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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와 중국 다민족

지식창고지기 2010. 7. 17. 19:46

지리와 중국 다민족

 

 

내지와 변방 지역으로 구분되는 중국

 

중국인의 거주 범위는 역사적으로 황하 중류 계곡의 중심지로부터 사방으로 크게 확장되었다. 지금과 같은 범위의 중국 영토가 완성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중국이라는 단어는 춘추 시대에 나타났지만, 그것은 지리적 중심에 있는 나라를 의미하는 보통명사에 지나지 않았다. 보다 확실하게는 청나라 말기에 이르러서야 오늘날의 범위를 차지하고 있는 중국을 국가의 개념으로 간주하게 되었던 것이다. 즉, 1912년 1월, 작년에 있었던 신해혁명의 결실로 중화민국이 등장하면서 그 약칭으로 중국을 쓰게 되었으며, 이로써 중국이 국가를 의미하는 대명사가 된 것이다.

 

이러한 중국은 크게 보아 내지와 변방지역으로 양분할 수 있다. 내지는 예부터 한족이 정착하여 곡물 위주의 농업을 주요 생업으로 삼아온 곳으로, 인구 밀도가 상대적으로 높았다. 변방 지역은 한족 이외의 소수 민족이 중심이 되어 목축 경제를 중심으로 하고 오아시스 농업을 보조로 삼는 경제 활동을 해온 곳으로 인구 밀도가 상대적으로 낮다.

 

오늘날과 같은 내지와 변방지역의 정치적 통합은 18세기에 이룩되었다. 현재의 변방지역은 대부분이 청나라의 변방 지대에 속했던 곳으로, 청나라에 의해 복속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이후, 예전의 변방 지역은 거의 모두 자치구로 분할되어 있는데, 이들 소수 민족 차치구에는 네이멍구(內蒙古내몽고) 자치구․신지앙웨이얼(新疆維吾爾신강위그르) 자치구․닝시아후이주(寧夏回族영하 회족) 자치구․광시주왕주(廣西壯族광서 장족) 자치구․시장장주(西藏藏族티벳 장족) 자치구 등이 있다. 중국의 남서부 변경 지대에는 18세기 후반부터 이 일대를 뒤덮고 있던 밀림이 농경지로 개간되면서 인접 국가들과의 국경선이 명확하게 그어지기 시작하였다.

 

내지와 변방 지역은 면적면에서는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지만 인구면에서는 극심한 불균형 상태다. 변방 지역은 면적상 내지보다 크지만 인구수로는 전체의 5%도 차지하지 못한다. 변방지역은 대부분 인구 밀도가 1㎢당 1명을 넘지 않으며, 실제로 사람들이 살지 않는 지역도 있다. 변방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오지는 고도가 높기 때문에 하천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지 못하고 내륙에서 끝이 난다. 하천과 지형의 이러한 특성으로 인하여 변방 지역은 내지와 달리 내륙 수운망의 혜택을 보지 못해 왔다. 그 대신 육로와 내륙 수운망이 발달하지 못한 변방지역을 가로지르는 단 하나의 중요 통로는 실크로드 즉, 비단길이었다. 비단길을 따라서 살았던 오아시스의 여러 민족들은 늦어도 9세기까지 인도-유럽어를 사용하였으며, 중국․인도․유럽을 왕래하며 살았다.

 

6대 古都의 변천

 

장기적으로 볼 때, 중국의 수도는 초기에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그리고 후기에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옮겨갔다. 중국 역사상 등장했던 수많은 수도 가운데 아직까지 명맥을 잇는 고도는 드물다. 그 대부분이 경제와 문화가 가장 발달된 동부의 평원 지대에 집중되어 있다. 역대 都城 가운데 “6大 古都”를 고른다면, 창안(長安)․루오어양(洛陽)․뻬이징(北京)․카이펑(開封)․난징(南京)․항저우(杭州)가 될 것이다.

 

이 중에서 창안․루오어양은 도성의 건설 시기가 상대적으로 이를뿐더러, 수도의 지위를 일찍 상실했다. 이에 반해, 카이펑과 뻬이징은 도성의 건설 시기가 상대적으로 늦었지만 수도로서의 존립 기간은 비교적 길었다. 또 난징과 항저우는 도성의 건설 시기가 카이펑 보다는 이르지만 뻬이징 보다는 늦었다.

 

난징과 항저우는 통일 정권보다는 망명 정권 또는 할거 정권의 도성으로 건설되었다. 난징과 항저우는 창지앙(長江)을 천연의 해자(垓字)로 삼을 수 있어 방어에 유리했다. 또 난징과 항저우는 경제가 풍요롭고 경치가 아름다운 강남 지방이었기에 통치자의 생활을 만족시킬 수 있었다.

 

창안과 루오어양은 험분한 지세로 인해 서북 지방 또는 관동 지방과 격리될 수 있었다. 이는 대외 방어에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갖춘 수도를 건설하게 했다. 그러나 이민족과의 정치․군사적인 투쟁의 중심이 서북 지방에서 동북 지방으로 옮겨감에 따라 동북 지방에 가까운 카이펑이나 뻬이징이 수도로서 더 적합하게 되었다. 최종적으로 뻬이징이 난징을 제치고 수도로 선택된 이유는 정치 권력을 전국에 효율적으로 행사할 수 있다는 지리적 위치 때문이기도 했다.

 

省의 유래

 

省은 처음에 금지된 지역을 의미했으나, 魏晉시대에 중앙 정부 기관의 명칭이 되었다. 元나라 때 省은 정식으로 1급 지방행정 구역이 되었다. 전국을 12개 대행정구로 나누고, 중앙 정부가 직할하는 省을 中書省이라 불렀다. 즉, 중앙 정부를 中書省이라 할 수 있으며, 나머지 11개 대행정구는 “行中書省”이라 불렀는데, 이를 다시 줄여서 “行省”이라 하였다. 明나라의 관제를 이어 받은 淸은 전국을 省이라는 최고 1급 행정구역 18개로 나누었다. 그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省의 숫자는 증가되었지만, 최고 1급 지방행정 구역이라는 성격은 변하지 않았다.

 

省․市․自治區 명칭을 칠언시로 노래한 周恩來

 

풍류를 즐기던 저우언라이는 중국의 30개省․市․自治區의 명칭을 칠언시로 표현한 적이 있다. 즉, 兩湖兩廣兩河山, 五江雲貴福吉安, 四西二寧靑甘陝, 還有內臺北上天 이라는 구절로 요약한 것이다. 이 詩에서 첫 수가 가리키는 지명은 湖北省․湖南省․廣西莊族自治區․廣東省․河南省․河北省․山東省․山西省이며, 둘째 수는 江蘇省․浙江省․江西省․黑龍江省․新疆위그르自治區․雲南省․貴州省․福建省․吉林省․安徽省을 의미하며, 셋째 수는 四川省․西藏族自治區․寧夏回族自治區․遼寧省․靑海省․甘肅省․陝西省을 뜻하며, 마지막 넷째 수는 內蒙古․臺灣․北京․上海․天津을 가리킨다. 여기에 저우언라이 사후에 책정된 海南省은 빠져 있다.

 

성급 행정구 명칭의 유래

 

北京市는 역사적으로 다양한 이름을 가졌었다. 가장 이르게는 “계(薊)”라고 불리웠으며, 西漢 시기에는 廣陽(광양)-幽州(유주)라는 두 가지 명칭을 가졌다. 그 후 南京(遼나라)-燕京-大都(元나라)-北平(明나라 초기)-北京(明의 영락제 시기)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이 후 北平特別市와 北平市라는 명칭으로 불린 적도 있는데, 중화인민공화국 수립후 수도로 삼으면서, 서울이라는 의미로 北京으로 바뀌었다.

 

天津市는 明나라 영락2년(1404년)에 “天津衛”라는 명칭이 생긴 것과 관련이 있다. 明의 영락제는 오늘날의 天津 지역에서 출병하여 물을 건너 남하했는데, 결국 천하를 얻게 되었다. 이러한 자신의 업적을 기리고자 이 지역을 “天津”이라고 명명했다. 그 뜻은 “천자가 물을 건넌 곳”이라는 의미이다.河北省은 黃河의 북쪽에 있다는 의미이다. 唐나라 때 黃河이북과 太行山 동쪽 지역에 河北道를 설치하였는데, 여기에서 河北이라는 명칭이 유래되었다.

 

山西省은 太行山의 서쪽이라는 의미로 명명되었다. 元나라 시기에 黃河의 동쪽이자 太行山의 서쪽인 지역을 山西라 칭했다. 이 지역은 戰國시기에 晉國의 영토였기에 줄여서 晉이라고도 부른다.

 

遼寧省은 遼河유역에 자리잡은 탓에 이렇게 이름 붙여졌다. 遼寧省 지역은 戰國시대 이후, 元․明 양대에 이르기까지 遼河주변이 중심이었다. 따라서 遼라는 외자로 지칭되다가, 1928년 遼河유역이 영원히 평안해지라는 의미를 담아 遼寧으로 개칭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줄여 쓰면 遼라 한다.

 

吉林省은 淸나라 초기에 松花江연안에 吉林烏拉城을 세운 것에서 그 명칭이 유래되었다. 만주어로 “吉林”이라는 말은 “沿”의 의미이고, “烏拉”은 “大川”의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吉林烏拉”은 “큰 강인 松花江을 따라 있다”는 뜻이 된다. 줄여 쓸 땐 吉이라 한다.

 

黑龍江省이라는 명칭은 <遼史>에 처음 보이는데, 물빛이 검고, 구비구비 흐르는 모습이 용이 헤엄치는 것 같다하여 붙여졌다. 간칭은 黑으로 한다.

 

上海市는 이미 宋나라 때부터 항구도시로 커나갔는데, 바다의 큰 물결 위에 땅이 있는 듯 하다는 의미에서 이름을 얻었다. 황포강가의 옛지명을 본따 滬(호)로 표현하기도 한다.

 

江蘇省은 淸의 康熙帝 6년(1667년)때 江寧府와 蘇州府를 합쳐서 만든 이름이다. 외자로 표현할 때는 蘇로 한다.

安徽省은 淸의 順治帝 초기에 安慶府와 徽州府를 합쳐서 만든 이름이다. 또 安慶付의 별칭이 皖(환)이었기에 安徽省을 외자로 표현할 때는 皖이라 부른다.

 

福建省은 唐시대에 이 지역에 설치된 5개 州 가운데 福州와 建州의 이름을 따서 만든 명칭이다. 이 지역은 고대에 閩越族이 살았던 지역이어서 閩(민)이라고 줄여 쓰기도 한다.

 

江西省은 隋와 唐나라 시기에 長江 이북과 淮水 이남 지역을 일컬은 데서 유래했다. 竷江(감강)이 이 지역을 관류하므로 줄여서 지칭할 때는 竷이라 한다.

 

山東省은 秦나라 때 崤山(효산) 이동을 山東이라 불렀고, 唐부나라 때는 太行山 이동 지역을 山東이라 부른 데서 연유했다. 春秋시대에 魯國이 있던 지역이므로 간칭으로는 魯(노)라 쓴다.

 

河南省은 黃河 이남에 있다는 의미다. 唐나라 때 전국을 열 개의 道로 나누었는데, 이때 黃河 이남이자 淮水 이북 지역을 河南道라 불렀었다.

 

湖北省은 洞庭湖(동정호) 이북 지역이라는 의미다.

湖南省은 洞庭湖의 남쪽 지역이라는 의미다.

 

廣東省은 五代시절에 지금의 廣東과 廣西를 廣南이라 불렀던 데서 그 실마리를 찾게 된다. 즉, 北宋이 廣南지역에 길을 내고는 그 동쪽과 서쪽을 각기 廣東․廣西라 부른 것이다.

 

四川省은 宋代에 이 지역에 4州를 설치하면서 그 행정 단위로 끝에 路를 붙임에 따라 생겨났다. 즉, “川峽四路”라는 말을 후일 줄여서 四川이라 부른 것이다. 이러니 이 지명을 보면서 큰 물 줄기가 네 개 있으리라는 기대는 잘못된 것이리라.

貴州省은 도시 이름에서 연유했는데, 唐시대에 矩州(구주)라 불리던 지역을 宋시대에 貴州라 부르게 되었고, 이 명칭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다.

 

雲南省은 漢代에는 작은 縣의 이름에 불과했는데, 漢武帝가 어느 날 사람을 시켜 오색 영롱한 구름(彩雲)을 좇게 했는데, 구름이 머문 곳을 찾다 보니 이 지역에 이르렀다. 그래서 이 지역을 彩雲의 남쪽이라는 의미로 雲南이라 부르게 되었다.

 

陝西省은 周나라때 지역을 나누다 생긴 명칭이다.

 

甘肅省은 西夏시대에 있었던 甘이라는 州와 肅이라는 州를 합쳐 지은 이름이다.

 

靑海省은 이 지역 내에 있는 靑海湖로 인해 생긴 이름이다.

이외의 기타 自治區들은 모두 그 지역의 소수민족 이름을 붙여 명명했다. 예를 들어, 西藏自治區․內蒙古自治區․新疆위그르自治區․廣西莊族自治區․寧夏回族自治區 등이 그러하다.

 

지명이 뒤바뀐 곳들

 

중국어 단어 가운데는 우리가 쓰는 한자어와 글자의 앞 뒤 순서가 바뀐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우리글에서 쓰는 平和를 중국어에서는 和平이라하고, 우리의 榮光을 光榮으로 쓰는 따위이다. 이는 아마도 우리말과 중국말이 어순이 다른 데서 기인하는 차이일 것이다. 이와 같은 예는 아니지만, 중국 지명 가운데 서로 앞뒤가 바뀐 지명들이 꽤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지명은 서로 다른 지역에 있는 도시이다.

 

開封(하남)과 封開(광동), 寧安(흑룡강)과 安寧(운남), 長子(산서)와 子長(섬서), 樂昌(광동)과 昌樂(산동), 隆化(하북)와 化隆, 高陽(하북)과 陽高(산서), 南豊(강서)과 豊南(하북), 安福(강서)과 福安(복건), 德化(복건)와 化德(내몽고), 吉安(강서)과 安吉(절강), 山陽(섬서)과 陽山(광동), 昌都(서장)와 都昌(강서), 懷仁(산서)과 仁懷(귀주), 樂平(강서)과 平樂(광서), 和平(광동)과 平和(복건), 寧武(산서)와 武寧(강서), 平原(산동)과 原平(산서), 江浦(강소)와 浦江(절강), 寧海(절강)와 海寧(절강), 陽原(하북)과 原陽(하남), 信陽(하남)과 陽信(산동), 安新(하북)과 新安(하남), 曲陽(하남)과 陽曲(산서), 林西(요녕)와 西林(광서), 安遠(강서)과 遠安(호북), 德保(광서)와 保德(산서), 興海(청해)와 海興(하북), 保康(호북)과 康保(하북), 武平(복건)과 平武(사천) 등.

 

북방어와 남방어

 

현대 중국어의 방언은 언어적인 특징과 지리적 분포에 의하여 북방 방언과 남방 방언으로 나뉜다. 북방방언은 다시 지리적 분포에 의하여 북방관화(北方官話)․강회관화(江淮官話)․서남관화(西南官話)로 나뉜다. 북방관화는 북경을 중심으로 동북 3성(黑龍江省․吉林省․遼寧省)․河北省․河南省․陝西省․山東省․山西省 등지에서 쓰인다.

 

강회관화는 江蘇省과 安徽省의 장강 이북과 구강․진강 사이의 장강 남안에서 통용된다. 西晉시대(A. D. 265-316)에 영가(永嘉)의 난이 일어났을 때 수많은 한족들이 남쪽으로 피난감에 따라 그들이 쓰던 북방방언도 진령과 회하를 잇는 경계선을 넘어 남하하게 되었다. 이들은 지금의 四川省․浙江省․江蘇省․安徽省 등지로 많이 흩어졌는데, 그 곳에서 먼저 통용되고 있던 吳방언과 섞여 오늘날의 강회관화가 파생되기 시작한 것이다.

 

서남관화는 湖北省․四川省․貴州省․雲南省․湖南省 서부․廣西壯族자치구 서북부․陝西省 남부․河南省 남쪽 변두리에서 사용된다. 唐 시대에 안사의 난으로 인해 피난민이 다시 남쪽으로 이주하는 현상이 발생했는데, 이들은 湖北省․湖南省․江蘇省․安徽省․江西省 등에 정착했다. 이들 이주민의 언어는 기존의 호북 방언을 변화시켜 서남관화의 기본형을 만들어냈다.

 

남방방언은 오어(吳語)․상어(湘語)․감어(竷語)․월어(粤語)․민어(閩語)․객가어(客家語)의 6종으로 구성되어 있다. 吳방언은 江蘇省 남부․上海市․浙江省 일대에서 쓰인다. 湘방언은 湖南省의 湘水와 資水 유역․廣西자치구 동북쪽 변두리에 분포한다. 竷방언은 江西省 북부와 중부․湖南省의 동쪽 변두리에서 사용된다. 粤방언은 廣東省 중부와 서부․廣西자치구 동남부에서 통용된다. 閩방언은 福建省(서부는 제외)․廣東省 동남부․海南省․타이완에서 쓰인다. 客家방언은 廣東省 동북부․江西省 남부․福建省 서부․四川省․廣西壯族자치구․타이완 일부․湖南省 일부에 분포한다. 이들 남방 방언들은 북방 사람들이 남쪽으로 이주하면서 북방 방언을 퍼뜨린 탓에 자연스레 그 영향을 받아 때로는 크게 때로는 적게 변화를 보였다.

 

漢族의 형성과 성장

 

한족과 그 직계 조상인 華夏族이 중국에서 인구수와 문화 수준 면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하게 되기까지는 무엇보다도 이주라는 요인이 크게 작용하였다. 한족이 타민족의 거주지로 이주할 때나 타민족이 한족의 거주지로 이주할 때는 거의 예외 없이 민족간 융합이 일어났다. 이러한 민족간 융합은 대부분 한족의 인구수가 증가되고 한족의 문화가 전파되는 방향으로 일어났다.

 

실제로, 한족의 전신인 화하족은 동일한 혈연 부락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았다. 화하족은 춘추시대에 하족(夏族)․상족(商族)․주족(周族)의 세 부족 후예들이 서로 융합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혼혈 민족인 것이다. 이들 화하족은 중원 지방(지금의 陝西省 동부, 山西省 남부, 河南省 북부, 山東省 중서부, 河北省 남부)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었다. 이 일대를 제외한 중원 지방에는 諸夏人들 이외의 타민족들이 흩어져 살고 있었다.

 

화하족들은 진시황 때(기원전 221-210)에 사방으로 진출하여 서쪽으로는 농동(隴東)고원, 북쪽으로는 하투(河套)지방․음산(陰山)산맥 남쪽․요하(遼河) 하류․한반도의 서북부, 남쪽으로는 사천 분지․장강 중하류까지 세력이 미쳤다. 화하족의 힘이 가장 강성했던 지역은 황하 중․하류와 화북평원 지대였으며, 지금의 浙江省 남부․安徽省 남부․江蘇省 남부․江西省 대부분은 월족(越族)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다.

 

西漢시기에 漢이 설치한 군․현에 사는 화하족들이 자신들에 동화된 다른 민족들을 화하족의 구성원으로 생각함에 따라 “漢族”이라는 개념이 탄생하였다. 한족들은 漢에 의해 새로이 개척된 변방에 적극적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당나라 시기에 安史의 난이 발발하자 한족들은 남쪽으로 이주하여 영남 지방에 도달하였으며, 이 중 일부는 지금의 福建省 내 산간 지대까지 진출하였다. 北宋 초기에 이르면, 지금의 湖南省 중서부를 제외한 오령 이남 지방이 벌써 한족들에 의해 장악되었다. 북송대 후기에 지금의 호남성 중부인 신화현과 안화현 일대에 진출한 한족들은 그곳의 다른 민족들을 계속 압박하여 남쪽으로 이주케 하였다. 남송대에는 북방에서 이주해온 한족들과 원래부터 남방에 있었던 한족 인구의 자연적 증가로 인하여 다른 민족의 거주 밤위가 더욱 축소되기에 이르렀다.

 

한족들은 명나라 때에 다시 한 번 대규모 이동을 시작하였다. 이주민들이 지금의 雲南省과 貴州省으로 진출함에 따라 그곳에 원래 있었던 다른 민족들의 거주지가 점차 위축되었다. 청대 후기에는 남방의 다른 민족들이 한족들의 거주지 확대에 밀려 모두 산간 지대로 물러나게 되었다.

 

중국 대륙에서 한족의 팽창

 

중국 대륙에서 한족이 기타 소수 민족들을 지배하며 살아 온 것은 이미 3천여년 이상 되었다. 한족 세력이 확대되는 가운데, 그들 이외의 민족들은 한족과의 혼혈이나, 한족에 대한 문화적 동화를 통하여 절대 인구수가 점차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활동 영역 자체가 축소되어 온 것이다.

 

한나라 시대의 인구 분포를 보면, 화북평야 바깥쪽에는 한족의 거주지가 하천 유역을 따라 가느다란 줄기 모양으로 분포되어 있었다. 이 한족의 거주지들 사이의 내륙 고지에는 다른 민족들이 살고 있었으며, 화북평야에는 흉노족과 선비족 등의 침략 전쟁이 벌어지곤 했다. 그 틈에 한족과 기타 민족간의 혼혈과 기타 민족들간의 혼혈이 광범위하게 일어난 것이다. 이때 한족 일부는 남동쪽과 남쪽으로 밀고 내려가면서 그곳에 거주하고 있던 월족(越族) 등을 융합하기도 하였다.

 

한족의 지리적 팽창은 유혈 전쟁을 수반하기도 하였다. 특히 중국 남서부에는 7-17세기에 한족의 지배에 대한 다른 민족의 저항이 간헐적으로 진행되었다. 한족에 대한 그들의 저항은 때로는 반란의 형태로 분출되기도 하였으며, 반란의 횟수는 당나라 시기부터 명나라 시대까지 4년에 한 건에서 매년 한 건으로 증가를 보였다. 특히 청나라는 때때로 대대적인 학살 등의 방법을 동원하여 다른 민족의 저항을 진압하곤 했다.

 

반면, 리아오흐어(遼河) 이북의 만주, 즉 동북 지방에 대한 역대 정권의 태도는 비교적 평화적이었다. 만주와 중국과의 경계는 나무 말뚝으로 만든 목책으로 만리장성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 목책은 명대 중기와 말기에 만주의 오랑캐로부터 한족을 보호하는 장벽이었지만, 청나라때는 오히려 한족이 만주로 진입하는 것을 막는 장애물이 되었다. 청나라는 한족이 신개척지로 진출하는 능력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만주로 향한 한족의 이주를 의도적으로 억제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에 대한 청의 또 다른 의도는 나중에 청 제국이 몰락할 경우, 만주족들이 후퇴하여 안주할 땅을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중엽에 흐에이룽지앙(黑龍江) 유역으로 팽창하는 러시아의 세력을 억제하기 위하여 만주에 대한 청의 정책은 바뀌게 되었다.

 

만주로의 한족 이주를 허용한 초기에는 단지 소규모적인 이주가 진행되었지만, 20세기초 철도의 건설로 인해 대규모 이주가 가능케 되었다. 1905년부터 1940년까지 35년 동안 만주는 인구가 두 배, 경작지도 두 배 이상 늘어났다. 1931년에 만주를 점령한 일본은 한족의 이민을 강력히 규제하기는 하였으나 물밀 듯이 밀려오는 한족의 이민 행렬을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의 서쪽 국경은 청나라 때에 비로소 확정된 것이다. 17세기 이후에 청은 유라시아 대륙의 여러 제국들과 경쟁 관계에 있었다. 청은 러시아와 함께 중앙아시아를 분할해 나갔다. 그 결과, 청과 러시아는 파미르고원부터 태평양까지 길이가 4,800여 ㎞에 이르는 국경선을 갖게 된 것이다.

 

중국의 서쪽 변경에서 소수 민족이 일으킨 독립운동으로는 지금의 샨시성(陝西省)과 깐수성(甘肅省)에서 1860년대에 이슬람교도들이 일으킨 것이 유명하다. 그 밖에 지금의 신지앙웨이우얼 자치구 서부에서 야쿱베그가 한때 봉기를 일으켜 국가를 수립한 적도 있다. 이때, 청의 일부 관리들은 신지앙 지역이 중앙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통치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이 지방을 포기하자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당시에 만일 쭈오어종탕(左宗棠)의 반대가 없었더라면 그러한 주장이 받아들여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청은 야쿱베그를 1878년에 물리치고 신지앙 지방을 청의 영토로 편입시킬 수 있었다.

 

소수 민족의 발전과 변화

 

중국에서는 오늘날 국민가운데 한족에 속하지 않는 다른 민족들을 “소수 민족”으로 구분한다. 모두 합해서 55개 소수 민족이 있는데, 그 생성과 발전의 역사에 근거하면 대략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지난 몇 세기 동안 국경 밖에서 국경 안으로 이주해온 민족, 둘째는 옛날부터 현재의 위치에서 지속적으로 발전해온 민족, 셋째는 거주지의 범위가 변화를 많이 하였거나 거주지 자체가 여러 번 바뀐 민족 등으로 구분된다.

 

첫째 유형에는 조선족․러시아인․경족․타타르족 등의 소수 민족이 포함된다. 경족은 대략 16세기 초에 베트남의 도산 등지에서 지금의 광서장족 자치구 방성 일대 연해안 지방으로 이주하였다. 조선족은 1870년대 한반도에서 만주 동북3성 지역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둘째 유형에 속하는 소수 민족으로는 장족(藏族)․고산족․여족․장족(壯族)․포의족․통족 등이 있다. 이들 민족들의 거주지 범위는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였지만 본래의 핵심적인 거주지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 이런 민족들은 한족과 융합되기도 하고, 다른 민족들을 융합하기도 하면서 발전하였다.

 

셋째 유형의 소수 민족에는 신강위그르족․유고족․철랍족․동향족․몽고족․만주족․회족 등이 있다. 이드은 이주의 과정이 민족의 발전에 어떠한 작용을 하였는가에 따라 대체로 두 가지 유형으로 다시 구분된다. 즉, 이주하는 과정에서 민족이 형성된 유형과 민족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이주 활동을 경험한 유형으로 구분될 수 있다.

 

몽고족의 조상은 예부터 북방에서 살아온 동호족․선비족․거란족․실위족 등이다. 13세기초에 칭기즈칸은 주변 부족들을 통합하여 대몽고 제국을 건립하였다. 그 후, 몽고의 군대가 곳곳에서 정벌에 성공하면서 그 일부가 정벌한 곳에 머물렀으므로 몽고족들의 분포 범위는 중앙아시아․서아시아․동유럽․중국 각지로 크게 확대되었다. 그리고 주원장(朱元璋)이 明을 건립하고 元제국의 수도인 大都를 함락시켰을 때 元의 順帝는 수십만 명의 몽고족을 이끌고 몽고고원으로 되돌아갔다. 이 몽고족들이 몽고고원에 처음부터 거주하였던 몽고 본족과 융합하면서 발전한 것이 근대의 몽고족이다.

 

만주족의 전신인 여진족은 원래 동북 지방을 근거지로 하였으며 역사상 여러 번 대규모의 인구 이동을 경험하였다. 여진족의 주체는 황하 유역에 한동안 거주하였지만, 명대에는 예전처럼 또다시 동북 지방에 집중 거주하였다. 1593년에 누르하치는 建州 여진족의 각 부를 통일한 다음, 1616년에는 흐어투아라(赫圖阿拉 : 지금의 遼寧省 新寶 지역)에서 자신을 “칸”이라 칭하고, 후금 정권을 수립하였다. 그 후, 1635년에 여진족은 자신의 명칭을 만주족으로 바꾸었다.

 

1644년에 만주족 인구의 절대 다수는 청의 군대를 따라서 북경을 중심으로 하는 화북평원으로 이주하였다. 그 후에도 만주족은 또다시 전국 각지로 확산되어 나갔으므로 동북 지방에 남아 있는 만주족은 오히려 극소수가 되었다.

 

회족은 셋째 유형 중에서 주로 이주의 과정에서 탄생한 소수 민족으로 그 동안 겪은 이주의 경험이 매우 다양하다. 회족의 기초는 13세기에 중앙아시아에서 국경 안으로 들어와 살고 있었던 아랍인과 페르시안인을 비롯한 이슬람교도들이었다. 도한 7세기 이후에 泉州를 비롯한 동남 해안의 항구 도시와 상업 도시에 외국인으로 살던 아랍인과 페르시아인의 후예들도 포함된다. 회족보다 인구가 많은 소수 민족은 壯族과 위그르족뿐이다.

 

55개 소수민족과 다수민족인 한족

 

<신명나는 춘지에 야오구(허리북)춤>

 

 이 장면을 춘지에 행사가 벌어지고 있는 공원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동작과 표정의 경쾌함에 박수 갈채를 아끼지 않았고, 그 소리 또한 인상적이었습니다.

 

중국은 56개의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국가이다. 중국민족은 유구한 역사 속에서 수많은 소수민족들과 중원에 기반을 둔 화하족 간에 끊임없는 갈등과 동화를 통하여 점진적으로 통일을 형성하여 오늘의 중화민족을 이루었다. 이를테면 화하족과 혼거한 각 이민족들은 우수한 화하족의 문화에 점점 동화되면서 그들의 생활이나 제도 등이 모두 다 중원화되었다.

 

중국역사에서 나타난 민족의 수는 무려 140여 족에 달하지만, 수천 년 동안의 동화과정 속에서 현재까지 남아 생존하고 있는 민족은 한족 이외에 55개의 소수민족이 있다. 이들은 한족에 비해 인구가 적기 때문에 소수민족이라 불리고 있으며, 아직까지도 한족에 동화되지 않고 원족계의 혈통, 풍속 및 언어 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중국인구 중에서 55개의 소수민족 수는 약 8%를 차지하고 있다. 각 소수민족 수는 큰 차이를 보이는데, 그 중에서 100만 명이 넘는 소수민족은 장족(壯族), 만주족(滿洲族), 회족(回族), 위그르족, 묘족(苗族), 이족(彛族), 조선족 등 15개 민족이고, 10만에서 100만 명 사이는 13개 민족이며, 나머지 소수민족은 10만 명 이하에 머무르고 있다.

 

소수민족들은 비록 인구수에 있어서는 상대적으로 열세이지만, 전 국토의 약 60%에 걸쳐 넓게 분포되어 있는데, 주로 내몽고자치고, 신강위그르자치구, 서장자치구, 감숙성, 요녕성, 흑룡강성, 길림성, 녕하회족자치구, 귀주성, 청해성, 운남성, 사천성, 광서성 및 동북지방 등에 살고 있다. 또한 이들이 사는 대부분의 지역은 천연자원이 풍부하며, 그리고 접경국가와 완충 내지는 중개적 역할을 수행하는 지역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소수민족들이 사는 이들 지역은 풍부한 경제자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중국이 산업화와 현대화정책을 추진해감에 따라 중국경제에 없어서는 안 될 핵심적인 지역으로 부상하게 되었고, 동시에 이 지역들은 대부분 러시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인도, 베트남 등 많은 국가들과 접경하고 있는 특수성 때문에 특히 소수민족들은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중국정부는 소수민족이 거주하는 지역의 경제적 잠재력과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하여 그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동질성을 저해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경제수준을 높이려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반중국운동의 발화점이 된 대약진

 

1958년 대약진정책이 소수민족 지역에도 실시되었다. 공사화에 따라 목축지대에도 가축의 공유화가 진행되고 정착이 강제되었다. 초지는 국유로 간주되었으며 토지는 경작하는 집단의 소유가 되었다. 신강에는 대소정책의 일환으로 파견된 생산건설 병단이 둔전병으로서 개척을 시작하여 하방청년을 포함한 10만 명이 이주했다. 그들은 상해 등 동부에서 동원되어 전혀 환경이 다른 사막기후 속에서 개간에 종사하고 습관이 다른 투르크계 민족과 마찰을 일으키면서 그날의 끼니도 어려운 가혹한 자급생활을 강요당했다. 그런데, 소수민족에게 있어 한민족의 이주와 집단화는 오아시스와 양호한 초지의 상실을 의미했다. 그리고 대약진에 따른 기아가 닥쳐왔다. 이에 대해 신강에서뿐 아니라 내몽골이나 운남성 및 귀주의 소수민족 지역에서도 대약진운동에 대한 저항이 있었다.

 

 

 

 

<티벳 장족의 마상술>

몽고족이 중원은 물론이고 유럽을 정복할 수 있었던 데는 뭐니 뭐니해도 "조랑말"이 큰 몫을 했지요. 거기에 그 말을 자유자재로 부렸던 몽고기병들의 마상술이 있었으니 두 말할 나위없었습니다. 사진의 주인공들은 중국의 유목 민족 가운데 하나인 티벳의 나취 지역 장족 사내들입니다. 민속 축제 기간중에 열리는 경마 경기 중의 한 종목인데, 말을 달리면서 티벳 불교에서 축복의 상징으로 소중하게 생각하는 “카타”라는 흰색 머플러를 줍는 것입니다.

 

한편, 중국공산당 지도부를 뒤흔들어놓은 최대의 독립운동은 티베트에서 일어났다. 종래 티베트 중앙부는 인도-네팔과의 관련이 깊었는데, 중국정부에 있어 최대의 문제는 라사와 중국 내지를 연결하는 도로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1954년에 청해(아무도)와 라사, 사천(캄)과 라사를 잇는 2개의 자동차 도로를 건설하게 되었는데, 군의 주둔과 도로공사 때문에 사람들은 심각한 식량부족으로 고생을 하게 되었다.

 

또 자치구 내에서는 개혁을 강요하지 않기로 되어 있었는데 자치구 외의 캄이나 아무도에서는 반종교선전, 사원의 특권 박탈, 토지개혁이 거의 내지(內地) 수준으로 시행되었기 때문에 종전부터 반한의식이 높았던 자는 물론 공산당 정권에 호의를 가진 자도 중국정부에 대한 반감이 심화되었다. 대약진-공사화가 그들을 덮치자 사원과 정청을 거점으로 절망적인 투쟁에 나섰다. 그 보복으로 살인-투옥 그리고 사원의 파괴와 승려의 환속이 강제되었다. 생존자는 라사로 도망가서 ‘티베트 반란’에 가담했다.

 

라사에서의 1959년 반란은 직접적으로는 달라이 라마가 인민해방군에게 납치된 것이 아닌가 하는 민중의 위기감에서 비롯되었다. 3월 10일 노루브링카 궁전을 둘러싸고 반중국 슬로건을 외치던 사람들의 행동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달라이 라마는 17일 측근과 함께 노루브링카를 떠나 인도 망명의 길을 택했다. 반란에 참가한 사원과 지방의 정청은 철저하게 파괴당했으며, 죽음을 당하고 투옥된 티베트인이 어느 정도인지도 알 수 없었다. ‘반란’ 후 6만 이상의 티베트인이 히말라야를 넘어 네팔과 인도로 도피하였으며 히말라야 지역에서는 티베트인 게릴라가 활동하기 시작했다. 뒤에 그들은 미국 CIA의 원조를 받아 한때는 히말라야에 해방지역을 가졌으나 1972년 중-미 국교회복과 동시에 종식되었다.

 

반란 후의 티베트에서는 즉각 민주개혁이 시작되었다. 우리라고 하는 부역과 신분제도의 폐지, 반란귀족 사원의 토지분배, 반란에 참가하지 않았던 귀족의 토지에 대한 감조, 사원관리의 변혁 등이 진행되어 1961년에는 민주개혁이 완료되었으며, 1964년 달라이 라마가 망명한 상태에서 정식으로 티베트 자치구가 성립되었다.

 

소수민족 분리 독립 불허 근거

 

1952년 ‘민족구역 자치실시요강’을 채택한 신중국정부는 소수민족의 거주지역에 자치구-자치주-자치현 등을 두어 그 모두를 중앙인민정부의 통일적 지도하에 지배한다는 체제를 만들어냈다. 이 요강의 근거는 주은래 등의 설명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즉, 중국은 반식민지 상태에서 한과 기타 소수민족과 함께 독립을 위해서 싸웠다. 따라서 중국이 독립을 달성한 상태에서 소수민족의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게다가, 중국 내 소수민족은 한민족 및 여타 소수민족과 잡거하고 있으며 독립된 경제단위를 구성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구소련의 소수민족에게는 독립의 조건이 구비되어 있지만, 중국의 소수민족들은 그렇지 못한 고로, 티벳이나 내몽골뿐만이 아니라 신강에서도 그루지아 봉기에 참여했던 사람이나 동투르키스탄공화국 관계자 등 민족주의 경향을 가진 자는 모두 탄압 받았다.

 

뿌리치는 장족, 붙잡느라 애쓰는 한족

 

집에 오는 길에 중앙민족대학 앞에 들렀다. 남학생 하나와 여학생 둘, 그리고 사업을 하는 남자 한 명과 나 이렇게 다섯이서 충칭 후오어 구오어 를 먹었다. 식사를 하면서 얘기를 나누었는데 사업을 하는 친구가 아주 솔직하고 활달한 성격이어서 대화가 재미있었다. 화남 과학 기술대학을 졸업한 후 미국에 잠시 유학 갔다 와서 지금은 자기 사업체를 갖고 있다고 했다. 90학번이니깐 이제 32살인데 직원이 3,4천명 되는 기계 공장을 경영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삼성과 협력 업체인 모양이다. 요즘은 이런 돈 잘 버는 젊은 친구들이 많다. 중관춘의 라오반들만 하더라도 소위 벤처 기업 사장들이기 때문에 거의 30대 안팎인 경우가 많은데 그도 그런 케이스의 하나인 셈이다.

 

동석한 다른 한 남학생은 신문학을 전공하는 석사생이었다. 이 친구는 청해성 출신의 장족인데다가 갑작스레 발병해 입원했다가 어제 퇴원했다고 한다. 자연히 그와 관련된 일들이 화젯거리가 되었다. 그 대화를 통해 중국 정부가 소수민족 중의 하나인 장족의 마음을 사로잡느라 얼마나 애쓰는 지 단면을 엿볼 수 있었다. 이 친구가 병원에 입원했더니 간호원, 의사 할 것 없이 모두 장족 출신의 석사과정생 이라고 호들갑을 떨더란다. 담당의사는 그의 치료에 혼신의 노력을 다하는 것 같았다고 한다.

 

장족 사람들은 중국 내에서 유일하게 칼을 휴대할 수 있도록 정부로부터 허락을 받고 있다. 이들은 열차건 길거리건 장,단도를 휴대할 수 있는데 어떤 학생의 경우는 장족 고유 복장에 칼을 차고 수업에 들어가기도 한다고 한다. 만일 일반 한족이 칼을 휴대하면 공공장소에는 얼씬할 수도 없는데, 그에 비하면 장족의 민족 문화를 인정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족들은 한족들에게 철저히 이민족 대우를 한다고 한다. 옆의 친구가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 했다. 한번은 라사쪽에 사업상 출장 방문을 했다고 한다. 한족 몇 명이서 라사의 한 딴웨이를 상대로 상담을 하는 것이었는데, 하루는 시간이 남아 한족들끼리 저녁에 길거리 구경을 나섰단다. 길 가의 양러우추왈(양고기 꼬치구이)을 몇 개 집어 먹었단다. 값을 계산하려고 했더니 물경 700위앤 정도를 요구했다고 한다. 북경같으면 70위앤도 안 나올 분량을 먹었는데 완전한 바가지 였다고 한다. 항의하려고 했으나 우격다짐으로 나와 포기하고 돈을 지불했단다. 나중에 거래처 직원에게 얘기했더니 엄청난 바가지를 썼다고 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고 위로해 주더란다. 만일 그런 상황에서 꽁안쥐(파출소)를 찾아 간다하더라도 경찰도 결코 한족 편을 들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티베트와 중국의 관계

 

7세기까지 티베트는 독립왕국이었다. 몽고족의 원제국(1279-1368) 시기에는 종주관계에 의한 지배를 받았는데, 이러한 지배체제는 청조(1644-1911)까지 지속되었다. 1911년의 신해혁명의 발발로 인해 청 제국이 붕괴되자 티베트는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 시기에 티베트를 둘러싼 국제 정치 환경을 보면, 인도를 점령하고 있던 영국이 중국의 동의하에 1886년에 티베트와의 무역을 개시하였다. 이에 앞서 1880년부터 티베트에 대해 관심을 보인 러시아가 있었다. 티베트는 러시아의 영향력을 이용해 영국 세력의 접근을 제어하려 했다. 이 때 중국은 서양 세력의 침략으로 굴욕을 당하고 있었다.

 

<티베트의 라마>

중국 역사에서 원나라가 차지하는 비중이 나름대로 큽니다. 왜냐하면 비록 한족은 아니었으나, 중원을 차지하고 멀리는 유럽을 정벌했으니까요. 그러한 원나라였지만 종교 문제로 인해 나중에는 백성들의 원성을 샀습니다. 당시 몽골족의 칸들이 라마교를 신봉한 결과, 라마승들의 그릇된 우상화가 지나쳤거든요. 심지어는 길 떠나는 라마승이 호화판 가마를 대절케 하고, 거슬려 보이는 백성들을 마구 처단했으니, 백성들의 불만이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사라지게 하기도 했을 겁니다.

 

티베트를 자신의 지배하에 놓으려던 영국은 1903-1904년 티베트를 무력으로 정벌할 것을 결정했다. 티베트인들은 영국의 무력도발에 항거했다. 1907년 티베트에 대한 중국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티베트의 영토와 티베트인들의 자치를 인정한다는 내용의 조약이 영국과 러시아 사이에 조인되었다. 1908년 중국 황제는 달라이 라마를 인정하였고, 티베트인의 자치정을 허용하는 권위를 부여했다. 그러나 1909년 라마들이 일으킨 난동을 진압하기 위해 중국군이 진주하기에 이르렀고, 이로 인해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를 떠나게 되었다.

 

1950년 중국은 티베트는 중국의 일부분임을 재천명하고, 1911년에 있었던 티베트의 독립선언을 무효화시키기 위해 인민해방군을 티베트에 파병했다. 티베트인들은 초기에는 강력히 저항했으나 곧 항복하고 1951년 5월 23일 티베트는 형식적인 자주권을 보유하지만 중국이 완전한 주권을 행사하게 된다는 협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티베트 문제에 관한 중국과의 협약에도 불구하고 주재하고 있는 중국군에 대한 군사적 봉기가 있었으며 이 중에서 유명한 것은 캄바족에 의한 봉기였다. 1959년 봉기는 라싸의 전 지역에 파급되었고 중국은 무자비한 진압으로 단기간 내에 질서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동안 제14대 달라이 라마를 중국의 억압에서 도피시킬 계획이 비밀리에 추진되고 있었다. 1959년 3월 31일 달라이 라마는 추종자들을 이끌고 인도로 피신했다. 인도 북구의 구릉지인 담슬라에 피신중인 달라이 라마와 10만 명의 추종자들은 티베트 망명정부를 수립하고 40여 년간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티베트 문제는 1960년 유엔총회에서 의제로 채택되었다. 유엔은 티베트문제에 관한 결의안에 대해 관심을 표명하고 있지만, 중국이 티베트에 관한 주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국제적인 입장을 인정한다는 의견을 표시하면서 인권문제만을 거론했다.

 

40여 년간 인도에 머물고 있는 달라이 라마의 망명과 계속되는 중국정부의 티베트 통치에 대한 비난은 중국정부를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1978년이래 중국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은 티베트에 대한 통치를 완화하고 달라이 라마의 귀국을 희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달라이 라마는 중국의 이러한 희망사항을 지렛대로 삼아 중국으로부터 티베트인들을 위한 양보를 얻어낼 수 있는 협상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그는 해외에 거주하면서 중국의 티베트 지배의 불법성을 역설하며 티베트와 티베트 인에 우호적인 세계 여론을 환기하는 강연을 해오고 있다.

 

조선족의 성립

 

朝鮮族은 여러 소수민족 중 11번째로 큰 소수민족이며 동북아지역의 주요한 토착민의 하나로 조선반도에서 발원, 13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주로 중국 東北3省인 吉林省・黑龍江省・遼寧省에 거주하고, 특히 길림성의 연변자치주 일대에 집단거주하고 있다.

 

중국 대부분의 소수민족이 그들의 거주 지역에 오랜 세월 동안 토착민으로 정착해서 뿌리내린 성격과는 달리 조선족은 한반도의 자연재해 및 역사적 사건에 관련되어 국경을 넘어 이주한, 비교적 짧은 역사의 이주정착민이다.

 

한국인이 외국에 거주하는 국가 가운데 중국에 정주하고 있는 조선족의 인구규모가 가장 큰데, 조선족의 형성 과정은 크게 4시기로 구분된다. ①不法移住期(1861~1881) ②封禁令 撤廢 以後의 移住期(1881~1910), ③韓日合邦 以後의 移住期(1910~1945), ④解放 以後의 朝鮮族. 이와 같이 중국 이주시기를 구분한 것은 조선인이 중국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는 당시의 사회적 및 역사적 현실에 기초한 것이다.

 

중국에 조선족사회가 형성된 것은 초기에는 경제적인 이유, 자연재해와 조선의 사회적인 문제 등으로 인한 이주가 많았으나, 결정적인 것은 일제에 의한 ‘토지조사사업’과 ‘산미증식계획’이었다. 이 두 정책으로 인하여 토지를 수탈당하고 생계의 길이 막힌 농민들이 중국・러시아・일본 등으로 이주하였고, 특히 중국의 동북지역은 조선의 두만강과 국경선을 이루고 있어 이주에 용이해 많은 농민들이 비옥한 땅인 중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1945년 이후 중국정부는 조선족이 중국과 협력하여 항일운동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인의 동북지역발전에 기여한 점, 이주의 역사 등을 고려하여 이 지역을 조선족 자치주로 결정함으로써 마침내 동북지역의 조선족 사회가 형성되었다.

 

재중국 조선족의 존재와 민족의식

 

조선족들은 법적으로는 중국의 공민이지만 감정적으로는 국가의식과 민족의식 사이에서 내면적인 갈등을 겪고 있다. 이유는 무엇보다도 한국이라는 모국이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데 그 원인이 크다. 즉 자신들이 현재 소속해 있는 국가는 물론 중국이지만 내면으로는 한민족이라는 동족의식 혹은 민족의식이라는 심리적 장벽이 가로 놓여 있는 것이다.

 

중국의 조선족은 약 250만 명으로 전국인구 0.7%, 소수민족인구의 2.1%를 차지하는데 55개 소수민족가운데서 인구가 13번째로 많은 민족이다. 그중 길림성에 1,181,964명(조선족 인구의 61.54%), 흑룡강성에 452,398명(조선족인구의 23.56%), 요녕성에 233,780명(조선족인구의 12%)이 각각 있다. 동북 3성의 조선족인구가 97.1%를 차지하고 연변조선족자치주에 82만 1,79명으로 가장 많다.

 

조선족의 이주는 1860년대로부터 시작하여 1945년 즉 광복될 때까지 줄곧 지속됨으로서 모국의 경제, 문화 및 인구 유동이 중단되지 않았다. 1980년대 말까지는 북한과, 그 이후에는 한국과 광범한 교류를 계속함으로써 모체 민족으로부터 부단히 새로운 민족성분을 흡수하여 중국화 되어가는 취약점을 보완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이 시행되고 나서 조선족 사회에는 그 뿌리를 흔들 근원적 문제가 나타나고 있다. 시장경제의 도입과 상품경제의 발전으로 농촌의 인구가 점점 도시로 집중되고, 이른바 "한국 드림"으로 인하여 여성들의 단신 출국이 늘어남에 따라 농촌총각이 결혼하기 힘들어 지고 조선족인구가 감소되는 현상까지 나타났다. 지금 조선족 농촌의 미혼남녀의 비례는 일반적으로 20:1인데 심한 곳은 심지어 40-50:1이고 57:1이 되는 곳도 있다.

 

<백두산>

리는 머리가 희다는 의미로 백두산이라 하는데, 중국 측은 1년 내 절반 이상 기간 동안 긴 시간, 흰 눈을 머리에 얹고 있다 해서 장백산이라 부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 정부는 지난 6월에 소리 소문 없이 중대한 결정(최소한 우리 입장에서는)을 내렸다. 그것은 크게 보아 두 가지인데, 하나는 중국 문헌에서 장백산이라 부르는 우리 민족의 영산 백두산의 관리 주체 변경이다. 이제까지 백두산은 1952년에 발족한 길림성 내 얜비앤 조선족 자치주가 관할권을 행사해 왔는데, 앞으로는 길림성 정부가 특별 관리기구를 발족시켜 직접 관리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관리권을 상급 기관으로 이관했다는 것이 아니라, 한 꺼풀 벗겨 놓고 보면 조선족과 백두산의 관계를 끊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이렇게 되면, 백두산을 고리로 해서 우리와 이어지던 조선족이 더 이상 우리와 한 핏줄이 아님을 주지시키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둘째로, 백두산 근처에 신도시를 개발하여 국제공항을 건설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한중 수교 이전까지, 이렇다 할 산업 기반 시설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얜비앤 조선족 자치주는 구성원 개개인의 뜨거운 교육열과 근면성 등에 힘입어, 중국 내 소수 민족 가운데 당당히 한족과 맞서는 민족 역량을 보여주었다. 그 후 한국 관광객이 이곳을 거쳐 백두산을 오르면서 관광 산업이 활황을 보여 자치주 경제에 큰 보탬이 되었다. 그런데 만일 이번에 세운 계획대로 새로운 공항이 백두산 근처에 건설된다면, 백두산을 찾기 위해 얜지시 공항을 이용하던 한국 관광단이 굳이 네, 다섯 시간을 우회하게 되는 얜지 공항 노선을 이용할 필요가 없게 된다는 점이 우려된다.

 

이렇게 되면, 얜지 조선족 자치주는 사회 경제적으로 위기를 겪게 된다. 우선, 사회적으로는 조선족 젊은이들이 더더욱 외지 혹은 한국으로 진출하려 애쓰게 되어, 자치주 내 조선족 주민 수가 급감하여 자치주 인정이 철회될 수도 있는 상황이 예상된다는 것이다. 현행법상 전체 주민의 3분의 1은 넘어야 소수민족의 자치권을 인정받는다. 예전 같으면야 절반도 더 되던 조선족 주민수가, 점차 줄고 있는 추세에 새로운 변수가 등장하게 되면 3분의 1 선도 지켜내기 힘들게 될 것 같다. 그 다음, 경제적으로는 관광객의 발길이 끊어지게 되면서 지역 내 경기가 악화되어 저발전의 나락으로 빠져들 것이라는 위기감이 앞선다. 결국 중국내 우리 동포인 조선족 사회의 붕괴 및 한인 사회로의 흡수가 예견된다는 것이다. 이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자칫 잘못 대처하다가는 내정 간섭이라는 중국측의 항변을 받게 될 처지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노력이라고는, 얜지시를 이용한 관광 노선의 유지뿐일까? 가뜩이나 <동북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고구려 역사를 자기네 것으로 만들고 있는 중국의 행보에, 적극 대처결해야 하겠다.

 

 

 

<우리의 고구려 벽화를 왜 중국문화재관리청이 보호해 주겠다고 나서지요?>

사진은 지난 여름 뻬이징시 왕푸징 근처의 <5 ․ 4>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발견한 게시판의 내용입니다. 우리로 따지면 문화재 관리국 건물 밖 홍보용 게시판이었습니다. 내 눈이 끌린 이유는 우리에게 낯익은 고구려 왕릉의 벽화인 무용도와 수렵도 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게시판에 눈길을 주고나자마자 분노가 일었습니다. 사진 위쪽으로 <중국 문화 유산 보호>라는 글자가 너무도 선명하게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주장을 누가 했는 지는 아래쪽에 적혀 있었지요, <국가문물국>이라고.

 

중국인들은 "중국은 통일된 다민족의 사회주의 국가이다"라는 입장에 서 있기 때문에 조선족도 넓은 의미의 중국인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에 반하여 한국인들은 중국 조선족에게도 우리와 같은 혈통이므로 당연히 중국인보다는 우리와 더 가까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면 당사자인 중국 조선족이 갖는 민족의식은 어떠한가?

 

얜비앤 조선족 청소년의 특수성을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연변의 조선족 청소년들은 자기가 소속한 국가는 분명히 중화인민공화국이고, 혈통상으로는 조선족이라는 관념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젊은 세대 조선족은 민족과 국가를 별도로 인식하고 있으며, 중국이라는 국가 체제 속에서 조선족의 자치체제를 당연한 것으로 수용하고 있으며, 이것은 한국인의 인식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정부의 입장과 일치하는 것이기도 하다.

 

기실, 현재와 같이 중국에 조선족이 존재하는 것은 한국의 경제적, 정책적 노력을 거쳐서 만들어진 상황이 아니고, 그렇다고 중국정부 당국의 보호책 때문도 아니며, 중국조선족 스스로의 애족주의에 입각하여 전통문화를 유지하겠다는 확고한 신념의 결과도 아니다.

 

따라서 역사적, 지리적, 정치적 원인 등으로 현 거주지에서 정착해야 할 운명이라면, 젊은 조선족 동포들이 정체는 중국 국민이요 혈통은 한국 민족이라고 자신의 정체감을 갖는 것에 대해 인정해 주어야 할 것이다. 게다가, 중국정부는 소수민족문제, 특히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강력한 모국을 갖고 있는 조선족에 대해서는 민감할 정도로 촉각을 세우고 주시하므로, 민간차원의 교류나 지원이라 해도 언제든 제동이 걸릴 수 있다. 결국 조선족 동포는 법적으로 외국인임을 우리도 인정해야만 하는 한계가 있다.

 

조선족 3세대의 정체성 갈등

 

저녁 때 조선족 여자대학원생을 만나서 식사를 했다. 그 학생의 이야기를 통해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나는 조선족들의 민족 감정에 관한 것이었다. 지금 기성세대에 속하는 조선족들은 본인의 경우에는 그래도 민족의식이 강하게 남아 있는 편이다. 그러나 자녀 양육관은 바뀌고 있다고 한다. 언어 교육만 하더라도 자신들은 중국어 학습에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자녀들에게도 조선족 학교 교육을 통해 한글을 배우게 했다고 한다. 그런데 개혁 개방이 시작되면서 사회 경제적 동원이 일어나고, 또 그로 인해 지역 간 이동이 어느 정도 자유로워지면서는 조선족으로 민족성을 유지한다는 것이 경제생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 아니 오히려 뒤처지게 됨을 실감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쉬운 예로 예전에는 중국어를 무시했는데, 이제는 생각이 바뀌어 자녀들을 되도록이면 한족 학교에 보내 중국어를 잘 습득할 수 있도록 한단다. 그러다 보니, 연변 지구에 조선족 학교가 차례로 문을 닫아 이제는 한글을 배울 수 있는 학교가 거의 없다고 한다. 지금 한참 대학 생활을 하고 있거나 혹은 사회생활에 뛰어든 젊은이들의 사고방식도 이에 따라 변했다고 한다. 솔직히 말해서 중국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는 철저히 중국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교육 수준이 높은 젊은이 일수록 심하다고 한다. 심지어는 혈통을 바꾸기 위해 여자의 경우 한족이나 다른 소수민족 중국인하고 결혼을 한다고 한다.

 

이 학생 자신의 경우는 현재 藏族 남자 친구를 사귀고 있는데 걱정이라고 했다. 집안이 워낙 보수적이라 다른 민족 출신의 남자와 결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큰아버지가 자신이 다니는 학교의 교수인데 아직 남자 친구를 소개시키지 못했다고 한다. 아마 알게 되시면 당장 고향으로 쫓겨 갈 것 같다고 걱정을 한다. 사실 본인도 북경에 오기 전까지는 타민족 남자와 교제하는 것을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하고, 같은 조선족 남자와 결혼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연히 캠퍼스에서 알게 되어 사귀다 보니 타민족이긴 하지만 그 남자가 좋아졌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중국에 있는 소수민족들은 뭔가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그건 그들이 한족들보다 훨씬 순박하고 착하다는 것이다. 나도 아마 그러리라 동감했다. 생존을 위한 이러한 사고방식의 변화가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왠지 무엇인가가 허물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른 한 가지 사실은 연변 지역에 나와 사는 북한 여자들의 이야기였다. 몇 년 전부터 우리나라 (농촌) 노총각들의 아내감으로 연변 지역의 조선족 처녀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 이와 비슷하게 연변에 사는 조선족과 한족 남자들은 기아를 면하고자 북한에서 월경해온 북한 처자들과 결혼을 하는 추세라고 한다. 조선족자치주 가운데서도 농촌 지역에는 조선족 처녀가 별로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자 농지를 떠나지 못하는 조선족 노총각들에게 북한 처녀가 시집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처녀뿐만 아니라 노년층에 속하는 나이 든 아주머니나 아예 할머니 가운데도 연변 쪽으로 나와 조선족을 포함한 중국인과 동거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그런데 처녀들은 애 낳고 살다가도 남편이 맘에 안 들면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는 일이 많음에 비해 나이가 많은 이들은 거의 돌아가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요즘은 나이 많은 북한 여자들이 인기(?)를 누린다고 한다. 이 또한 어처구니없는 비극인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