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서양의 사상을 적극 소개한 중국 근대 계몽사상가 옌푸(严复)

지식창고지기 2010. 6. 30. 11:19

서양의 사상을 적극 소개한 중국 근대 계몽사상가 옌푸(严复)

 

 

19세기 말 중국 최초의 유학생, 옌푸는 중국이 자강(自强)을 이루려면 서양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근대 서양의 사상적 원천으로 주목되는 저서들을 중국어로 번역하여 소개하고 교육 계몽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중국인의 사상적 시야를 넓히고 근대 중국의 초석을 놓았다. 사회진화론과 사회 유기체에 입각하여 사회 개혁을 주장한 그는 혁명이 아니라 중추 집단의 생각을 점진적으로 변화시킴으로써 사회 전체의 변화를 이룩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그의 사상은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중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세기 후반, 중국 청나라에서는 서양문물을 받아들이자는 양무운동(洋務运动, 1861-95)이 일어났다. 태평천국운동(1850-64) 진압에 공을 세운 쩡궈반(曾国藩), 리훙장(李鴻章) 등 한인 관료들이 중심이 되어 부국강병을 위해 서양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군수공업을 중심으로 철도, 조선, 섬유, 광산 등 근대 공업을 일으켰고, 이 과정에서 난징(南京), 상하이(上海), 푸저우(福州), 톈진(天津)등에 군수공장, 무기제조창, 조선소 등이 들어섰다. 그러나 이 운동은 ‘중체서용’(中体西用; 중국의 전통적인 학문과 사상을 근본으로 삼고, 서양의 문물을 수단으로 삼아 활용함)의 기치 아래에 이루어진 결과로서, 피상적인 개혁에 불과하였다. 낡은 제도를 그대로 둔 채 서양의 기술만을 받아들이려 한 이 운동은 한계점을 드러낸 채 청프전쟁(1884), 청일전쟁(1894-95)의 패배로 말미암아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청일전쟁의 패배 이후, 중국 지식인들은 절박한 위기의식에 휩싸였다. 서구 열강 및 일본의 침탈이 노골화되어지면서, 청의 지식인, 관료들은 중국의 전통문화, 정치, 사회 등 모든 분야에 대해 심각한 자성과 비판이 일어났다. 특히 젊고 진보적인 중국의 일부 지식인들은 유교 경전에 매달리기보다 서양의 지식과 사상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 부국강병 ' 을 위해 진정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에 고민하고, 서양의 대포와 총만 수입하면 중국도 강해질 수 있을까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면서, 절박한 중국의 입장을 해결해 줄 사상과 선각자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서양 사상을 체계 있게 소개한 인물이 바로 옌푸(严复, 1854-1921)이다.

 

옌푸의 성장과정과 유학생활


옌푸는 푸젠(福建)성 호우관(侯官) 사람으로, 1854년에 한 의사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송광(宋光)이고 자(字)는 우릉(又陵)이었는데, 후에 옌푸로 개명하고, 자도 기도(几道)로 바꿨다. 의사인 그의 아버지 엄진선(严振先)은 총명하고 어려서부터 글 읽기를 좋아하던 아들을 보고 꿈에 부풀었다. 당시에는 과거 시험만이 관료가 되어 개인과 가문의 명예를 드높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이었는데, 어린 자식의 성장을 주의 깊게 보아오던 아버지는 가장 실력 있는 선생을 초빙하여 자식 교육을 시켰다. 옌푸는 10살 부터 가정교사인 황샤오옌(黃少岩) 밑에서 한학(汉学)과 송학(宋学)을 배웠다. 그러나 2년 뒤 그의 스승이 세상을 떠나고, 게다가 그의 아버지가 병사하면서 가세가 기울었기 때문에 공부를 계속 할 수 없게 되었다.생활이 어려워진 옌푸는 과거시험을 단념하고 부친의 친구의 도움을 받아 줘중당(左宗棠), 선바오쩐(沈保祯)이 창설한 푸저우선정학당(福州船政学堂)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사대부 집안 출신이라 하여도 가문의 유력자나 가장의 죽음으로 인하여 운명이 바뀌는 것은 당시의 중국사회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는 일로, 과거를 통한 출세 길이 막혀버린 옌푸가 다소 궁색한 대안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서양의 신학문(西学) ’을 익히는 것이었다. 


그가 입학한 푸저우선정학당은 푸저우선정해군기술학교(福州船厂海军技術学校)로, 당시 추진되고 있던 양무운동 과정에서 생긴 근대적 학교였다. 그는 영어, 대수학, 해석 기하학, 삼각법, 물리학, 역학, 화학, 지질학, 천문학, 항해술 등을 공부했는데, 주목해야할 것은 훗날의 옌푸의 서양 과학에 대한 열중이 단순히 ‘서양 과학 ’과의 막연한 접촉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초보적이나마 자연과학의 실제적인 방법과 데이터와의 직접적인 접촉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그가 전통적인 교육을 떠나 영어를 공부하고 서양의 학문을 받은 것이 바로 그의 장래를 결정짓게 된다.


선정학당을 졸업한 그는 1877년에 중국 최초의 유학생으로서 영국으로 건너갔다. 처음 포츠머스(Portsmouth)대학에서 공부하다가 후에 그리니치(Greenwich) 해군대학으로 옮겨 군사학을 공부하였다. 2년간 영국에서 유학하던 옌푸는 단순히 군사관계의 지식만이 아니라 널리 영국의 정치, 경제, 사회제도 등을 익히면서 서양 문화 및 사상을 흡수하고, 감명을 받는다. 서양열강이 부강하게 된 것은 사회에 공리(公利)가 신장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 시기에 이미 옌푸는 다른 청년들과는 현격히 다른 생활경험을 쌓고 있었다. 당시 중국의 지식인이나 개명한 양무파 관료들은 서양이 도덕적, 지적, 정신적으로 중국보다 열등하다는 편견을 떨쳐버리지 못했으나 옌푸는 영국으로 유학가기 전부터 이미 서양학문에 대한 열의와 관심, 그리고 서양인 스승과의 친밀한 교제 등을 바탕으로 그러한 편견에서 벗어나 있었다. 옌푸의 동급생들은 대부분이 좋은 일자리를 얻고 출세해 보려는 처음의 입학동기를 끝까지 버리지 않는 사람들이었고, 실제로 졸업 후 해군장교가 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런 친구들도 대부분도 서양에 대한 편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였으나, 지적인 감수성으로 자신의 경험에 반응하였던 옌푸는 그의 친구들과 생각이 달랐다.

 

옌푸의 교육 계몽 운동


1879년 영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옌푸는 푸저우선정학당의 교관이 되어 학교에 몸담게 되었다. 이듬해(1880)에는 리훙장의 요청에 따라 톈진 북양수사학당(北洋水师学堂)에 초빙되어 총교습(总教習, 교무처장)이 되었으며, 후에 북양수사학당의 교장으로 오랫동안 재직하면서 근대 교육에 헌신한다.


그가 새롭게 교육에 헌신하고 있을 당시, 청일전쟁의 패배는 중국인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간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힘을 써 온 양무운동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난 것이다. 이 때 옌푸는 톈진의 중문 신문인『직보(直报)』에「논세변지극(论世变之亟, 시세의 격변에 대하여)」,「원강(原强, 힘이란 무엇인가)」, 「벽한(闢韓, 韓愈를 반박함)」, 「구망결론(救亡決論, 멸망으로부터의 구제에 관하여)」 등의 글을 연이어 발표하면서 계몽활동을 전개하였다.여기에서 그는 중국 역대 군주를 ‘대도(大盜)’라고 공격하고 전제정치(專制政治)를 배격해야 한다는 변법자강(變法自强)의 입장에 섰다. 수구(守舊) 세력에 반대함은 물론, 기술이나 제도 뿐 만 아니라 서양 사상을 배워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과거에 쓰이던 팔고문(八股文)을 폐지하고 서양 과학을 도입해야 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발표된 글은 모두 서양 경험을 바탕으로 중국의 정치사상을 냉철히 비판하였으며, 중국인들의 정치적 무관심과 지적 나태가 중국의 곤궁을 불러 일으켰다고 주장하여 세인의 주목을 받았다.


영국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돌아온 옌푸는 군계로부터 사상계로 전화(轉化)하여 서양의 학문과 교육을 전파하고 보급하는 데 힘썼다. 영국에서의 교육이 그의 사상과 행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곧 양무파 관료들은 부국강병을 위해 서양의 군사 및 기술을 도입하되 철학이나 사상면에 존재하는 중국적 전통은 지켜야 한다는 ‘중체서용’의 입장에서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그런 식의 상반된 서구 이해와 피상적인 개혁으로는 청조의 현상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옌푸의 생각이었다.


그는 국가의 강약 · 존망의 3대 조건은 ' 정신과 체력 ' , ' 지혜와 총명 ' ,' 인의와 덕성 ' 이라고 하면서 ' 정신과 체력의 증강 ' , ' 지혜와 총명의 강화 ' , ' 인의와 덕성의 함양 ' 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곧 인격의 3대 요소인 ‘지(智) · 덕(德) · 체(體)’에 기본을 둔 것으로, 국가 차원에서도 부강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민력(民力, 대중의 힘), 민지(民智, 국민의 슬기), 민덕(民德, 백성의 도리)이 절대 필요함을 지적하였다. 민력을 고무하기 위해서는 건강한 정신과 신체가 필요하고, 민지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과거 시험에 대치하여 서양 학문을 익혀야 하며, 민덕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전제정치를 폐지하고 백성을 존중하는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를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모든 것은 교육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로, 당시의 중국에 입헌 군주제가 필요하나, 민지가 개발된 후에 비로소 실현 가능한 일이며 이때 절대 필요한 것이 교육이라는 입장에서 그는 ‘교육구국론(敎育救國論)’을 펼쳐나갔다.


옌푸는 서양의 교육체계를 따라 중국의 교육 체계를 3단계로 나누어 실시할 것을 조정에 건의하였다. 바로 소학교, 중학교, 대학교의 과정으로, 소학교는 16세 이전의 학생, 중학교는 16세에서 21세의 학생으로  문리(文理)가 통하고 소학교의 기초가 있는 청년을 교육하는 과정이며, 대학교는 3, 4년 공부한 후에 전문학교로 진학하여 전공을 공부하는 과정이다.


또한 옌푸가 중요시 한 것 중의 하나는 여성교육이다. 그는 당시 상하이경정여학당(上海径正女学堂)의 설립을 적극 지지하였다. 여학교의 설립은 여성들이 봉건적인 예교 속박으로부터 해방되는 길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남녀평등과 여학생들의 사회활동을 중시하였다. 만일 여성들이 사회활동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새로 설립된 여학교도 전통적인 사숙과 별 차이가 없기에 여학생의 사회활동을 보장할 것을 요구하였다. 더불어 여학생은 스스로 자주의식을 가지고 사회활동을 해야지만 여성의 능력이 극대화되고 사회 개혁을 이룰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여성교육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는 톈진 북양수사학당의 학교장이 되어 교육행정의 책임을 맡으면서도 그 외의 여러 교육기관에 관계하여 활동하였다. 경사대학당(京师大学堂) 번역국 주임, 상하이복단공학교(上海复旦公学校)의 교장, 안징고등사범학당(安庆高等师范学堂) 교장을 역임하였으며, 청조 학부(学部)의 명사관(名 辞馆) 총편집장을 역임하는 등 정계보다도 교육계에 줄곧 몸담고 활동하면서 교육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번역 · 저술사업을 통한 계몽운동


서양 근대 사상에서 서양 부강의 비밀을 찾고자 했던 옌푸는 서양의 과학기술이나 문물제도에만 주목하던 양무파 지식인들의 태도와는 크게 달랐다. 서양의 힘의 근원, 곧 동양과 서양의 차이의 근원은 단순히 무기나 기술의 차이가 아니라 철학과 사상에 있음을 깨닫고 서양의 철학과 사상을 소개하여 중국을 계몽하려 하였다.


특히 청일전쟁의 패배는 그에게 큰 충격이었다. 조선의 동학혁명(東學革命)을 계기로 청일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중국 해군은 겉으로 위풍이 당당했지만 일본과의 싸움에서 여지없이 패배하고, 육군도 참패를 당하였다. 옌푸의 영국 동창생 이토오히로부미(伊藤博文)는 당시 이미 일본의 수상으로써 중국의 강화대표 리훙장과 하관조약(下關條約)을 맺고, 영토를 할양을 중국에 요구했다. 이러한 상황을 경험한 옌푸는 국가의 위급함과 자신의 초라함에 크게 분개했다. 청의 지식인, 관료들도 중국의 전통문화, 정치, 사회 등 모든 분야에 대해 심각한 자성과 비판을 하지 않을 수 없없는데, 옌푸는 서양의 이론을 소개하면서 시대의 병폐를 지적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자 노력하였다. 그 결과, 옌푸는 1898년에 최초로『천연론(天演論)』을 번역 · 출판했다. 이 책은 중국에 사회진화론을 소개한 책이다. ‘천연’ 이라는 용어는 ' evolution ' 을 뜻하며, 본래는 영국의 생물학자인 헉슬리(T. H. Huxley)의『진화와 윤리(Evolution and Ethics)』를 번역한 것인데, 내용에 자신의 코멘트를 첨가한 것이다.  옌푸는 인간 사회의 ‘적자생존’에 의한 진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옌푸는 피폐된 국혼을 다시 일깨우고 온 국민이 다시 일어나기를 기대하였다. 열강의 침략으로 도탄에 빠져 있던 국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은『천연론』은 출판되자마자 전국적인 선풍을 일으켰다. 당시 ' 적자생존 ' , ' 생존경쟁 ' 등의 용어가 중국 사상계의 슬로건이 될 정도로 진화론은 폭넓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옌푸는 좌절에 빠진 중국인에게 서양의 학술 문화를 소개하며 지속적으로 비중 있는 많은 학술 명저를 번역하였다. 몽테스키외의『법의 정신』, 아담 스미스『국부론』, 스펜서(Herbert Spencer) 『사회학 연구(A Study of Sociology)』등 많은 책이 번역되어 큰 호응을 얻었다.


특히 그가 1881년경에 읽은 스펜서의『사회학 연구』는 옌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사상적 사건이었다. 스펜서의 사상은 옌푸의 이후의 사상적 발전에 전면적이고 근본적인 영향을 끼쳤다.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은 사회학의 원리들이 단순히 사회를 기술하는 역할에 머무른 것이 아니라, 사회변혁을 위한 처방전이었다. 또한 개인은 생물의 세포처럼 전체의 일부라는 사회유기체설은 중국의 민족주의를 고양시키는 큰 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유는 근본이고, 민주는 실천이며, 기회의 평등도 백성의 힘을 한 곳으로 모아 부국강병을 이루는 수단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베이징퉁이학당(北京通藝學堂, 후에 베이징 대학에 통합됨)에서 강의하였고, 1897년 톈진에서 유신파 신문인『국문보(國聞報)』,『국문휘보(國聞彙報)』를 창간하는 한편 서양의 사회 경제에 관한 여러 저서들을 번역했다.


중국은 의화단 사건(1899-1901) 이후 세계의 열강이 중국으로 침투하여 조차지를 차지하고 철도부설권, 광산채굴권 등의 이권을 획득하면서 중국은 만신창이가 되어가자, 중국은 과분(瓜分, 참외가 칼에 잘리듯' 분할 점령되어 버림)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만연했다. 이러한 위기의식은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함께 동요하는 일종의 집단의식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국가 위기 속에서 옌푸는 활발한 저술활동의 길로 나서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종합하여 번역의 3대 원칙을 고수하려 노력하였다. 번역이 원전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信), 번역문이 매끄럽고 부드러워야 한다는 것(達), 번역한 문장이 간결하고 품위 있어야 한다는 것(雅)이었다. 옌푸는 이 세 가지의 원칙을 준수하며 신중하게 여러 번역서를 냈는데, 이것은 후대 번역가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었다.

 

안타까운 옌푸의 말년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이 일어난 뒤 인습을 타파하는 혼란기가 오자, 옌푸는 서구사상에 관한 종전의 입장을 차츰 버리고 고대 중국문화 쪽으로 점점 돌아섰다. 경사대학당 문과대학 교장으로 잠시 근무하였는데, 그 때 1913년에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비판한 ‘민약평의(民約平議)’를 통해 중국은 아직 공화제나 민주제를 시행할 만큼 국민이 성숙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군주제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옌푸는 서양의 유명한 저서들을 번역 보급하여 사회 계몽과 근대 중국의 문화 혁신에 상당한 공헌을 했지만, 말년에 그의 업적을 크게 손상시키는 잘못을 한다. 그것은 주안회(籌安會)에 서명한 것이다. 중화민국 초의 특수한 상황을 틈타 총통이 된 위안스카이(袁世凱)는 신해혁명의 열매를 삼키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려는 제제운동(帝制運動)을 전개하면서 부하들을 부추겨 군주제를 찬성하는 주안회를 조직했다. 당시 명성이 높았던 옌푸를 가담시켜 권위를 높이려하였고, 옌푸가 여기에 참여한 것이다. 위안스카이의 정권 찬탈 음모가 실패하자, 옌푸는 주안회 육군자(六君子)의 하나로써 중국인민들의 지탄을 받게 되었고, 그 명성도 빛을 잃고 말았다. 그의 말년에 위안스카이의 황제 즉위 운동에 휘말려 계몽가로서의 이미지를 흐리고 말았다.


이후 그는 1921년 10월 27일, 향년 68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묘지는 오늘날 푸저우시 교외에 자리하고 있다. 그의 저작으로 『엄기도시문초(严几道诗文钞)』,『후관엄씨총간(候官严氏丛刑)》,『엄역명저총간(严译名著丛刊)』등 다수가 남아 있다. 옌푸는 번역 이외에도 시도 썼는데 그가 죽은 뒤에 2권의 시집이 발간되었다.


옌푸가 영국 그리니치 해군대학에서 유학하던 시절, 동양에서 온 두 명의 생도가 성적이 가장 좋았다는데 바로 옌푸와 이토오히로부미다. 두 사람은 동창생으로서 절친했는데, 이토오히로부미는 성적이 옌푸에 늘 뒤져있음을 한탄했다고 한다. 그러나 졸업 후 이토오히로부미는 일본으로 돌아가 크게 출세하여 위세 당당한 국제 정치가가 되었고, 옌푸는 사회가 온통 부패로 찌든 조국에서 뜻을 펼치지 못하다가 번역 사업으로 울분을 달래야 했으며 말년에는 위안스카이 편에 가담함으로써 인민들의 지탄을 받는 인물이 되고 말았다. 이 두 동창의 인생 항로는 서세동점(逝世同点)의 시기에 있었던 당시의 중국과 일본의 역사상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좋은 사례라 할 수 있겠다. 


신해혁명과 중화민국 초 위안스카이의 제제운동으로 정국이 불안한 가운데 비록 옌푸의 사상은 사회에 직접적인 파장을 일으키지 못했지만, 19세기 말 교육과 서양 학술서적의 번역과 보급 활동을 통해 그가 남긴 계몽사상가로서의 업적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는 실로 중국 근대 계몽사상가 · 교육가 · 번역가로서 암울한 중국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주면서 일세를 풍미했던 인물이라 평가해도 지나침이 없다.


전순동 | 본지 집필위원 · 충북대학교 역사교육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