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서양사상의 창조적 수용, ‘동서문화’ 논쟁과 ‘과학과 인생관’ 논전

지식창고지기 2010. 5. 28. 09:34

서양사상의 창조적 수용, ‘동서문화’ 논쟁과 ‘과학과 인생관’ 논전

 

 

양무운동과 변법운동의 실패는 물질과 제도만 부분 개혁하는 단계에서 총체로서의 ‘문화’를 개혁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청 왕조를 뒤집었지만 얼마 뒤 군벌의 전제제도가 부활하였고, 일본의 침략 또한 한층 노골화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해혁명의 실패 원인을 분석하면서 중국의 진로를 찾으려는 요구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 첫 번째 반향이 『신청년』의 창간으로 시작된 5.4운동이었다. 5.4신문화 운동의 구호는 진독수가 『신청년』 창간호 「청년에게 삼가 고함(警告靑年)」에서 제시한 ‘과학’과 ‘민주’였다. ‘덕선생(德先生, Democracy)’과 ‘새선생(賽先生, Science)’으로 불린 과학과 민주는 광범위한 사상해방운동을 일으켰다. ‘민주’는 서양 근대 민주공화정과 천부인권론을 의미하며, ‘과학’은 과학정신과 과학지식을 뜻한다. 그 결과 ‘타도! 공가점(打倒孔家店)’ 구호처럼 봉건문화에 대한 전면 비판이 시작되었고, 한 편으로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받아들였다.

 

5.4 신문화 운동 시기에 다양한 서양 사상이 들어온다. 특히 시대정신을 잘 반영한 사조는 허무주의와 과학주의이다. 실용주의의 ‘회의’ 태도와 경험방법이나 허무주의, 무정부주의는 전통과 권위에 대한 절대 부정으로 나타났다. 또한 당시 사상가들이 우상과 미신 파괴를 위해 사용한 이론은 진화론이다. 진화론은 엄복이 헉슬리의 『진화와 윤리』를 『천연론(天然論)』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하여 변법파의 이론이 되었고, 엄복은 다윈의 ‘적자생존론’을 이용하여 ‘자강(自强)’이론을 만들었다. 그 뒤 손문(孫文)은 진화론으로 민주혁명의 필연성을 논증하였고, 5.4 신문화운동기의 구호인 ‘과학’ 또한 진화론을 의미하였다. 그런데 신문화운동 이후 학술 이론에 대한 요구가 증가하자 칸트와 헤겔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칸트의 지식론과 자유의지설은 민주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사상 무기가 되었고, 헤겔철학은 유물변증법 이해를 위한 도구였다. 그러나 5.4 이후 서양사상의 대규모 수입은 중국사상의 현대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지만 단편적이고 과장되게 수입되는 경우가 많았다.

 

1차 세계대전으로 서구 자본주의의 모순과 병폐가 심각하게 노출되자 5.4시기의 과학과 민주 신앙이 일시에 추락하면서, 동양문명으로 중국과 세계를 구하자는 ‘동방문화본위파’가 ‘전반서화파’와 ‘동서문화논쟁’을 벌였다. 첫 단계인『신청년』창간부터 5.4 운동까지는 ‘문화의 차이와 우열’에 집중하여 진독수와 두아천이 논쟁을 벌였다. 다음 단계는 양계초와 장사교(章士釗)가 서양문명과 중국문명의 융합을 주장하였고, 이에 대해 진독수와 이대조가 반대하였다. 그 밖에 양수명은 동서문화의 차이는 시간과 공간의 차이만이 아니라 정신과 문화노선의 차이라고 하면서 독자적인 현대화를 주장하였다. 그 뒤 1930-40년대에 이르면 풍우란과 하린이 동서문화 상호융합의 구체적인 과정과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이에 대해 전반서화파인 호적은 총체적인 서구화가 유일한 길이라고 하였다.

 

다음으로 주목할 것은 ‘과학과 인생관’(‘과학과 현학’) 논전이다. 이 논전의 배경은 세계대전 이후 ‘서구 문명(과학) 파산론’의 영향으로 보수 진영의 민족주의가 활기를 찾은 것과 서양사상의 급격한 수용이었다. 논전에는 인생관파의 장군매와 양계초, 과학파의 정문강과 호적 등이 참가하였다. 이 논전은 순수 사상 논전이 아니라 전통 도덕윤리와 비과학적 형이상학을 결합한 인본주의와 과학을 이데올로기로 포장한 과학주의와의 논전이었다. 이를 계기로 마르크스주의가 청년대중에게 널리 유포되어 ‘과학’은 역사유물주의의 다른 이름이 되었다. 1934년 장개석이 공산당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펴면서 ‘신생활’운동을 제창하자 진립부(陳立夫)가 중국 고유 윤리도덕에 입각한 중국 문화건설을 주장하고 나섰다. 이렇게 시작된 중국본위문화건설론은 정치활동으로 추진되던 신생활운동의 일부로서 국민당의 사상 통제 강화에 목적이 있었다. 여기에 대해 진서경과 호적이 우민화 정책이라고 비판하였고, 중국본위문화건설론자들은 전반서화론이 중국인을 제국주의 문화노예로 만든다고 주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