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옥에서 나온 화가는 다짐에 다짐을 하였다.
당나라에서는 그림을 그리지 않겠노라, 황제 아니라 황제 아버지가 주문하여도 다시는, 다시는, 그리지 않겠노라 하고 스스로 다짐했다. 그림의 인연으로 절세미인을 볼 수 있어 좋았고, 꿈속에서나마 흠뻑 사랑에 젖어 좋았지만, 까딱하다간 불귀의 객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깨달은 거였다. 그래서 그 뒤 일체 붓을 들지 않았다. 그러나 며칠 안 가서 화가는 고민하였다.
29)‘그림을 버리고서야 무슨 보람으로 사는가.’
산송장이 따로 없다고, 밥만 먹고 똥만 누는 산송장이 바로 나라고, 사는 것이 죽느니만 못하다고, 그런 생각이 그를 더욱 고민하게 했다. 그러다가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 꿈에서 궁녀와 함께 살기 좋은 신라로 도망가잔 약속을 했었지. 그러니까, 그 나라로 가보자. 그 나라에선 내 그림을 알아줄 임금과 백성들이 있을 거야.’ 화가는 또다시 앞날에 희망을 걸어보았다. 신라로 가서 귀화하고, 영원히 신라에서 살다가 신라의 흙이 될 결심을 했다.
30)그러나 현실은 꿈과 달랐다, 한참 달랐다.
자신이 그런 붕새로 화하거나 그 붕새를 타고 바다를 건너갈 신선의 몸은 못되었다. 그러다가 때마침 불교 화엄경 연구차 당나라에 왔다가 돌아가는 신라의 중, 의상조사에게 동행을 청하였다. 때는 신라 문무왕 10년(670년)이었다. 진덕왕 4년(650년)에 원효와 함께 당나라로 가던 도중에 난을 당해 이루지 못하고, 그 후 문무왕 1년(661년)에 당나라 사신의 배편을 빌려 타고 당나라에 건너와서 화엄종을 깨치고 돌아가는 신라의 의상조사에게 동행을 청한 것이었다.
31)“당신은 그 명성 뜨르르한 당나라의 그림 대가
우리나라에 가주시면 조야에서 크게 환영해주실 것입니다. 당나라의 유명한 절에서 감탄한 당신의 부처그림을 우리 신라 불당에 그려주시면 얼마나 고마운 불연이겠습니까?” 그래서 화가는 국빈이나 마찬가지의 문화사절 신분으로 신라에 건너왔다. 그는 처음부터 신라에 귀화하여 영주할 희망이 있었으므로 나라에서도 그를 곧 진골(眞骨) 신분을 주었다. 훌륭한 집과 곡식과 여럿 종을 내려주었다.
32)그런 영유로 신라에 거주하게 된 장승요,1)
그는 불상화의 보수만으로도 재산을 이루게 되었다. 귀화한 화가 장승요가 맨 먼저 그린 그림은 중생사의 대비상(大悲像)이다. 그리고 틈 날 때마다 헤어진 궁녀의 모습을 그려 모았다. 화가는 자기가 그린 미인도 속의 인물을 수로라고 지었다.
옛적에 오흥태수 지낼 적에 오흥수씨 집안과 친했었기에.
후일담
33)신라 말기 천성(天成) 연중 최은함은
순박하기 이를 데 없었으나 늙도록 대 이을 자식이 없었다. 없었는데, 그의 아내가 중생사 대비상에게 아들 점지를 위해 백일 기원을 올리고, 그 영험으로 옥동자를 낳았다. 그러나 애지중지하던 외아들이 채 백일이 되기 전에 큰 난리가 나서 세상이 어지러웠다. 마침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서라벌까지 쳐들어와서 서라벌은 불바다가 되고 아우성, 아우성치며 도망하는 백성들로 수라장을 이루었다.
34)노부부는 젖먹이를 데리고 피난하기가 어려웠다.
데리고 가다가 죽이는 것 보다는 차라리 아기를 점지해준 중생사 대비상 부처님께 맡기고 가기로 했다. 부랴사랴 중생사에 간 부부는 부처님께 정성껏 빌고 나서 대비상 그림 밑에 아기를 눕혀두었다. 그러자 부처님이 음성이 들리는 듯 하였다. “알뜰히 보살필 테니 염려 말고 몸을 피했다 오너라.”
소나무, 솔바람소리를 자기 소원대로 들은 것인지도 몰랐다.
35)보름 뒤 피난 갔던 백성들이 돌아왔다.
서라벌에 침입했던 후백제군을 물리치고 난리가 진정된 거였다. 최은함 부부는 허겁지겁 중생사의 대비상 그림 밑에 두고 갔던 아기를 찾으러갔다. 기적, 기적이었다. 대비상 앞에 원래 놓아둔 그대로 누워있는 아기. 방실방실 웃음을 띠우는 아기. 아기 입에서는 아직도 젖 냄새가 남아있었다. 그가 바로 최승로인데, 이때부터 자손이 끊이지 않았다. 최승로가 최숙을 낳고, 최숙은 최제안을 낳았다.
최은함, 경순왕 따라 고려에 들어가 큰 가문을 이루었다.
36)장승요의 대비상 그림은 생불이 움직이는 듯 했다.
이 불상을 배례하고 기도하면 바라는 대로 복을 받았기에 불상화는 더욱 유명해졌다. 이 대비상 그림을 섬기고서 소원 성취한 영험이 무수했는데, 그 중에 최은함 이야기가 저토록 신묘했던 것이다.
-1983년 초반에 없어진 지명, 월성군(소재지-경주시)의 “중생사 벽화”전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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