥을 유지해오다가 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 가나[假名] 문자의 보급·발전에 힘입어 부활하게 되었고 와카의 궁정사회 복귀는 가나 문자의 보급을 촉진시켰다. 이와 더불어 견당사(遣唐使) 파견이 중지되고 점차 당풍에서 벗어나려는 기운이 일면서 와카를 일본 고유의 시가로 자각하게 되었고, 가나 문자가 국자(國字)로서 널리 통용되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10세기초에 칙명에 의하여 〈고킨와카슈 古今和歌集〉(905) 가 편찬되었다. 〈고킨와카슈〉 성립 이전 이른바 와카사[和歌史] 전환기에는 아리와라 나리히라[在原業平], 헨조[遍照], 오노 고마치[小野小町], 훈야 야스히데[文屋康秀], 기센[喜撰], 오토모 구로누시[大伴黑主] 등 6가선(六歌仙)이 활약했다. 6가선시대로부터 〈고킨와카슈〉 성립에 이르는 시기는 우아한 고킨초[古今調] 시풍의 형성기였다. 세련된 기지와 취향을 추구하여 만요 와카와는 다른 헤이안 귀족의 취미나 정서에 맞는 7·5조의 유려한 시풍이 생겨났다. 〈고킨와카슈〉의 시인으로는 편찬자인 기노 쓰라유키[紀貫之], 오시코우치 미쓰네[凡河內躬恒], 미부노 다다미네[壬生忠岑], 기노 도모노리[紀友則]를 비롯해 소세이법사[素性法師], 기요하라 후카야부[淸原深養父], 후지와라 오키카제[藤原興風], 이세[伊勢] 등이 유명하다. 〈고킨와카슈〉에는 약 1,100수의 와카가 춘가(春歌 : 상·하)·하가(夏歌)·추가(秋歌 : 상·하)·동가(冬歌)·하가(賀歌)·이별가(離別歌)·기리요카[ 旅歌]·모노노나[物の名]·연가(戀歌 : 1~5권)·애상가(哀傷歌)·조카[雜歌 : 상·하]·자쓰테이[雜體]·오우타도코로어카[大歌所御歌]의 20권으로 편성되어 있으며 근간을 이루는 것은 사계가(四季歌)와 연가이다. 또한 이 시집에는 가나로 된 서문과 한자 서문이 실려 있는데 기노 쓰라유키가 쓴 가나 서문은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와카론으로 일본 평론문학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후 와카는 약 1세기 동안 활기를 띠었으나 10세기 전후 산문문학이 융성함에 따라 부진한 상태를 보이다가 10세기 말엽 부활하여 잇달아 칙찬집이 출현했으며 대규모 우타아와세[歌合]가 활발히 개최되고 사가집이 다수 출현했다. 우타아와세는 좌우로 편을 갈라 주어진 주제 아래 와카를 지어서 우열을 겨루는 일종의 놀이였는데 심판을 맡은 판자(判者)의 평언(評言)을 통해 시론(詩論)으로 조직화되어갔다. 이처럼 활발한 헤이안 후기의 시단(詩壇)에서 주목되는 인물은 유현(幽玄)의 미(여운의 넘치는 섬세한 미적 경지)를 추구한 후지와라 슌제이[藤原俊成]와 승려 시인 사이교[西行]이다. 〈고킨와카슈〉 성립을 필두로 중세 초기에 〈신코킨와카슈 新古今和歌集〉가 출현하기까지 7개의 칙찬시집이 편찬되었다.

3.3 일기문학(日記文學)

전기적인 <다케토리 모노가타리〉에서 시작된 모노가타리 문학이 현실성을 지닌 산문표현으로 성숙해가는 동안에 한편에서 기노 쓰라유키의 〈도사 일기 土佐日記〉(935) 로 시작되는 일기문학이 형성되어갔다. 본래 일기란 공적 기록에 속하며 한문으로 기록하는 것이었는데 점차 개인의 내면을 표출하는 문학형식으로 바뀌었다. 〈도사 일기〉는 도사 지방 장관의 임기를 마치고 귀경하는 뱃길에서 작가 기노 쓰라유키가 임지에서 잃은 여아에 대한 슬픔, 그 고장의 인심, 바다에서 겪은 고난·공포 등을 해학적으로 기록한 것이다. 이 일기에서 작가는 자신을 무명의 여성으로 위장함으로써 귀족 관료의 입장에서 벗어나 자유인으로서 사적인 감회를 자유로이 토로했다. 이로써 가나문 일기는 비로소 인간생활의 내면을 기록하는 문학형식으로서 자격을 갖게 되었으며, 〈도사 일기〉의 출현은 이후의 여류 일기문학의 개화를 예고하는 것이었다.여성이 자신의 눈으로 사물을 보고 자신의 마음으로 진실을 파악하려는 움직임이 10세기 중엽부터 표면화되는데, 이러한 움직임이 최초로 결실을 맺은 것은 당시의 상류 귀족 후지와라 가네이에[藤原兼家]의 아내 (미치쓰나[道綱]의 어머니)가 쓴 〈 가게로 일기 日記(974 경)이다. 일부다처의 관습이 일반적이었던 당시, 불안과 고뇌 속에서 아내와 어머니로서 보낸 20여 년 간을 기록한 인생 고백이다. 〈도사 일기〉가 기행적 일기인 데 대해 〈가게로 일기〉는 자전적 일기이다. 이후 일기문학은 이 2가지 계통으로 발전했다. 특히 〈가게로 일기〉는 사건이나 줄거리 본위의 모노가타리와 대응하여 개인의 내면이나 심리구조를 추구하는 산문문학의 길을 열었다. 그밖에 사랑의 고뇌와 전말을 그린 〈이즈미시키부 일기 和泉式部日記〉(1004), 〈겐지 모노가타리〉의 작가 무라사키 시키부가 궁정생활에 관한 견문·감상을 서술한 〈무라사키 시키부 일기 紫式部日記〉(1008), 소녀시절의 꿈이 깨어지고 회한에 찬 생애를 회상한 〈사라시나 일기 更級日記〉(1060) 등 많은 여류 일기문학이 출현했다.

3.4 수필·설화 문학

10~11세기에 섭관정치 전성기에 성립한 〈마쿠라노소시 枕草子〉(1000 경)는 〈겐지 모노가타리〉와 더불어 헤이안 시대 문학의 쌍벽을 이루는 수필문학이다. 작가 세이 쇼나곤[淸少納言]의 예리한 관찰력과 적확한 판단력, 사물을 선명하게 표현하는 묘사력과 자유분방하고 유려한 문장에 의해 〈마쿠라노소시〉는 독자적인 높은 위치를 차지했으며 수필문학이라는 새로운 문학양식을 이루어냈다. 〈겐지 모노가타리〉의 미의 세계를 '아와레'(あわれ)라고 한다면 당시 귀족사회가 본질적으로 안고 있던 인간의 고뇌를 사상(捨象)함으로써 확보할 수 있었던 〈마쿠라노소시〉의 밝은 미의 세계는 '오카시'(をかし)라고 규정할 수 있다.레키시 모노가타리를 출현시킨 헤이안 말기의 회고적 풍조는 또한 산재해 있던 설화·전설·구비(口碑) 등을 채록하려는 움직임으로 이어져 12세기 전반에 마침내 설화집 〈곤자쿠 모노가타리슈 今昔物語集〉(전31권)가 편찬되었다. 이는 헤이안 시대 초기의 〈니혼료이키 日本靈異記〉(810~24)의 계통을 잇는 것으로 작가는 아마도 한자에 정통하고 불교에 지식이 풍부한 귀족이거나 승려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인도·중국·일본 3국의 설화가 1,000여 편 수록된 〈곤자쿠 모노가타리슈〉에는 불교설화가 700편에 이르나 단순히 교리를 위해 편집된 것이 아니라 귀족사회 바깥에 있는 서민의 생활에 입각해 신앙문제를 추구하려는 자세가 엿보이며, 민간설화에는 강한 감동을 가지고 다양한 인생의 단면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4 중세(가마쿠라·무로마치시대)

12세기말 가마쿠라 바쿠후 설립(1192) 무렵부터 17세기초 에도 바쿠후 설립(1603) 이전까지의 약 400년간을 중세라고 하는데, 이 400년간은 가마쿠라 시대(1192~1333), 남북조(南北朝)· 무로마치[室町] 시대(1334~1573), 아즈치[安土]·모모야마[桃山] 시대(1574~1600)로 나눌 수 있다. 전대의 문학이 주로 교토 귀족계급 주도 아래 있었던 데 비해 중세의 문학은 귀족과 신흥무가(新興武家)·승려·은둔자·예능인 등의 협력·제휴에 의해 발달했다. 또 이들에 의해 표면에 나타나지 않았던 민간문학·예능이 부각된 것도 주목할 만하다. 중세 문학의 특징은 교토 귀족문화와 지방 서민문화가 결합·형성된 점에 있다. 여러 차례에 걸쳐 일어난 전국적인 동란은 양 문화의 교류를 가능하게 했으며 은둔자·승려계급이 작가나 전승자로서 활약하는 장(場)을 마련해 주었다. 중세 문학의 대부분에 불교적 세계관인 무상관(無常觀)이 짙은 음영을 드리우고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4.1 〈신코킨와카슈 新古今和歌集〉 시대

가마쿠라 바쿠후가 설립되고 정치의 실권이 무가로 넘어갔으나 귀족계급은 여전히 궁정정치와 귀족적 문학을 보호·유지하려 했다. 따라서 초기 20~30년간은 복고 풍조가 현저히 성행했고 특히 와카가 활기를 띠어 뛰어난 시인이 많이 배출되었다. 마침내 1205년 와카를 사랑했던 고토바 상황[後鳥羽上皇]의 명을 받아 후지와라 슌제이의 아들 사다이에[定家]와 이에타카[藤原家隆] 등이 〈신코킨와카슈〉를 편찬했다. 이는 '새로운 〈고킨슈〉'라는 포부 아래 편찬된 귀족문학 최후의 결실이었다.약 2,000수가 수록된 이 시집은 유현(幽玄)·유심(有心 : 깊은 정취와 여운이 있는 시풍)이라는 문학이념을 바탕으로 한 정교하고 섬세하며 예술적 향기가 높은 사화집(詞華集)으로서 〈만요슈〉·〈고킨슈〉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고전 와카의 독자적인 정점을 이루었다. 그러나 조큐[承久]의 난(1221) 이후 와카 시단은 침체·몰락의 길을 걷게 되나 칙찬집 편찬은 계속되어 가마쿠라 시대에 8개 시집이 나오게 되었다. 60여 년에 걸친 남북조의 동란과 무로마치 시대의 끊임없는 분쟁으로 하극상(下剋上) 풍조가 초래되어 서민의 지위와 생활이 비약적으로 향상함에 따라 상류귀족의 세력이 완전히 실추되었다. 대신에 상층 무가나 승려가 귀족과 대등하게 또는 그들을 대신하여 귀족문화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4.2 후기 한시문과 와카·렌가[連歌]

전대에 귀족 남성의 점유물이었던 한문학은 귀족계급의 후퇴와 비례하여 침체해갔다. 그러나 가마쿠라 시대 말엽부터 남북조시대에 걸쳐 중국의 선승들이 일본에 건너오고 일본의 승려들이 중국 유학을 하게 되면서 한문학이 부활했는데 이를 고잔 문학[五山文學]이라 일컫는다. 남북조시대가 그 최성기로, 뛰어난 한시문과 게문(偈文)을 남겼으나 무로마치 시대에 이르러 선종 사원이 타락함에 따라 쇠퇴해갔다. 칙찬 와카집은 남북조시대에도 4개 시집이 나왔으나 와카는 점차 저조해져 무로마치 시대의 〈신쇼쿠코킨와카슈 新續古今和歌集〉(1439)를 끝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이러한 사실은 귀족문학으로서 와카가 종언을 맞았음을 뜻하는 것인데, 대표적 시인으로는 남북조시대의 돈아[頓阿], 무로마치 시대의 쇼테쓰[正徹]·신케이[心敬] 등 승려를 들 수 있다.와카를 대신하여 성행한 것은 렌가이다. 렌가는 한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재치를 바탕으로 협동 제작하는 문예로서 헤이안 초기부터 등장했다. 본래는 와카 1수를 상구(5·7·5)와 하구(7·7)로 나누어 두 사람이 읊던 단(短) 렌가, 후기에는 3명 이상이 모여 1구씩 이어가는 장(長) 렌가가 생겨 가마쿠라 시대에도 종종 읊어졌다. 남북조시대에 섭정 니조 요시모토[二條良基]는 구사이[救濟]를 비롯한 은자(隱者) 렌가시[連歌師 : 전문적인 렌가 작가]의 협력을 얻어 렌가 작법을 제정하고 최초의 렌가집 〈쓰쿠바슈 濟玖波集〉를 편찬했다. 이후 렌가는 소제이[宗 ]·신케이[心敬] 등에 의해 발전해오다가 15세기말 이오 소기[飯尾宗祗]에 의해 완전한 예술적 경지에 도달했다. 렌가집으로는 소기가 편찬한 〈신센쓰쿠바슈 新撰 玖波集〉 등이 있다. 소기를 정점으로 무로마치 말기에는 렌가 본래의 자유로운 기운이 상실되어감으로써 이를 타개하는 움직임으로 하이카이렌가[俳諧連歌]가 등장했다. 하이카이렌가는 재치와 자유로운 해학을 내용으로 하는 야마자키 소칸[山崎宗鑑], 아라키다 모리타케[荒木田守武]에 의해 개척되었다. 이들은 전통적인 와카·렌가를 대신하는 새로운 시 형식인, 근세 하이카이의 기초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4.3 기코 모노가타리[擬古物語]와 레키시 모노가타리[歷史物語]

모노가타리에 서는 가마쿠라 초기의 〈마쓰우라미야 모노가타리 松浦宮物語〉·〈스미요시 모노가타리 住吉物語〉 등 전대의 왕조 모노가타리의 모방작이 많이 나왔다. 〈겐지 모노가타리〉와 그밖의 모노가타리를 비평한 모노가타리 평론서 〈무묘조시 無名草子〉의 출현은 주목할 만하다. 또한 전대의 모노가타리 문학을 대신하는 단편 이야기책 오토기조시[御伽草子]가 다수 출현했는데 대부분이 치졸한 작품이다. 중고시대의 레키시 모노가타리의 뒤를 이어 가마쿠라 초기에 〈미즈카가미 水鏡〉가, 남북조시대에는 〈마스카가미 增鏡〉가 성립되었으나 회고적이며 독창성이 결여되어 있다. 그리고 지엔[慈円]의 〈구칸쇼 愚管抄〉, 기타바타케 지카후사[北 親房]의 〈진노쇼토키 神皇正統記〉 등 사관(史觀)을 주로 한 사론(史論)이 출현했다.

4.4 군키 모노가타리[軍記物語]

험난한 역사의 움직임을 정면에서 다룬 〈호겐 모노가타리 保元物語〉·〈헤이지 모노가타리 平治物語〉로 시작하여 〈헤이케 모노가타리 平家物語〉로 완성되는 것이 군키모노가타리이다. 중고시대의 〈쇼몬키 將門記〉 등 한문체의 전기(戰記), 〈곤자쿠 모노가타리슈 今昔物語集〉의 무가설화 등에서 싹튼 군키 모노가타리가 중세에 이르러 시대를 반영한 레키시 모노가타리로서 결실을 보게 된 것은 군키 모노가타리가 고대에서 중세로 옮겨가는 커다란 변혁기를 무대로 했기 때문이다. 〈호겐 모노가타리〉·〈헤이지 모노가타리〉는 각각 호겐(1156)·헤이지(1159)의 난을 다룬 것으로, 한자를 섞은 간결한 문체(와한혼효문[和漢混交文 : 일한 혼합문])로 무장의 활약상을 영웅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주인공은 새로이 역사에 등장한 무사계급이었으나 그들은 이 2차례의 난에서 귀족간의 정쟁에 이용되었을 뿐이다. 〈헤이케 모노가타리〉는 헤이안 말기부터 가마쿠라 초기에 이르는 미나모토 씨[源氏]와 다이라 씨[平氏]의 싸움이라는 역사의 격동을 다이라 씨 일문의 흥망에 초점을 맞추어 묘사한 장편 군키 모노가타리이다. 〈헤이케 모노가타리〉의 최초의 형태는 1220년경에 이미 성립되었고 작가는 시나노[信濃] 지방의 전(前)장관이었던 유키나가[行長]로 알려져 있으며, 지방 각지를 순회하던 장님 비파승에 의해 유포되어온 구송문예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헤이케 모노가타리〉는 제행무상(諸行無常)·성자필쇠(盛者必衰)라는 불교적 무상관을 기조로 하여 사건과 인간의 행동을 인과응보의 이치로 분석해보인 점에서 일반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문장은 한자를 섞어 쓴 한혼효문이나 장면에 따라 서정적 문장을 쓰는 등 운율적이다.14세기 초엽 140년간 지속된 가마쿠라 바쿠후가 무너진 후 남조와 북조의 대립항쟁이 일어나 60년에 걸친 전란이 전국을 휩쓸었다. 〈다이헤이키 太平記〉는 이 동란시대를 그린 40권에 이르는 장편 군키 모노가타리이다. 잇달아 계속되는 싸움과 그에 따르는 용맹하면서도 비애에 찬 인간의 모습이 호쾌하고 화려한 필치로 묘사되어 있다. 작가는 고지마 법사[小島法師]라는 설이 있으나 아마도 여러 사람에 의해 씌어져 나간 것으로 짐작된다. 작품성이 〈헤이케 모노가타리〉에 미치지는 못하나 유교도덕으로 말세를 개탄하고 위정자를 비판하는 등 새로운 시각을 엿볼 수 있다. 그밖에 주목할 만한 것은 군키 모노가타리에서 파생된 영웅전기 모노가타리이다. 〈소가 모노가타리 曾我物語〉·〈기케이키 義經記〉 등이 대표적이며 후대에 미친 영향도 크다.

4.5 설화·일기·수필/ 기타 문학

이 시대 전기(前期)에는 설화가 활발히 수집·편찬되었다. 귀족의 고대 동경, 신흥계급의 지식욕, 불교의 창도(唱導), 신흥계급 계몽을 위한 훈몽사상(訓蒙思想) 등이 작용했던 것이다. 귀족계층의 〈우지슈이 모노가타리 宇治拾遺物語〉(1213~21경)·〈고콘초몬주 古今著聞集〉(1254), 무가의 〈짓킨쇼 十訓抄〉(1252) 등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으며, 귀족계층의 일화나 불교의 영험담·둔세담(遁世談)이 많고 서민에 관한 민간설화가 수록된 점이 주목할 만하다.중세의 일기문학은 전대의 여류일기만큼 우수한 작품은 없다. 궁중나인의 일기로는 다이라 씨 몰락기의 한 여성의 비애를 그린 〈겐레이몬인 우쿄노다이부슈 建禮門院右京大夫集〉, 지극한 모정(母情)이 호소력있게 다가오는 〈이자요이 일기 十六夜日記〉, 애욕의 적나라한 고백을 기록한 〈도와즈가타리 とはずがたり〉 등이 있다. 이에 대해 남성 귀족의 한문일기에도 주목할 만한 것이 있는데 후지와라 가네자네[藤原兼實]의 〈교쿠요 玉葉〉, 후지와라 사다이에[藤原定家]의 〈메이게쓰키 明月記〉(1180~1255), 가마쿠라 바쿠후 서기(書記)들이 쓴 〈아즈마카가미 吾妻鏡〉 등이 그것이다. 사이교를 비롯해 수많은 문학가가 출가·둔세하여 초암에서 시가를 음영(吟詠)하는 한편 훌륭한 수필문학을 남겼다. 대표적인 것은 가모 조메이[鴨長明]의 〈호조키 方文記〉(1912), 요시다 겐코[吉田兼好]의 〈쓰레즈레구사 徒然草〉(1330경)이다. 〈호조키〉는 먼저 무상한 세상과 허무한 인간의 모습을 그린 뒤 천재와 동란에 의해 일어나는 비참한 도시생활의 양태를 기록함으로써, 후반의 초암생활의 편안함과 대조시키고 있다. 〈쓰레즈레구사〉는 인생의 갖가지 모습을 붓 가는 대로 기록한 수필이다. 난세를 살아온 인간의 시선이 사회생활 구석구석에 미치고 있는데, 그것이 모두 작자의 예리한 감수성과 판단력에 의해 선택·서술되어 있다는 점에서 특이한 인간기록이라 할 수 있다. 〈호조키〉·〈쓰레즈레구사〉는 전대의 〈마쿠라노소시〉와 일본 수필문학의 쌍벽을 이룬다.

4.6 노[能]·교겐[狂言]

중세시대에서 특기할 만한 사항 중에 하나는 극문학의 성립이다. 남북조의 난은 서민문화를 부각시킴으로써 렌가가 성행하게 되었는데 교겐도 같은 경위로 출현한 예능이다. 노·교겐의 원류는 전대부터 있었던 사루가쿠[猿樂]이다. 가마쿠라·남북조 시대에는 사루가쿠와 가무 중심의 덴가쿠[田樂] 등을 직업적으로 하는 단체 자[座]가 다수 출현하여 사찰과 신사(神社)의 보호를 받으며 서민들 사이에서 성장해갔다. 많은 예능인 중에서도 유자키 자[結崎座]의 간아미[ : 觀阿彌미]는 덴가쿠·사루가쿠의 장점을 종합하여 새로운 예술인 노가쿠[能樂]를 완성시켰다. 노는 연기자의 대부분이 가면을 쓰는 일종의 가면극으로서 춤과 창(唱), 반주효과를 내는 합창(지우타이[地謠]라 함)과 북·피리 등으로 이루어지며 독특한 구조의 무대에서 진행된다. 요쿄쿠[謠曲]는 노의 각본을 말한다. 간아미는 노의 명수(名手)인 동시에 뛰어난 연출가·각색자·작곡가였다. 노가쿠를 더욱 발전시킨 것은 그의 아들 제아미[世阿彌]였다. 작가·연기자로서 탁월한 재능을 가졌을 뿐 아니라 고도의 예술론을 써 이론과 실천을 체계화함으로써 노가쿠를 예술적으로 완성했다. 〈후시카덴 風姿花傳〉(1400~ 18)·〈가쿄 花鏡〉(1424)·〈사루가쿠단기 申樂談儀〉(1430)는 특히 뛰어난 연극론이다. 교겐은 노와 같은 무대에서 공연되는 예능으로, 노와 더불어 성장했다. 노가 장중하고 우아한 가무극으로 주인공이 전설 중의 인물인데 반해, 교겐은 대화와 동작으로 된 현대적·사실적이며 풍자·해학이 풍부한 구어 희극이다. 따라서 노는 귀족적, 교겐은 민중적이라 할 수 있고 노와 교겐은 전통적 귀족문화와 신흥 서민문화의 종합체라는 점에서 중세문화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5 근세(에도 시대)

무로마치 바쿠후의 성립(1573)으로부터 에도 바 쿠후[江戶幕府] 멸망(1867)까지, 약 300년간을 근세라고 한다. 근세문학은 18세기 중엽을 경계로 전기·후기로 나누고 이를 다시 4기로 나눌 수 있다. 즉 에도 초기(1661~81경)까지가 제1기, 겐로쿠[元祿 : 1688~1704] 연간을 중심으로 1716~36년경까지가 제2기, 1736~41년경부터 1781~89년에 이르는 약 50년간이 제3기, 이후 바쿠후 말까지가 제4기이다. 이 시대의 문학은 전대 문학을 계승하고 있으나 상인·장인(조닌[町人]이라 함)의 경제력이 향상됨에 따라 서민문학으로 한층 확대되어간 점이 커다란 특색이다. 16세기말 포교를 위해 건너온 가톨릭교도와 한반도에서 건너간 활자인쇄술에 자극을 받아 정판(整版)인쇄가 비약적으로 발전함으로써 문학이 인쇄물로서 급속도로 독자층에 침투해갔다. 인쇄술의 발달로 민중의 계몽 교화가 진전됨에 따라 문학의 주도권은 조닌의 손으로 넘어갔다. 근세 전기의 문학은 주로 문화적 전통이 있는 교토와 오사카 지방을 중심으로 번영했는데 후기에는 신흥 정치도시이며 소비도시인 에도로 옮겨갔다. 따라서 근세 전기를 가미가타문학[上方文學]의 시대, 근세 후기를 에도 문학의 시대라고 부른다.

5.1 고쿠가쿠[國學]운동과 와카

도쿠가와 바쿠후는 주자학을 관학(官學)으로 삼았다. 그러나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고문헌을 실증적으로 파악하고 인간의 자연적 욕망을 긍정하려는 경향이 일어났는데, 이토 진사이[伊藤仁齊] 고학파(古學派), 오규 소라이[萩生 徠] 의 고문사학파(古文辭學派) 등이 그것이다. 주자학파 중에서 가이바라 에키켄[貝原益軒],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 무로 규소[室鳩巢] 등은 특색있는 수필을 남겼다. 특히 하쿠세키는 역사·지리·언어 등 넓은 분야에 걸쳐 합리주의적 태도로 연구해나갔으며 자서전 〈오리타쿠시바노키 折たく柴の記〉를 썼다. 그리고 17세기 후반에 시모코베 조류[下河邊長流]와 승려 게이추[契沖]가 〈만요슈〉를 연구했는데, 게이추는 〈만요다이쇼키 萬葉代匠記〉를 써서 고전연구에 실증적인 방법을 확립했다. 고전에 관한 학문은 가다 아즈마마로[荷田春滿]나 가모 마부치[賀茂眞淵]에 이르면 고전연구를 통해 고도(古道)를 구명하려는 자각을 갖게 되는데 이를 고쿠가쿠라 한다. 마부치의 학문을 계승하여 고쿠가쿠를 대성한 사람은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이다. 노리나가는 〈고지키덴 古事記傳〉·〈겐지 모노가타리 다마노오구시 源氏物語玉小櫛〉 등 고전 연구에 큰 성과를 남겼다. 노리나가의 학문은 히라타 아쓰타네[平田篤胤]에게 계승되고 많은 고쿠가쿠 학자가 배출되었다. 고쿠가쿠의 발흥은 당시의 문학에 여러 가지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와카에 혁신적 기운을 가져다주었다. 근세 초두의 시인으로는 호소카와 유사이[細川幽齊]가 있고, 그의 문하인 기노시타 조쇼시[木下長嘯子]가 다소 청신한 면모를 보이기도 했으나 전체적으로 당시의 와카는 인습적인 풍조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겐로쿠 시대에 시모코베 조류, 승려 게이추 등이 나타나 중세 가학(歌學 : 와카에 관한 학문)의 전통을 비판하고 〈만요슈〉에 눈을 돌리게 되었으며 이어 만요 부흥을 이상으로 하는 가모 마부치가 등장한다. 또한 마부치의 만요초를 배격하고 〈고킨슈〉를 존중한 가가와 가게키[香川景樹]가 등장했는데 그의 유파를 게이엔파[桂園派]라 일컫는다. 근세말경에는 승려 료칸[良寬], 오쿠마 고토미치[大 言道], 히라가 모토요시[平賀元義], 다치바나노 아케미[橘曙賢] 등 지방 출신의 특색있는 시인이 나타나 우수한 작품을 남겼다.

5.2 하이카이[俳諧]의 흥륭

렌가시[連歌師]의 여기(余技) 영역에 머물러 있던 하이카이는 마쓰나가 데이토쿠[松永貞德]가 나타나면서 급속도로 발전했다. 이 무렵부터 하이카이의 첫구 5·7·5만을 독립시키는 방법이 선보였는데 이를 홋쿠[發句]라고 불렀다. 데이토쿠파[貞德派]의 하이카이를 데이몬[貞門]이라 하는데 그의 문하에 고전연구로 유명한 기타무라 기긴[北村季吟]이 있다. 이지적인 언어 유희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데이몬하이카이에 반대하여 일어난 것이 니시야마 소인[西山宗因]을 중심으로 하는 단린파[談林派]의 하이카이이다. 데이몬이 형식주의적인데 비해 소인의 시풍은 보다 자유롭고 해학적이다. 이 무렵 전국적인 산업발전을 바탕으로 하는 신흥 조닌이 진출했는데 단린하이카이는 이 신흥 조닌의 취향에 맞아 전국적으로 유행했다. 소인 문하의 대표적 작가로는 오사카의 조닌 이하라 사이카쿠[井原西鶴]가 있다. 단린하이카이는 데이몬의 보수성을 타파하기는 했으나 전통 타파에 급급한 나머지 문예로서 시정(詩情)을 상실해갔다. 단린하이카이가 한계에 달하자 새로운 하이카이로의 모색이 시도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마쓰오 바쇼[松尾芭蕉]의 쇼후하이카이[蕉風俳諧]가 출현했다. 바쇼는 단린의 도시적 향락주의에 만족하지 않고 진정한 시를 찾아 모색과 탐구를 계속하여 마침내 〈겨울해 冬の日〉(1684)에 이르러 새로운 시풍을 표방했다. 바쇼는 〈오쿠노호소미치 奧の細道〉(1694) 등에 묘사된 바 떠돌이 생활을 통해 자연에 동화함으로써 시구(詩句)를 심화·발전시켜갔다. 〈오이노코부미 の小文〉(1688)라는 기행문에서 엿보인 한아고담(閑雅枯淡)의 사비(さび)의 경지는 〈사루미노 猿蓑〉(1691)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다시 만년의 〈숯섬 炭俵〉에서 가루미[輕み]의 경지에 도달하는데 이는 초기 쇼후[蕉風]의 고답성(高踏性)을 부정하고 고도의 시정과 그것을 평이하게 표현하려는 통속성을 융합한 것이었다. 문하에는 기카쿠[其角]·란세쓰[嵐雪]·교라이[去來]·조소[丈草]·본초[凡兆] 등 뛰어난 시인이 있었으나 바쇼 사후 쇼몬[蕉門]은 분열하고 하이카이 시단(詩壇)은 세속화의 길을 걸었다. 오랜 침체 끝에 18세기 중엽 하이카이 혁신운동이 일어났다. 그 중심적 존재인 요사 부손[與謝蕪村]은 객관적이며 회화적인 화려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부손 외에 오시마 료타[大島蓼太], 가야 시라오[加舍白雄], 가토 교타이[加藤曉台] 등이 있었으며 이들의 사후에 침체해가는 시단에서 이채를 띤 시인은 고바야시 잇사[小林一茶]이다.

5.3 교카[狂歌]·센류[川柳]

해학적이고 익살스러운 비속한 단카인 교카는 18세기 후반에 최성기를 맞아 조닌들이 애호했을 뿐 아니라 지식인들 사이에도 유행했다. 센류는 인정이나 풍속의 기미(機微)를 파악하여 그것을 예리하고 교묘하게 표현하는 묘미가 있는 17음의 최단시형으로, 창시자는 가라이 센류[柄井川柳]이다. 번거로운 작법이 필요하지 않고 기지·재치를 겨루는 흥미가 있어 오늘날까지 서민문학으로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5.4 근세소설의 탄생

이 시대에 최초로 등장한 소설은 무로마치 시대의 오토기조시[お伽草子]의 계통을 잇는 가나조시[假名草子]이다. 상업 발전에 따라 대규모로 등장한 도시 조닌의 지식욕이나 문학의식을 충족시키기 위한 출판물이 많이 간행되었다. 소설만이 아니라 계몽·교훈·오락·실용 등을 목적으로 하여 가나문으로 평이하게 씌어졌기 때문에 가나조시라 불렸다. 대표작으로는 작자 미상의 〈우라미노스케 恨之介〉, 도미야마 도야[富山道冶]의 〈지쿠사이 竹齋〉, 스즈키 쇼산[鈴木正三]의 〈두 사람의 비구니 二人比丘尼〉, 아사이 료이[淺井了意]의 〈도카이도 명소기 東海道名所記〉·〈우키요 모노가타리 淨世物語〉·〈오토기보코 御伽婢子〉 등이 있다. 그밖에 이솝 우화의 번역인 〈이소호 모노가타리 伊曾保物語〉, 소화본(笑話本)인 〈세이스이쇼 醒睡笑〉 등도 주목된다. 가나조시에는 세상을 적극적·긍정적으로 보려는 현실주의적인 경향이 보인다. 가나조시가 발달함으로써 마침내 조닌 자신들에 의한 신문예가 성립되었다. 조닌을 대상으로 하는 본격적인 근세소설인 우키요조시[浮世草子]는 조닌 출신인 이하라 사이카쿠에 의해 창시되었다. 사이카쿠는 〈고쇼쿠이치다이오토코 好色一代男〉(1682)를 비롯한 일련의 호색물(好色物)과 신흥 조닌의 모습을 그린 〈니혼에이다이구라 日本永代藏〉·〈세켄무네잔요 世間胸算用〉 등을 남겼다. 사이카쿠 이후 우키요조시는 교토 하치몬지야[八文字屋] 서점에서 간행된 소설 중심의 하치몬지야본[八文字屋本] 시대가 펼쳐졌다. 사이카쿠의 영향을 받아 배출된 많은 작가 중에 에지마 기세키[江島其 ]가 특히 유명한데 그는 〈세켄무스코카타기 世間息子氣質〉(1715) 등 '가타기모노'[氣質物]라 불리는 계열의 작품을 썼다. 기세키 사후 하치몬지야본은 쇠망했다.

5.5 에도의 소설

우키요조시 시대에 이어 소설계에는 요미혼[讀本]과 샤레본[酒落本]이 등장했다. 발상기의 요미혼에는 중국 백화소설(白話小說)의 영향이 강하게 엿보이는데, 쓰가 데이쇼[都賀庭鏡]의 〈하나부사조시 英草紙〉(1749)·〈시게시게야와 繁野話〉(1766)가 대표적 작품이다. 요미혼이란 당시의 그림 위주의 책에 대해 문장 위주의 소설을 뜻하는데, 하치몬지야본이 갖는 전기성(傳奇性)이 한층 강조된 것이다. 우에다 아키나리[上田秋成]의 〈우게쓰 모노가타리 雨月物語〉(1776)는 중국의 괴기담을 일본화하는 데 성공한 일본 괴기소설의 백미이다. 샤레본은 유곽에 드나드는 손님과 창녀와의 대화를 중심으로 엮은 단편 사실소설이다. 산토 교덴[山東京傳]이 등장해 〈쓰겐소마가키 通言總籬〉(1778)·〈게이세이카이시주핫테 傾城買四十八手〉(1790) 등을 썼으나 바쿠후의 금지령에 저촉되어 교덴이 처벌된 후로 샤레본 자체도 변모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근세 초기부터 에도에는 아카혼[赤本]· 구로혼[黑本]·아오혼[靑本] 등 표지의 색에 따라 명칭을 붙인 '구사조시'[草雙紙]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이던 것이 성인용으로 발전해갔다. 그 첫작품이 고이카와 하루마치[戀川春町]의 〈긴킨센세이에이가노유메 金口先生榮花夢〉(1775)이다. 기뵤시[黃表紙]계에서도 교덴이 〈에도우마레우와키노카바야키 江戶生艶氣樺燒〉(1785) 등을 써 제1인자로 활약했다. 그러나 개혁 정치에 따른 제재를 받아 점차 그 내용이 복수담으로 흘러 줄거리가 복잡해짐으로써 합책본(合冊本) 형식인 고칸[合卷]으로 변화해갔다. 류테이 다네히코[柳亭種彦]의 〈니세무라사키이나카겐지 언 紫田舍源氏〉는 고칸의 대표작이나 쇼군가[將軍家]를 풍자했다 하여 미완성인 채 판매 금지되었다. 처벌을 받은 후 산토 교덴은 요미혼에서 활로를 찾고자 했으나 다키자와 바킨[瀧澤馬琴]에는 미치지 못했다. 바킨의 수많은 작품 중 〈진세쓰유미하리즈키 椿說弓張月〉(1806~10)·〈난소사토미핫켄덴 南總里見八犬傳〉(1814~42)은 웅대한 구상과 복잡한 줄거리로 명문을 구사한 대표작이다. 특히 후자는 중국 전기소설 〈수호전 水滸傳〉을 일본화한 것으로 에도 요미혼의 최고봉을 이룬다. 샤레본의 계통을 잇는 것으로 당대의 세태와 인정을 묘사한 곳케이본[滑稽本]과 닌조본[人情本]이 있다. 곳케이본은 초기에 히라가 겐나이[平賀源內] 등이 활약했으며 19세기 초엽의 대표 작가로 짓펜샤 잇쿠[十返舍一九]와 시키테이 산바[式亭三馬]가 있다. 닌조본은 말기의 샤레본에서 파생한 작품군으로, 샤레본이 유곽의 세계만을 대상으로 한 데 대해 에도 조닌의 폭넓은 일상생활을 무대로 하여 연애를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다메나가 슌스이[鳥永春水]는 〈슌쇼쿠우메고요미 春色梅兒譽美〉(1832~33)가 호평을 받은 데 힘입어 많은 속편을 내놓았으나 퇴폐적이고 무기력한 세태를 묘사해 그 전성기도 오래가지 못했다.

5.6 조루리[淨瑠璃]·가부키[歌舞伎]

헤이쿄쿠[平曲]·요쿄쿠[謠曲]에서 원류를 찾을 수 있는 조루리는 음곡에 맞추어 이야기를 음송하는 일종의 극이다. 소박한 형태이기는 하나 중세 후기에 이미 그 원형이 있었으며, 근세 초기에 이르러 비파를 반주악기로 사용하던 것이 샤미센[三味線 : 일본의 3현악기]으로 바뀜에 따라 신시대의 예능다운 특색을 갖추게 되었고, 다시 오랜 전통을 가진 인형극(구구쓰[傀儡])과 제휴함으로써 닌교조루리[人形淨瑠璃]라는 새로운 연극으로 성장해 갔다. 신흥도시 에도에서는 호쾌한 긴피라부시[金平節]가 환영을 받았으며 교토·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게이한[京坂] 지역에서는 세련된 곡이 환영을 받아 이노우에 하리마노조[井上播磨 ], 우지 가가노조[宇治加賀 ] 등이 출현하여 예술적 향상에 힘썼다. 이 가미카타조루리[上方淨瑠璃] 계열에서 다케모토 기다유[竹本義太夫]가 등장하여 다케모토자[竹本座]를 창설함으로써 조루리를 대성시켰다. 다케모토자의 전속작가인 지카마쓰 몬자에몬[近松門左衛門]은 다케모토 기다유의 조루리 대성에 커다란 공헌을 했을 뿐 아니라 조루리 대본을 고도의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의 작품 중에서는 〈고쿠센야캇센 國性爺合戰〉(1715)과, 세와조루리[世話淨瑠璃]의 최초 걸작으로 알려진 〈소네자키신주 曾根崎心中〉(1703)가 유명하다. 그밖에 〈메이도히캬쿠 冥途飛脚〉(1711)·〈신주텐노아미지마 心中天網鳥〉(1720)·〈온나고로시아부라지고쿠 女殺油地獄〉(1721) 등이 있다. 당시 다케모토자에 대해 도요타케자[豊竹座]에 기노 가이온[紀海音]이 있어 이 양자가 대립·경쟁하면서 조루리를 번영시켰다. 가이온은 지카마쓰에 비해 의리를 존중하는 경향이 있으며 〈가마쿠라산다이키 鎌倉三代記〉(1718)·〈신주후타쓰하라오비 心中二つ腹帶〉(1722) 등이 성공작이다. 이들에 이어 다케다 이즈모[竹田出雲]와 지카마쓰 한지[近松半二]가 활약했는데 합작 형식의 작품이 많다. 이즈모는 나미키 센류[竝木千柳] 등과의 합작 〈스가와라덴주테나라이카가미 菅原傳授手習鑑〉(1746)·〈요시쓰네센본자쿠라 義經千本櫻〉(1747)·〈가네데혼추신구라 假名手本忠臣藏〉(1748) 등 규모가 큰 걸작을 많이 남겼다. 한지도 합작으로 〈혼초니주시코 本朝二十四孝〉(1766)·〈이모세야마온나테이킨 姝背山婦女庭訓〉(1771) 등의 명작을 남겼다. 한지 이후 조루리는 급속도로 쇠퇴해 다케모토·도요타케 양자가 잇달아 소멸했다.

한편 가부키의 원류는 이즈모 대사[出雲大社]의 무녀 오쿠니[阿國]가 16세기말 교토에서 시작한 가부키 춤에서 찾을 수 있다. 오쿠니로 시작된 온나가부키[女歌舞伎]가 풍기문제로 1629년 금지되면서 남성이 하는 와카슈가부키[若衆歌舞伎]·야로가부키[野郞歌舞伎]로 변천했고, 차츰 연극으로서 체재를 갖추어 무용 본위의 연기에서 기예 본위의 대사극적(臺詞劇的) 양식으로 이행하여 희곡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17세기 말엽부터 18세기 초엽 교토에 사카타 도주로[坂田藤十郞]가 출현하여 가미카타의 가부키가 활기를 띠게 되었는데 이는 지카마쓰 몬자에몬이 많은 각본을 써서 가부키 발달에 기여한 데 힘입은 바 크다. 이에 대해 에도 가부키를 확립한 것은 초대(初代)인 이치카와 단주로[市川 十郞]이다. 그러나 실제로 가부키가 융성기를 맞이한 것은 조루리가 쇠퇴한 18세기 중·말엽부터이다. 에도에 사쿠라다 지스케[ 田治助], 가미카타에 나미키 쇼조[竝木正三] 등 많은 작가가 출현하여 가부키계에 활기를 불어넣었는데 특히 이어서 등장한 나미키 고헤이[竝木五甁]는 에도의 감각적인 극에 가미카타 가부키의 합리성을 첨가시켰다. 나미키 고헤이의 사실성을 더욱 철저히 하여 당시의 하층 사회의 풍속이나 인물을 여실히 묘사한 작가가 쓰루야 난보쿠[鶴屋南北] 4세이다. 대표작 〈도카이도요쓰야카이단 東海道四谷怪談〉은 괴담극으로서 하나의 완성을 보였다. 이어서 세가와 조코[瀨川如皐], 가와타케 모쿠아미[河竹默阿彌] 등장했다. 조코는 〈요와나사케우키나노요코구시 與話情浮名橫櫛〉(1853) 등을 썼으며 가와타케 모쿠아미는 지카마쓰 이래의 근세 연극을 집대성하는 동시에 다음 시대로의 교량 역할을 했다. 〈아오토조시하나노니시키에 靑砥稿花紅彩繪〉 등 많은 걸작을 남겼다.

6 근대(도쿄 시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 1868]부터 현대에 이르는 시기를 근대라 부른다. 메이지 신정권이 부국강병책·서구화주의를 추진함에 따라 서유럽의 기술과 지식이 소개되어 문명개화 풍조가 팽배하고 사회 각계에 일대 변혁이 일어났다. 이러한 시대상황은 문학에도 파급되어 근대문학이 탄생하기에 이른다. 여기서 말하는 근대문학은 그 담당자가 지식인이며 그 근저에 자유주의·개인주의 사상과 인간성의 긍정·해방에 대한 염원이 깔려 있는 것을 말한다. 서구문학의 영향도 그 특색의 하나이며 소설 장르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문예 저널리즘 성립에 따라 문학의 의의도 증대되었다.

6.1 계몽기의 문학과 근대문학의 여명

메이지 유신에 의한 근대화의 발전이 바로 근대문학 창출의 길로 연결된 것은 아니다. 정치·경제에 중점을 둔 근대화였기 때문에 문학면에서의 근대화는 지지부진했고 시행착오를 거듭했다.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나카무라 마사나오[中村正直], 니지마 조[新島襄], 나카에 조민[中江兆民] 등 지식인들은 서양의 사상·문화를 전하고 계몽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한편 메이지 유신 전후에 일단 쇠퇴했던 게사쿠[劇作 : 통속소설] 문학이 다시 활기를 띠었다. 가나가키 로분[假名垣魯文]의 〈세이요도추히자쿠리게 西洋道中膝栗毛〉·〈아구라나베 安愚樂鍋〉가 주목을 받았고, 나루시마 류호쿠[成島柳北]는 〈류쿄신시 柳橋新誌〉를 써서 문명 개화의 풍조를 풍자했다. 1878년을 전후해서 번역소설과 정치소설 출현의 기운이 일었다. 서양사정의 소개가 주목적이던 번역소설은 자유민권운동이 격화되면서 정치소설 번역으로 옮아갔고 정치소설 창작도 출현했다. 야노 류케이[矢野龍溪]의 〈게이코쿠비단 經國美談〉, 도카이 산시[東海散士]의 〈가진노키구 佳人之奇遇〉, 스에히로 뎃초[末廣鐵腸]의 〈설중매 雪中梅〉 등이 청년층의 열광적 지지를 받았다. 이 번역소설과 정치소설은 근대문학 창출의 전제가 되었다.

6.2 사실주의의 제창

메이지 초기의 계몽사상은 개량주의 사상으로 발전하여 문학에도 그 여파가 미쳤다. 가장 주목되는 것은 쓰보우치 쇼요[坪內逍遙]의 〈소설신수 小說神髓〉(1885~86)에 의한 소설 개량이다. 공리주의 문학관과 유희적 문학관을 배격하고 사실주의 방법을 주장한 쇼요의 제창은 근대문학으로의 성장에 매우 의의있는 일이었다. 그의 이론 실천이 〈도세이쇼세이카타기 當世書生氣質〉(1885~86)이다. 쇼요의 사실주의를 계승하여 보다 높은 문학성을 획득함으로써 근대소설의 여명을 고한 작품은 후타바테이 시메이[二葉亭四迷]의 문학론 〈소설총론 小說總論〉의 구체화인 〈뜬구름 浮雲〉(1887~89)이다. 여기서 그는 독창적인 구어체를 채용하여 언문일치 소설의 효시가 되었다.

6.3 낭만주의 문학의 여러 양상

시메이와 함께 근대문학에 대한 자각을 촉구한 문학가는 모리 오가이[森鷗外]이다. 그의 소설 〈무희 舞姬〉(1890)는 아문체(雅文體)로 쓴 낭만적인 작품이다. 오치아이 나오부미[落合直文]와 협력하여 낸 번역시집 〈오모카게 於母影〉(1889)는 일본 근대시의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시가라미조시 しがらみ草紙〉를 창간하여 비평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쓰보우치 쇼요와 오가이 간의 몰이상논쟁(沒理想論爭)은 문예비평 발전에 기여한 대논쟁이다. 〈뜬구름〉 이후 메이지 20년대(1887~) 소설계를 이끈 것은 오자키 고요[尾崎紅葉]가 이끄는 겐유샤[硯友社](1885 결성)계의 문학과 고다 로한[幸田露伴]이다. 고요는 〈니닌비쿠니이로잔게 二人比丘尼色懺悔〉(1889)로 문단에 등장하여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또 한 〈다정다한 多情多恨〉(1896)·〈금색야차 金色夜叉〉(1897~1902) 같은 작품을 써서 내면적 묘사에 성공했다. 한편 풍부한 고전적 소양을 바탕으로 박력있는 문장을 구사했는데, 〈오층탑 五重塔〉이 대표작이다. 〈소설신수〉의 영향으로 사실주의 경향이 팽배하고 겐유샤의 풍속 사실소설이 문단을 석권한 메이지 20년대 전반 문단 일각에서는 기타무라 도코쿠[北村透谷]를 비롯한 〈분가쿠카이 文學界〉(1893 창간)의 청년들이 등장하여 근대적 자아를 외치며 메이지 낭만주의 운동을 이끌었다. 도코쿠는 〈염세시인과 여성 厭世詩家と女性〉(1892)·〈내부생명론 內部生命論〉 등 뛰어난 직관과 철저한 자유주의에 입각한 평론을 썼다. 고요와 로한에 이어 등장한 히구치 이치요[ 口一葉]는 〈키재기 たけくらベ〉·〈니고리에 にごりえ〉 등 서정적이고 사실적인 작품과 많은 일기를 남겼다.청일전쟁 후 낭만주의와 전후의 사회문제의 영향을 받아 히로쓰 류로[廣津柳浪], 가와카미 비잔[川上眉山], 이즈미 교카[泉鏡花] 등은 관념소설·심각소설을 시도하여 성격·심리 묘사에 사실적인 깊이를 더함으로써 신국면을 개척했다. 도쿠토미 로카[德富蘆花]는 〈불여귀 不如歸〉(1898) 등에서 이상주의적인 정열을 보였고, 〈겐 삼촌 源叔父〉을 써서 낭만주의 작가로 출발한 구니키다 돗포[國木田獨步]는 자연감각을 표출한 단편을 발표하여 뒤이어 대두한 자연주의에의 교량 역할을 했다.

6.4 자연주의 문학의 성립

메이지 30년대(1897~) 중반 고스기 덴가이[小杉天外], 나가이 가후[永井荷風], 다야마 가타이[田山花袋] 등에 의해 초기 자연주의 문학이 출현했다. 이들의 작품에는 프랑스의 자연주의 작가 에밀 졸라의 영향이 강하게 배어 있다. 평론가 하세가와 덴케이[長谷川天溪]가 강력한 운동을 전개한 것은 1906년 이후이다. 시마자키 도손[島崎藤村]은 시에서 산문으로 전환하여 〈파계 破戒〉(1906)를 발표했고, 다야마 가타이도 〈이불 蒲團〉(1908)을 발표하여 일본 자연주의 사소설(私小說)의 방향을 제시했다. 이어 〈생 生〉(1908)·〈시골교사 田舍敎師〉(1909)에서 작가의 주관을 배제하고 사물을 외부에서만 묘사하는 평면묘사의 주장을 구체화했다. 그밖에 마사무네 하쿠초[正宗白鳥], 도쿠다 슈세이[德田秋聲]를 비롯해 작자의 주관을 이입(移入)한 주인공의 시점에서는 일원묘사(一元描寫)를 주장한 이와노 호메이[岩野泡嗚] 등이 활약했다.

6.5 탐미파의 문학

메이지 40년대(1907~)에는 반자연주의 경향으로 탐미주의가 일어났다. 이들은 어두운 현실에서 유리하여 예술적인 미의 세계를 추구하려는 예술지상주의적·향락적인 면을 지향했다. 대표 작가로는 〈아메리카 모노가타리 あめりか物語〉 등의 나가이 가후와 〈문신 刺靑〉(1910) 등의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郞]를 들 수 있다.

6.6 모리 오가이와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자연주의 문학운동이 거세게 일고 있을 때 시류를 초월하여 독자적인 문학을 완성한 작가로 모리 오가이나쓰메 소세키가 있다. 오가이는 〈기러기 雁〉(1911~3)·〈아베일족 阿部一族〉(1915)·〈다카세부네 高瀨舟〉(1916) 등 명작을 발표했다. 그의 주지적 작품과 격조 높은 문체는 기노시타 모쿠타로[木下 太郞], 나가이 가후,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등에 영향을 주었다. 소세키는 해학·풍자소설인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吾輩は猫である〉(1905)·〈도련님 坊っちゃん〉(1906)을 썼고 그의 인생관·예술관인 '비인정'(非人情), '저회취미'(低徊趣味)를 구현한 〈풀베개 草枕〉(1906)를 발표했다. 〈산시로 三四郞〉·〈마음 心〉·〈명암 明暗〉 등에서 현실과 이상의 모순을 추구하고 전통과 근대의 문제를 염두에 두면서 문명비판을 시도했다.

6.7 시라카바파[白樺派]의 문학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이상주의 풍조의 영향으로 인도주의를 표방한 신문예가 〈시라카바 白樺〉(1910 창간)를 중심으로 발생했다. 〈행복자 幸福者〉·〈우정 友情〉의 무샤노코지 사네아쓰[武者小路實篤], 〈어떤 여자 或る女〉의 아리시마 다케오[有島武郞], 〈암야행로 暗夜行路〉의 시가 나오야[志賀直哉], 〈다정불심 多情佛心〉의 사토미 돈[里見煎 ] 등이 주요작가이다. 그밖에 나가요 요시로[長與善郞], 구라타 햐쿠조[倉田百三]가 있다.

6.8 신시초파와 사소설의 완성

1916, 1917년부터 시라카바파에 이어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해서 근대문학의 하나의 정점을 이룬 것은 〈신시초 新思潮〉·〈미타분가쿠 三田文學〉·〈기세키 奇蹟〉 등의 동인지에서 등장한 작가들이다. 〈라쇼몬 羅生門〉·〈지옥변 地獄變〉 등의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와 기쿠치 간[菊池寬], 구메 마사오[久米正雄]가 있고, 야마모토 유조[山本有三], 도요시마 요시오[豊島與志雄]도 〈신시초〉계의 작가이다. 기쿠치와 구메는 통속소설로 전환하여 대중문학 장르의 성립을 촉진했다. 〈미타분가쿠〉에서도 구보타 만타로[久保田萬太郞], 미나카미 다키타로[水上瀧太郞]가 인정을 받았으며 사토 하루오[佐藤春夫]도 지적 권태와 과민한 신경으로 산문시 〈전원의 우울 田園の憂鬱〉 등을 썼다. 또한 히로쓰 가즈오[廣津和郞], 소마 다이조[相馬泰三], 가사이 젠조[葛西善 ] 등 〈기세키〉(1912 창간)의 동인들과 우노 고지[宇野浩二]는 소설의 제재를 신변에서 찾아 실생활의 사건과 심정의 굴절을 그렸고 시가 나오야 이하 시라카바파 작가뿐만 아니라 시마자키 도손, 도쿠다 슈세이 등 자연주의 작가도 신변사를 소재로 개성미를 보였는데 이 작품들은 독자적 소설양식으로 주목되어 사소설·심경소설을 이루었다.

6.9 신감각파와 프롤레타리아 문학

쇼와[昭和 : 1926~ 89] 초기 문단의 특징은 무산계급의 해방을 지향하는 프롤레타리아 문학과, 기성의 문학관념이나 문장표현의 혁명을 지향하는 신감각파·예술파 문학이 대립하면서 활동한 점이다. 프롤레타리아 문학은 수차의 분열을 거듭하다가 일부는 전일본무산자예술동맹(NAP)이 결성되면서(1928) 기관지 〈센키 戰旗〉(1928)를 중심으로 센키파를 형성했고, 다른 일부는 사회민주주의적인 노선을 취하여 〈분게이센센 文藝戰線〉(1924)에 모였다. 센키파 작가로는 〈게공선 蟹工船〉의 고바야시 다키지[小林多喜二], 도쿠나가 스나오[德永直], 나카노 시게하루[中野重治], 미야모토 유리코[宮本百合子] 등이, 분게이센센파에서는 마에다코 히로이치로[前田河廣一郞], 하야마 요시키[葉山嘉樹], 히라바야시 다이코[平林たい子] 등이 활약했다. 신감각파의 대표 작가는 〈기계 機械〉의 요코미쓰 리이치[橫光利一]와 〈이즈의 무희 伊豆の踊子〉의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이다. 이들은 신감각파의 기관지 〈분게이지다이 文藝時代〉가 폐간되자(1927) 다시 신흥예술파(新興藝術派)를 결성했다(1929). 이 계통에는 평론가 고바야시 히데오[小林秀雄], 가와카미 데쓰타로[河上徹太郞]가 있으며, 작가로는 기무라 이소타[嘉林磯多], 이부세 마스지[井伏 二], 호리 다쓰오[堀辰雄], 이토 다다시[伊藤整] 등이 배출되었다.

6.10 문화 통제하의 문학

만주사변(1931)·태평양전쟁(1941)으로 전쟁이 확대되어 정치상황이 악화됨에 따라 언론·사상의 탄압이 강화되고 사상적 불안과 혼란이 깊어갔다.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려고 활발한 문학운동이 일어나 '문예부흥'이라 불렸으나 중일전쟁 이후의 어려운 사회상황과 문화통제로 쇠퇴하고 대신에 국책문학·전쟁문학이 장려됨으로써 문학 불모의 시대가 되었다. 고바야시 히데오 등이 〈분가쿠카이 文學界〉를 창간하여(1933) 자유로운 입장에서 쇼와 문학추진의 기틀을 마련하려 할 즈음 〈니혼로만하 日本浪漫派〉가 대두하여(1935) 적극적으로 국수주의 사상을 내걸고 일본 정신의 재검토, 전통미의 부활을 꾀했다. 일본 프롤레타리아 작가 동맹이 해산된(1934) 후, 이상을 잃고 전쟁 위기에 직면한 작가들은 자학적인 패배문학으로 기울어졌다. 이러한 데카당스에서 다카미 준[高見順], 니와 후미오[丹羽文雄], 다자이 오사무[太宰治]가 출현했다. 또 이 시기에 마르크스주의에서 전향한 작가의 전향문학이 등장했다. 또 기성 근대작가인 시마자키 도손, 시가 나오야, 도쿠다 슈세이, 나가이 가후, 다니자키 준이치로 등이 활약하여 많은 수확을 얻었다. 중일전쟁이 일어나자(1937), 군국주의가 강화되고 국가권력이 노골적으로 문예간섭을 함에 따라 양심적인 작가활동이 어려워지는 한편 국책문학·전쟁문학이 출현하여 태평양전쟁 이후 패전 때까지 문단은 암흑기였다.

6.11 전후의 문학

1945년 일본의 패전으로 전쟁이 끝나자 전쟁중 무언의 저항을 하던 나가이 가후, 시가 나오야 등 대가들이 창작활동을 시작했고 무뢰파(無賴派)라 불리던 사카구치 안고[坂口安吾], 다자이 오사무 등은 기성질서로부터의 탈출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또 전쟁 전 프롤레타리아 계열이던 미야모토 유리코[宮本百合子], 나카노 시게하루[中野重治] 등은 〈신니혼분가쿠 新日本文學〉를 창간하여(1946) 민주주의 문학운동을 추진했다. 패전 후의 활성화된 문단을 대표한 것은 노마 히로시[野間宏], 우메자키 하루오[梅崎春生], 시이나 린조[椎名麟三] 등 제1차 전후파 작가들이다. 혼다 슈고[本多秋五], 히라노 겐[平野謙] 등이 창간한(1946) 〈긴다이분가쿠 近代文學〉는 전후문학의 커다란 추진력이 되었다. 하니야 유타카[埴谷雄高], 오오카 쇼헤이[大岡昇平], 다케다 다이준[武田泰淳], 나카무라 신이치로[中村眞一郞],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 등도 쇼와 20년대 전반부터 활약하기 시작했다. 1950년을 전후해 등장한 아베 고보[安部公房], 홋타 요시에[堀田善衛], 시마오 도시오[島尾敏雄] 등은 제2차 전후파라 불린다. 1951년 일본이 미국 등 48개국과 강화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전후 점령상태에서 벗어나 어느 정도 경제적 안정을 이룩하자 비정치적인 일상생활을 추구하는 작가들이 등장하는데 야스오카 쇼타로[安岡章太郞], 요시유키 준노스케[吉行淳之介], 엔도 슈사쿠[遠藤周作] 등 이른바 제3의 신인들이다. 1955년경부터 1960년경에 걸친 일본의 고도경제성장기에는 공전의 소비 붐이 일고 전후문학도 크게 변질되었다.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가 등장하여 이후 일본문학의 성격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어 순수문학파(純粹文學派)라 불리는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 가이코 다케시[開高健] 등이 활동하여 폐쇄적이던 문단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6.12 근대시

일본의 전통시가와 구별되는 시(詩)는 서양시의 영향을 받아 메이지 시대에 출현했는데 1882년 야타베 료키치[矢田部良吉], 도야마 마사카즈[外山正一], 이노우에 데쓰지로[井上哲次郞] 등이 펴낸 〈신체시초 新體詩抄〉에 의해 구체화되었다. 테니슨 등의 번역시와 수편의 창작시가 실린 시집으로 내용적으로는 졸렬한 작품이 많다. 그러나 복잡한 사상·감정을 일상어를 써서 새로운 시형으로 표현하려는 혁신적 기개는 신체시 창조의 기운을 낳았다. 모리 오가이의 역시집 〈오모카게 於母影〉(1889)는 신체시의 예술적 가능성을 증명한 것으로 주목된다. 메이지 20~30년대에는 낭만적 시풍의 전성시대를 맞았는데 기타무라 도코쿠의 영향을 받은 시마자키 도손의 〈와카나슈 若菜集〉(1897)는 근대시의 첫 성과이며 도이 반스이[土井晩翠], 묘조파[明星派]의 스스키다 규킨[薄田泣菫], 간바라 아리아케[蒲原有明] 등이 각각 개성을 꽃피웠다. 아리아케는 상징시를 개척했고, 우에다 빈[上田敏]의 역시집 〈해조음 海潮音〉(1905)은 상징시 전개에 영향을 주었다. 메이지 40년대에는 자연주의 영향이 시에도 파급되어 형식의 제약에서 벗어나 일상적인 사건이나 인상을 구어로 읊으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자슈몬 邪宗門〉의 기타하라 하쿠슈[北原白秋], 미키 로후[三木露風] 등 탐미파의 상징시가 주류를 이루었다. 다이쇼기[大正期]에 접어들면서 다카무라 고타로[高村光太郞]가 철저하게 평이한 일상어로 쓴 자유시를 시도했고, 하기와라 사쿠타로[萩原朔太郞]는 감수성·상징성·음악성을 갖춘 구어시를 써 그 예술성을 확립했다.다이쇼 말기에는 미래파·다다이즘 등 전위예술운동과 사회주의적 프롤레타리아 시의 운동으로 전통적인 시가 부정되고 새로운 현대시 정신이 출현했으며, 노동자 계급의 해방을 목표로 하는 프롤레타리아 시와 새로운 주지적 시를 추구하려는 〈시토시론 詩と詩論〉(1925~28)파의 시가 대립하면서 성장했다. 그뒤 〈시토시론〉 운동을 둘러싼 예술파의 시인들은 각자의 자질이나 개성에 따라 〈시키 四季〉(1934 창간)파 등 여러 유파로 나뉘어 현대시 활동을 전개했다. 전쟁기간 시는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예술성이 지극히 황폐했으나, 전후 부흥함으로써 전전파 쇼와 시인들이 활발한 창작을 재개했다. 한편, 〈아레치 荒地〉의 시인들이 출현하여 문명비판과 인간성을 추구했다. 그리고 전후 10여 년 무렵부터 다시 새로운 움직임이 일었다.

6.13 단카

메이지 시대에 이르러서도 전통적 미의식에 의한 게이엔파[桂園派]의 흐름이 주류를 이루어 다카사키 마사카제[高崎正風] 등 궁내성 오우타도코로[御歌所]에 소속된 시인이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1893년 오치아이 나오부미가 아사카샤[淺香社]를 창립함에 따라 많은 준재가 배출되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단카 개량운동이 시작되었는데 단카론 〈망국의 소리 亡國の音〉의 요사노 뎃칸[與謝野錢幹]의 활약이 특히 두드러졌다. 메이지 30년대에는 사사키 노부쓰나[佐佐木信綱]가 〈고코로노하나 心の華〉를 창간하여(1898) 와카 혁신을 지향했고, 〈가인에게 주는 글 歌よみに與ふる書〉에서 만요초를 주장한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의 사생파(寫生派)도 일어났다. 1899년 요사노 뎃칸은 신시샤[新詩社]를 결성하고 다음해에 〈묘조 明星〉를 창간하여 메이지 30년대 낭만주의 시가의 중추가 되었다. 이 묘조파에서 많은 시인이 배출되었는데 〈헝클어진 머리 みだれ髮〉를 써서 세인을 놀라게 한 요사노 아키코[與謝野晶子]가 주목된다. 메이지 40년대에 이르러 자연주의 문학의 영향이 시가에도 나타나 와카야마 보쿠스이[若山牧水], 마에다 유구레[前田夕暮], 도키 아이카[土岐哀果],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 등의 단카와 기타하라 하쿠슈, 요시이 이사무[吉井勇] 등의 탐미적 단카가 중심이 되었다. 다이쇼 시대에는 마사오카 시키의 사생정신을 이은 〈아라라기 アララギ〉파가 단카 시단의 주류가 되었다. 사이토 모키치[齊藤茂吉], 시마키 아카히코[島木赤彦] 등 우수한 시인이 많은데 특히 단카집 〈샷코 赤光〉(1913)의 모키치는 문단에 큰 영향을 끼쳤다. 다이쇼 시대말부터 쇼와에 걸쳐 구어가(口語歌), 구어자유율 단카 운동[口語自由律短歌運動]이 활발해졌다. 이 움직임은 프롤레타리아 단카와 예술파의 단카와도 결부되었다. 중일전쟁이 일어나 대부분의 시인이 시류에 영합하는 가운데 도키 젠마로[土岐善 ], 쓰치야 분메이[土屋文明] 등은 반전적(反戰的)인 시풍을 고수했다. 전후 구와바라 다케오[桑原武夫]의 〈제2예술론 第二藝術論〉을 계기로 단카 부정론이 제기되었으나 신인의 활약에 의해 새로운 단카의 세계가 추구되었다.

6.14 하이쿠

메이지 20년대에 마사오카 시키에 의해 사생(寫生)을 주장하는 하이쿠[俳句] 혁신운동이 추진되었다. 이때의 하이쿠 시인들은 신문 〈니혼 日本〉이나 하이쿠 잡지 〈호토토기스 ホトトギス〉를 발표무대로 활약했다. 시키 사후 이 파에서 새로운 경향의 하이쿠를 제창하는 가와히가시 헤키고토[河東碧梧桐]와 그의 제자들이 활약하여 무계자유율(無季自由律) 하이쿠로 발전했다. 한편 전통을 지키는 다카하마 교시[高浜虛子]도 하이쿠에 전념했으며 객관 사생을 중시했다. 쇼와에 이르러 호토토기스파 내부에서 단조로운 사생을 부정하고 근대적 자아나 감각을 중시하는 신흥 하이쿠 운동이 일어났다. 한편에서는 프롤레타리아 하이쿠도 시도되었다. 중일전쟁 개전 후는 전쟁 하이쿠와 인간탐구파 하이쿠의 움직임이 있었고 마침내 공백시대를 맞이했다. 전후에는 하이쿠를 비판하는 〈제2예술론〉이 하이쿠 시단에 충격을 주어 반성의 기운이 일고 새로운 하이쿠가 출현했다.

6.15 근대의 연극

메이지에 이르러서도 에도 이래의 가부키가 애호되었으나 메이지 10년대말부터 일어난 연극 개량의 기운이 높아졌다. 역사적 사실을 존중한 각본과 쓰보우치 쇼요 등에 의한 신사극(新史劇)이 출현하여 가부키계에 새로운 바람이 일었다. 또 자유민권운동의 정치 선전을 위해 출현한 신파극(新派劇)은 그 현대적 내용이 대중의 흥미를 유발하여 한때 성행했으나 곧 힘을 상실했다. 메이지 30년대 후반에는 사회적·정치적 문제에 관심이 깊은 프롤레타리아계의 극단과 예술적 완성을 지향하는 예술파 극단으로 나뉘어 활발한 연극활동이 전개되었고 일본의 현실을 다룬 우수한 희곡을 창작·상연하게 되었다. 전쟁중에는 활동이 어려웠으나 전후에는 많은 극단이 재개·창립되어 다채로운 연극활동이 전개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