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양명학의 등장과 분화

지식창고지기 2010. 5. 28. 09:32

양명학의 등장과 분화

 

 

명대에 들어 현실과의 긴장 관계를 상실하고 경색된 학문태도를 보인 관학으로서의 주자학자들은 자신들은 주희의 이론을 철저히 따르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에서 실천 중심주의나 교조주의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흐름에 대한 반발이 진헌장과 담약수를 통해 리학(理學)에서 심학(心學)으로의 전환으로 나타나면서 양명학이 나온다. 명나라가 쇠퇴기로 접어들면서 지배계층의 대토지 소유와 수탈에 대한 농민 봉기가 날로 확산되었지만 주자학은 이러한 사회적 위기를 타개하는데 무력하였으므로 새로운 대안 모색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또 남쪽 해안지방 상공업 도시를 중심으로 자본주의 맹아 현상이 나타났으며, 그 결과 봉건도덕에 매몰된 인간이 아니라 개인의 욕망까지 긍정하면서 주체적 자아에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변화에 조응하여 나타난 사상이 양명학이다.

 

양명학을 제창한 왕수인은 주자학에서 중요하게 생각한 우주의 객관 법칙을 인간 마음속에 내재시킴으로써 개체 중심, 인간 중심 사상을 열었다. 왕수인은 주자의 性卽理설 대신 心卽理를 주장하였다. 마음속에 만물의 이치가 다 들어있으며, 그 마음은 사람의 보편적인 마음인 동시에 나의 구체적인 마음이다. 내 마음 속에 있는 만물의 존재법칙이자 도덕법칙인 리가 부모에게 펼쳐지면 효가 되고 임금에게 펼쳐지면 충(忠)이 되며 벗에게 펼쳐지면 믿음이 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마음을 인심과 도심으로 나누고 인심을 경계 대상으로 삼은 주자학과 달리, 인심과 도심이 하나라는 입장으로도 나타난다.

 

왕수인이 말한 마음의 본체는 양지이며, 양지는 맹자가 말한 양지양능이다. 양지양능은 인간만이 아니라 만물의 존재 근거이므로 인간 주체의 입장에서 본다면 만물이 모두 내 마음 속에 들어 있다는 만물일체론이 된다. 또한 왕수인은 마음의 움직임이 리의 구현이라는 생각에서 앎이란 실천의 시작이며 실천이란 앎의 완성이라는 지행합일론을 주장하였고, 이 같은 생각에서 사물에 들어 있는 이치를 먼저 깨닫고 나중에 행한다는 주희의 선지후행(先知後行)설을 비판하였다. 또한 주자의 격물치지설 대신 치양지설을 통해 사물에 나아가 이치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속에 타고난 양지를 잘 길러낼 것을 주장하였으며, 그 과정이 구체적 실천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사상마련(事上磨鍊)을 강조하였다. 이 경우 치양지란 마음과 이치가 하나로 합일된 경지로서 인간 자신이 타고난 도덕적 자각을 완성한 상태이다. 양명학에 대해서는 주자학의 계승인지 극복인지에 대한 다른 주장들이 있다. 두 사상 모두를 리학(理學)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주희의 리학(理學)과 구별하여 심학(心學)이라고도 부르며, 양명학의 심학 체계 속에 명말청초에 유행하는 기학(氣學)적 요소가 많다는 견해도 있다.

 

왕수인 이후 양명학은 마음을 솔직하고 자연스럽게 열어 놓을 것을 강조하면서 인륜 기강을 무시하는 경향이 강했던 현성파(現成派), 고요한 상태와 사물에 작용한 상태로 양지를 구별하고 그 가운데 고요한 본 모습을 강조한 귀적파(歸寂派), 양지는 도덕법칙인 하늘의 이치이므로 이치를 궁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 수증파(修證派)로 나뉜다. 이러한 분화는 왕수인이 생전에 제자들과 나누었던 사구교 논쟁에서 나왔다. 이 논쟁은 마음의 본체인 양지에 중점을 둔 왕기의 사무설(四無說)과 본체에 이르는 공부를 중시한 전덕홍의 사유설(四有說)로 나뉜다. 그 뒤 수증파와 귀적파는 주자학으로 귀결되었고 현성파가 양명학의 특징을 잘 드러냈다. 양지현성파는 태주(泰州)학파라고도 불렸으며, 인륜 법도를 무시하는 경향이 많았기 때문에 양명학 안에서조차 비판받았다.

 

이 사상은 왕간의 회남격물설을 통해 마음(心)에서 몸(身)으로 문제 범위를 넓혔고 백성의 일상생활이 도라는 생각으로 나아갔다. 뒤를 이어 하심은은 취화당(聚和堂)을 통해 몸(身)을 가(家) 개념으로 넓혔고, 공동체로서의 인간과 그 인간의 욕망을 긍정하는 육욕론(育欲論)과 여민동욕(與民同欲)을 주장하였다. 또한 이지는 동심설(童心說)을 통해 동심의 발현에 역점을 둔 인간 해방을 역설하였다. 양명학은 인간 주체에 대한 강조를 기반으로 명대 서민문화의 이념적 기반이 됨으로써 사회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청나라 초기의 경세론 성립에도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특히 양지가 내 마음 속에 완전한 모습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과 이를 제대로 드러내기 위해 마음을 솔직하고 자연스럽게 열어 놓을 것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욕망을 긍정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전통적으로 강조해 온 인륜 도덕이나 사회 기강의 굴레로부터 인간 주체의 해방을 꾀했다는 점이 두드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