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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공묘(公府孔廟)

지식창고지기 2010. 8. 3. 06:46

공부공묘(公府孔廟)

 

 

◎ 공자(孔子)

 

중국 춘추시대의 사상가. 유교(儒敎)의 개조(開祖). 이름은 구(), ()는 중니(仲尼). 공자라고 할 때의 자()는 존칭이다. 아버지는 제()나라와의 싸움에서 군공(軍功)을 세운 부장(部將)이었으나, 공자가 3세 때 별세하여 어린시절 빈곤 속에서 자랐다. 그러나 그는 어려서부터 공부에 힘썼고 노나라의 창시자로 주왕조(周王朝) 건국의 공신이기도 했던 주공(周公)을 흠모하여 그 전통적 문화습득에 노력했으며, 수양을 쌓아 점차 유명해졌다. 처음에는 말단 관리였으나, 50세가 지나서 노나라의 정공(定公)에게 중용(重用)되어, 정치가로서의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였다.

 

그의 계획은 노나라의 실력자인 3중신의 세력을 눌러 공실(公室)의 권력을 회복하고, 주공의 정신을 살린 질서있는 문화국가를 건설하려는 것이지만, 그의 계획이 드러나 BC 497, 56세 때 관직을 잃고 그 후 14년간 문하생들을 데리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유세(遊說)를 계속하며 이상실현을 꾀하였다. 그러나 BC 484, 69세 때 그 불가능함을 깨닫고 고향에 돌아가 제자들의 교육에 전념하였다. 이 무렵 아들 이(), 고제자(高弟子) 안회(顔回) 및 자로(子路)가 잇달아 죽는 불행을 겪었고, 74세때 자공(子貢)˙증삼(曾參) 등 뛰어난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타계하였다.

 

◎ 공부(公府) - 공자후손의 주거지

 

공부는 공자의 후대 자손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송()나라와 금()나라 시기(기원12-13세기)에 건설되기 시작한 전형적인 귀족장원이다. 공부는 또 연성공부(衍聖孔府)라고도 불리며, 현재의 모습은 명 청 양대에 걸쳐 완성된 것이다. 부지면적이 5만 평방미터에 달하고 각종 건축물의 방과 대청이 500여칸이나 된다. 중국 봉건시대 관청의 전형적인 건축물로 "천하 제일의 가옥"이라고 불린다.

 

공부는 463개의 방이 있고, 中路(중로), 東路(동로), 西路(서로)로 나뉘어 있다. 돌사자상이 버티고 있는 공부의 대문으로 들어가면 中庭(중정)이다. 그뒤에「聖人之門(성인지문)」이라는 현판이 걸린 문이 있는데, 이어서 있는 重光門(중광문)은 종손이 칙사를 마중하거나 의식을 행하던 곳이다.

 

공부는 관아(官衙)는 대당, 이당, 삼당 세부분으로 나뉘는데 대당은 중앙의 난간 안에 있는데, 연성공5)이 중요한 의식을 행하거나 정부의 관리들을 맞던 곳이다. 이당은 5개의 방으로 되어있고, 공문을 받고 발송하거나 연성공을 거들던 관원의 집무실이었다. 마지막으로 삼당은 이당의 뒤에 있는데 가족내부의 일들을 처리하던 곳으로 동쪽의 방은 손님을 접대하던 객실로 청대말기의 모습을 남기고 있다.

 

내택문(內宅門)은 공부의 앞뒤를 나누는 경계선으로 연성공이 놀던 내택과 관아를 구분짓는 금문(禁門)이기도 하다. 내택문 내에는 영벽(影壁)과 가족의 웃어른 및 처녀들이 살던 전당루, 후당루, 내택의 뒤에 있으면서 '철산원(鐵山園)'이라고도 불리는 수화원이 위치해 있다. 그러나 이곳은 현재 모두 공개되는 것이 아니라 유리창을 통해 관람할 수 있으며, 제일 안쪽의 정원에는 공자가문을 소개한 자료관이 마련되어 있다.

 

◎ 공묘(孔廟) - 공자사당

 

대만, 우리나라, 그리고 중국 본토에서 전국 각지에 크고 작은 공자의 사당이 있다. 하지만 이중 일명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사당이 바로 공자의 후손이 모여사는 공자 마을인 곡부(曲阜)에 위치한 공자의 사당이다.

 

북경의 고궁(故宮), 제남의 태산에 있는 대묘(岱廟), 그리고 중국의 3대궁전 건축물의 하나로 알려진 것이 공묘(孔廟)이다. 춘추시대의 사상과 공자를 기원하는 사당()으로 기원전 480년 공자가 타계한 다음 해에 제자들이 공자가 직접 강의한 행단(杏壇)에 대성전(大成殿)을 지어 그의 위패를 모신 것을 시작으로 그 후의 역대황제들이 계속 증축하여 지금은 남북 1km, 면적 22 m²의 장대한 규모이다.

 

형세가 웅장하며, 짜임새 있는 구조를 하고 있다. 앞 뒤로 9개의 전각과 뜰이 있고, 제각기 독특한 특색을 보이고 있다. 그 중에서 대성전(大成殿)과 규문각(奎文閣)이 핵심 건물이다. 대성전은 공묘의 주요 건축물로 휘황찬란하며 형세가 웅장하다.

 

대성전 앞 통로에 위치한 10개의 대리석 기둥에는 여의주를 가지고 노는 두 마리의 나는 용이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다. 고대 중국에서 용은 하늘과 황제를 상징했다. 따라서 황궁 대웅전에만 용을 새길 수 있었고 다른 건축물에는 용의 도안을 사용하는 것을 금하였다. 하지만 공묘 안에는 정밀하게 새겨진 비룡(飛龍)이 있는데 이는 공자의 지위가 중국에서 매우 높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공자 학설의 주요 사상은 당시 사회발전 및 국가 통치에 대단히 유익했기 때문에 그의 사상은 지배집단의 적극적인 숭상과 군주의 특별한 지지를 받았다. 저택을 이처럼 화려하고 웅장하게 건설할 수 있었던 사람은 중국 역사상 공자가 처음이자 유일한 인물이었다. 대성전 앞에 ‘행단(杏壇)’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이는 공자가 노년에 학문을 강의하던 곳이다. 공묘 안에는 13채의 비정(碑亭 : 비석을 비바람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만든 정자)이 있고, 53개의 거대한 비석을 포함한 총 800여 개에 달하는 비석이 있다. 서예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공묘 내에서 비석에 새겨진 필체가 가져다주는 감동을 마음껏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보충>공림(孔林) - 공자 일가의 가족묘

 

공림(孔林)은 공자와 그의 가족들의 전용 묘지로 세계에서 가장 큰 가족 묘지이다. 공림이라는 이름도 수많은 묘비의 비석이 숲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무덤이 10만 여개, 역대 석의(石議) 85, 묘비 400, 교목 42,000여 그루가 있다. 이 곳은 2,400여 년간 재배되고 보호 받아 온 송백이 무성하고 고목나무가 하늘 높이 치솟아 있는 인공 원림을 이루고 있다. 노나라 애공 16(기원전 479)에 공자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제자들이 이 곳에 공자를 묻고 장사를 지냈다. 공자를 뒤이어 이 곳에 장사를 지내는 후손들이 계속해서 늘어남으로써 공원의 면적도 점차 늘어나 명나라 말기에 이르러서는 1,800여묘까지 확대되었고, 강희 23(1684)에는 임야 면적은 2941.9묘에 달했다. 현재 공림의 둘레는 5,591m이고 총면적은 183.33 헥타르이다. 이처럼 규모가 방대하고, 기세가 웅대한 가족묘지는 공자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이었다. 묘지 안에 있는 묘비는 각각 하나의 전설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듣노라면 황홀해 지고 눈이 번쩍 뜨인다. 그중 공자의 분묘는 향전 뒤쪽에 있는데 ‘대성지성문성왕묘(大成至聖文宣王墓)’라고 씌어져 있다. 명성에 비해 화려하지 않고 풀이 무성하게 우거져 돌보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 중국의 대사상가인 공자의 무점에 함부러 손댈 수 없다는 중국인들의 신념 때문이다.

 

公府요리

 

공부요리는 공자의 후예가 만든 요리로 만찬코스와 가족코스가 있는데 자체적으로 특징을 가지고 있는 요리이다. 심지어 많이 볼 수 있는 사과도 공부요리에서는 독특한 요리로 된다.

 

1. 팔보(八寶)사과 : 조형이 아름답고 독특한 이 요리는 공부요리의 특색요리라고 할 수 있다. 이 요리는 사과 8개로 만드는데 사과의 겉면에 "팔보"무늬를 그리고 꼭지부분을 떼어 덮개로 만들고 사과 속을 파서 공간을 만든다. 사과 속에 설탕, 호두, , 대추, 깨 등으로 만든 소를 넣은 다음 덮개를 덮어 기름에 튀기고 그 뒤에 덮개 대신 돼지고기를 덮어서 찐다. 찐 사과 8개를 접시에 담은 뒤 설탕, 얼음사탕, , 계화, 기름 등으로 만든 소스를 두면 팔보사과가 된다. 이 요리는 보기에도 좋고 맛은 달고 부드러워 말로 형용할 수 없다.

 

2. 파사과 : 이 요리는 공부 요리중의 전통요리이다. 먼저 사과껍질을 벗겨서 토막토막 썰어서 기름에 튀긴다. 다른 가마에 깨기름을 두르고 거기에 설탕, 꿀을 넣어 발갛게 될 때까지 익혀서 기름에 튀긴 사과에 얹는다. 그러면 빨간 색깔의 부드러운 파사과 요리가 된다. 이밖에 사과를 실처럼 썰어서 설탕물에 담궜다가 깨기름, 설탕 등을 넣어 버무려 올리면 상큼하고 달콤한 사과 냉요리가 된다.

 

국립 안동대학교 중어중문학과 중국문화의 이해 발표 수업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