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한국)

[신비의 고대왕국 .15] 전설로만 전해오는 감문국

지식창고지기 2010. 11. 10. 09:58

[신비의 고대왕국 .15] 전설로만 전해오는 감문국
 마을앞 작은 연못, 밭 한가운데 말무덤 '감문국 존재를 시위하다'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 앞에 위치한 연못 '동부연당'. 김천 향토사학자들은 동부리가 옛 감문 국의 중심인 궁궐이 있던 지역이며, 그 궁궐에 딸린 궁궐지가 바로 동부연당이라고 말한다.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 앞에 위치연못 '동부연당'. 김천 향토사학자들은 동부리가 옛 감문 국의 중심인 궁궐이 있던 지역이며, 그 궁궐에 딸린 궁궐지가 바로 동부연당이라고 말한다.
감문국(甘文國)이 신라에 의해 멸망당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언제 세워졌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감문국이 처음 등장하는 우리 역사서는 삼국사기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2에 보면 '조분왕 2년(231년) 7월, 이찬 석우로(昔于老)를 대장으로 감문국을 토벌했다. 이후 진흥왕 18년(557년)에 이곳을 감문군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학계는 감문국이 기원전 2~3세기에 김천지역에 건국돼 300~500년간 이어지지 않았을까 추정하고 있다.


# 감문국의 역사적 흔적들

이 같은 추측은 김천지역에서 발굴된 유적을 통해 가능하다. 1991년 김천시 구성면 송죽리 고목마을에서 신석기시대 유적과 유물이 출토됨으로써 1만∼1만5천년 전 김천에 사람이 살았다는 사실이 고고학적으로 입증됐다. 또 감문면 문무리에서 청동기시대의 지석묘와 횡혈석실묘 다수가 발견돼 그 시대에 사람이 집단으로 거주하면서 원시적인 문화생활을 영위한 것으로 확인됐다. 현재 감문국 주변에는 산성(석성, 토성)과 지석묘(고인돌) 200여기가 산재해 있다.

특히 김천시 개령면 감문산 정상에는 인위적으로 만든 흔적이 뚜렷한 토성의 일부가 남아 있다. 길이 200m, 높이 2.5m, 너비 10m 의 감문산성은 신라에 복속된 감문국 시대의 토성으로 향토사학계는 보고 있다.

감문산은 성황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이는 감문산이 감문국의 내성으로 나라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아직도 감문산 정상에는 봉수대의 흔적이 남아 있다.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 앞에는 작은 연못이 하나 있다. '동부연당'이다. 동부리는 옛 감문국의 중심인 궁궐이 있은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궁궐에 딸린 궁궐지가 바로 동부연당이라는 게 김천 향토사학자들의 견해다.

동부연당에서 인근 감문산을 넘어 북쪽으로 8㎞ 떨어진 감문면 삼성오성마을의 밭 가운데에 봉분이 하나 있다. 높이 5m, 지름 10m 크기의 이 무덤을 이 동네 주민들은 '말무덤'이라고 부른다. 주민들은 예전에는 지금보다 훨씬 컸는데, 관리를 하지 않아 작아졌다고 했다. 일제시대 때 도굴됐다는 얘기도 있다.

'말무덤'의 '말'은 '크다'라는 뜻을 지닌 접두사로 말무덤은 '큰 무덤', 즉 수장의 무덤이다. 이 무덤을 학계에서는 '금효왕릉'이라 부른다. 감문국 시조왕의 무덤이라는 설이 있다. 하지만 감문국 멸망 이후 만들어졌다는 설도 있다. 봉분을 높게 하는 방식은 5세기 이후 등장했기 때문에 금효왕릉 조성시기가 감문국 멸망 이후라는 것이다. 이는 감문국이 신라에 복속된 이후에도 상당기간 토착세력에 의한 지배를 신라가 용인했다는 증거라고도 한다.

김천을 대표하는 농악이자 경북도 무형문화재 8호인 '빗대농악'은 감문국시대에 군사들이 진영을 펼치고 조련하는 장면과 전쟁에 출전하거나 개선할 때 군사들을 위로하던 연회성격이 담긴 굿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개령면 신룡리와 대광동의 경계를 이루는 고개의 이름은 애인고개다. 감문국과 신라가 대치할 당시 신라 총각과 감문국 공주가 사랑에 빠졌으나, 양국의 대치 때문에 사랑을 이루지 못하다 결국 공주가 상사병으로 죽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개령면 신룡리의 '나벌들'은
감문면 삼성리 밭 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말무덤을 두고 향토사학계는 금효왕릉이라 부른다. 감문국 시조왕의 무덤이라는 설이 있다. (사진제공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2
감문면 삼성리 밭 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말무덤을 두고 향토사학계는 금효왕릉이라 부른다. 감문국 시조왕의 무덤이라는 설이 있다. (사진제공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감문국시대 나(羅)씨 성을 가진 장군이 이곳에서 태어나 큰 공을 세웠다고 붙여진 지명이라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이처럼 김천에는 감문국의 흔적이 곳곳에 있다.


# 신라는 왜 감문국을 정벌했나

감문국의 규모를 알 수 있는 기록은 없다. 하지만 감문국이 곡창지대를 기반으로 안정적인 성장을 해왔을 것이라는 것은 지리적 특수성만으로도 추측이 가능하다.

감천 상류인 송죽리에 신석기·철동기·철기 등 다양한 유적이 분포해 있다. 그리고 감천 하류로 내려갈수록 평야가 넓어지고, 감문국의 도읍지도 하류인 개령에 터를 잡았다. 이것은 김천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초기에는 감천 상류에 집중됐지만 더욱 더 비옥한 토지를 찾아 감천 하류로 내려왔다는 것. 현재도 김천의 대표적 곡창지대가 바로 개령들이다.

감문국의 인구는 중국 구전 역사서인 '동사(東史)'를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동사에는 '아포(현재의 김천 아포면지역)가 조공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을 때 군병 30명을 동원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뤄볼 때 감문국은 600~700가구의 작은 나라로 짐작된다.

그렇다면 신라 입장에서 크지도 않고, 거리도 먼 감문국을 멸망시켜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향토사학계는 그 이유를 크게 3가지로 보고 있다.

김천의 제1하천인 감천을 경계로 현재의 개령지역은 감문국이 확실히 점령하고 있었다. 하지만 감천 건너편인 아포와 성주지역은 가야연맹체 세력권에 있어, 이들과의 세력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신라가 김천 전역을 확실히 장악해야 했다. 또 신라의 입장에서 감문국 점령은 최종 목표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추측도 있다. 당시 경북 중부지역에서 가장 큰 세력권을 형성한 상주 사벌국을 치기 위해서는 감문국을 점령, 전초기지로 활용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 실제 감문국을 점령한 신라는 10년 후 전쟁을 통해 사벌국을 멸망시켰다.

특히 신라에 있어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가야세력이었다. 김해·함안·거창·성주·고령·김천·상주로 이어지는 가야벨트를 무너뜨리지 않고는 신라의 생존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가야세력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리는 첫번째 전쟁으로 감문국을 택한 것으로 보고 있다. 감문국은 당시 신라의 위협적 존재였던 가야영향권에 속해 있었던 나라였다. 또 왜(일본)와도 많은 교류를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신라가 감문국을 정벌한 것이 230년 7월이고, 왜가 금성(신라의 수도)으로 쳐들어 온 것은 231년 4월이다. 그런데 삼국사기에 왜가 금성을 침입한 이유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이 없다.

추측해 보면 임나(아라가야)를 중심으로 일본과 친분을 갖고 있던 가야는 왜의 동조로 감문국을 다시 가야로 편입하려다 실패했고, 신라는 가야세력을 분열시키기 위해 감문국을 공격했다는 것. 감문국이 신라에 점령당하자, 왜가 가야를 대신해 신라에 보복성 공격을 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은 "신라는 추풍령을 확보해야 금강을 넘어 충북 보은 등 한강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며 "이런 관점에서 볼때 추풍령을 끼고 있는 감문국은 신라 입장에서 사활을 걸고 점령해야할 전략적 요충지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2010-09-01 07:58:55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