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일본)

일본문학(Britannica) - 중고(헤이안시대)

지식창고지기 2010. 2. 11. 09:58

중고( 헤이안 시대)

나라에서 헤이안쿄로 천도한 794년부터 다이라 씨[平氏]가 멸망한 1185년까지 약 400년간이 중고, 이른바 헤이안 시대이다. 이 시대 문학의 담당자는 궁정도시 헤이안쿄를 본거지로 하는 귀족계급이었으므로 이 시대를 궁정문학시대 또는 귀족문학시대라고도 부른다.

 

한시문의 융성

중고시대 전기(8세기 말엽~10세기 중엽)는 대륙문화의 모방시대이다. 도성(都城)의 규모를 비롯해 궁정의례 전반이 당풍(唐風)으로 장식되었으며 남성 관료들이 다투어 한시문을 씀에 따라 한시문 융성시대를 맞기에 이른다. 8세기 초엽에는 왕명에 따라 한시문 3집인 〈료운슈 凌雲集〉(814)·〈분카슈레이슈 文華秀麗集〉(818)·〈게이코쿠슈 經國集〉(827)가 잇달아 출현했으며 이 칙찬(勅撰) 한시문집 이외에 개인 시집인 사가집(私家集)이 다수 나왔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요시미네 야스요[良岑安世], 후지와라 후유쓰구[藤原冬嗣], 오노 미네모리[小野岑守], 구카이[空海] 등을 들 수 있다. 주목할 만한 저서로는 구카이의 시문집 〈쇼료슈 性靈集〉(835)와 시문의 수사법을 논한 〈분쿄히후론 文鏡秘府論〉(819)이 있다. 9세기 후반부터 10세기에는 미야코 요시카[都良香], 스가와라 미치자네[菅原道眞], 기노 하세오[紀長谷雄] 등이 활약했는데, 특히 스가와라 미치자네의 시문집 〈간케분소 菅家文草〉(900)·〈간케코슈 菅家後集〉(903)가 주목할 만하다.

 

와카의 부흥

〈만요슈〉 이후 헤이안 시대 초엽의 약 100여 년 동안 와카는 한시문에 가려져 공적인 세계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었으며 민간 또는 사적인 세계에서 명맥을 유지해오다가 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 가나[假名] 문자의 보급·발전에 힘입어 부활하게 되었고 와카의 궁정사회 복귀는 가나 문자의 보급을 촉진시켰다. 이와 더불어 견당사(遣唐使) 파견이 중지되고 점차 당풍에서 벗어나려는 기운이 일면서 와카를 일본 고유의 시가로 자각하게 되었고, 가나 문자가 국자(國字)로서 널리 통용되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10세기초에 칙명에 의하여 〈고킨와카슈 古今和歌集〉(905)가 편찬되었다. 〈고킨와카슈〉 성립 이전 이른바 와카사[和歌史] 전환기에는 아리와라 나리히라[在原業平], 헨조[遍照], 오노 고마치[小野小町], 훈야 야스히데[文屋康秀], 기센[喜撰], 오토모 구로누시[大伴黑主] 등 6가선(六歌仙)이 활약했다. 6가선시대로부터 〈고킨와카슈〉 성립에 이르는 시기는 우아한 고킨초[古今調] 시풍의 형성기였다. 세련된 기지와 취향을 추구하여 만요 와카와는 다른 헤이안 귀족의 취미나 정서에 맞는 7·5조의 유려한 시풍이 생겨났다. 〈고킨와카슈〉의 시인으로는 편찬자인 기노 쓰라유키[紀貫之], 오시코우치 미쓰네[凡河內躬恒], 미부노 다다미네[壬生忠岑], 기노 도모노리[紀友則]를 비롯해 소세이법사[素性法師], 기요하라 후카야부[淸原深養父], 후지와라 오키카제[藤原興風], 이세[伊勢] 등이 유명하다. 〈고킨와카슈〉에는 약 1,100수의 와카가 춘가(春歌 : 상·하)·하가(夏歌)·추가(秋歌 : 상·하)·동가(冬歌)·하가(賀歌)·이별가(離別歌)·기리요카[羇旅歌]·모노노나[物の名]·연가(戀歌 : 1~5권)·애상가(哀傷歌)·조카[雜歌 : 상·하]·자쓰테이[雜體]·오우타도코로어카[大歌所御歌]의 20권으로 편성되어 있으며 근간을 이루는 것은 사계가(四季歌)와 연가이다. 또한 이 시집에는 가나로 된 서문과 한자 서문이 실려 있는데 기노 쓰라유키가 쓴 가나 서문은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와카론으로 일본 평론문학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후 와카는 약 1세기 동안 활기를 띠었으나 10세기 전후 산문문학이 융성함에 따라 부진한 상태를 보이다가 10세기 말엽 부활하여 잇달아 칙찬집이 출현했으며 대규모 우타아와세[歌合]가 활발히 개최되고 사가집이 다수 출현했다. 우타아와세는 좌우로 편을 갈라 주어진 주제 아래 와카를 지어서 우열을 겨루는 일종의 놀이였는데 심판을 맡은 판자(判者)의 평언(評言)을 통해 시론(詩論)으로 조직화되어갔다. 이처럼 활발한 헤이안 후기의 시단(詩壇)에서 주목되는 인물은 유현(幽玄)의 미(여운의 넘치는 섬세한 미적 경지)를 추구한 후지와라 슌제이[藤原俊成]와 승려 시인 사이교[西行]이다. 〈고킨와카슈〉 성립을 필두로 중세 초기에 〈신코킨와카슈 新古今和歌集〉가 출현하기까지 7개의 칙찬시집이 편찬되었다.

 

모노가타리 문학[物語文學]

9, 10세기는 정치사적으로 괄목할 만한 전환기였다. 후지와라 씨[藤原氏]에 의해 추진된 율령정치가 후지와라 씨의 권세를 강화시켜 사적 섭관정치(攝關政治)의 길이 열리게 되는데, 상층 귀족의 권력투쟁의 그늘에서 중·하층 귀족은 불안하게 부침(浮沈)하는 사태에 놓였다. 이러한 현실적 상황에 대응하여 여러 형태의 산문문학이 발생했다. 모노가타리 문학의 원조라 일컫는 〈다케토리 모노가타리 竹取物語〉(9세기말~10세기 전반)는 고래의 전승을 바탕으로 허구의 세계를 전개한 전기적(傳奇的) 이야기인데, 상층 귀족의 생활을 풍자적으로 묘사하면서 지상의 인간의 무력함과 미의 영원성을 추구하는 작가의 낭만적인 사상을 표현한 작품이다. 같은 시대에 성립된 〈이세 모노가타리 伊勢物語〉(10세기 중엽)는 당시의 귀족이며 시인인 아리와라 나리히라를 주인공으로 하여 그의 와카 제작의 연유에 관한 이야기를 집성한 것이다. 이처럼 귀족의 생활과 결부된 와카를 둘러싼 항간의 구전설화를 흡수·편성한 것을 우타모노가타리[歌物語]라고 한다. 그밖에 많은 모노가타리가 출현했으나 대부분 산실되고 말아, 모노가타리 문학의 최고 걸작인 〈겐지 모노가타리 源氏物語〉 이전에 나온 장편으로는 〈우쓰호 모노가타리 宇津保物語〉·〈오치쿠보 모노가타리 落窪物語〉·〈이세 모노가타리〉의 계통을 잇는 〈헤이추 모노가타리 平中物語〉·〈야마토 모노가타리 大和物語〉가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우쓰호 모노가타리〉(10세기 후반)는 전20권으로 된 최초의 장편으로 전기적 성격과 사실적 성격을 교차시키면서 귀족사회 여러 계층의 전형적인 인간상을 생생하게 묘사해냈다. 〈오치쿠보 모노가타리〉는 명석한 주제와 면밀한 구상으로 당시의 세태를 상세히 묘사한 현실적인 모노가타리이다. 이 모노가타리를 집대성한 것이 〈겐지 모노가타리〉이다. 〈다케토리 모노가타리〉에서 〈우쓰호 모노가타리〉로 발전한 신비적인 낭만성, 〈우쓰호 모노가타리〉나 〈오치쿠보 모노가타리〉의 현실적인 사실성, 그리고 〈다케토리 모노가타리〉와 〈오치쿠보 모노가타리〉의 희곡적 성질 등이 모두 〈겐지 모노가타리〉에 포괄되어 있다. 특히 〈이세 모노가타리〉 전편에 흐르는 와카를 중심으로 한 서정성은 〈겐지 모노가타리〉의 기조(基調)를 이루고 있다. 근세의 고전 연구가인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는 〈겐지 모노가타리〉의 본질을 '모노노아와레'(もののあわれ)라고 보는 견해를 피력했다. 모노노아와레란 객체적 대상과 주체적 감정의 융합에서 일어나는 감동으로,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과 공명(共鳴)을 나타낸다. 이는 중세 이래 종교적·도덕적 견해에서 〈겐지 모노가타리〉를 해방시킨, 인간 본연의 감정을 근저에 둔 획기적인 문예론이었다. 〈겐지 모노가타리〉는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라 불리는 여성에 의해 11세기 초엽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전 54첩(帖)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내용상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는 주인공 겐지[源氏]의 출생에서부터 그의 화려한 청·장년기를 그린 41첩까지이며, 제2부는 다음 42~44첩으로 초월자인 겐지가 불안과 고뇌 속에서 생을 마감하는 내용이다. 제3부인 마지막 10첩은 겐지의 자손들의 이야기이다. 〈겐지 모노가타리〉를 정점으로 모노가타리는 다시 비현실적·전기적 경향으로 흐르게 되었다. 헤이안 말기의 수작으로는 〈요와노네자메 夜半の寢覺〉와 단편소설집 〈쓰쓰미추나곤 모노가타리 提中納言物語〉가 있다.

한편 섭관정치가 급속도로 쇠퇴하면서 모노가타리를 창작·감상하던 궁정의 문화적 기반 역시 위축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허구적 모노가타리는 쇠퇴한 대신에 헤이안 말기의 회고적 풍조는 과거의 사실에서 소재를 찾아 구상을 새롭게 한 문학을 발생시켰는데, 그것이 바로 〈에이가 모노가타리 榮花物語〉·〈오카가미 大鏡〉·〈이마카가미 今鏡〉 등의 레키시 모노가타리[歷史物語]이다. 특히 〈오카가미〉는 강한 비판정신을 나타낸 수작이다.

 

일기문학(日記文學)

전기적인 〈다케토리 모노가타리〉에서 시작된 모노가타리 문학이 현실성을 지닌 산문표현으로 성숙해가는 동안에 한편에서 기노 쓰라유키의 〈도사 일기 土佐日記〉(935)로 시작되는 일기문학이 형성되어갔다. 본래 일기란 공적 기록에 속하며 한문으로 기록하는 것이었는데 점차 개인의 내면을 표출하는 문학형식으로 바뀌었다. 〈도사 일기〉는 도사 지방 장관의 임기를 마치고 귀경하는 뱃길에서 작가 기노 쓰라유키가 임지에서 잃은 여아에 대한 슬픔, 그 고장의 인심, 바다에서 겪은 고난·공포 등을 해학적으로 기록한 것이다. 이 일기에서 작가는 자신을 무명의 여성으로 위장함으로써 귀족 관료의 입장에서 벗어나 자유인으로서 사적인 감회를 자유로이 토로했다. 이로써 가나문 일기는 비로소 인간생활의 내면을 기록하는 문학형식으로서 자격을 갖게 되었으며, 〈도사 일기〉의 출현은 이후의 여류 일기문학의 개화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여성이 자신의 눈으로 사물을 보고 자신의 마음으로 진실을 파악하려는 움직임이 10세기 중엽부터 표면화되는데, 이러한 움직임이 최초로 결실을 맺은 것은 당시의 상류 귀족 후지와라 가네이에[藤原兼家]의 아내(미치쓰나[道綱]의 어머니)가 쓴 〈가게로 일기 蜻蛉日記〉(974경)이다. 일부다처의 관습이 일반적이었던 당시, 불안과 고뇌 속에서 아내와 어머니로서 보낸 20여 년 간을 기록한 인생 고백이다. 〈도사 일기〉가 기행적 일기인 데 대해 〈가게로 일기〉는 자전적 일기이다. 이후 일기문학은 이 2가지 계통으로 발전했다. 특히 〈가게로 일기〉는 사건이나 줄거리 본위의 모노가타리와 대응하여 개인의 내면이나 심리구조를 추구하는 산문문학의 길을 열었다. 그밖에 사랑의 고뇌와 전말을 그린 〈이즈미시키부 일기 和泉式部日記〉(1004), 〈겐지 모노가타리〉의 작가 무라사키 시키부가 궁정생활에 관한 견문·감상을 서술한 〈무라사키 시키부 일기 紫式部日記〉(1008), 소녀시절의 꿈이 깨어지고 회한에 찬 생애를 회상한 〈사라시나 일기 更級日記〉(1060) 등 많은 여류 일기문학이 출현했다.

 

수필·설화 문학

10~11세기에 섭관정치 전성기에 성립한 〈마쿠라 노 소시 枕草子〉(1000경)는 〈겐지 모노가타리〉와 더불어 헤이안 시대 문학의 쌍벽을 이루는 수필문학이다. 작가 세이 쇼나곤[淸少納言]의 예리한 관찰력과 정확한 판단력, 사물을 선명하게 표현하는 묘사력과 자유분방하고 유려한 문장에 의해 〈마쿠라노소시〉는 독자적인 높은 위치를 차지했으며 수필문학이라는 새로운 문학양식을 이루어냈다. 〈겐지 모노가타리〉의 미의 세계를 '아와레'(あわれ)라고 한다면 당시 귀족사회가 본질적으로 안고 있던 인간의 고뇌를 사상(捨象)함으로써 확보할 수 있었던 〈마쿠라노소시〉의 밝은 미의 세계는 '오카시'(をかし)라고 규정할 수 있다.

레키시 모노가타리를 출현시킨 헤이안 말기의 회고적 풍조는 또한 산재해 있던 설화·전설·구비(口碑) 등을 채록하려는 움직임으로 이어져 12세기 전반에 마침내 설화집 〈곤자쿠 모노가타리슈 今昔物語集〉(전31권)가 편찬되었다 (→ 색인 : 민담). 이는 헤이안 시대 초기의 〈니혼료이키 日本靈異記〉(810~24)의 계통을 잇는 것으로 작가는 아마도 한자에 정통하고 불교에 지식이 풍부한 귀족이거나 승려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인도·중국·일본 3국의 설화가 1,000여 편 수록된 〈곤자쿠 모노가타리슈〉에는 불교설화가 700편에 이르나 단순히 교리를 위해 편집된 것이 아니라 귀족사회 바깥에 있는 서민의 생활에 입각해 신앙문제를 추구하려는 자세가 엿보이며, 민간설화에는 강한 감동을 가지고 다양한 인생의 단면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