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명말청초 사상의 등장

지식창고지기 2010. 5. 28. 09:33

명말청초 사상의 등장

 

 

명나라가 망하면서 공리공론에 머문 주자학과 인욕 긍정의 양명좌파가 한족의 패망을 가져왔다는 반성을 바탕으로 지식인들의 도덕적 자각을 강조하면서 정치 변혁을 꾀한 동림당(東林黨)이 나온다. 그들은 명나라 초부터 실시된 이갑제 같은 방책이 중기 이후의 사회변화에 대응하지 못한 것이 명나라가 망한 원인이었다고 생각하고 그 반작용으로 다양한 경세치용 방안을 내놓았다. 대표적으로 황종희는 유교 도덕주의 입장에서 제도개혁론을 서술한 ?명이대방록?을 지었다. 그는 마음을 본체로 삼고 기(氣)로 규정함으로써 마음의 구체적인 활동을 강조하면서 경세치용의 학을 주장하였다. 황종희는 하․은․주 삼대를 이상으로 삼아 세상이 임금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임금이 세상을 위해 있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고, 임금의 존재 이유 또한 도덕성이 아니라 이해관계로 해석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명말 농민 봉기의 교훈에서 온 것이며, 맹자의 민본사상을 더 강화한 것이다. 그리고 신하도 세상을 위해 일할 뿐 임금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이러한 입장은 비록 민권을 인정한 것은 아니지만 유교의 왕권신수설을 정면으로 부정한 것이다. 이러한 황종희의 사상은 경학을 중심에 두고 사학을 보조 수단으로 삼아 학문의 현실적 효용을 정치를 통해 실현해 보려는 것으로 나타났다.

 

명나라 초에 있었던 리학(理學)에서 심학(心學)으로의 전환은 명말에 이르러 기학으로 바뀌었다. 이 같은 흐름은 양명학 영향도 있지만 통속화한 관학으로서의 주자학에 대해 현실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입장에서의 반론이라는 의미가 크다. 대표 인물인 왕부지기론(氣論)을 바탕으로 구체적이며 표현 가능한 기(器) 위에서 도를 설명함으로써 정신적인 것보다 구체적인 사물이 우선한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기(氣)에 대한 그의 이해는 장재의 ?정몽(正蒙)?을 해석한 ?장자정몽주(張子正蒙註)?에 잘 나타나 있다. 그의 사상은 청나라 말에 이르러 강한 민족주의가 담겨있다고 평가되면서 많은 호응을 얻었고, 현대 중국에서는 유물론적 사유라는 이유로 새로운 시각에서 조명되고 있다. 이 같은 흐름은 성인의 가르침에 도달하는 길은 문자를 배우고 익히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천에 있다고 본 안원으로 이어졌다. 이 같은 흐름을 이어 받아 기철학의 완성을 이룬 사람은 대진이다. 대진은 ?맹자자의소증?에서 옛 사람들이 말한 도는 일상생활에 들어 있는 일반적인 실천을 말한 것인데 성리학자들이 형이상학적인 리라고 함으로써 일상을 벗어난 고원한 것이 되었다고 보았다. 그는 또 기가 드러난 결과인 ‘욕(欲)’․‘정(情)’․‘지(知)’를 긍정함으로써 윤리 도덕을 등에 업고 못 가진 자와 낮고 천한 자들을 리의 이름으로 규제하고 벌주는 기성 질서를 부정하였다. 이처럼 기철학은 리에 짓눌렸던 인간 욕구를 고유하고 불변적인 본질로 끌어 올렸으며, 리철학의 관념적이고 주관적인 틀을 벗어나 실체적이고 객관적인 학문의 틀을 제시하였다.

 

다음으로 고증을 통해 고전을 정리하고 해명하는 고증학이 나온다. 고증학은 송․명대의 학문이 고전의 참 모습을 이해하지 못하였다고 보고 고전 자체로의 복귀를 통해 송․명리학을 넘어서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고증학은 청나라가 한족 지식인들에게 강력한 사상 통제를 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 대규모 편찬사업을 실시함으로써 정치적인 관심 없이 지식인들의 학문 욕구를 채워주는 독특한 학문 경향으로 나아갔다. 또한 명말 이후 경제적인 여유와 욕망 긍정의 자유로운 학문 경향이 자유로운 정신으로 경전을 다룰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대표적인 고증학자 고염무는 주자학자들이 공리공담에 빠져 경전에 담긴 치국평천하의 도를 제대로 알지 못하였다고 비판하고 그 대안으로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문을 제창하였다. 그를 이어 본격적으로 고증학을 펼친 사람들로는 염약거, 호위, 모기령 등이 있다. 염약거는 ?고문상서?의 많은 부분이 위작임을 밝힌 ?상서고문소증?을 지었고, 호위는 ?서경? 「우공」편의 지리를 고증한 ?우공추지(禹公錐指)?와 주돈이의 ?태극도설?이 도가 계열의 자료임을 밝힌 ?역도명변(易圖明弁)?을 지었다. 고증학은 경전을 중시하면서도 현실에 대한 관심에서 벗어나 학문을 위한 학문으로 축소됨으로써 사상의 빈곤이 나타난다. 긍정적으로 본다면 학문의 객관성을 유지하면서 고전의 권위에 눌리지 않은 자유로운 비판이 가능했지만 학문의 사회적 역할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학문대상을 문자학․음운학․천문학․지리학․산학(算學) 등 다양한 분야로 넓히면서 근대 학문의 기초를 마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