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우(蚩尤) 후예 묘족(苗族)의 대이동(大移動)
묘족(苗族, 먀오쭈)은 장구한 역사를 간직한 민족이다. 이미 5천여 년 전부터 중국 고대 전적(典籍)에 이들의 선조(先祖)에 대한 기록이 기재되어있다. 중국 왕조 성립 이전부터 중원(中原)에서 ‘치우부락(蚩尤部落)’으로 맹위를 떨쳤으며, 상주시대(商周時代)에는 장강(長江, 揚子江) 중류 남쪽에 ‘삼묘국(三苗國)’을 건립하기도 하였다.
<사진: 치우(蚩尤) 초상, 서강묘족박물관(西江苗族博物館).>
오늘날 묘족(苗族)은 중국 내에서 귀주성(贵州省), 호남성(湖南省), 운남성(雲南省), 사천성(四川省), 광서장족자치구(廣西壯族自治区), 광동성(廣東省) 등지에서 거주하고 있다. 이것은 묘족의 역사적인 다섯 번에 걸친 대이동(大移動)의 결과다.
묘족 선조(先祖)는 본래 사천성(四川省) 아롱강(雅礱江), 민강(岷江), 파강(巴江), 그리고 가릉강(嘉陵江) 등의 상류와 중류 지역에 거주하였다.1) 고대 강족(羌族)이 남하(南下)함에 따라 이들은 동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것이 묘족 선조의 첫 번째 대이동이었다. 이들은 장강(長江, 揚子江) 중류의 북쪽 강한평원(江漢平原)2)과 남쪽 동정호(洞庭湖)3)와 팽려(彭蠡)4) 사이에 머물렀다.
<사진: 묘족 선조 이동(중국 상고시대)>
장강 중류에 머물던 묘족 선조(先祖)의 인구는 증가하였고, 문화와 생산력이 발전되었다. 이에 따라 점차로 세력이 확장되면서 이들은 ‘구려(九黎)’라 불렸다. 구려는 9개 부족(部族)과 81개 씨족(氏族)을 관장하였다. 이때 역시 동진(東進)하던 ‘염제족(炎帝族)’5)과 충돌이 발생하게 되었다.
염제족은 구려족에게 격퇴 당하고 황하(黄河) 북쪽으로 물러났다. 이후 해를 거듭하면서 구려족의 세력은 강대해졌다. 이때 치우(蚩尤)가 등장한다. 나면서부터 총명한 치우는 배우기를 즐겼으며, 용감하여 싸움도 잘 하였다. 장성한 치우는 구려족의 우두머리가 되어, 여러 병기를 제조하는 등 군사력의 증대를 꾀하였다.
한편 황하 상류에 자리를 잡고 있던 ‘황제족(黄帝族)’6)이 남하(南下)하면서 구려족과 충돌하게 되었다. 황제족은 구려족과의 아홉 번의 싸움에서 연패하였다. 다급한 황제족은 염제족과 연합하고 탁록(涿鹿)7)에서 치우와 대접전을 가졌다. 치우는 이 싸움에서 대패하고 목이 잘렸다. 이후에도 구려족은 계속해서 황제족과 싸웠으나 연패를 당하고 북쪽으로 이주하였다.
북쪽으로 이주한 일부 구려족은 ‘여국(黎国)’8)을 건립하였다. 이들이 산동(山東) 일대에 있었던 신석기 시대 후기의 문화인 대문구문화(大汶口文化)를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들의 무덤에서 출토된 토기 문양이 오늘날 묘족 자수(刺繡)의 문양과 매우 흡사하기 때문이다.
<사진: 묘족(苗族)은 치우(蚩尤)를 조상(祖上)뿐만 아니라 민족의 신으로 숭상한다. 곤명 민속촌.>
한편 연합한 황제족과 염제족은 중국 한족(漢族)의 선조인 ‘화하족(華夏族)’을 형성하였다. 탁록 대전 이후에 있은 계속된 싸움에 또 다른 일부는 포로가 되어 화하족의 노예가 되었다. 이들은 나중에 한족(漢族)의 일원이 되었다.
탁록(涿鹿) 대전(大戰) 이후, 대부분의 구려족(九黎族)은 남쪽으로 이주하였다. 이것이 세 번째 대이동이었다. 이들은 장강(長江) 남쪽 동정(洞庭)과 팽려(彭蠡) 사이에, 삼묘(三苗)를 주축으로 부락연맹체 성격의 국가인 ‘삼묘국(三苗國)’을 건립하였다. 이때가 중국 상고시대(上古時代)의 황제(黄帝)에서 요(堯)에 이르는 시기였다.
장강(長江) 남쪽의 부락연맹체인 삼묘국(三苗國)은 오랜 기간에 걸쳐서 세(勢)를 비축하여 강대하여졌다. 요(堯)는 삼묘(三苗), 공공(共工), 환두(歡兜, 또는 驩兜) 등을 공격하기를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뒤를 이은 순(舜)은 이들을 공격하였다(‘南巡狩猎’). 그 결과 공공은 유주(幽州)9)로 이동하고, 환두는 숭산(崇山)10)으로 물러나고, 삼묘는 삼위(三危)11)로 쫓겨났다.
이로서 부락연맹체인 삼묘국은 분산, 와해되었다. 이 싸움으로 우(禹)의 아비인 곤(鲧)이 우산(羽山)12)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삼위로 쫓겨난 무리들은 싸움을 멈추지 않았으나, 일부는 하 왕조(夏 王朝) 우(禹)에 이르러 투항하기 시작하였다.
마왕퇴(馬王堆) 1호 무덤에서 발견된 관(棺)을 두른 T자 형 띠.
다섯 번째 대이동은 와해된 부락연맹체의 이동으로, 다른 이동과는 달리 뿔뿔이 분산되었다. 삼위(三危)로 쫓겨난 삼묘(三苗)는 가장 강한 부족이었다. 이들은 물러나면서 저항하였고, 패하면 또 이동하였다.
이들은 다시 삼위산(三危山)을 출발하여 남하(南下)하였다. 대설산(大雪山)13)을 지나고, 혼수하(渾水河, 黄河 지류)를 건넜다. 이어서 금사강(金沙江)을 따라 남쪽의 운남성(雲南省) 북동부와 귀주성(貴州省) 북서부로 이동하였다.
숭산(崇山)으로 물러난 환두(欢兜)는 가장 짧은 거리를 이동하였다. 숭산에서 동쪽으로 이동하여 오늘날 호남성(湖南省) 상덕(常德)에 도착하였으나, 다시 동정(洞庭)과 팽려(彭蠡) 사이로 이동하였다. 훗날 이들은 주 왕조(周 王朝)의 근심거리가 되었다.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이르러 초(楚)와 화목하게 지내 ‘초만(楚蠻)’의 주요 구성원이 되었다.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진(秦)에 의해 초(楚)가 점령당하게 되자, 일부는 무릉산(武陵山)14) 지역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이때에 ‘무릉만(武陵蠻)’이라 불렸다.
이곳에서 그들은 곧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하였으며, 서한시대(西漢時代)까지 빠르게 발전하였다. 서한시대 무릉산 지역에 있었던 ‘장사국(長沙國)’ 승상(丞相)이던 이창(利蒼)의 가족 무덤인 ‘마왕퇴(馬王堆) 무덤’이 이를 뒷받침한다. 1호 무덤에서 발견된 이창의 처(妻) 신추(辛追)의 관(棺)을 두른 T자 형 띠가 묘족의 장례 관행인 것으로 보아 묘족 여인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서기 47년 동한(東漢)에 의해 쫓겨나게 되었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도달하게 된 곳은 지금의 호남성(湖南省) 서부, 귀주성(贵州省) 북동부, 사천성(四川省) 동남부, 그리고 호북성(湖北省) 남서부 일대였다.
삼묘(三苗) 중 일부는 동해안(東海岸)으로 이동하여 오랫동안 정착하였으나, 서서히 서쪽으로 이주하였다. 그들 중 일부는 바다를 건너 일본(日本)으로 이주한 것으로 짐작되어진다. 오늘날 일본의 일부 지방이 귀주성 동부지역에 거주하는 묘족과 비슷하고 문화적으로 동일한 현상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서강(西江) 묘족의 이동 경로, 서강 묘족 박물관
귀주성 동부지역에 거주하는 ‘묘족의 오래된 노래(苗族古歌)’의 마지막 부분인 ‘산 넘고 물 건너는 노래(跋山涉水歌)’에 따르면 동해안에서 서쪽으로 이주한 이들은 싸움이 없이 평화적으로 이동을 하였다. 점차적으로 본래 삼묘(三苗) 부락연맹체(部落聯盟体)가 있었던 지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일정 기간이 지난 후 다시 좋은 장소를 찾아 나섰다. 동정호(洞庭湖)를 떠나 오계(五溪)15) 지역에 이르렀다. 그리고 무수(巫水)16)를 따라 남령(南岭)17)을 들어선 이후, 오늘날의 광서장족자치구(廣西壯族自治區) 융수(融水)18)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다시 북상하여 귀주성 남동지역에 정착하였다. 이때가 약 1,200여 년 전인 송 왕조(宋 王朝) 시기였다.
<사진: 서강(西江) 묘족의 부자연명(父子連名) 세계보(世系譜), 서강 묘족 박물관>
이러한 주요 이동 이외에 많은 작은 이동이 있었다. 그러나 송대(宋代)를 전후하여 대부분의 묘족(苗族)들은 오늘날의 거주 지역에 정착하였다. 그러나 원(元), 명(明), 청(淸)의 통치자의 끊임없는 침공을 당하였다. 또한 기근, 질병, 농지의 황폐, 그리고 인구 증가 등의 이유로 지역 내에서 이동은 끊임이 없었다.
한편 청 건륭연간(乾隆年間, 1736-1795년)에는 묘족들의 호적을 정리하면서 그간 유지해온 부자연명제(父子連名制)를 강제로 폐지시켰다. 그리고 이들에게 한족(漢族)의 성(姓)을 부여하였다(蔣, 唐, 侯, 楊, 董, 宋, 顧, 龍, 陸, 李, 梁, 毛, 陳, 金, 吳 등). 마치 일제(日帝) 때 있었던 창씨개명(創氏改名)과 같은 만행이었다.
비록 과거와 같은 세력을 비축하지는 못했지만, 묘족(苗族)들은 끊임없이 중원 왕조에 대항하여 봉기하였다. 지난 세기에 있었던 국공내전(國共內戰) 때, 패퇴하던 모택동(毛澤東)은 이들의 도움으로 연안(延安)에 도착할 수 있었다.
중국의 묘족(苗族)들은 수천 년간의 천신만고 끝에 겨우 백여 년 전부터 안주하기 시작하였다. 민족 평등이란 미명(美名)아래 몇 십 년 전부터 자치 지역이 형성되고, 비교적 평안한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베트남 북부, 라오스, 미얀마, 타이 등에 거주하는 묘족들은 아직 그렇지 못하다.
특히 라오스에 거주하던 묘족들은 월남전(越南戰)에 휘말렸다. 1954년 베트남 북부가 공산화 되면서 가톨릭 신자 등이 남쪽으로 탈출로로 이용하던 길이 월남전 동안 ‘호지명(胡志明) 루트’로 사용되었다. 미국 CIA는 이 비밀 루트를 파괴하기 위해 상무적(尙武的)인 라오스의 묘족을 그들의 비밀전쟁(Secret War)에 이용하였다. 이념에 상관없이 거주한 지역에 따라 서로 총을 겨누기도 하였다.
<사진: 묘족들의 봉기를 이끈 장수미(張秀眉, 1823-1873)19) 초상, 서강묘족박물관>.
1960년대에 1만 명의 라오스 거주 묘족이 전사하였다. 1975년 라오스가 공산화된 이후, 박해가 뒤따를 약 16만 명의 묘족이 미국, 프랑스, 호주 등으로 이주하였다. 아직 남아 있는 묘족은 월남전에서의 역할과 상관없이 소수민족으로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 베트남, 미얀마, 타이 역시 마찬가지다.
1) 이들 네 강은 모두 장강(長江) 상류의 지류다.
2) 장강(長江)과 한강(漢江, 또는 漢水) 사이의 평원으로, 호북성(湖北省) 중남부 지역. 한강은 장강의 지류로 총 길이가 1,532㎞에 달한다. 섬서성(陝西省) 한중(漢中)에서 발원하여 호북성을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가로질러, 무한(武漢)에서 장강과 합류한다. 중국 왕조인 한(漢), 도시 한중(漢中), 중국의 다수 민족인 한족(漢族) 등의 이름이 이곳에서 유래되었다.
3) 호남성(湖南省) 북부에 있는 중국 제 2의 담수호.
4) 강서성(江西省) 북부에 있는 중국 제 1의 담수호 파양호(鄱阳湖)의 옛 이름.
5) 전설의 중국 상고시대(上古時代) 신농씨(神農氏) 후예. 신농부락(神農部落)의 우두머리가 염제(炎帝)였다.
6) 전설의 중국 상고시대(上古時代) 신농씨(神農氏) 후예. 성(姓)이 공손(公孫)이며, 이름이 헌원(軒轅)인 황제(黃帝)의 일족. 황제(黃帝)는 한족(漢族)의 선조이며, 중국의 종교, 문화 중요 인물이다.
7) 하북성(河北省) 북서쪽 장가구(張家口)에 위치.
8) 산동성(山东省) 서쪽 운성현(鄆城县) 서부에 위치. 상 왕조(商 王朝) 말기에 주 문왕(周 文王)에 의해 소멸되었다(西伯勘黎).
9) 하북성(河北省) 북부에서 요령성(辽寧省)에 이르는 지역.
10) 하남성(河南省) 북서부에 위치한 산, 중악(中嶽).
11) 삼위산(三危山,또는 卑羽山)의 옛 지명, 감숙성(甘肅省) 돈황(敦煌) 부근의 산.
12) 강소성(江苏省) 동해현(东海县)과 산동성(山东省) 임술현(临沭县) 사이에 위치한 산.
13) 사천성(四川省) 서쪽에 있는 산맥. 최고봉인 공알산(贡嘎山)은 해발 7,556m.
14) 호남성 북서부에서 귀주성, 호북성, 중경시에 뻗어있는 산. 최고봉은 귀주성에 있는 범쟁산(梵净山)으로 해발 2,494m.
15) 호남성(湖南省) 부화(怀化)에 흐르는 酉水(酉溪), 辰水(辰溪), 溆水(溆溪), 舞水(無溪), 渠水(渠溪)의 옛 이름.
16) 호남성(湖南省) 서남쪽에 위치한 강으로 원수(沅水)의 지류다. 오늘날 이름은 홍강(洪江)이다.
17) 호남성(湖南省), 강서성(江西省), 광동성(廣东省), 그리고 광서장족자치구(廣西壮族自治区) 지역에 있는 산들의 총칭. 협의로 오령(五岭; 越城, 都庞, 萌渚, 骑田, 大庾 등 다섯 산)을 가리킨다.
18) 광서장족자치구(廣西壯族自治区) 북쪽에 위치한 대묘산(大苗山) 부근의 묘족자치현(苗族自治縣).
19) 1855년에 귀주성(貴州省) 대강현(台江縣)에서 시작된 묘족 봉기의 지도자. 태평천국의 난과 더불어 청조(淸朝)의 지배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10개 현(縣)을 포함한 귀주성 동남부를 장악하였으나, 1872년 청군의 대대적인 진압으로 17년의 반란이 마감되었다.
중국 정부는 반란, 봉기 등의 용어보다 봉건 타파를 위한 것으로 보고 기의(起義)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작금(昨今)에 티베트나 신장(新疆) 등지에서 일어나는 봉기는 기의(起義)와 무관한 것인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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