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서양 문명의 충격과 대응, 양무파와 변법파

지식창고지기 2010. 5. 28. 09:33

서양 문명의 충격과 대응, 양무파와 변법파

 

 

아편전쟁은 중국 근대의 개막이자 중국적 세계의 붕괴를 뜻하는 것이었으며, 전쟁의 패배로 중국은 반식민지 반봉건 사회가 되었다. 중국의 근대는 자생적이 아니라 제국주의 세력의 침탈에 의해 전개된 근대였다. 그 가운데 태평천국 운동은 제국주의에 저항하면서, 서양 문물과 기독교 신앙의 자극을 받아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것이었다. 사회체제의 전면 개혁을 추구하면서 정치와 종교의 일치를 주장한 홍수전의 태평천국운동은 비록 실패하였지만 중국의 변화에 대한 확고한 방향 제시를 하였다. 또한 정치에는 무관심한 채 고문(古文) 전통에 기대 있던 고증학이 경세치용(經世致用)을 외치는 금문(今文) 전통의 공양학파로부터 심하게 비판받았다. 하지만 공양학파도 봉건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더구나 청나라의 지배 사상인 주자학은 여전히 질곡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중국 근대는 봉건 자연경제와 신분질서의 해체였고, 주자학적 통치이념의 해체였다. 그 해체의 동력을 서양문명에서 가져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 중국 근대가 짊어진 짐이다.

 

태평천국이 청의 통치 기반을 흔들자 서양식 개혁으로 봉건 정권을 강화하자는 양무운동이 일어난다. 양무운동은 서양 문명의 충격에 대한 첫 번째 대응으로 서양 군사 기술을 들여와 안으로는 봉건제를 보호하고 밖으로는 침략을 막으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양무파는 중학을 본체로 삼고, 서학을 응용으로 삼는다는 뜻에서 중체서용(中體西用)을 내 걸었다. 장지동은 『권학편』에서 “구학을 본체로 삼고 신학을 응용으로 삼는다(舊學爲體, 新學爲用)”고도 하였다. 중체서용론은 근대 초기 서학을 조금이나마 수용하고자 했던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사고방식이었고, 그 흐름이 이홍장(李鴻章), 증국번(會國蕃) 등 양무파 관료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중체서용론의 논리는 체용 논리이다. 체용 논리는 사물의 본질과 현상, 본체와 작용으로 구분 짓는 도기(道器) 범주와 비슷하며, 그 속에 본말(本末)과 주보(主輔)의 범주가 담겨 있다. 그러므로 체․용 범주는 체․용이 분리될 수 없다고 하면서도 용에 대한 체의 우월성이 전제된다. 중학과 서학을 모두 받아들이면서도 중학의 우위를 인정하는 것이며 그 결과 중학은 심신 수련만 하는 것으로, 서학은 기술적인 것으로 왜곡시켰다. 이러한 장지동의 논리적 한계는 절충주의로 요약된다. 즉 본질적 변화 없이 미봉적 변화만 허용하는 전통 지배계층의 ‘변화’에 대한 대응 방식인 셈이며, 왕조의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연장선에 있는 것이다. 특히 변법파가 등장하여 기술적 측면을 넘어서 민권, 의회 개선, 입헌 군주제 등을 주장하면서 역사의 흐름에서 뒤쳐질 수밖에 없다. 더구나 청일전쟁의 패배로 양무운동의 취약성이 여지없이 폭로되었다.

 

청일전쟁의 패전은 애국지사들을 자극하였고, 그들은 민족 공업을 발전시켜 민족을 위기에서 구하려 하였다. 이것이 변법유신 운동의 기초가 되었다. 양무운동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한 변법파 이론가는 강유위, 담사동, 양계초, 엄복 등이며, 대표 이론은 담사동의 도기론(道器論)이다. 도와 기를 하나의 범주 체계로서 확립한 것은 『주역』「계사전」의 “형이상을 도라고 하고, 형이하를 기라 한다"는 언급이다. 그 뒤 성리학을 통해 추상적 차원으로 발전하여 도는 사물의 이치․도리․법칙․본체로서 초감각적인 것을 가리키고, 기는 사물 자체로서 형질을 가진 구체적인 현상을 가리키게 되었다. 그것이 청말에 이르러 체용․본말 범주와 더불어 서양 문명 수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유의 도구로 쓰인 것이다. 담사동의 도기론은 왕부지 도기론의 근대적 수용이었으며, ‘중국의 윤리 질서를 도(東道)’로, ‘서구 문명의 과학 기술을 기(西器)’로 연결하는 데서 시작하였다. 담사동과 왕부지는 기를 중시하였고, 기가 변하면 도도 변한다는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기가 본체이고, 도가 응용(器體道用)”인 셈으로, 기가 도에 대해 우위를 유지하며 기의 변화는 곧 도의 변화로 이어지게 된다. 이를 바탕으로 담사동은 서법, 즉 서양문화를 전폭적으로 수용하자고 하였다. 따라서 담사동의 봉건 윤리 비판은 전제 군주제에 대한 비판으로 집중된다. 하지만 변법파는 개혁의 주체를 황제로 삼았으며 당시 변화의 실상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없었다. 따라서 변법파의 역사적 위치는 근대의 완성이 아니라 시작에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