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현대 중국의 거물들

지식창고지기 2010. 7. 19. 11:06

현대 중국의 거물들

 

 

현대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생활이나 운명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는 인물에는 쑨원(孫文)․지앙이에ㅅ흐(蔣介石)․마오즈어똥(毛澤東)․저우언라이(周恩來)․덩시아오핑(鄧小平) 등이 꼽힐 것이다. 이들에 대한 간단한 인물평을 들어보기로 하자.

 

쑨원은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이나 타이완에서 모두 존경받는 지도자다. 타이완에서는 중화민국을 개국한 이로 받들려 國父로 추앙된다. 왜냐하면 타이완은 그 법통을 중화민국을 계승한 데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어려서 고향에서 겪은 제국주의 세력의 침탈 행위에 대한 경험과 형의 도움으로 외국을 돌아본 경험, 그리고 무엇보다 민중의 분노가 폭발했을 때 느꼈던 무력 투쟁의 성과 등에 의해 혁명을 꿈꾸며 커간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블라지미르 일리치 레닌처럼 자신이 국내에서 힘껏 추진한 혁명이 실패로 끝나 외국으로 망명해 있을 때 국내에서 일어난 혁명이 성공함에 따라 그 주인공으로 추대되었다. 그의 이데올로기는 三民主義로 대변되는데, 그 내용은 民族․民權․民生으로 요약된다.

 

먼저 그가 내세운 민족주의는 전기와 후기의 내용이 달랐다. 처음에는 만주족이 세운 淸이 대륙의 주인인 漢族을 지배하는 것에 대한 반발로 나타났다. 즉, 滿洲族이라고 하는 異民族이 漢族을 지배하는 것이 모순이라고 보고 투쟁에 나선 것이다. 신해혁명을 통해 만주족이 몰락하고 淸이 사라지면서 쑨원의 민족주의는 제국주의 세력을 상대하게 되었다. 즉, 이제는 서국 열강이 중국민족을 침략하는 것에 대한 투쟁에 나서게 된 것이다. 두 번째로, 民權主義는 전제 정권이 아닌 공화국 정체를 건설함으로써 主權在民을 실현한 것이다. 이는 국가 권력의 분리로 나타났는데, 그는 3권분립을 넘어서 5권 분립을 시도하기도 했다. 끝으로 民生主義는 영국 망명 시절에 보게 된 영국의 산업 혁명이 일군 사회적 모순에서 생겨났다. 자본가와 노동자 간의 대립은 차치하고라도, 국가 정책에 의해 한 지역이 개발되었을 때, 그 개발 차익을 얻는 이들은 모두 지주계급이라는 데 주목하였다. 그리하여 토지 개발에 따른 차익을 국민에게 골고루 나눠줄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자 세금제도를 생각하게 되었고, 또한 토지를 국유화해야 겠다는 생각을 펼치게 된 것이다.

 

쑨원이 뻬이징에서 병사한 후, 국민당과 공산당의 갈등은 골이 깊어갔는데, 역설적이게도 쑨원이 자신의 三民主義가운데 민생문제만을 남겨 놓고 서거한 바람에 공산당이 이를 기치로 내세워 대륙을 장악할 수 있었다는 분석도 있다. 이런 형편이다보니, 타이완에서는 중화민국을 건국한 國父로 떠받들게 되고,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자신들의 혁명을 도운 인물로 인정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중국인이건 타이완인이건 쑨원에 대한 감정은 다들 좋은 편이다.

 

지앙지에스는 쑨원의 지지를 등에 업고 정계에 진출하여 그의 후계자가 된 후에는 공산당을 공존 불가능한 존재로 인식하여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그가 쑨원의 유지에도 불구하고 공산당과의 합작을 깬 데는 지지 계급 기반이 달랐던 데 큰 이유가 있다. 즉, 그는 당시 중국을 주름잡던 4대 가문중의 하나인 宋씨 집안의 셋째 딸 메이링과 재혼하였을 뿐만 아니라, 孔씨 집안과도 사돈지간이 되어 도시 산업 및 상업 부르죠와지와 이익 관계를 같이 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상하이를 중심으로 한 도시세력을 자신의 지지 기반으로 삼게 되었다. 이는 공산당이 노동자 및 농민 계급을 지지 기반으로 삼은 것과 차이가 나는 부분이다.

 

그 후 아이러니컬하게도 구소련 공산당이 蔣을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국민당은 毛의 공산당 세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타이완으로 탈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결국 대륙에는 공산당의 승리 하에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었다. 蔣은 자신의 패퇴가 부패에 있음을 깨닫고 타이완에 정권을 세운 후에는 부패 방지에 힘을 쏟았을 뿐만 아니라, 경제 분야는 타이완 토박이에게 맡기고, 대륙에서 옮겨간 국민당 간부들은 정치에 주력하는 정책을 폈다. 이후 蔣의 완벽한 독재체제 하에서 수 십 년 간 이어진 계엄 통치는 국민들의 정치적 권리를 제약하기는 했지만, 경제적 성장을 거듭해 타이완은 신흥공업국가의 반열에 들어섰다. 이런 형편이다 보니 타이완 사람들은 蔣을 인정하는 측면도 있다. 단, 대륙의 중국인들은 중국의 정책 및 선전에 영향을 받아 蔣을 낮게 평가한다. 어찌 보면 蔣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박정희 前대통령에 대해 갖는 이중적 평가를 타이완 사람들에게 받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마오즈어똥은 대륙의 중국인들이 모두 인정하는 명실상부한 國父이다. 사진에서 보듯이 1921년 7월에 중국공산당 창당 발기를 위한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 참석한 이래, 대장정을 거쳐 半식민 半봉건 상태에 있던 중국을 건져냈고, 강대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했다는 데서 비롯된 찬양이다. 그러나 毛는 사후에 “문화대혁명” 발발에 대한 책임이 인정되어, 국가와 당으로부터 “開國에는 功이 있고, 建國에는 過가 있다”는 공식적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중국인들의 평가는 상당히 높다. 문화대혁명 때에는 우상숭배의 영향으로 거의 神적인 존재로 떠받들렸다. 일례로 그의 훈화를 담은 <毛어록>은 인민의 가슴에 <성경>이 되어, 그것만 품으면 전장에 나서도 총알이 피해갈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그 후 이런 헛된 생각은 사라졌지만, 최소한 그에 대한 존경은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 우리는 1989년 천안문 사태 때 자금성 벽에 내걸린 그의 영정이 그 소란 속에서도 깨끗이 보존되는 것을 보았다. 영원히 정치 우선주의를 걷고자 했던 毛는 독재자란 인상을 남기기는 하였지만, 아마도 현대 중국 인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카리스마적 인물로 남을 것이다.

 

저우언라이는 매우 독특한 지도자이다. 결코 최고의 자리에 서지 않으려 했던 인물이며, 또한 최고 권력자의 그림자도 밟지 않으려 했던 인물이다. 젊었을 때 그의 공산당 활동과 지위를 놓고 보면, 毛보다도 앞서 있었다. 그러나 李立三 등의 무모한 교조적 혁명 논리가 蔣의 공격에 밀려 실패로 끝나 長征에 오르면서, 1935년에 열린 준의회의에서 毛의 농민과 농촌에 근거한 혁명 전략을 높이 평가하면서 毛의 손을 들어주어 毛가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 한 이후, 周는 결코 毛의 자리를 넘보지 않았다. 아주 철저히 2인자의 위치를 자청하고 고수했던 것이다. 이런 자세와 온화한 인품으로 인해 중국의 인민들은 대부분 周를 존경한다. 어찌 보면 毛에 대한 인민들의 존경이 굴곡이 있다면 周에 대한 존경은 일관된다고 볼 수 있다.

 

끝으로, 덩시아오핑은 毛의 전철을 밟지 않고자 끝까지 노력했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문화대혁명이 끝나 새로운 지도부가 구성되었을 때, 누가 보기에도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鄧이었지만, 그는 선두에 나서지 않고 그 대신 후야오방 이라든지 자오쯔양 등을 내세워 개혁개방 정책을 펴나가게 했던 것이다. 자신은 점진적 개혁파와 총체적 개혁파의 중간자적 역할을 떠맡아 개혁을 조율하고 설계하는 역할에 만족했던 것이다. 따라서 3전4기의 정치 역정을 딛고 1976년 재등장할 때는 인민들로 하여금 카리스마를 느끼게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 후 개혁개방의 과실이 맺기 시작하면서 그에 대한 인민들의 존경은 날로 높아갔다. 1980년대 초에는 음력설을 맞아 인민들이 자발적으로 천안문광장에 모여 鄧을 찬양하면서, “小平, 你好!”라는 소박한 플래카드를 휘날리게 했던 것이다. 이 장면은 우표 도안에도 이용되었다. 그러다가 1989년 천안문 사태를 유혈 진압하면서 인민들의 실망이 커지기도 했다. 천안문 광장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지도부에게 자신들의 주장을 펴려던 학생들 앞에 나타난 자오쯔양 당시 총리는 “내가 너무 늦게 왔다”는 말로 학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면서, 자아비판을 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 첨예한 이슈 중 하나였던 당과 정부의 부패 문제를 건드렸는데,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나의 북경대 박사과정 동기생인 중국인 친구의 말을 빌리면 이렇다. 그 날 밤 그 자리에서 자오쯔양 총리는 자기 아들이 자신의 후광을 업고 개혁 정책에 힘입어 독점적 지위에서 사업을 해 돈을 벌었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그러자 그 다음번 화살은 자연히 鄧에게로 쏠렸다는 것이다. 총리 아들이 이럴진대, 막후 최고의 실력자 鄧의 자식들은 어떻겠냐는 생각이 학생들에게 팽배해졌다는 것이다. 리펑을 통해 이를 알게 된 鄧은 격노했고, 이를 이용해 리펑은 명령 계통을 위반한 채, 유혈진압을 지시했다.

 

한 가지 알아두어야 할 것은 그렇게도 민심을 잘 읽는다는 鄧이 자신이 내세운 趙총리 편에 서지 않았던 데는 그의 가족사가 깔려 있다는 사실이다. 당시 초점이 모여졌던 덩푸팡 즉, 鄧의 맏아들은 장애자이다. 그는 북경대 물리학과 학생시절에 문화대혁명을 겪게 되었고, 당시 走資派로 몰려 숙청당했던 아버지 덩시아오핑의 禍가 그에게로 번졌다. 즉, 鄧의 아들임이 알려진 덩푸팡은 북경대 학생들에 의해 4층 기숙사에서 땅바닥으로 던져졌고, 그 때 입은 부상의 후유증으로 등뼈가 휘어진 것이다.

 

모든 아버지는 자식에게 감정적으로 약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人之常情이다. 하물며 자기 때문에 불구자가 된 아들을 남들이 삿대질한다고 해서 나 몰라라할 아버지는 없는 것이다. 덩시아오핑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이유로 그는 학생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리펑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이런 사실로 인해 鄧은 인민의 존경을 잃는 듯 했지만, 다시 1992년 저 유명한 <南巡講話>를 통해 개혁을 다시 추동시켜 오늘의 경제 성장을 일궈낸 것이다. 덕분에 그에 대한 인민의 애정은 다시 살아났고, 그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격하운동은 벌어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추앙되는 분위기가 있다.

 

결국 중국 인민들은 괜찮은 지도자들을 만난 덕분에 기 펴고 살게 되었다는 말로 귀착될 수 있겠다. 따라서 이러한 중국 지도자들에 대한 서방의 상반된 평가에 익숙한 우리가 중국인민들 스스로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한 채 우리만의 잣대로 지도자들을 평가한다면 이 또한 우를 범하는 일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