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중국 주周 ( BC770~BC221 ) 제자백가 - 유교

지식창고지기 2009. 5. 31. 21:37

유교 儒敎


중국 춘추시대 말기에 공자(BC 551경~479경)가 창시한 사상.


공자가 죽자 추종자들에 의해 8개 학파로 나뉘었으며, 그들은 각각 공자의 가르침을 가장

정통으로 계승했다고 자처했다.

공자의 사상과 가르침은 〈논어〉에 잘 나타나 있으며, 맹자(BC 371경~289경)는

공자의 가르침을 더욱 발전시켰다.

그는 전국시대(BC 475~221) 초기에 묵자(墨子:BC 476경~390경)의 집산주의(集産主義)

와 양주(楊朱:BC 440~360경)의 개인주의로 물들어 있던 사상계를 비난했다.

봉건왕조 주(周)의 해체와 패권정치의 부상으로 힘과 부(富)의 목소리가 커졌다.


초기 도가(道家)와 법가(法家) 지식인들은 현실 정치에 실질적으로 참여했으며,

유가(儒家)의 지식인들도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유가의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최고 덕목인 덕치(德治)가 실현될 수 없는 현실

정치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한마디로 그들은 현실을 도외시할 수 없었으나, 그렇다고 하여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것이 바로 당시 유가가 처한 상황이었다.


한편 맹자는 유가사상의 정통계승자로 알려져 있다.

공자의 손자 자사(子思)의 제자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맹자는 사회비판자, 도덕철학가,

정치적 활동가로서 위대한 삶을 살았다.

맹자는 육체노동을 하지 않는 사대부(士大夫) 계층을 중용하는 것이 국가발전의 관건이라고

주장했다. 

농업을 최우선시하고 임금도 노동을 해야 한다고 한 농가(農家)의 주장에 대해 맹자는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구분으로 답했다.

맹자에게 유교 사대부는 관리(官吏)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관리와 왕이 인정(仁政)을

베풀도록 가르치는 책임을 지닌 학자를 의미했다.

맹자는 봉건군주에게 단순한 정치적 조언자가 아니라 왕의 스승으로서 임하고자 했다.

유가의 도덕적 이상주의와 당시의 구체적인 사회적·정치적 현실을 결합시키기 위해,

맹자는 당시 유행하던 사상조류인 묵자의 집산주의와 양주의 개인주의를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했다. 

묵자의 집산주의는 보편적인 사랑인 겸애(兼愛)를 강조하여 모든 사람을 자기 가족과 같이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맹자는 그것을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같이 무관심하게 자기 아버지를 대하게

됨을 의미한다고 했다.

양주는 묵자와는 반대로 자기를 우선시했는데, 맹자는 양주의 주장이 정치적 무질서를

초래하게 한다고 반박했다.

두 사상가에 대해 맹자는 "묵자는 겸애를 주장하니 이것은 아비가 없는 것이요,

양주는 자기만을 위하니 이것은 임금이 없는 것"이라고 했다.

맹자는 사회개혁의 방도를 밝혔다. 그것은 왕들이 추구하는 이(利)·부(富)·권(權) 등을

정의·공공정신·복지·영향력 등으로 대치하는 것이었다.

맹자는 다스림의 첩경은 민의(民意)와 일치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왕보다 나라가

중하고 나라보다 백성이 더 중하며 왕도(王道)를 행하지 않는 군주는 군주일 수 없다고 한,

강한 '민본주의' 사상에 따른 것이었다.

이 사상에는 맹자가 선하려고 노력함으로써 스스로 완전해진다는 '성선설'(性善說)의 철학적

신념이 있다.


맹자는 한 인간의 형성에서 생물학적·환경적 요인이 갖는 구속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외부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하늘이 부여해준 고귀한 근본인

'대체'(大體)를 넓히고 순화시킬 수 있는 자유와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나아가 마음의 힘을 완전히 깨달으면 자기의 본성을 알게 되고, 본성을 알면 하늘을 알게

된다고 했다.


맹자가 유가의 도덕적 이상주의를 완성한 인물이라면, 순자(荀子:BC 300~230)는

예(禮)와 권위를 강조함으로써 유교를 통해 인간 조건에 대한 현실적·체계적 탐구를

가능하게 한 인물이었다.

그는 BC 3세기에 부강했던 제(齊)나라의 직하(稷下)학파에서 논리학, 경험론, 실천적 사고,

논쟁 등에 탁월했던 학자였다.

그는 당시의 주요한 사상조류를 대표하는 이른바 12명의 철학자들을 철저하게 비판했는데,

이로써 유가는 당시의 유력한 정치적·사회적 학파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순자의 가장 주된 비판대상은 맹자의 '성선설'이었다. 공자·맹자와 같이 순자도

자기수양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순자는 맹자와는 반대로 인간본성의 악함을 주장했다. 인간의 본성을 자기욕구의

충족에 있다고 본 그는 사회적 강제의 필요성을 확신했다.


강제가 없으면 인간의 생존조건인 사회적 안정이 침해되기 때문이다. 순자가 보기에

맹자의 최대 약점은 사회의 안정을 위한 예(禮)와 권위의 필요성을 간과한 것이었다.

순자는 도덕성의 기초를 인간 정신의 인식능력인 지능(知能)에서 찾았다.

인간은 '지'(知)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의 생존과 안정을 위해 이기적인 자기본성을

제어한다. 

그에 따르면 유가의 학문은 '사회화'이다.


사회화의 과정에는 고대 성인(聖人)의 권위, 관습, 스승, 군주, 법, 관리 등이 모두

필요하다. 

법·질서·권위·예에 대한 순자의 강조는 이후 법가와 연결되었다.

행동의 객관적 기준에 대한 그의 주장은 이후 진(秦)나라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전제주의의 이념적 바탕으로 작용했다.

순자는 유교의 학문적 영속에 크게 기여했다. 하늘[天]에 대한 자연주의적 해석,

문화에 대한 세련된 이해, 정신의 인식론적 측면과 언어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통찰,

올바른 논리적 정의와 논쟁에 대한 강조, 진보에 대한 신념, 정치적 제도에 대한 관심 등은

유교의 학문적 자산을 매우 풍부하게 했다.

순자는 이후 3세기 이상 유가의 모범으로 존경받았다.


진대에는 법가사상이 크게 유행했지만, 전한(前漢:BC 206~AD 25) 초기의 통치사상은

법가에서 조화와 불간섭의 청정무위(淸靜無爲)를 주장하는 도가사상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한(漢) 무제(武帝:BC 141~87)의 치세와 동중서(董仲舒:BC 179경~104경)의

출현으로, 유교는 국가적인 이데올로기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의례(儀禮)가 통치행위, 사회적 관계의 정립, 분쟁의 해결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유교사상은 관료체제와 법률체계 속에서 굳게 자리를 잡았다.

BC 136년 유학은 국교로 선포되었다. BC 124년 국립대학인 태학(太學)이 세워졌으며,

오경박사(五經博士)와 50명의 박사제자원(博士第子員)이 설치되었다.

BC 50년에는 태학에 3,000여 명의 학생이 있었고, AD 1세기에는 매년 1,000여 명이

국가가 주관하는 시험을 치르고 관리로 충원되었다.

즉 유학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관료제를 장악하기 시작한 것이다. 58년 모든 관학(官學)

에서는 사원에 공자를 모셨고, 175년에는 황제의 후원 아래 학자들이 합의본 경전에

대한 해설을 몇 십 년에 걸쳐 거대한 석판에 새기는 작업을 완성했다.

수도인 뤄양[洛陽]에 세워진 이 석비는 고전적 유교전통 형성의 완성을 상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