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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의 패션은 구두와 향수로 확장되었다. 구두 코 부분과 몸체 부분의 색깔을 달리한 투 톤 구두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은 샤넬은 전도유망한 향수 산업에 뛰어들었다.
샤넬의 향수는 ‘샤넬 No.5’가 유명하다. 이를 만든 사람은 러시아 출신 조향사인 에르네스트 보였다. 인공향료에 화학성분을 합성해 오랫동안 향기가 지속되는 향수를 만들어 유럽에서 명성을 얻었다. 당시에 러시아 귀족들이 사용하던 향수는 최고의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를 샤넬에게 소개한 사람은 샤넬보다 열한 살 연하의 연인이었던 러시아 망명 귀족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대공이었다. 러시아 볼셰비키혁명 이후 탈출한 파블로비치 대공은 로마노프 왕조의 직계 후손이었으며,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시기에 차르를 좌지우지했던 신비의 인물 라스푸틴의 암살을 주도한 사람이었다. 인생의 우여곡절답게 우울한 성격을 가진 파블로비치 대공에게 샤넬은 따뜻한 사랑을 베풀었는데, 파블로비치는 그들의 사랑이 끝나갈 무렵 에르네스트 보를 소개했던 것이다. 연인이 준 마지막 선물이라 할까.
드디어 1921년 5월 5일, 인공 향수 ‘샤넬 No.5’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향수는 80개가 넘는 꽃 향기에 화학물질을 넣어 만든 것이다.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에르네스트 보가 1~5, 20~24의 번호가 적힌 향수 열 개를 내놓았을 때 샤넬은 그중 5를 선택했고, 때문에 샤넬 No.5가 되었다. 5는 샤넬이 평소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믿어온 숫자. 5월 5일 세상에 알려진 것도 그래서였다.
샤넬의 향수는 처음에는 부티크의 고급손님에게 공짜로 주었다. 1924년 샤넬은 향수 회사를 만들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현대적인 향수를 본격적으로 판매하기 시작했다. 샤넬의 고급스런 이미지와는 달리 ‘No.5’는 귀족들을 위한 고급 향수가 아니라 알데히드라는 화학 성분으로 만든 서민용 향수였다. 2차 세계대전 때 유럽에 주둔했던 가난한 미군들은 이 서민용 향수를 미국에 전했고 배우 마릴린 먼로가 “나는 샤넬 ‘No.5’를 입고 잔다”는 말을 남길 정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향수가 되었다. 먼로의 이 말은 옷을 입지 않고 잔다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했다. 사실 영어에서 향수를 ‘뿌리다’라고 할 때 ‘입다(wear)’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샤넬은 어떻게 세상을 바꾸었나
샤넬의 일생은 변화를 상징하는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그녀는 디자인뿐만 아니라 행동도 상당히 진보적이었다. 담배를 피우거나 수영복을 입은 모습은 당시 여성으로서는 파격적인 것이다. 디자이너로서의 활동 자체도 동시대 여성들에겐 충격이었다. 남자들을 뛰어넘는 커다란 성공을 거두면서 사업가로서 입지를 굳힌 샤넬 자체가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극적인 요소였다.
샤넬은 일요일을 싫어할 정도로 일에 중독 된 사람이었다. 자신이 하는 일에 엄청난 열정을 쏟아부었다. 그 결과 샤넬은 엄청난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었다. 1954년부터 1971년까지 파리 패션계의 여왕처럼 군림했다. 샤넬은 오로지 자신의 성공을 위해 일했다. 성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했다. 그녀는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다. “나는 못된 여자다. 툭하면 화를 내고, 속이고, 거짓말하고 엿듣는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남의 것을 빼앗는 것이다.” 거짓말도 서슴없이 하며 자신의 과거를 화려하게 포장하는 허영심과 세련된 문학적 화술도 빠뜨릴 수 없는 샤넬의 개성이었다.
하지만 샤넬의 일생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다. 샤넬은 유부남인 영국인 사업가 보이 카펠과 사랑에 빠졌지만 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커다란 마음의 상처를 받았고,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공작과는 낙태 수술의 후유증으로 아기를 낳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별로 끝났다. 그 후 에도 여러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졌지만 모두 상처만 남고 끝이 났다. 샤넬은 언젠가 “단 한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화려했지만 평생 고독했던 샤넬의 죽음은 쓸쓸했다. 1971년 1월, 그녀는 파리 리츠호텔 객실에서 혼자서 숨을 거두었다.
르츠호텔은 지금도 각국의 부호들이 묵는 초특급 호텔이다. 샤넬은 리츠호텔에서 30여 년을 살았다. 지금도 샤넬이 사용하던 스위트룸에는 그녀가 직접 고른 세계 각국의 가구와 장식품들이 가득 차 있다. 중국 가구, 아프리카 장식품 등이 놓여 있고 샤넬의 사진들도 걸려 있다. 오로지 일에만 몰두했던 샤넬은 이곳에서 잠을 자고 몇 걸음 떨어진 방돔의 의상실에 가서 밤 늦도록 일했다. 그녀는 리츠호텔에서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에도 하녀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의 귀염둥이, 이제 죽음이군.” 어쩌면 그녀의 인생은 여성이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던 시대에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집념을 가진 한 여성이 걸어야 했던 험난한 역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샤넬은 항상 고정관념에 맞서 싸웠다. 여성은 남성을 위해 꾸미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아름다워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샤넬은 과감하게 여성복에 남성적 요소를 끌어들였다. 그와 반대로 20세기 후반의 남성복 디자이너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남성복에 여성적 요소를 끌어들였다. 아르마니 옷에서 보이는 남성과 여성의 구분을 뛰어넘는 시도는 이미 오래 전에 샤넬이 먼저 이룩한 것이다. 결국 아르마니는 거울에 비친 샤넬인 셈이다.
오늘의 패션은 누가 주도하는가
1946년 7월5일 파리의 한 수영복 패션쇼에서 핵폭탄이 터졌다. 프랑스 디자이너 루이 레아가 투피스 수영복을 내놓아 관객들을 경악시킨 것이다. 침실에서 입는 속옷이 해변에 나타난 듯한 파격이었다. 당시 여성의 수영복은 모두 원피스나 반바지 스타일이었다. 핵폭탄급 충격을 준 이 수영복은 6월 30일 프랑스가 핵폭탄을 실험한 남태평양의 비키니 섬에서 이름을 따 ‘비키니’라 불리게 되었다.
수영복 패션쇼는 시작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모델을 구하지 못해 결국 스트립 댄서 출신인 미셸린 베르나르디니를 데려와야 했다. 바티칸의 교황은 ‘부도덕한 패션’이라 비난 했으며, 가톨릭 국가인 이탈리아와 에스파냐는 비키니 착용을 금지했다. 그러나 1947년 할리우드에서 마릴린 먼로가 비키니를 입고, 1956년 프랑스 배우 브리짓 바르도가 영화 <그리고 신은 여자를 창조했다>에서 비키니를 입고 등장하자 세상은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1960년대 들어 비키니는 점점 대중화되었고, 점점 작아졌다.
과거의 패션은 오로지 패션 디자이너의 몫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서서히 대중의 손으로 넘어가고 있다. 대중화의 첫 번째 계기는 바로 1960년대 중반에 일어난 미니스커트의 대유행이었다. 이를 계기로 이전까지 30대 여성을 대상으로 삼았던 패션은 15~20세의 젊은 여성에게로 관심을 옮겨가게 되었다. 부모 세대가 이룩한 물질적인 풍요의 혜택을 입은 청소년기 여성들이 갖는 실험정신과 도전정신이 새로운 패션을 창조했다. 베이비 붐으로 등장한 이 젊은 세대는 인구통계학적으로도 거대한 구매력을 가진 집단이었다. 젊은 여성들이야말로 강력한 구매력을 가진 소비자였다. 지금 당장 의류 매장에 가보면 누가 옷을 사고 있는지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1968년은 패션의 전환점이었다. 개성의 시대였던 이때는 미니, 미디, 숏팬츠, 판탈롱 등 다양한 스타일이 동시에 나타났다. 패션 디자이너들은 보통 사람들이 편안하게 입을 수 있는 옷을 만들어내기 시작했으며 구두, 핸드백, 선글라스, 스카프 등 액세서리에도 개성이 드러났다. 고급 부티크 대신 대중의 취향과 추세에 따르는 패션 기업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H&M이나 자라Zara 같은 브랜드로 대표되는 패션 기업은 시즌마다 새로운 유행 상품을 저가로 대량 공급해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로 있다. 이제 디자이너가 패션을 주도하던 시대는 끝났다. 유행을 주도하는 집단들은 뉴욕, 파리, 밀라노의 패션쇼뿐만 아니라 이름 없는 개인들이 오가는 거리에도 나타났다. 현대의 패션은 고급 디자이너 패션, 산업 패션, 길거리 패션에서 동시에 만들어진다.
19세기의 의상이 자신이 아니라 남을 위해서 입는 것이라면, 오늘날의 의상은 남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입는다고 할 수 있다. 신분과 계급이라는 집단적 정체성보다는 개인의 정체성에 더 관심이 많다. 이전의 옷은 사회적 부와 지위를 상징하는 전통적인 역할을 했지만 ‘민주화되니 패션’은 개성의 표현의 수단이 되고 있다. 19세기 패션의 변화가 상층에서 하층으로 확산되는 ‘톱다운(top down)’방식이었다면, 오늘날의 패션은 하층에서 상층으로 확산되는 ‘바텀업(bottom up)’방식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유행이 돌고 돌며 바뀌듯이 패션의 사회적 의미도 달라지고 있다. 그 의미 변화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청바지다. 청바지는 원래 육체노동자가 작업장에서 입는 옷이었다. 그런데 1960년대의 유럽 대학생들은 주류문화에 대해 저항하는 의미로 청바지를 입었다. 1970년대 한국에서도 청바지와 통기타가 청년문화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첨단 패션으로 변화한 청바지에는 더 이상 그러한 의미가 없다. 대중이 주도하는 패션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이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은 텔레비전과 영화 속의 스타들이고, 수많은 패션 잡지와 쇼핑센터이다. 이제 옷이 갖고 있는 권력이 보통 사람들의 수중에 넘겨지는 조용한 혁명이 진행되고 있다.
김윤태 「교양인을 위한 세계사」, 책과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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