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동북아 신화의 계보, 맨 위에 단군이 있다
우리는 이미 BC 4500~BC 3000년 전 발해연안에서 꽃을 피운 훙산문화에서 단군신화의 원형을 발견할 수 있음을 논증해왔다.
제단과 여신묘, 적석총 등 이른바 단·묘·총 3위일체 유적의 발견과 곰 이빨, 곰 소조상, 곰형 옥기 등의 출토가 이를 고고학적으로 입증시켜준다. 이미 훙산문화 시절에 제정일치 사회가 개막되었음도 보았다.
단군신화를 유심히 보면 이것은 단순한 신화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단군 왕검은~1500년간 나라를 다스리다가~주 무왕이 즉위한 해(BC 1046년 무렵) 기자(箕子)를 조선(朝鮮)에 봉하자,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삼국유사)
마을 입구에 서 있는 세르게 모습. 우리의 서낭당처럼 기도하는 곳이다.
주 무왕이 은(상)을 멸한 시점으로부터 나라를 다스렸다는 1500년을 더하면 BC 2500년 무렵이 된다. 여기에 환인→환웅↔웅녀→단군의 시대를 감안하면 BC 3000년 무렵과 맞아 떨어진다. 그런 뒤 은(상)이 망하자 기자(箕子)가 본향인 단군조선의 영역으로 돌아오자, 정권을 내주고 장당경으로 옮겼다는 것이다. 얼마나 기승전결이 완벽한 스토리 구조인가.
■ “단군신화는 동이족의 공통신화”
그런데도 시라도리 구라기치(白鳥庫吉)와 이마니시 류(今西龍) 같은 일본학자들의 헛된 부르짖음으로 “단군신화는 잘 구성된 제국의 흥망성쇠”(양민종 부산대 교수)가 아니라 그저 ‘가공스러운 선담(仙譚)’, ‘일고의 가치도 없는 전설“이라고 폄훼된 것이다.
울란우데의 셀렝가 강가 언덕 위에 조성된 게세르 신화 탄생 1000년 기념탑. 울란우데 | 김문석기자
각설하고, 단군신화와 관련해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을 꼽자면…. 우선 단군신화가 한민족만의 건국신화냐 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이번 기획을 진행하면서 끈질기게 ‘동이(東夷)의 역사’임을 강조해온 것과 일맥상통한다.
“단군신화를 있는 그대로 봐야하지 않을까요. 지금까지는 이데올로기에 끼워 맞춘 측면이 강하고…. 단군신화를 찬찬히 뜯어보면 우리가 상식처럼 배워온 특정 종족의 국가 이데올로기가 투영된 건국신화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양민종 교수)
즉, 일연스님이 쓴 조선 건국 신화는 건국 이전의 하늘세계 모습과 건국 이후 국운이 다해 쇠락하는 과정까지를 고스란히 담은 제국의 흥망성쇠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 뼈대만을 기록한 삼국유사의 단군신화에 살을 붙인 서사시의 전개양상으로 분석해볼까요. 우선 하늘신의 세계가 있고, 환웅이 지상으로 강림하는 이유를 담은 프롤로그, 신시(神市)의 형성과 홍익인간과 제세이화(濟世理化)의 실현을 담은 제1부, 아사달에서 제국을 건설한 뒤 단군왕검 시대의 통치기를 담은 제2부, 그리고 제국의 쇠퇴와 부활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제3부…. 어떤가요. 특정종족의 건국 및 족조신화로만 축소시킬 수 있을까요?”
단군신화에 건국신화의 모티브가 분명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건국신화로만 보는 관점은 신화 내용을 축소시키는 우를 범한다는 게 양 교수의 설명이다. 또한 단군신화를 곰토템족이 호랑이 토템족을 꺾고 나라를 세운다는 특정종족의 국가성립 신화로 보는 관점 또한 좁은 해석이라는 것이다.
“단군신화의 통치이념을 한번 들어봅시다. 특정 종족의 이념이 아닌 ‘홍익인간’과 ‘제세이화’ 아닙니까. 환웅이 지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곰과 호랑이로 대표되는 존재들이 과거의 모습을 탈피하고 조화롭고 보편적인 세계로 진입하려는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양 교수는 “단군신화는 곰 족이나 호랑이 족의 토템에서 비롯된 특정종족의 건국신화가 아니라 다양한 종족들의 보편적인 세계 건설을 담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단군신화는 조화와 통합, 상생을 지향하는 인간주의 사상이 스며든, 고대세계의 보편적인 제국의 흥망성쇠를 보여주는 대서사시라는 것이다.
“결국 단군신화는 한민족만의 신화가 아니라 동이계로 대표되는 다종족, 즉 동북 아시아인의 신화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제와서야 순혈주의를 나무라고 세계화를 부르짖지만, 단군은 이미 다양한 종족들이 함께 꾸며가는 보편적 세계를 포괄하는 이상적인 제국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해석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단일종족의 건국신화, 족조신화로만 축소시킨 것은 결국 우리 역사를 축소시키는 것입니다. 단군신화에서 볼 수 있는 조선은 벌써 여러 종족이 여러 문화를 조화롭게 융합, 공동가치를 지향한 동아시아 고대제국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데 말입니다.”
■ 게세르 신화가 도리어 단군신화 계열
또 하나, 동북아시아 신화 속에서 단군신화의 위치는? 과연 단군신화는 바이칼 호수 주변 종족인 부랴트인들의 신화인 게세르 신화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것인가. 육당 최남선도 단군신화의 얼개와 비슷한 신화로 게세르 신화를 꼽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과연 이 바이칼 호수 주변에서 단군신화의 모태를 찾는 작업이 유의미한 것일까. 과연 담딩수렝을 비롯한 몽골연구자들의 말처럼 “게세르 신화의 이동경로가 티베트→몽골→부랴트이며, 단군신화도 게세르 신화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것”일까.
기자는 여기서 양 교수의 이야기를 듣고 하나의 실마리를 부여잡았다.
“중요한 것은 게세르 계열 신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티베트 판본(링 게세르)은 사실 19세기에 채록됐다는 겁니다. 몽골계 판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기록은 1716년입니다.”
더구나 게세르 이야기 가운데 가장 신화적이고, 샤머니즘 세계의 이상을 잘 표현한 것으로 평가되는 몽골계 부랴트 판본이 채록된 것은 불과 10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단군신화는? 일연 스님(1206~1289년)이 삼국유사를 쓴 것은 1280년 무렵이다. 게세르 신화의 채록보다 500년 가까이 앞선 것이다. 한마디로 단군신화는 이른바 게세르 계열 신화 가운데 가장 먼저 채록된 신화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단군신화가 게세르 신화 계열이 아니라 도리어 게세르 신화가 단군신화 계열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는 얘기다.
“확고한 증거가 나오지 않는 한 지금까지 불러온 게세르 계열의 신화는 이제 단군-게세르 계열로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
이 이야기가 담고 있는 함의는 매우 크다. 우리는 그동안 새로운 역사학이나 고고학 자료만 나오면 일본이나 북방을 쳐다보면서 그 원류를 찾느라 법석을 떨기 일쑤였다. “이런 것들은 우리 역사의 타율성과 정체성을 강조한 식민사학의 영향이 크다”는 이형구 선문대 교수의 해석을 참고할 만하다. 양민종 교수도 “신화 내용까지 북방을 비롯한 다른 지역의 유사성을 강조하면서 일방적인 전파론의 잣대로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보고 있다.
■ 차라리 몽골의 조상을 찾아라
1941년 부랴트어로 간행된 게세르 서사시(왼쪽)와 1936년대 러시아 한림원에서 러시아어로 번역 간행한 게세르 서사시의 표지.
또 하나 우리는 몽골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막연히 우리 민족의 시원으로 여기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젠 거꾸로 보는 시각도 필요하다. 이미 러시아·몽골학계에서도 칭기즈칸이 발해 말갈의 후예이고, 몽골은 발해 유민들이 세운 나라”일 가능성을 강하게 제기하고 있지 않은가.(경향신문 5월31일자 보도)
“메르키드족, 즉 발해 말갈의 후손이었던 칭기즈칸은 훗날 자신의 혈통, 즉 메르키드족을 부인하고 섬멸작전에 나섭니다. 순수한 몽골혈통임을 강조한 나머지 자신의 혈통을 철저하게 부정하는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섬멸작전 뒤에 메르키드족의 아내와 딸들을 차지하는데, 그 가운데 훌란 공주라는 여인이 포함됩니다.”(주채혁 세종대 교수)
이 훌란 공주는 몽골 역사상 전설적인 미인으로 꼽힌다. 17세기 문헌인 ‘몽골원류’와 ‘알탄톱치(황금사략·黃金史略)’에는 훌란 공주를 ‘솔롱고스의 공주’라고 적고 있다. 주채혁 교수는 펠리오의 견해를 따라 “일반적으로 ‘무지개의 나라’를 뜻하는 솔롱고스(Solongos)는 사실 솔론, 즉 누렁족제비를 잡아 파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주장한다.
“재미있는 것은 ‘알탄톱치’를 보면 훌란 공주의 아버지 다이르 우순 칸을 보카 차간 한이라고 적고 있다는 겁니다. 보카이(Booqai)의 보카는 ‘늑대’의 존칭어로 몽골에서 발해를 지칭합니다.”
주 교수는 “어쨌든 지금 헤름투라는 곳, 즉 훌룬부이르 몽골스텝의 하일라르 강변에 헌납된 훌란공주와 칭기즈칸이 신혼 초야를 보낸 것으로 짐작되는 유적이 있다”고 말한다.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훗날 몽골제국을 좌지우지한 여인 또한 고려여인인 기황후라는 것이다. 1333년쯤 원나라 황제 혜종이 마시는 차와 음료를 주관했던 궁녀에 불과했던 기(奇)씨는 총명하고 빼어난 미모로 일약 제2 황후에 오른 뒤 치열한 정권다툼 끝에 혜종과의 사이에 낳은 아들을 황태자로 등극시킨다.(1354년) 이후 기황후는 30여년 간 권세를 휘두른다.
탐사단에 합류한 몽골학자 에르데니 바타르 네이멍구대 몽골사연구소 박사는 ‘원서 후비열전(元書後妃列傳)’을 인용, 재미있는 논문을 썼다. 즉 “기황후가 1365년 정식 황후로 책봉된 뒤 숙량합(肅良哈)씨라는 성을 하사받았다”는 것이다.
황제의 총애를 한몸에 받은 기황후는 1359년 지금의 오르도스 지방에 식읍을 받는다. 에르데니 바타르 박사는 “지금도 오르도스 지방에는 솔롱고스, 즉 숙량합사(肅良哈思)라는 성을 가진 몽골인들이 많다”고 덧붙인다. 하지만 그런 몽골이 7차례나 고려를 유린했으니, 끈질긴 인연이 도리어 악연으로 바뀐 셈이다. 다시 ‘몽골비사’를 반추해보면 흥미로운 추측을 할 수 있게 된다. 몽골이 지금 우리 선조가 아니라 우리가 몽골의 선조일 수도 있다는 추정이다.
■ “발해가 몽골의 뿌리”
칭기즈칸이 태어난 때가 1162년. 그런데 ‘몽골비사’는 칭기즈칸으로부터 12대 위의 역사부터 기록한 책이다. 몽골비사를 보면 여시조 알랑 고아가 빛의 교감으로 아들을 낳게 된다. 그런데 알랑 고아의 아버지는 코리-투메트 부족의 귀족인 코릴라르타이-메르겐, 어머니는 바르쿠진-고아였다. 하지만 코릴라르타이-메르겐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그는 스스로 코릴라르라는 씨족을 만든 뒤 정든 코리-투메트 족의 땅을 떠나 부르칸 산으로 떠난다. 그 과정에서 코릴라르타이-메르겐의 딸 알랑 고아가 부르칸 산에서 둥지를 틀고 있던 도분-메르겐이라는 남성을 만나 아이를 낳은 것이다.
이 신화를 뜯어보면 ‘빛의 감응’, 즉 일광감응(日光感應)이라는 측면에서는 유화부인의 설화와 비슷하고, 시기를 받아 정든 고향을 떠나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는 측면에서는 주몽설화와 흡사하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유화부인 설화와 주몽설화가 칭기즈칸의 설화보다 최소한 800~900년은 앞선다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고?
몽골비사가 칭기즈칸 시대(12세기 초)부터 앞선 12대의 역사를 쓴 것이라면 역산해볼 때 알랑고아의 시대는 800~900년쯤 되지 않는가. 그러니 늦어도 기원전 1세기의 신화인 유화부인·주몽설화보다 800~900년가량 늦을 수밖에.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몽골을 이룬 사람들은 발해의 고급문명을 바탕으로 강력한 무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는 얘기가 아니겠어요. 셀렝게 강 일대는 철의 주산지였으니까 더욱 그랬겠지요.”(주채혁 교수)
기존의 뿌리 깊은 통념을 깨는 것. 역사를 공부하는 자세는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울란우데·자거다치·모리다와/이기환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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