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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은본 천부경의 출현

지식창고지기 2010. 12. 22. 20:27

농은본 천부경의 출현              

 

  1. 개요

 

 

 

 

 

 

 

                                        

    [농은본 천부경]

                                         * ‘天符經’이라는 글자와 낙관은 훗날 삽입한 것이라고 해요.

 

 

  현재까지 알려진 천부경은 다음과 같이 5종이 있습니다.

① 묘향산 석벽본: 운초(雲樵) 계연수(桂延壽)가 발견

② 태백일사본(太白逸史本): 이맥의 <태백일사>에 실려 있음

③ 최고운(崔孤雲:최치원) 사적본(事蹟本): 최문창(崔文昌)전집에 나옴

④ 노사전(蘆沙傳) 전비문본(篆碑文本): 蘆沙 奇正鎭

⑤ 농은본(農隱本)

 

  이중 ①과 ②는 완전히 일치해요. 농은본과 각본과의 차이 부분을 비교하면 다음 표와 같아요.

    

농은본

태백일사본

묘향산 석벽본

최고운 사적본

노사전

전비문본

三極

三極

三極

三極

鉅無匱

鉅無匱

鉅無

鉅無匱

三四

三四

三四

三四

一妙衍

一妙衍

杳演

一妙衍

昻明

昻明

昻明

天地一

天地一

 

  농은본은 태백일사본과 여섯 글자가 다르고, 최고운 사적본과는 11자가 달라요. 특히 ‘成玄五十’과 ‘成環五七’의 차이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어요.

  농은본은 진위에 관한 논란이 있지만 그 내용을 보면, 다른 천부경보다 원본에 가장 가까운 천부경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농은본을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아래의 글은 박대종씨의 「한국에서 발견된 갑골문자에 관한 연구」논문에서 발췌한 글입니다.

 

  천부경(天符經)은 한 민족 최고(最古)의 나라로 알려진 환국(桓國)에서 비롯, 구전되어 오던 중 환웅(桓雄)의 명에 의해 신지(新誌) 혁덕(赫德)에 의해 최초로 녹도문(鹿圖文)으로 기록되었고 후에 신라의 최치원이 옛비석에서 신지(新誌)[*단군시대의 천황의 명령을 전하고 출납의 임무를 전담하다가 혁덕이후 기록을 담당했던 벼슬의 이름, 앞의 신지혁덕과는 다른 사람임]가 쓴 전자(篆字)로 된 고각본(古刻本)을 찾아내어 그것을 다시 첩(帖)으로 만들어 세상에 전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천부경은 고려말까지 전해져 내려오다 유교를 숭상하는 조선왕조 때 묻혀버린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난 1916년에 대종교도 계연수(桂延壽)가 묘향산 석벽에서 이를 발견하고, 1917년 탁본을 대종교에 전하여 다시 맥을 잇게 된 것이다.

 

  갑골문은 1899년 중국대륙에서 최초로 발견됐지만 고대최고의 문자학서인 "설문해자(說文解字)"를 지은 후한(後漢 A.D 25~ 220)의 허신(許愼)조차도 갑골문을 몰랐었다. 중국에서 갑골문을 본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것의 실체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던 중 청나라 말기 1899년에 학자인 왕의영(王懿榮)에 의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런데 고려말 충신인 농은(農隱) 민안부(閔安富)의 유품에서 발견된 천부경문(天符經文)에서 은허 갑골문과 동일한 글자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650년전의 인물인 민안부가 중국대륙 은허에서 발견된 갑골문을 보고 천부경을 작성할 수는 없는 일이다. 또한 중국대륙에서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거나 발견되었다 하더라도 미해독된 갑골문자들이 농은유집 천부경에 다수 발견, 확인됐다는 점이다.

 

  농은 민안부는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도은 이숭인, 야은 길재, 수은 김충한과 더불어 6은(六隱)으로 불리었던 충신으로 조선이 개국하자 고려신하로서 도리를 다하지 못했다며 두문동(杜門同)에 은거한 72현 중의 한 사람이다.

 

  주목할 점은 조선조 이맥이 "태백일사"에서 “세상에 전하는 바 목은 이색, 범세동은 모두 천부경을 주해하였다”고 증언한 점이다. 이색은 민안부와 당시 교분이 두터웠고, 범세동은 민안부와 같이 두문동에 들어간 72현 중의 한사람이다. 이는 민안부도 천부경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즉 고려충신 72현들 사이에서 천부경은 여러 부 작성되어 귀중하게 보관되었고, 이번에 발견된 농은 민안부의 천부경은 그의 후손인 민홍규씨가 2000년초 송호수 박사를 찾아가 선보임으로써 공개된 것이다.

 

또 주목할 점은 민족경전인 "삼일신고"의 내용 중 발해 문왕인 지은 "삼일신고봉장기"에 단군이 신지에게 "삼일신고"를 그리라는 명을 내렸다는 구절이 나온다. "천부경"이 "삼일신고"의 한쌍임을 고려할 때 천부경에 대해서도 동일한 그림문자로 돌 위에 새겼다는 추정이 가능해진다.

 

  또한 "후조선기"에는 ‘기자(箕子)가 부여의 법학자였던 왕수긍(王受兢)을 초빙해 박달나무에 은문(殷文)으로 삼일신고를 쓰게 하여 그것을 읽었다’라고 기록이 있다. 종래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이 지배적이지만, 일반적으로 기자는 은나라의 현인(賢人)으로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를 빼앗자 B.C 1122년에 동쪽 조선으로 들어와 기자조선을 건국한 이로 알려졌는데, B.C 1122년이면 지금으로부터 3122년 전으로 은허 갑골문 시기와 일치한다.

 

  이를 종합할 때 민안부의 "농은본 천부경"은 기자의 초빙(招聘) 및 지시하에 왕수긍이 삼일신고와 함께 은문(은허갑골문)으로 쓴 진본을 후대에 일급 서예가가 지금으로부터 최소 6백년전 이상의 옛날에 정밀모사한 모사본으로, 왕수긍이 쓴 당시 연도는 지금으로부터 약 3100년 전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기자 이전의 원본 천부경, 즉 단군 나아가 환웅시대의 천부경까지 고려하면 천부경 자체는 그보다 훨씬 멀리까지 소급된다.』

 

2. 문자의 비밀

 

  천부경의 81자 글자 중에서 30자가 숫자이므로, 이 숫자에 관한 이해가 중요해요. 먼저 이를 일괄하여 살펴봅니다.

 

①. 숫자의 비교

  숫자는 비밀을 간직한 암호문자입니다. 그런데 그 숫자의 모양이 갑골문이나 금문에 표기된 것과 아주 다르고, 삼일신고(三一神誥)에 나오는 신시(神市) 산목(算木) 표기법과는 한 자만 빼고 같아요. 산목이란 막대기를 가지고 셈하는 원시적인 방법입니다.

 

  1.2.3.4의 숫자는 모두 같은 모양이나, 5.6.7.8.9.10의 숫자는 달라요. 농은본에 나오는 6.7.8.9의 숫자 모양은 <삼일신고(三一神誥)>에 전하는 숫자 모양과는 같고, 갑골문과는 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