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중국 주周 ( BC770~BC221 ) 제10대 여왕, 제11대 선왕, 제12대 유왕

지식창고지기 2009. 5. 31. 17:53

제10대 여왕 ?王


주나라 10대왕인 여왕이 즉위하였다.

여왕은 성격이 포악하고, 교만하며 탐욕스러웠다.

또한 백성을 괴롭히고, 사치를 일삼았으므로 자연히 백성들의 불만과 원성은 날로 높아졌다.

그러자 여왕은 위나라 출신의 무녀들로 하여금 왕을 욕하는 자를 살피게 하고는, 무녀들이

고발하는 자들을 모조리 죽였다.

그러자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게되었으며, 말은 하지 않고 눈으로써 원망을 주고받게되었다.

그러자 백성들이 원망의 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소식에 여왕은 크게 기뻐하였다.

이에 소공은

“그것은 다만 억지로 백성의 입을 틀어 막은것에 불과합니다.

백성의 입을 막는 것은 강물을 막는 것 보다도 더 나쁜 결과를 가져옵니다.

강물을 막으면 반드시 둑이 터져서 많은 사람의 목숨을 해칩니다. 하지만 백성들의 마음을

내리누르는 해독은 더없이 깊고 큰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나 여왕은 이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백성들은 3년만에 무리를 지어 반란을 일으켰고, 왕은 산서성으로 달아났다.

이에 왕이 없는 왕실을 주공과 소공 두 재상이 협력하여 이끌었다.

이 기간을 공화(共和)라 부른다.

 

 

제11대 선왕 宣王

 

?~BC 782.


14년 뒤 여왕이 죽고, 아들 선왕이 즉위하였다.


선왕은 어진 사람을 등용하고 유능한 사람을 우대 하였다.

또한 선왕은 현명한 신하들과 정치와 외교의 안정에 힘썼으므로 주나라 왕조는 다시금

중흥의 때를 맞이하였다.


하지만 선왕 39년에 강족에게 패하는 등 선왕 말년에 이르러 국력이 급속도로 쇠퇴하였다.

이에 선왕은 패배를 설욕키위해 요민(要民)이라는 호구조사를 실시하였는데, 이는 병사와

인부의 징용, 세금의 징수를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로인해 백성들의 원성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선왕 43년에는 충신이었던 두백을 단지 왕명을 어겼다는 이유만으로 참수하는등

정치에 대한 혼란을 가져왔다.


3년후 재위 46년만에 선왕이 생을 마감하고, 그 아들 유왕(幽王)이 왕위에 올랐다.

 

 

제12대 유왕 幽王


선왕의 뒤를이어 유왕이 즉위했다.

유왕이 즉위할 무렵 거리에서는 다음과 같은 동요가 유행하였다.

“산뽕나무로 만든활과

  가느다란 풀로 만든 화살통

  주나라를 망치네...

  주나라를 망치네...“


헌데 때마침 산뽕나무로 만든 활과 화살을 팔고다니는 부부가 있어 유왕은 그들을 잡아

들이라 명하였다.

그 부부는 놀라 그길로 달아났는데, 길에서 울고 있는 한 계집아이를 보았다.

그들은 문득 불쌍한 생각이 들어 그 아이를 데리고 포나라로 도망쳤다.

그 뒤 포나라 사람이 유왕에게 죄를 지은 일이 있어 용서를 빌기위해 여자를 바쳤는데,

이가 바로 그 옛날 뽕나무 활장수 부부가 주워 길렀던 포사(??)였다.


유왕은 포사를 보자마자 완전히 빠져들어 국정을 전혀 돌보지 않았다.

유왕은 일찍이 신후(申候)의 딸을 비로 맞아 그녀에게서 난 아들 의구(宜臼)를 태자로

책봉하였다.

그러나 유왕은 포사의 환심을 사기위해 의구를 폐하고, 포사가 낳은 아들 백복(伯服)을

태자로 세웠다.


한편 포사는 웃는법이 없었다.

유왕이 아무리 그녀를 웃게하기 위해 갖은 애를써도 절대 웃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한 병사가 실수를 하는 바람에 봉화가 올려졌다.

봉화가 울려지느 것은 외적이 침입했다는 표시로 각지에서 제후들이 군사를 이끌고 달려

왔는데, 막상 와보니 아무일도 없는 것이었다.

이에 제후들은 모두 철군하였다.

그런데 그렇게 웃지않던 포사가 제후들이 군사를 몰고 허겁지겁 왔다가 돌아가는 모습에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날부터 유왕은 포사의 웃음을 보기위해 수시로 봉화를 올렸다.

봉화가 울려질 때마다 포사는 크게 웃어댔고, 제후들은 여지 없이 군사를 이끌고

달려왔으나, 허탕일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정말로 북쪽에서 견융족이 군사를 이끌고 주나라를 공격해 들어왔다.

유왕은 이에 황급히 봉화를 올렸지만 아무도 달려오지 않았다.

마침내 유왕은 여산의 산기슭에서 견융족에게 피살되었고, 포사는 그 추장에게 넘겨졌다.


유왕이 죽고, 평왕이 즉위하여 그 수도를 호경에서 낙양으로 옮겼다.

이로써 호경을 수도로한 시대를 서주(西周), 낙양을 수도로한 시대를 동주(東周)라

부르게 된다.


또한 동주 시대는 514년간 계속되었는데, 이시기는 다시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로

구분된다.


춘추시대는 평왕이 도읍을 옮긴 기원전 770년부터 진(晉)나라가 한. 위. 조 나라로

나뉘는 기원전 403년까지 368년간을,


전국시대는 이후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는 기원전 221년까지 178년간을 말한다.


춘추시대라는 이름은 공자가 노(魯)나라의 역사를 기본으로 하여 편찬한 『춘추』에서

유래하였으며, 전국시대는 한나라말 유항이 편찬한 『전국책』에서 유래하였다.


춘추시대는 이른바 ‘춘추오패(春秋五覇)’가 등장하는데, 이는 천하의 패권을

잡은 다섯명의 패자를 가리키는 말로서,

제나라 환공(齊 桓公)

진나라 문공(晉 文公)

초나라 장왕( 莊王)

오왕 부차(夫差)

월왕(越王) 구천(句踐) 을 일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