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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전 세계 건축물의 대부분은 아주 최근에 만들어진 것이다. 특히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첨단기술을 이용한 대규모 건축물들이 급속히 등장했다. 벽돌과 목재를 이용하는 전통적 방법은 손으로 일일이 작업해야 했기 때문에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러므로 공장에서 미리 만든 부품과 타워 크레인이 새로운 건축의 필수적인 도구가 되었다.
각국의 정치인들은 르코르뷔지에의 건축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신속하게 대량으로 건물을 공급해야 하는 정치적 필요를 해결하려고 했다. 기업가들도 대량 생산으로 만들어진 건축자재를 소비할 르코르뷔지에의 건축을 환영했다. 전 세계적으로 동일한 건축 양식을 전파하는 모더니즘 건축은 유일신을 숭배하는 선교사의 역할과 비슷했다. 지역의 문화ㆍ전통ㆍ관습은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으로 여겨졌다. 르코르뷔지에는 “전 세계에 단 한 가지 종류의 건물”만이 존재하게 될 거라고 선언했다.
모더니즘 건축은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중세의 성당, 절대왕정기의 화려한 궁전처럼 모더니즘 건축도 지배계급의 권력을 상징하는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만들어냈다. 미국과 유럽에는 대기업의 건물과 거대한 관료기구의 건물이 세워졌다. 학교, 병원, 대학교, 교통시설도 역시 모더니즘 건축 양식을 따랐으며 오락, 쇼핑, 휴식을 위한 건물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과연 모더니즘 건축은 성공했는가?
시간이 지날수록 모더니즘 건축은 실패라는 비판에 직면했다. 모더니즘 건축은 저렴한 재료와 부품으로 짧은 기간에 공사를 끝내 가장 싼값에 건축을 완성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30년이 지나자 수리나 개조, 또는 철거를 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종종 엄청난 대재앙을 일으키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1960년대 일어난 와우아파트 붕괴사건이나, 1990년대의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사건은 그 극명한 예이다. 새로운 기술과 재료를 충분히 검증하지 않은 채 사용했다가 심각한 후유증을 앓고 있기도 하다. 단열재, 아크릴, 시멘트, 방부제, 접착제는 인간의 건강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주고 있다.
모더니즘 건축은 에너지 소비가 심각하고 환경에 친화적이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철근 콘크리트로 만든 건물은 나무와 벽돌로 만든 과거의 건물보다 인공적 환풍, 냉방시설, 중앙난방 등에 엄청난 에너지를 필요로 했다. 거대한 유리를 단 건물은 여름에는 너무 덥고, 겨울에는 너무 추워 적당한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막대한 에너지를 사용해야 했다. 고층 건물 하단에 위치한 낮은 층은 옆 건물로 인해 그늘이 져서 적당한 햇빛을 받을 수 없었다. 또한 고층 건물 사이로 부는 바람은 보행자를 춥게 만든다.
모더니즘 건축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는 ‘기계의 미학’에 밀려 전통 건축양식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기능적 건축은 전통적 상징과 건축의 이미지를 파괴했다. 전통적인 공동체 대신 거대한 아파트먼트가 들어서고, 사람들은 옆에 누가 사는지조차 모른 채 살아간다. 집은 자연과 문명을 상실한 채 인간을 가두는 공간으로 전락했다. 현대인은 상부상조와 협력의 문화를 잃어버리고 소외와 고독의 상태에 빠져있다.
모더니즘 건축은 평등주의적 유토피아를 꿈꾸었지만, 아파트 평수와 가격에 따라 새로운 위계질서가 만들어졌다. 고급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과 임대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 이것은 모더니즘 ‘건축의 실패’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실패’라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모더니즘 건축이 인간의 문명에 평등주의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 실패한 것은 분명하다. 모더니즘 건축가들은 단순한 ‘장인(craftsman)’이 아니라 새로운 건축 양식으로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사회 엔지니어(social engineer)’가 되고 싶어했지만, 그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의 등장
모더니즘 건축이 주창한 경제주의와 기능주의는 빛바랜 과거가 되었다. 모더니즘 건축은 더 이상 경제적이거나 기능적이지 않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저렴한 가격으로 대중을 위한 주택과 사무실을 제공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은 자본주의에서도 사회주의에서도 의심 없이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1972년 7월 세인트루이스의 푸루이트 이고(Pruit Igoe)라는 집합주택단지가 철거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건물은 1958년 미국건축가협회상을 받은 대표적인 모더니즘 건축물이었는데, 사람이 살지 않아 슬럼으로 변해버린 것이다.《포스트모던 건축의 언어》(1977)를 쓴 영국의 건축이론가 찰스 젱크스는 이 철거사건이 모더니즘의 사망과 포스트모더니즘의 탄생을 알리는 순간이라고 선언했다.
1960년대부터 모더니즘 건축은 이미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었다. 마치 포드주의의 대량 생산방식이 약화되고 다품종 소량 생산방식이 확대된 것처럼, 건축 양식에서 모더니즘이 차지하던 지위는 점차 약화되었다. 모더니즘 건축을 공격하는 대표적인 건축가는 미국의 로버트 벤투리이다. 그 후 팝 건축(pop architecture), 포스트모던, 네오 네오 클래시컬, 하이 테크(Hihg Tech)같은 다양한 이름 아래 새로운 스타일의 건축 실험이 이루어졌다.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은 현대적 기술을 이용하면서도 전통적인 기호와 상징을 변형된 형태로 사용한다. 찰스 젱크스는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의 원리를 의미의 다중성, 복합 코드, 애매함과 긴장, 그리고 양자택일이 아닌 양자혼합의 추구라고 정의했다. 최근에는 대안사회를 추구하면서 쓰레기를 재활용하고, 태양열과 풍력을 사용하는 에코 하우스(Eco House)가 관심을 끌고 있다. 하지만 이 새로운 실험들은 아직 모더니즘 건축을 완전히 대체할 정도에는 이르지 못했다.
한국은 르코르뷔지에의 꿈이 이루어진 곳?
모더니즘 건축의 특색은 전 세계적인 차원으로 보급되었다는 점이다. 석유수출로 막대한 부를 얻은 중동의 거부나 왕족들은 모더니즘 건축을 도입해 자신들의 ‘현대화’를 표현하고 부와 권력을 과시했다. 아랍에미리트의 두바이가 대표적인 예다. 그 밖에 르코르뷔지에가 직접 설계한 인도의 찬디가르 도시계획(1950), 르코르뷔지에의 영향을 받은 브라질 건축가 오스카 니마이어의 브라질리아 도시계획(1956), 국제공모전에서 1등으로 당선된 덴마크의 건축가 이외른 우촌이 설계한 시드니의 오페라하우스(1956) 등을 들 수 있다.
모더니즘 건축은 지역적 특징과 결합하여 독특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탄게 겐조 같은 일본 건축가는 전통적인 목조 건축을 응용해 일본적인 모더니즘 건축을 만들었다. 1964년 도쿄 올림픽이 개최되었던 요요기 국제경기장이 그의 작품이다. 안도 다다오는 자연 건축물, 그리고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이 합일을 이루게끔 공간을 연출한 ‘물의 교회’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르코르뷔지에의 한국인 제자로 김중업(1922~1989)이 있다. 평양 출신의 김중업은 1942년 요코하마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한국에서 활동했다. 1952년 한국 건축가로서는 최초로 파리 르코르뷔지에 건축사무소에서 4년간 공부한 뒤 귀국했다. 귀국하던 해에 ‘김중업 합동건축연구소’를 창설하고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 재직하면서 한국의 모더니즘 건축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의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1969년 완공한 삼일빌딩, 서강대학교 본관, 주한프랑스 대사관이 손꼽힌다. 올림픽 공원 남문에 있는 ‘세계 평화의 문’도 그의 작품이다.
1964년 ‘자유센터’를 필두로 1971년 ‘공간사랑’을 건립한 김수근(1931~1986)도 비슷한 시기에 활동하며 한국의 모더니즘 건축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함경도청진 출신인 김수근은 1951년 도쿄예대 유학 시절 스승이었던 요시무라 준조의 영향을 받았고, 그 때문에 일본 건축을 모방했다는 지적을 받아 한때 논란이 일기도 했다. 요시무라는 콘크리트 건축을 이용한 국제 스타일을 받아들이면서도 지역적인 특색을 강조한 건축가였다. 김수근은 비록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한국적 전통을 고민했다.
그는 1966년 종합예술지《공간》을 창간했고, 1972년 (주)공간그룹을 창립했다. 대표 작품으로 검은 창덕궁 기와 지붕과 벗해 있는 원서동의 ‘공간’ 사옥이 유명하다. 처음으로 노출 콘크리트 개념을 소개한 워커힐 힐탑바, 왜색 시비를 불러일으킨 부여박물관, 최초로 보행자 데크를 시도한 세운상가, 타워빌딩, 남산맨션을 설계했다. 붉은 벽돌이 아름다운 덕성여대 약관과 가정관, 마로니에 공원을 바라보는 아르코 예술극장과 미술관도 빼놓을 수 없다. 잠실 종합운동장의 올림픽 주경기장을 설계하기도 했다. 이렇듯 한국 건축에서 김수근은 그 영향력이 매우 크다.
1960년대 이후 모더니즘 건축이 한국에 도입된 이후로 건물은 대형화, 고층화되면서 정부종합청사(21층), 대연각호텔(20층), 삼일빌딩(31층) 등이 세워졌다. 1970년대에는 서울 중심부에 플라자호텔, 롯데호텔이 들어서고 남산에 하얏트호텔이 세워졌다. 1980년대에는 여의도에 대한생명 63빌딩과 강남에 무역센터가 세워졌다. 서울은 점차 마천루의 도시로 변해갔다. 사무실 빌딩이 모더니즘 건축 양식으로 변화하면서 주택 건물도 거대한 아파트 블록으로 변화했다.
1963년 주택공사가 마포아파트를 건립한 이후 서울의 아파트 건물은 꾸준히 증가했다. 주택건설촉진법에 따르면 5층 이상 주거건물은 아파트로 분류된다. 이 기준에 따르면, 서울은 ‘아파트 천국’이다. 아파트 지붕이 하늘과 맞닿아 있는 서울의 강남을 바라보면 바로 이곳이야말로 르코르뷔지에의 꿈이 이루어진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직도 유럽과 미국에서 아파트는 노동자, 외국 이민자 같은 저소득층의 임시거주지이다. 재부분의 중산층들은 교외에 위치한 정원 딸린 주택을 선호한다. 이는 서구의 중산층이 경치가 아름다운 농촌에서 빌라나 맨션을 가지고 있는 상류층을 동경하는 문화와 관련되어 있다. 도심에 노동자와 이민자의 슬럼이 형성되어 범죄가 증가하고, 도심 주택에 대한 세금이 인상된 것도 한 원인이었다. 그래서 영국과 미국의 중산층은 통근시간이 한 시간 이상 걸리더라도 도시교외에 살기를 원한다. 교외의 질서정연하고 청결한 주거단지는 중산층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아파트가 중산층의 주거양식이 되었다. 그렇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먼저 급속한 도시화로 단기간에 지가가 상승해 정원 있는 단독주택의 가격이 너무 비싸진 것이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도쿄, 베이징, 상하이, 홍콩, 방콕, 콸라룸푸르 등의 도시에 세워진 거대한 아파트도 그런 이유로 세워졌다. 다음으로 정원을 잘 가꾼 집을 갖고 싶어하는 서양의 중산층과는 달리 한국의 중산층은 아파트 거주의 편리함을 선호한다. 여기에는 문화적요인도 있을 것이다. 자연 가까이 살던 전통적인 양반 상류층 문화의 뿌리가 뽑히면서 정원 이는 주택은 더 이상 매력과 동경의 대상이 되지 못한 것이다.
한국에서 아파트는 현재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는 추세이다. 오늘날 전 국토에서 아파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비율은 50퍼센트에 달한다. 전국의 도로를 달리다 보면 논과 밭 사이에 우뚝 솟아 있는 아파트를 쉽게 볼 수 있다. 경제주의와 기능주의를 강조하는 모더니즘 건축이 한국의 들판에서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주위 환경과 어울리지 않는 아파트는 어색하다 못해 파괴적이기조차 하다. 한국적 아름다움을 간직한 모더니즘 건축이 그립다.
김윤태 「교양인을 위한 세계사」, 책과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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