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왕망이 세운 ‘신(新)’ 나라는 왜 단명했는가?

지식창고지기 2010. 6. 30. 11:19

왕망이 세운 ‘신(新)’ 나라는 왜 단명했는가?

 

 

외척으로서 제위를 노린 왕망과 그의 야심


혁명(Revolution)은 쉽지만 개혁(Reformation)은 어렵다는 말이 있다. 기존 체제를 완전히 뒤엎고 새로운 틀을 짜는 것보다 기존 체제 아래 개혁을 새롭게 시행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는 말이다. 이런 예는 전한(前汉 B.C. 202~A.D. 8)을 멸하고 신(新, A.D. 8~23)을 건국한 왕망의 사례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전한은 선제(宣帝 B.C. 74~48)이후 원제(元帝B.C. 48~33), 성제(成帝 B.C. 33~7), 애제(哀帝 B.C. 6~1), 평제(平帝, A.D. 1-5) 등 4대에 걸친 황제들 모두 극단의 음란에 빠지고 조정의 정치는 외척과 환관들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다. 이 때 외척으로서 전한을 멸망시키고 새롭게 ‘신’이란 왕조를 창립한 강력한 인물이 왕망이다.


  왕망(王莽, B.C. 45~23, 재위 A.D. 8~23)은 자가 거군(巨君)으로, 그 조상은 본래 산둥성 지난(济南)군 동평양(东平陵)에서 살았으나 후에 오늘날 허베이성 다밍(大名) 지방으로 이사하여 살았는데, 이곳에서 원제의 황후 왕정군(王政君)의 동생 왕만(王曼)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므로 그는 춘추전국시대 제나라 귀족의 후예일 뿐 아니라 외척의 한 사람으로서 활약한 정치가이다. 기원전 33년, 전한의 성제가 즉위하고, 왕망의 고모 원정군이 태황후로 앉게 되자, 이를 계기로 황태후 동생들, 곧 왕 씨들이 외척으로서 권세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왕망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밑에서 외롭게 자랐기 때문에 출세 길에서 밀려나 있었다. 이런 왕망은 어려서부터 홀로 계신 어머니에게 효성을 다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독서를 즐기고, 품행이 방정하며 여러 관료들과도 좋은 유대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일족이나 관료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은 편이었다. 특히 대사마(大司马, 군사 담당의 최고 관직) 자리에 있던 백부 왕풍(王风)의 총애를 받아, 왕망은 황문시랑(黄门侍郎, 궁정 내의 황제 시종관)을 시작(B.C. 22)으로 관직에 오른 후, 사성교위(射声校尉, 금군의 궁병)를 거쳐 기원전 16년에는 봉읍(封邑) 1,500호를 차지한 신도후(新都侯, 오늘날 河南省 唐河县 서남쪽)에 봉해지는 등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당시 외척들 가운데에는 권세를 발판으로 부정하고 음란 및 퇴폐적인 행세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왕망은 부정과 여색을 멀리하고 유가 경전을 탐독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으며 여러 학자들과 교류하여 좋은 관계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왕망은 기원전 8년, 38세의 나이로 대사마 직에 올라 정권의 중추에서 세력을 떨쳤다. 애제 때 잠시 관직에서 물러나 있기는 하였으나, 애제의 죽음과 함께 다시 대사마 직에 올라, 9세의 평제를 옹립하는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는 평제보다 3살 위인 자신의 딸을 평제의 황후로 삼게 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더욱 강화시켰다. 외척 왕씨의 종친이나 왕망파 간에는 왕망을 주공(周公)에 비유할 만큼의 성현으로 평가하였다. 그는 생각이 깊고 인사에 공정하였으며 재물에 대해 청렴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에게 ‘한 왕조의 왕실을 안존하게 하는 인물’이라는 뜻으로 ‘안한공(安汉公)’이라는 미칭이 내려졌다(A.D. 1).  ‘안한공’으로서 ‘공후백자남(公侯伯子男)’ 5등작의 ‘공작(公爵)’의 칭호가 내려진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왕망은 사람들에게 옛날 주공의 시대가 다시 도래 하였다는 인상을 주기 위하여 변방 이민족으로 하여금 흰 꿩(白雉)을 헌상하도록 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주나라 초기에 주공이 어린 성왕을 보좌하고 있을 때, 주변 이민족들이 성인 주공의 덕화에 감응하여 길조의 흰 꿩을 헌상하는 일이 많았는데, 이런 고사에 연유하여 주변 민족들에게 흰 꿩을 바치도록 함으로써 성현의 시대를 암묵적으로 나타냈던 것이다. 이후 왕망은 노골적으로 성인으로 추앙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왕망은 ‘재형(宰衡)’이라는 최고의 칭호까지 얻게 되었다. 주나라의 성왕을 보좌한 주공을 태재(太宰), 은나라의 탕왕을 보좌한 이윤(伊尹)을 아형(阿衡)이라 불렀는데, 왕망은 이 두 인물의 덕을 다 겸비한 인물이라는 데서 ‘재형’이라는 관위를 두고, 거기에 취임(A.D. 4년)하게 되었다. 결국 그는 ‘재형’이라는 높은 재상으로서 활동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복식, 관면, 거마 등은 이미 황제와 거의 같을 정도였다. 그는 정계의 반대파를 물리치고 14세의 평제를 독살했다. 이러한 때에 왕망은 당시 유행하던 오행참위설(五行讖说)을 교묘히 이용하며 인심을 모았다. 맹통(孟通)이라는 사람이 우물에서 나온 것이라며 흰 돌(白石) 하나를 가져왔다. 거기에는 붉은 글씨로 “告安汉公莽为皇帝(고하노니 안한공 왕망은 황제가 되라)” 라는 여덟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물론 이것은 왕망 일파가 벌인 연극이었지만, 당시 사람들은 그것을 하늘이 내린 상서로운 징조, 곧 천자가 탄생할 ‘부명(符命)’이라며 중시하였다. 왕망은 이 부명에 따라 황제가 되려 하였으나, 황태후가 난색을 표명하였다. 이에 겨우 두 살 된 유영(刘婴:宣帝의 현손)을 황태자로 세웠다. 그리고 자신은 ‘섭황제(摄皇帝)’, ‘가황제(假皇帝)’라 칭하며 장차 황제가 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이후 왕망파에서는 부단히 각종 명목을 내세워 왕망이 황제가 되어야 함을 진언하였는데, 왕망이 총애하던 부하 애장(哀章)이라는 사람이 왕망이 황제가 되어야 한다는 부서(符瑞)를 헌상하자, 이것을 받아들였다. 53세의 왕망은 어린 유영으로부터 ‘선양(禅让)’의 형식을 밟아 제위를 물려받아 한나라를 멸하고(A.D. 8), 황제에 즉위하여 나라를 세웠다. 국호를 ‘신’(新, A.D. 8~23)이라 하고, 도읍지 명칭도 ‘창안(长安)’을 ‘창안(常安)’으로 개명하였다.


  왕망은 중국역사상 ‘선양’이라는 형식으로 황제가 된 최초의 인물이다. 하지만 실은 그는 야심을 가지고 유영의 자리를 찬탈하여 나라를 세웠던 것이다. 이 때 국호를 ‘신(新)’이라 한 것은 일찍이 그가 제후로서 ‘신도후(新都候)’에 봉하여진 일이 있었는데, 여기서 ‘신’을 따왔다고 한다. 왕망은 이 때 스스로 순(舜) 임금의 말예라 자칭하였다. 그때까지 주공의 재래를 강조하여 왔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순임금을 내세운 것은 당시 한은 요(尧)의 말예라 하고 있었고, 요와 순 사이에는 유명한 선양의 전설이 있기 때문에 그것의 재현을 머리에 그렸던 것이다. 본래 왕망은 청년기에 유학에 몰두하였고, 후에는 천재유학자 유흠(刘歆, 약 B.C. 50 ~A.D. 23)등과 교분이 짙었다. 유흠을 비롯하여 전한 말의 유학 풍은 서상(瑞祥)이나 부명을 중시하는 참위사상에 기울고 있어, 일종의 신비주의적 색채가 강하였는데, 왕망이 찬탈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외척이라는 황실과의 관계가 작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전한 말 유행하고 있던 참위설을 교묘히 이용하였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왕망의 개혁과 좌절


열광적인 유교 신봉자였던 왕망은 황제가 되자 그 이듬해(8년)에 연호를 ‘시건국(始建国)’이라 정하고, 전한 후기의 부패한 정국을 타개하고자 여러 개혁을 단행하였다. 고식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제도 자체의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 목표는 주(周)나라의 제도(周礼)를 내세워 이상 국가를 건설하려는 것으로, 과거 주나라 시대로 복귀하려는 유교주의를 표방하였다. 국호로 새롭다는 ‘新(신)’을 채택하였으나 그의 정책에는 복고적 색채가 농후하였던 것이다.


  왕망의 개혁 정책은 유학 이념의 색체가 짙게 반영되었다. 관제나 토지제도에 주 행정법전인 상서(尙书)등에 보이는 옛날 용어를 사용하였다. 3공(公), 9경(卿), 27대부(大夫) 등, 주나라의 제도를 그대로 따랐고, 지명까지도 바꾸는 일이 많이 있어 도리어 혼란을 가져오는 예가 많았다. 왕망은 ‘개명광(改名狂)’이라 할 정도로 형식을 좋아하면서 유교경전에 따라 대폭적인 관제의 개혁, 관명·지명 등의 명칭을 변경하여 새 왕조의 참신성을 높이려 하였으나, 이러한 개혁은 도리어 행정의 혼란을 가중시키고 말았다.


  그는 당시 가장 큰 문제를 토지제도라 보았다. 그는 주나라의 정전제(井田制)가 진, 한대에 파괴되어 토지겸병이 널리 유행함으로써 빈민은 송곳하나 꽂을 땅도 없게 될 뿐 아니라 소나 말처럼 취급되어 노비로 팔려나가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널리 확대되어 있던 토지 겸병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토지 왕전제(王田制)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노비매매를 금하였다. 왕전제란 전국의 토지를 모두 국유로 하고, 사사로이 매매하는 것을 금하였을 뿐 아니라 한 집에 남자가 8명 이하일 경우에는 900무(1井) 이상을 소유할 수 없게 하고, 나머지는 친척이나 토지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는 토지 국유제이다. 이러한 왕전제는 주대의 정전제를 모방한 것이었다. 그러나 왕망의 토지개혁정책은 이미 대토지사유제와 노비소유제가 일반화되고 있던 당시의 사회 상황에 정면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왕망은 토지와 노비의 매매를 금지하여 토지겸병과 농민의 노예화를 억제하려하였다. 하지만 이 정책은 지주·관료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쳐 3년 만에 중단되고 말았다.


  왕망은 또 상업의 국가통제정책을 실시하였는데, 그것이 오균(五均)·육관(六莞) 제도이다. 오균은 창안(长安) 뤄양(洛阳), 한단(邯郸), 린즈(临淄), 젠예(建业), 청뚜(成都) 등 중요도시 시장에 오균사시사(五均司市师)를 설치하고, 상공업의 관리, 세금의 징수, 물가통제 등을 국가가 직접 담당하도록 한 것이다. 육관은 정부에서 소금·철·술·야철·화폐주조 등의 사업을 독점경영하고, 이름난 산택(山泽)에서 생산세(生产稅)를 징수하도록 한 국가 통제 정책이다. 오균·육관제도는 평준(平準) ·균수(均输) 등 여러 상공업 통제 정책과 함께 당시의 현실이 요청하는 정책으로, 전매제 강화와 국가에 의한 물가 통제, 농민에 저리의 자금 융자 정책을 통하여 대상인 및 고리대금업자 등을 억제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관계하는 많은 관료가 대상인 중에서 임용되었고, 또한 그들은 뇌물 수수행위와 사리사욕을 자행하였기에 이 제도의 정신이 살아나지 못하고 실패하고 말았다. 또한 경제 안정을 위한 정책으로 화폐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는 전후 8년간, 4차례에 걸쳐 화폐개혁을 단행하였는데, 화폐의 질이 떨어져 실패하고, 도리어 경제혼란을 가져오고 말았다.


  왕망은 유교적 중화사상을 내세우면서, 또 한편 국내정치의 실패를 밖으로 돌리려는 뜻에서 지금까지 한에 복속하여 온 흉노 및 서역의 소수 민족에 대한 원정을 단행하였다. 북방 흉노족은 전한 말부터 신의 건국에 이르기까지 나타난 일련의 혼란기를 맞아 한의 변경을 침범하는 일이 잦았기에, 왕망은 흉노원정을 단행하였으며, 더불어 주변 이민족의 군장들을 모두 ‘왕’에서 ‘후(候)’로 격하시켰다. 이것은 주변의 여러 민족을 격분시켰고, 이에 불만을 품은 소수민족들은 중국으로부터 이탈하였다. 특히 선제 이래 우호관계를 유지하여 오던 흉노와의 관계가 다시 악화되어가자, 왕망은 국내의 실책을 만회하고 대외의 위신을 회복하기 위해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흉노 원정을 단행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 때 왕망은 고구려에 대해서도 ‘하구려후(下句丽侯)’라 하여 위상을 격하시켰는데, 자연히 고구려와도 충돌하게 되었다.


  왕망의 개혁은 여러 면에서 혁명적이었다. 더불어 유교적 이상주의를 표방하면서도 그의 개혁에는 법가주의적인 성격이 강하게 내포되어 있었다. 이러한 개혁정책은 결과적으로 한말의 여러 모순과 사회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전제지배를 꾀한 그의 정책은 오히려 농민들에게 고통을 주었고, 각지에 있는 호족들과의 이해가 상반된 점에 실패의 원인이 있었다. 그의 대외정책의 실패도 사회혼란을 더욱 가중시켰다. 그의 개혁은 시대변화의 대세에 역행한 것들이었고, 거기에 더욱 전한정권의 찬탈자라고 하는 비정통성과 친족의 살해라는 비도덕성으로 인하여 개혁은 인민의 지지를 얻지 못하였던 것이다. 혁신정책이 안고 있는 위험부담은 왕망정권에서도 예외는 아니었으며, ‘신’ 나라는 결국 단명으로 끝나고 후한에게 왕조를 넘길 수밖에 없었다.

 

녹미군, 적미군의 반란과 ‘신’ 나라의 파산


왕망의 한왕조 찬탈은 무력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대사마에서 안한공, 재형, 가황제 등으로 한 걸음씩 계단을 밟아 오르듯이 행해졌기 때문에 찬탈을 눈치 챈 때는 이미 왕망이 옥좌에 앉은 후였다. 이러한 때에 왕망의 실정이 점점 표면화되자, 곳곳에서 왕망 정권에 반대하는 봉기군이 일어났다. 실은 일반 백성들은 황제가 누구든 관계없이, 백성들의 생활만 안정시켜 준다면 그 군주에게 복종한다는 심리가 작용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전한 말기 부패한 정치로 생활고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왕망이 조작해낸 갖가지 상서로운 조짐과 그의 정치적 제스처에 넘어가 성천자가 나타난 것으로 여기며 왕망의 정치를 기대하였는데, 그 기대가 무너지게 되자, 백성들은 왕망 정권에 반기를 들었다.


  왕망 정책의 실패 뿐 아니라 거기에 더욱이 대기근까지 겹치게 되자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이러한 반란군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녹립군과 적미군의 반란이었다. 17년에 후베이(湖北)성의 징저우(荊州)의 녹림산(綠林山, 오늘날 湖北 大洪山 일대)을 근거지로 신시(新市) 출신의 왕광(王匡), 왕봉(王凤) 형제를 지도자로 하는 약 5만 명의 봉기군이 집결하여 왕망정권에 반기를 들었다. 이들을 녹림군(绿林军)이라 칭하였다. 18년에는 오늘날의 산둥(山东)성 동부와 장쑤(江苏)성 북부 일대에 큰 기근이 닥치자, 낭야(琅邪:지금의 산둥성 주청[諸城]현 동남해안 지역) 사람인 번숭(樊崇,~27)이 산둥 쥐현(莒县)에서 무리를 이끌고 반기를 들자, 수 만 명이 그 깃발 아래 모여 들었다. 이 반란군들은 적군과 아군을 식별하기위하여 눈썹을 붉은색(赤色)으로 물들였기에 ‘적미군(赤眉军)’이라 하는데, 적색은 전한 왕조를 상징하는 것으로, 적미군의 목표는 왕망을 타도하고 한을 부흥하는 것이었다.


이 외에 황야 유역의 평야 지대에서도 동마(铜马) 기의군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봉기군이 난립하여 큰 부대는 수십만 명, 작은 부대는 1만 명 이상 집결하여 봉기하였다. 전국에서 봉기군이 난립하자 각 지방의 호족과 지주들도 다투어 왕망 정권 타도를 위한 무장을 했다.  호족 세력 중에서는 난양(南阳) 출신 호족으로 한 왕조의 핏줄을 이은 유연(刘縯, 유수의 맏형), 유수(刘秀, B.C. 6~A.D.57, 후한 光武帝로서 재위 기간은 25~57년) 형제가 이끄는 부대가 가장 강력하였다. 이들은 녹림군과 연합하여 한 왕조의 부흥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왕망의 죄상을 고발하였다. 이들은 유현(刘玄)을 임시황제로 내세워 ‘경시제(更始帝)’라 칭하고(23), 완청(宛城, 오늘날 河南省 南阳市 宛城区 일대)에 도읍하여 왕망 타도의 기치를 드높였다. 왕망은 이들을 진압하기 위하여 대군을 파견하였다. 왕망은 40만 군대를 보내어 곤양(昆阳, 오늘날 河南省 叶县 일대)에 있는 유현 군대를 포위하였다. 왕망군과 유현군이 곤양에서 대치하고 있었는데, 8000명 밖에 되지 않은 유현군은 유수의 활약으로 왕망의 40만 대군을 참패시킴으로써 왕망 세력에 치명적 타격을 주었다. 이로써 곤양전투는 중국 전쟁 역사상 수천의 소수 군대로서 수십만의 대군을 크게 이긴 유명한 전투로 기록되게 되었다. 곤양전투에서 크게 승리한 이후, 경시제 유현은 전투에 큰 공을 세운 유수 형제를 시기 질투하였다. 유능한 유연(유수의 형)을 두려워하여 그를 살해하였고, 유수에게는 허베이(河北) 평정을 명하여 외곽으로 몰아냈다. 경시제는 수도 창안을 공격하기 위하여 녹림군을 파견하였는데, 이 때 창안성 내의 민중도 이에 호응하여 봉기함으로써 쉽게 창안을 점령할 수 있었다. 이에 왕망은 궁궐을 빠져나와 도망가다가 상인 두오(杜吴)에게 살해됨으로써 ‘신’ 나라는 15년 만에 망하고 말았다(23년). 이 때 왕망은 향년 68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창안을 점령한 경시제는 이곳으로 수도를 옮겨 혼란을 수습하려 하였으나 그의 군대는 규율이 없고 부패하여 창안성 내에서 노략질과 살상을 자행하니 사회의 불안과 혼란이 극심하여졌다.


  한편 적미군은 한나라 황실의 일족이라 칭하는 유분자(刘盆子)를 황제로 추대하고, 연호를 ‘건세(建世)’라 하고서 창안을 공격했다. 이들은 경시제 유현을 죽이고 정권을 탈취하였는데, 그들 역시 질서가 바로서지 않은 채 약탈만을 자행하였다. 이 때 허베이 일대를 평정하여 강력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던 유수 장수들에게 추대되어 뤄양(洛阳)을 도읍으로 황제의 자리에 오르니(25년), 이가 후한의 광무제(光武帝, 25~57)이다. 광무제는 반란세력을 진압하고 통일시키는 일이 급선무라 생각했다. 우선 동방으로 철수하는 적미군을 허난성 이양(宜阳)에서 항복시켰고(27년), 이후 10여년에 걸쳐 각 지방의 반란 세력을 진압하였는데, 이로써 천하 평정의 사업을 완수하였다. 광무제가 신을 이어 후한 왕조를 세울 수 있었던 데는 그의 지도력이나 정치적 역량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출신지 난양(南阳)과 허베이 지방의 호족 세력이 큰 힘이 되었다. 유수는 전한의 종실로 난양의 대지주이고 그의 외삼촌 번굉(樊宏)도 호족이었다. 유수를 도와 함께 군대를 이끌었던 사람들 중에는 관료지주 및 부호들이 많았으니 곧 후한의 창업은 호족출신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전한의 고조 유방이 평민출신이며 창업공신들이 대부분 미천한 계층이었다는 것과는 크게 대조가 되는 면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후한 정권은 호족과 연계된 호족 연합정권의 성격이 강한 편이다. 후한의 건국과정에서 호족의 힘을 바탕으로 제국이 성립되었다는 것은 바로 후한 정권과 호족과의 밀접한 관계를 설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왕망정권의 역사적 성격과 의의


전한은 왕망에 의하여 찬탈되었고(AD. 8년), 왕망의 신정권은 불과 15년 만에 멸망하고(23년) 후한으로 이어졌다. 전·후한 400여 년간의 역사에서 본다면 왕망정권 15년간은 아주 짧은 기간에 불과하다. 그러나 왕망의 ‘신’ 정권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왕망정권은 중국역사상 처음으로 무력이 아닌 선양으로 왕조를 찬탈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왕망의 개혁이 중국의 역사에서는 보기 드물 정도로 혁명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왕망에 대한 평가는 크게 두개의 상반된 견해가 있다. 하나는 유교주의의 가면을 쓴 사악한 정치가로 보는 부정적 시각이 있는가 하면, 또 하나는 위대한 개혁자, 탁월한 정치가로 평가되기도 한다. 후스(胡适)는 그의『중국철학사(中国哲学史)』에서 왕망을 중국고대의 뛰어난 사회주의자로 평가하였고, 그의 경제정책을 국가사회주의라고 높이 평가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왕망의 성격상의 괴벽함과 급진적 개혁에 따른 정치 혼란이 그의 정권을 단명으로 끝나게 하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는 공평무사를 내세워 그의 친 자식들을 가혹하게 처벌하여 천륜을 어긴 사람이기도 하다. 왕망은 네 아들(宇·獲·安·臨)을 두었는데, 병사한 왕안을 제외하고는 모두 비행에 연루되어 자살하고 말았다. 이것은 왕망에 의해 그렇게 내몰리게 되었는데, 왕망은 아무리 자기 자식이라 하더라도 법을 어기면 처형한다는 엄정성을 과시한 횡포에서 나온 처사였다고 하며, 왕망의 부인은 이를 슬퍼하여 실명(失明)하였다. 그는 정권 야욕을 위해 자신의 딸을 평제의 황후로 삼아 입궐시키면서 세력을 키워 나가면서 전한을 멸망시키고 신나라를 세워 이상사회를 실현하고자 대담한 정책을 폈으나, 그의 시정 방침은 급진적이었고, 또한 현실을 무시한 급진적 개혁으로 말미암아 사회를 더욱 혼란에 빠뜨리고 말았다. 그가 취한 호족 억제책 및 국유화 정책은 성장해가는 호족과 상인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경제와 행정의 혼란은 농민들의 생활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긴 역사를 통하여 배양되어 온 사회체제, 강대한 세력을 지닌 호족, 대상인, 흉노 등의 존재는 일련의 과격한 법령만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만큼의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전한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구조적인 문제를 일시에 해결하려는 성급함으로 인해 왕망 정권은 쉽게 붕괴하고 말았다고 할 수 있겠다. 


  왕망이 세운 신나라가 이상주의적 사회 건설을 목표로 급진적 개혁정책을 쓰면서 반(反)호족정책을 취한 결과 15년 만에 쉽게 붕괴되었다는 사실은 ‘전한’에서 ‘신’, 그리고 ‘신’ 정권에서 ‘후한’ 정권으로 전개되는 과정이 호족시대의 도래를 의미하는 시대적 변혁임을 보여주고 있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전한에서 후한으로 넘어가는 시대는 대토지 사유화가 촉진되고 호족 세력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시대적 전환기였던 것이다. 이러한 변화에 역행한 왕망정권의 몰락은 역사의 당연한 귀결이었던 것이다. 이후 호족 세력은 후한 200년간 국가와 인민 사이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면서 지배세력으로 발전하여 나갔던 것이다.


전순동 | 본지 집필위원 · 충북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출처 | 중국어문선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