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윈난의 바이족 사람들

지식창고지기 2010. 6. 25. 11:41

윈난의 바이족 사람들
 
 
   
은기 쟁반 만드는 데 열중인 한 공방 안의 두 장인. 신화촌에서는 10대 중반부터 한 스승 문하에 들어가 장인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 모종혁

중국 윈난(雲南)성 다리(大理)자치주 허칭(鶴慶)현 신화(新華)촌. 신화촌은 펑황(鳳凰)산 아래 헤이롱탄(黑龍譚)을 끼고 있는 바이(白)족 마을이다. 오늘날 신화촌의 가구 수는 1100여 가구. 신화촌은 중국 최고의 관광지 중 하나인 다리시에서 2시간 반이나 떨어졌지만, 중국에서 가장 부유한 농촌마을 중 하나다.

 

2006년 현재 신화촌 한 가구당 1년 수입은 3만 위안(한화 약 390만원). 다리자치주 농촌가구 평균수입의 8배에 달한다. 신화촌 전체 수입액은 3748만 위안에 달해, 중국 내 다른 농촌마을의 평균수입액보다 10배나 높다.

 

윈난성의 산간지대에 있는 신화촌이 중국 내 어느 향촌보다 잘 살게 된 것은 주민들의 특별난 손기술 덕분이다. 신화촌은 예부터 사는 주민은 많으나 농사지을 토지는 적고 습지가 많은 고장이다. 펑황산은 달리 '돌산'이라 불릴 정도로 초목이 거의 자라지 않는다.

 

경작할 땅이 적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신화촌 주민들은 천여 년 전부터 고향을 떠나 살 길을 찾아야했다. 가깝게는 리장(麗江)·쿤밍(昆明)·시쑤앙반나(西雙版納) 등지로, 멀리는 중국 내지·티베트·미얀마·태국 등까지 일거리를 찾아 나섰다.

 

신화촌 바이족이 빈손으로 고향을 떠나 타지로 나간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조상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자신만의 손기술을 가지고 고향을 떠났다. 그것은 다름 아닌 금·은·동·철 수공기술.

 

<허칭현지>(鶴慶縣志)에는 명나라 초기 이미 신화촌 주민들은 독특한 금속 공예술로 윈난 전역에서 유명했다고 적혀있다. 바이족 전통의 독특한 공예술을 지니고 타향 이국으로 나간 신화촌 주민들은 각지에서 큰 환영을 받았다. 그들은 금속 가공술 장인으로 타지에 쉽게 정착했고 경제적 부와 사회적 명성을 얻었다.

 

판젠화(范建華) 윈난성 사회과학원 민족문학연구소장은 <바이족 장인촌>에서 "1996년 티베트 라싸에는 약 400여 명의 신화촌 장인들이 활동하고 있었다"면서 "쿤밍에서 라싸를 오가는 차마고도 일대에서 활약하는 금속공예 장인들은 모두 신화촌 출신이었다"고 적었다.

 

적지 않은 신화촌 주민들은 고향을 떠나 타지에 정주했지만, 일부 사람들은 다시 신화촌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단지 몸만 되돌아온 것이 아니었다. 타향 이국에서 보고 듣고 겪은 생활양식·문화·예술·종교 등을 함께 가슴에 품고 귀향했다.

 

   
신화촌은 돌산이라 불리는 펑황산과 헤이롱탄을 끼고 있는 바이족 농촌마을이다.
ⓒ 모종혁

 

   
결혼식 피로연에 필요한 식사 준비에 분주한 두 바이족 여성. 신화촌은 한때 '과부촌'이라 불릴 정도로 여성들이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 모종혁

티베트 라싸에만 400여명, 차마고도에서 활약한 문화 사절

 

20세기 들어 교통수단이 발달하면서 신화촌 금속 장인들의 명성은 중국 전역에 퍼졌다. 반지·귀걸이·팔찌·목걸이 등 개인장식품에서 접시·주전자·컵·칼·자물쇠·문고리 등 일상생활용품, 각종 종교제기, 거대 조형물까지 신화촌 장인들은 금·은·동으로 가공해서 만들 수 있는 물건은 다 만들었다.

 

신화촌 주민들이 만든, 예술성 높고 특색 있는 민족성을 지닌 금속용품은 중국 사회주의정부의 인정까지 받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재앙이 닥쳐왔다. 1966년 시작된 문화대혁명의 10년 광풍은 신화촌 장인들이 만든 금속 수공품을 부르주아의 사치품으로 낙인찍어 탄압했다.

 

신화촌 3대 명장 중 한 명인 홍신구이(洪新貴·57)는 "문혁 시기 금·은 공예품에 대한 주문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신화촌 장인들은 교통이 불편한 산간마을에 들어가 동제품을 만드는데 주력했다"고 회고했다.

 

홍 장인은 "우리 집안은 대대로 종교 제기를 주로 만들었기에 더욱 힘든 시기였다"면서도 "광시(廣西)·구이저우(貴州)에 사는 먀오(苗)족·동(侗)족·수이(水)족 등과 접촉하면서 현지 소수민족의 새로운 금속 공예술을 흡수·발전시킬 수 있었다"고 말했다.

 

1978년 개혁개방이 시작되면서 신화촌 장인들의 활동도 재개되었다. 억눌려 작업 못한 10년을 분풀이하듯 신화촌 주민들은 금·은·동으로 된 다양한 수공품을 만들어냈다.

 

2006년 한 해 신화촌에서 생산한 금속 공예품은 500만 건에 달하고 총 판매액은 2억 위안(약 260억원)을 넘어섰다. 신화촌 전체 1100여 가구 가운데 907가구가 금속 공예품을 만드는 데 종사하고 있고, 2118명의 주민이 금속 공예 장인이 되어 살아가고 있다.

 

신화촌 장인들은 20여 개 민족, 100여 품종의 생활문화 금속용품을 만들 수 있다. 신화촌 장인들이 만든 금속 공예품은 중국 각지 뿐만 아니라 인도·파키스탄·버마·태국·네팔·일본·미국·독일 등 세계 각지로 팔려나가고 있다. 수백 년 전 차마고도와 남부 실크로드를 통해 퍼져나간 신화촌의 명성과 공예품은 오늘날 편리해진 운송수단 덕에 대량 수출되고 있다.

 

홍 장인은 "최근에는 티베트 전역 뿐만 아니라 네팔에서도 라마불교 제기와 법기에 대한 주문이 잇따르고 있다"면서 "문혁과 개혁개방 초기 떠돌아다니면서 접한 라마불교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오늘과 같은 호황을 가져다주었다"고 말했다.

 

   
리장 동파(東巴)공원 입구에 세워진 대붕신조와 동파신상은 신화촌 장인들이 현지에 가서 제작한 것이다.
ⓒ 모종혁

 

   
작업에 열중인 신화촌 3대 명장 중 한 명인 촌파뱌오. 신화촌에서 생산된 모든 금속 공예품은 장인이 심혈을 기울여 손수 제작한다.
ⓒ 모종혁

전승되는 기술도 다르고 노련한 장인 되기도 험난해

 

주민의 8·9할이 금속 공예업에 종사하고 있지만, 오늘날 신화촌에는 변변한 기술학교가 한 곳도 없다. 장인이 되고자 하면, 오직 가업을 잇거나 마을 이웃어른을 스승으로 모셔서 기술을 배워야 한다.

 

신화촌 각 가정마다 전승되는 기술도 다르다. 어느 집은 금 세공을, 어느 집은 은 세공을, 어느 집은 동기 가공만을, 어느 집은 철기 가공을 전문적으로 한다. 개인장식품만 만드는 집이 있는가 하면, 일용생활용품만 만들고 종교 제기와 법기를 전문 제작하는 집이 따로 있다.

 

노련한 장인이 되기 위한 길 또한 험난하다. 신화촌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부모에게서 망치를 선물 받아 장난감처럼 가지고 논다. 14~16세가 되면 아버지를 스승 삼아 혹은 따로 스승 찾아 수련의 길에 들어서는데, 그 기간은 짧게는 5·6년, 길게는 10년 이상 걸린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스승은 자신의 제자를 데리고 수련 여행을 떠나는 것이 전통이었다. 신화촌에서 가장 유명한 명장인 춘파뱌오(寸發標·46)도 마찬가지였다.

 

16살 때부터 아버지를 스승으로 모시고 금속 공예기술을 익혔던 춘 장인은 먼저 윈난성 각지를 돌아다녔다. 윈난성 내 여러 소수민족의 공예술을 익히고 견문을 넓힌 춘 장인은 뒤이어 티베트·구이저우·광시·간쑤(甘肅)·닝샤(寧夏) 등지를 다녔다. 조상 대대로 내려온 바이족 전통 공예술과 타민족 및 현대 가공기술을 융합시키는 작업도 병행했다.

 

1987년 라싸에 정착한 춘 장인은 티베트자치주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포탈라궁 내 금·동 제기와 법기 제작을 주도했다. 문혁 중 파괴된 티베트 내 수많은 라마사원의 복원작업에서 다시 만들어진 수많은 금·은·동·철 제품은 춘 장인이 제작한 것.

 

춘 장인은 "1996년 고향으로 되돌아올 때까지 티베트를 방문하는 중국 및 외국 지도자에게 주는 금·은기 선물은 내가 다 만들었다"면서 "라싸에서 지낸 10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현재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쓰는 은 차기 세트도 랴오닝(遼寧)성 단둥(丹東)시 공산당위원회의 주문을 받아 제작해 선물한 것"이라는 촌 장인은 "2003년에는 신화촌의 전 장인을 대표해서 유네스코가 수여한 민간공예미술대사의 칭호를 받았다"고 자랑했다.

 

   
유네스코가 수여한 민간공예미술대사의 칭호를 얻은 신화촌 장인 춘파뱌오. 춘 장인은 라싸에서 지낸 10년이 티베트 문화와 라마불교에 대한 이해를 더욱 깊게 했다고 말한다.
ⓒ 모종혁

 

   
밀려드는 관광객으로 인해 신화촌 내에는 금·은 수공예품을 파는 쇼핑센터도 생겼다.
ⓒ 모종혁

"신화촌 명성은 특유의 민족성과 기술에다 보편성 획득한 덕분"

 

금세기 들어 신화촌의 존재가 언론매체를 통해 중국 전역에 알려지면서 신화촌을 찾는 손님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작년 한 해 신화촌을 찾은 관광객은 무려 160만 명에 달했다. 신화촌에서 생산된 금·은 수공예품을 찾는 고객도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신화촌의 명성이 드높아지면서 신화촌에 스며들어 기계로 만든 금속 공예품을 수공품이라 속이는 사례가 늘고 있다. 신화촌에서 위장 생산된 가짜 금·은기도 활기를 쳐서 시장을 교란시키고 있다. 이 때문에 작년 9월 허칭현 공안국은 윈난성 최초의 여행산업팀을 편성, 가짜 금·은 수공예품 소탕에 나섰다.

 

밀려드는 고객과 주문으로 인해 여성들도 수공예품 제작에 나서고 있다. 신화촌에서는 본래 남성은 금·은기를 만들고 여성은 집안일을 돌보는 전통이 있었다. 일거리를 찾아서, 혹은 만든 금속 수공예품을 팔기 위해 고향을 떠난 남편을 기다리며 아내는 집안을 이끌고 자식을 돌봐야 했기에, 신화촌은 '과부촌'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춘파뱌오 장인은 "지금은 여성에게 금속 수공품 제작기술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금기가 깨졌다"면서 "금·은 공예품을 만들지 않더라도 마을 내 쇼핑센터나 상점에서 일하는 사람까지 합치면 모든 주민이 장인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라고 말했다.

 

푸얼(普濔)의 푸얼차, 석림의 자수와 더불어 신화촌의 금·은 수공예품은 윈난성을 대표하는 특산품으로 성장했다. 신화촌은 리장·다리·샹글리라·허순(和順) 등과 함께 윈난성 10대 향토마을로 선정됐다. 중국정부도 이곳을 4성급 관광지로 지정했다.

 

작년 1월 22일 <다리일보>는 "신화촌을 찾는 관광객 덕분에 2006년 허칭현 문화산업은 1.14억 위안(약 148억원)의 수입과 허칭현 GDP의 14%를 차지했다"면서 "허칭현은 윈난성 문화산업의 모범시현 1등상을 획득하고 특색문화산업의 시범지구로 선정됐다"고 보도했다.

 

춘 장인은 "오늘날 신화촌 수공예품이 수많은 어려움과 경쟁 속에서도 끈질긴 생명력과 세계 각국으로까지 수출되는 것은 바이족 특유의 민족성과 여러 민족의 문화예술을 포용한 개방성 때문이다"고 강조했다.

 

춘 장인은 "지난 천여 년 동안 신화촌 장인들은 차마고도와 실크로드를 통해 멀리 신장(新疆)위구르자치구·인도까지 가서 우리의 수공기술을 선보이고 현지의 새 기술과 문화예술의 토양을 받아들었다"면서 "신화촌만의 전통과 기술을 고집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보편성을 획득한 것이 신화촌의 명성을 지금까지 유지한 비결"이라고 말했다.

 

   
허칭현 중심가에 있는 명나라 때 세워진 고루는 다리자치주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허칭현은 신화촌 덕분에 문화산업의 호황을 맞고 있다.
ⓒ 모종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