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등소평의 집안 내력

지식창고지기 2010. 2. 27. 11:55

본적이 사천성 광안현(廣安縣)인 등소평은 집안도 아주 훌륭한 편이었다. 조상들 중에 진사(進士)에 합격한 인물도 있고, 등소평 만한 관직을 가진 사람은 없지만 대리사정경(大理寺正卿: 지금의 사법부 부장)을 역임한 사람도 있다.

1989년 사천성 광안현 협흥향(協興鄕) 패방촌(牌坊村, 즉 등소평의 고향)에 있는 등소평의 사촌 집에서 ≪등씨가보(鄧氏家譜)≫라는 족보가 발견되었다. (이 족보에는 적장자 직계 혈통만 있기 때문에 방계인 등소평 집안의 직접적인 족보는 아님)

≪등씨가보≫와 ≪광안주신지(廣安州新誌)≫의 기록에 의하면 등소평의 집안은 명대 초기부터 시작된다. 그의 조상은 명대 초기의 병부원외랑(兵部員外郞: 원외랑은 侍郞의 차관으로 9품 18제 중 종5품임) 등학헌(鄧鶴軒)이고 원적은 강서성 길안부(吉安府) 여릉현(廬陵縣)이다.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이 명나라를 건국하였을 때 사천 등 서남지역은 여전히 평정되지 않고 있었다. 등학헌은 홍무(洪武) 13년(1380)에 황명을 받들고 사천지역에 들어갔다. 전란이 평정된 후에 사천지역의 인구는 줄어들고 토지는 피폐하여 주원장은 많은 사람들을 사천지역으로 이주시켰다. 이에 등학헌도 가족들을 데리고 사천으로 이주하여 광안 요평리(姚平裏: 지금의 광안현 패방촌)에 정착하였다.

등소평의 딸 등용이 지은 ≪나의 아버지 등소평(我的父親鄧小平)≫에서는 상술한 ≪등씨가보≫와 ≪광안주신지≫를 고증한 결과 명대에 등씨 집안 조상 중 8대조 등사렴(鄧士廉)과 그의 형제 등사창(鄧士昌)이 진사 출신이라 밝히고 있다. 등사렴은 명말 숭정(崇禎) 연간에 진사에 합격하여 광동해양령(廣東海陽令)과 이부시랑(吏部侍郞)을 역임하였으며, 명말에 청나라 군대가 중원을 점령하여 명의 잔존 세력이 서남으로 갔을 때는 주계왕(周桂王)을 따라 운남으로 갔다. 18년 후 그는 다른 41명의 대신들과 함께 순국하였다.

등사창은 명대 만력(萬曆) 연간에 진사에 급제하여 남경호부주사(南京戶部主事)를 역임하였으며, 나중에는 절강 처주부(處州府) 지부로 승진되었다. 그 후 다시 호광안찰사부사(湖廣按察司副使)로 발탁되었다가 탄핵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갔다.

청대에 이르러 등씨 집안은 극도로 기울었다. 건륭(乾隆) 원년에 진사에 급제한 등시민(鄧時敏) 외에 관계에 진출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등시민은 진사에 급제한 후에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가 편찬을 맡았다. 그 후 시강학사(侍講學士), 통정사부사(通政司副使)를 거쳐 건륭 10년에는 대리사정경에 올랐다가 만년에 고향으로 돌아가 66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아마도 명청 시기를 통털어 등씨 집안에서 관직이 가장 높았던 사람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이후로 등씨 집안은 점점 위세를 떨치지 못하고 더욱 기울어갔다.

등소평의 아버지 등소창(鄧紹昌)은 두 명의 소작농을 거느린 소지주였다. 등소창은 일찍이 사천의 비밀단체 '가로회(哥老會)'의 단장으로 지방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항상 마을 사람들의 어려움과 근심을 해결해 주곤 하였다. 당시에 사천지역에서 일어난 많은 반청(反淸) 의거는 그곳의 최대 세력이었던 '가로회'가 주동하였으므로, 등소창도 단장의 한사람으로 그 의거에 가담하였을 것이다.

등용의 기록에 의하면, 등소창은 1914년 광안현 단련국장(團練局長)을 역임하였다가 사직한 후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향장(鄕長)을 역임하였다고 한다.

등소창은 등씨 집안의 3대 독자였기 때문에 4명의 아내와 결혼하여 9남매를 두었으나 4남 3녀만 살아 남았다. 등소창은 13세 때 첫째 부인 장씨(張氏)와 결혼하였으나 장씨가 병사하여 후손을 보지 못하였다. 15세 때 다시 둘째 부인 담씨(淡氏)와 결혼하였으니, 이 담씨가 바로 등소평의 생모이다. 담씨는 모두 3남 2녀를 낳았는데, 첫째가 장녀 선렬(先烈), 둘째가 장남 선성(先聖, 즉 등소평), 셋째가 차녀 선진(先珍, 10여세 때 병사함), 넷째가 차남 선수(先修, 즉 등간<鄧墾>), 다섯째가 삼남 선치(先治, 즉 등촉평<鄧蜀平>)이다.

1926년 등소평이 프랑스로 간 뒤 아무런 소식이 없자 담씨는 자식 생각에 세월을 보내다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등소창의 셋째 부인 소씨(蕭氏)는 등씨 집안의 여섯째 사남 등선청(鄧先淸)을 낳은 뒤에 병사하였다. 그 후 등소창은 다시 넷째 부인 하백근(夏伯根)과 결혼하여 3명의 딸을 낳았는데, 일곱째가 삼녀 선부(先芙), 여덟째가 사녀 선용(先蓉, 10여세 때 병사함), 아홉째가 오녀 선군(先群)이다.

하백근은 49년부터 줄곧 등소평과 함께 생활하였으니, 그녀가 바로 등소창 자녀의 실질적인 어머니나 다름 없었다. 등소평의 형제자매들은 대부분 각급 정부나 군대에서 요직을 맡았다.

등간은 1937년에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기자를 역임하였고, 49년 이후에는 중경시(重慶市) 부시장, 무한시(武漢市) 부시장, 호북성 부성장을 역임하였다.

둘째 여동생 선부는 국가기관의 기밀사업에 종사하다 퇴직한 후에는 사천성 정협위원을 역임하였다. 그녀의 남편 장중인(張仲仁)은 사천 당안국장(案局長)을 역임하였다. 등용의 말에 의하면 그는 충직하면서도 근면성실하여 장모 하백근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 한다.

막내 여동생 선군은 하얼빈 군사공정학원을 졸업한 후에 줄곧 군대에서 근무하면서 해방군 총정치부 공작부 부장을 역임하였다. 그녀는 몇 안되는 여자 소장 중의 한 사람으로 남편 율전명(慄前明)과는 하얼빈 군사공정학원 동기생이다. 율전명은 해방군 제2포병부대의 부사령관을 역임한 소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