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에 관하여 민간에서 전해온 이야기. 야사(野史)·야승(野乘)·패사(稗史)·패설(稗說) 등의 용어로 통용되기도 하나 엄밀한 의미에서 같은 개념은 아니다. 야사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야사보다는 허구성이 중시된다는 점에서 야사와 구별되며, 넓은 의미로는 설화에 속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야담은 민간에서 구전되던 설화적 모티프들이 결합되어 생성된 것이며, 문자로 정착된 뒤에도 여전히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어 설화와 같이 유동문학적(流動文學的)·적층문학적(積層文學的) 성격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화보다 실사(實史)에 치중한 면이 많다는 점에서 설화와 구별되기도 한다.
문학의 장르상으로 볼 때 야담은 서사장르류에 속한다. 그러나 서사장르류의 하위양식, 곧 장르종(種)으로서의 야담은 성립되기 곤란하다. 왜냐하면, 야담 속에는 신화·전설·민담뿐만 아니라 소설적인 작품까지 포괄되어 있어, 그 자체가 장르종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결국 야담은 정식 장르 명칭은 아니다.
따라서, 종래 문학의 한 양식 명칭으로 ‘야담’이 많이 쓰였던 것은 엄밀한 장르 의식에서였다기보다는 ‘민간에서 전해온 이야기’를 총괄하는 통념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요컨대, 야담은 학술적 장르 명칭이라기보다는 관습적 장르 명칭인 것이다.
이러한 야담은 초기에는 단순한 이야깃거리에 지나지 않았으나 점차 본격 문학작품에까지 접근해갔다. 특히, 조선시대 말 산문문학의 발달 추세에 힘입어 소설화의 경향을 띠게 되었다.
야담의 기록자는 단순한 줄거리의 복사에서 나아가 하나의 단편을 바탕으로 이를 부연·윤색하거나 또는 여러 단편들을 결합하여 장편화하기도 하였으며, 단편에 창의(創意)를 가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야담이 종전처럼 단순한 견문(見聞)의 재현에 그치지 않고 거기에 기록자(개인작가)의 창작적 요소가 덧붙여졌을 때, 이제껏 민중 속에 전승되는 설화에 지나지 않던 야담이 마침내 소설문학으로까지 변모될 수 있었다.
〔특 징〕
야담은 이야기꾼들에 의해서 이야기되거나, 또는 유식자에 의하여 문자화된다. 일단 문헌에 정착된 이야기는 또 다른 유식자에 의하여 전사(轉寫)되거나 또다시 구전되기도 한다. 이러한 야담의 전승적 특질 때문에 현전하는 많은 야담들의 내용은 유사성을 띠게 되는데, 이는 설화자나 기록자가 자신의 견문을 충실히 전하려 하는 데서 연유한다.
가령 유몽인(柳夢寅)이 찬(撰)한 ≪어우야담≫에는 “견문에 따라 어우야담을 지었다(隨見聞者於于野譚).”고 기록되어 있고, 이희준(李羲準, 李羲平說도 있음)이 찬한 ≪계서야담 溪西野談≫에도 “야담은 견문에 따라 기록한 것이다(野談者隨見聞而記錄也).”라고 쓰여 있는 것이다.
야담의 내용은 흔히 화자(話者)나 기록자가 기억상실을 메우기 위하여, 또는 흥미 제고(提高)를 위하여 그들 임의대로 첨삭하거나 개변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라도 임의창작에 의하기보다는 자신의 기억 한 구석에 남아 있는 설화적 재산을 끄집어내어 혼입시키게 된다.
이처럼 설화적 요소에 창작적 요소가 쉽게 끼여들 수 있고, 또 양자 사이에 명확한 경계선을 긋기가 어렵기 때문에 하나의 작품을 놓고 야담인가 소설인가 하는 논쟁이 종종 야기되어 왔으며, 심지어 소설의 발생 시기를 ≪삼국유사≫에까지 올려 잡으려는 가설까지 제기되기도 했다.
설화성과 아울러 제기되는 야담의 또 하나의 특징은 역사성이다. 야담은 주로 역사적 사건, 역사적 인물과 관련된다. 야담이 흔히 야사나 인물전설처럼 보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야담의 작자, 즉 민중은 야담을 통하여 그들의 역사의식을 허구화한다. 그들은 야담 속에서 역사적 인물을 허구적 인물로 재창조하기도 하고, 가상의 인물을 역사적 실제 인물로 만들어 내기도 한다.
물론, 야담 속에서 재창조된 인물들과 역사적 실제 인물들이 동일시될 수는 없다. 야담적 사실은 결국 ‘참 역사’는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야담의 의사역사성(擬似歷史性)은 민중의 꿈과 이를 성취하고자 하는 그들의 바람으로부터 생겨난 허구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역 사〕
야담(설화)의 발생은 상고시대까지 소급할 수 있으나 오랫동안 구두로 전승되어왔기 때문에 그 발생연대를 짐작할 수 없다.
문헌상으로 볼 때 최고의 문헌 중 하나로 알려진 ≪구삼국사 舊三國史≫가 현재 망실되어 그 자세한 내용을 알 수는 없으나, 이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후대 문헌들의 내용으로 미루어 여기에는 정사(正史) 외에도 민간에 떠돌아다니던 이야기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어 8세기 초 신라의 김대문(金大問)에 의해 화랑이나 승려, 또는 민간에 구전되는 일사기문(逸事奇聞)들을 모은 것으로 생각되는 ≪화랑세기 花郎世紀≫·≪고승전 高僧傳≫·≪계림잡전 鷄林雜傳≫ 등이 저술되었다고 하나 이 역시 불행히도 산일(散佚)되어 버렸다. 현전하는 야담집류 중 최초의 것은 ≪수이전 殊異傳≫으로 추정된다.
이 책의 편자 및 편찬연대에 관하여는 여러 이설이 있어 단정짓기 어렵지만, 승려인 각훈(覺訓)의 ≪해동고승전 海東高僧傳≫의 기록인 ‘약안박인량수이전(若按朴寅亮殊異傳)’을 따른다면, 이 책은 박인량의 생몰연대(1047?∼1096)로 미루어 대략 11세기 후반의 문헌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책 역시 산일되어 그 원모습을 거의 알 길이 없고, 다만 여러 책에 흩어져 전하는 일문(佚文)들을 참고하여 볼 때 민간 야담을 바탕으로 상당히 문학성 있는 작품들이 수록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오늘날 우리가 확실히 참고할 수 있는 옛 문헌으로는 ≪삼국사기≫·≪해동고승전≫·≪삼국유사≫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삼국유사≫와 같은 문헌은 ‘유사(遺事)’라는 명칭이 시사하는 의미나, 책머리의 저자 자술(自述), 즉 기이편(紀異篇)에서도 분명히 나타나는 바와 같이 야담적 사실들을 의도적으로 채록해 놓고 있어 야담집으로 간주할 만하다.
13세기나 14세기에도 아직 야담집다운 문헌은 찾아볼 수 없었으나, 현전하는 약간의 문집이나 이른바 패관문학서(稗官文學書)들에서 다소나마 야담적 자료들이 산견(散見)된다. 가령 최자(崔滋)의 ≪보한집≫과 이제현(李齊賢)의 ≪역옹패설≫이 그러한 예이다.
또한 이 무렵에는 민간설화를 바탕으로 하여 씌어진 이규보(李奎報)의 〈동명왕편 東明王篇〉도 나왔다. 15세기 후반에 이르러 비로소 설화집의 편찬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서거정(徐居正)의 ≪태평한화골계전 太平閑話滑稽傳≫, 성현(成俔)의 ≪용재총화 弁齋叢話≫, 강희맹(姜希孟)의 ≪촌담해이 村談解蓬≫를 비롯하여, 서거정의 ≪필원잡기 筆苑雜記≫, 남효온(南孝溫)의 ≪추강냉화 秋江冷話≫, 이육(李陸)의 ≪청파극담 靑坡劇談≫, 조신(曺伸)의 ≪소문쇄록 瑄聞磨錄≫과 같은 문헌들이 나타났다.
16세기에는 송세림(宋世琳)의 ≪어면순 禦眠楯≫, 그 밖에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 稗官雜記≫, 정미수(鄭眉壽)의 ≪한중계치 閑中啓齒≫, 김안로(金安老)의 ≪용천담적기 龍泉談寂記≫가 있었고, 17세기 전반에는 유몽인의 ≪어우야담≫이 나왔다. 이 책은 ‘야담’이라는 명칭을 표제에 붙인 최초의 책이었다.
이 무렵에 이루어진 성여학(成汝學)의 ≪속어면순 續禦眠楯≫, 차천로(車天輅)의 ≪오산설림 五山說林≫, 이수광(李邈光)의 ≪지봉유설 芝峯類說≫, 김시양(金時讓)의 ≪하담파적록 荷潭破寂錄≫ 등에도 다수의 야담적 자료가 들어 있다.
17세기 후반에는 홍만종(洪萬宗)의 ≪명엽지해 蓂葉志諧≫가 나왔고, 그의 ≪순오지 旬五志≫·≪해동이적 海東異積≫ 등도 야담 연구에 유용하다. 18세기 전반에는 신돈복(辛敦復)의 ≪학산한언 鶴山閑言≫, 이희겸(李喜謙)의 ≪청야만집 靑野亶輯≫, 정재륜(鄭載崙)의 ≪공사견문록 公私見聞錄≫ 등이 등장했다.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에 걸친 시기는 전 시대에 꽃을 피우기 시작했던 산문정신이 드디어 결실을 맺은 시기였다. 문학사상 두드러진 산문화의 경향은 판소리·소설·잡가·장편가사·사설시조와 같은 문학 장르를 완성시켰을 뿐만 아니라 야담의 집대성도 이루었다.
이 시기에 편찬된 대표적인 야담집으로는 ≪동패낙송 東稗洛誦≫·≪선언편 選諺篇≫·≪해동야서 海東野書≫·≪기문총화 記聞叢話≫·≪계서야담≫·≪청구야담 靑丘野談≫·≪동야휘집 東野彙輯≫ 등을 들 수 있는데, 특히 마지막 세 문헌은 각각 312편, 293편, 260편의 자료를 담고 있어 우리 나라 ‘3대 야담집’이라 부를 만하다.
이들 중 편찬자가 알려져 있는 것은 ≪계서야담≫과 ≪동야휘집≫뿐이다. 20세기 들어 본격적인 근대문학이 시작된 이후에도 야담은 여전히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여러 출판사들이 꾸준히 ‘야담’이니 ‘사화’니 하는 부류의 책들을 출판하였다.
1926년에 한양서원(漢陽書院)에서 간행된 강효석(姜斅錫)의 ≪대동기문≫도 그러한 책 중의 하나이다. 야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점차 문단에는 야담을 전문으로 집필하는 작가군까지 생겨났다.
이들의 작품은 종전의 야사·야담집의 자료들을 윤색하거나 재창작한 것들이 대부분이었으나 창작소설 못지않은 대우를 받으며 신문·잡지의 지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가령 1934년 10월에 창간되어 통권 55호를 기록한 ≪월간야담 月刊野談≫이나, 1935년 12월에 창간되어 통권 110호를 기록한 ≪야담 野談≫과 같은 월간지들의 장수(長壽)는 당시 대중들의 야담취향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라 할 것이다.
광복 후 지금까지도 야담관계 서적은 끊임없이 간행되고 있다. 1950년대에서 1970년대에 걸쳐 ≪야담≫·≪야담과 실화≫ 등 수종의 월간잡지가 나온 바 있으며, 상당한 권책(卷冊)으로 이루어진 야담 전집류도 여러 차례 간행되었다.
1960년대 초에는 ≪한국야담사화전집≫(1960, 동국문화사), ≪한국야담전집≫(1961, 신태양사), ≪정통한국야사전집≫(1961, 청운사) 같은 것들이 거의 동시에 경쟁적으로 출간되었던 것이다.
〔연구 및 전망〕
민간에서 야담이 유행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1970년대 초까지 이에 대한 학자들의 연구 성과는 그다지 만족할 만한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 야담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가 없었음은 물론이려니와, 그에 대한 가치 평가도 별로 온당한 것이 아니었다.
대개의 경우 학자들은 개설서에서 약간의 지면을 할애하여 야담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정도에 그쳤다. 그것도 야담 자체를 고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소설사를 기술하면서 소설의 전 단계로서 야담을 상정하여 ‘설화의 소설화’ 또는 ‘소설의 배경설화’를 언급하거나, 한문학사를 기술하는 과정에서 한문학 작품의 예로서 야담집이나 야담 자료를 논급하였던 것이다.
광복 이전의 야담관계 논문 중에서 특별히 논급할 만한 것으로는 조윤제(趙潤濟)의 〈설화문학고 說話文學考〉(文章, 3권 3호, 1941.3.)가 있다. 이 글을 통하여 조윤제는 설화에 대한 제반 문제를 개관하는 가운데 야담에 대해서도 언급하여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연구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등 매우 주목할 만한 발언을 남겼다.
야담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이루어진 것은 1970년대에 들어서인데, 상당한 수의 신진학자들이 연구 대열에 참가하여 다양한 측면으로 야담을 집중 고찰한 결과 풍성한 성과를 얻고, 국문학 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할 수 있었다.
이 기간 동안의 연구 동향을 요약하면,
① 용어 및 장르론(야담은 야담인가, 설화인가, 소설인가, 수필인가?),
② 고전소설에 미친 야담의 영향(배경설화론 혹은 야담과 소설의 비교연구),
③ 단일설화집에 관한 연구(태평한화골계전·어우야담·동야휘집·청구야담·계서야담·삽교만록 등에 대한 연구),
④ 단일작품에 관한 연구(야담작품에 반영된 사회경제적 특성),
⑤ 이야기꾼에 관한 연구(이야기꾼과 기록자 또는 야담집의 편찬자에 대한 연구) 등을 들 수 있다.
야담연구의 첫걸음은 자료의 발굴·정리·분류 작업으로부터 시작된다. 자료 수집에 있어서는 야담집의 발굴뿐만 아니라 각 문헌 및 나아가 구전 자료까지 거두어 모으는 일이 중요하다.
자료를 정리할 때에는 그 자료가 수록되어 있는 문헌의 편찬연대 및 편찬자 또는 편찬의도, 편찬방법, 나아가서는 유사 자료와의 비교, 전후대 문헌자료와의 영향 수수관계 등까지도 규명되어야 할 것이다. 야담의 분류는 ≪동야휘집≫ 편자에 의해 최초로 시도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19세기 중엽에 이루어진 이 분류는 한정된 자료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으므로, 이것을 모든 야담 분류에 적용하기에는 매우 미흡하다. 그러나 앞으로 보다 완전한 분류체계가 이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야담은 과거 다른 기록문학 장르가 양반 위주의 것이었던 데 반해 양반과 상민이 공유하던 문학 장르라는 점에서도 문학사적 의의를 지닌다. 야담은 민중 속에서 탄생된다. 그러므로 그 속에는 민중의 꿈과 생활이 투영되어 있다.
야담 속에는 역사적 사실이 정직하게 반영되어 있기도 하지만, 때로는 역사적 사실과는 정반대의 왜곡된 모습이 나타나기도 한다. 상층 계급에 의한 역사보다 야담에 투영된 민중의식 속에서 ‘참 역사’가 재구성될 수도 있다.
따라서, 기록야담의 연구에 있어 문면(文面)에 나타나 있는 기록자의 연구뿐만 아니라, 배면(背面)에 숨어 있는 화자와 독자의 연구도 중요하다. 이러한 연구는 이야기에 투영된 민중의식을 추출해 내거나 야담의 소설로의 이행 과정을 밝히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설화의 내용을 분석하여 설화 향유층이 표현하고자 했던 주제나 인간상, 나아가 세계관·인생관을 파악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야담의 문학사적 의의는 그것이 통시대적 작품이라는 데 있다.
즉, 야담은 기록문학 이전단계에서부터 시작되어 현재는 물론 미래에까지도 지속될 것이며, 문학의 다른 장르에 끊임없이 소재를 제공해 왔고, 또 앞으로도 제공할 것이다. 특히, 조선시대 말기의 소설의 발생 및 발달에 야담이 커다란 기여를 한 점은 간과해서는 안 된다.
조선시대 말기에 비롯된 산문정신의 대두는 야담의 집성, 판소리의 정립을 가져왔고, 이러한 시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소설문학이 출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야담이 소설에 끼친 영향에 대한 연구에서는 소재의 대비뿐만 아니라, 구조나 형식 등의 계승 문제들에 대해서도 검토되어야만 할 것이다.
≪참고문헌≫ 韓國說話文學硏究(張德順, 서울大學校出版部, 1970), 李朝漢文短篇選集 上·中·下(李佑成·林熒澤, 一潮閣, 1973·1978), 朝鮮後期文獻說話의 硏究(曺喜雄, 螢雪出版社, 1980), 說話文學考(趙潤濟, 文章 3-3, 1941), 古代小說에 미친 野談의 影響(李石來, 省谷論叢 3, 1972), 野談의 文學的意義와 性格(玄吉彦, 韓國言語文學 15, 1978), 文獻說話의 硏究(曺喜雄, 韓國文學硏究入門, 知識産業社, 1982).(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요점 정리
기원
야담의 기원이나 발생을 정확히는 말을 할 수가 없다. 대체로 고려 후기의 '역옹패설'같은 시화·잡화·잡록류 문학에서 일화·기담의 요소들이 발달하여 서거정의 '태평한화골계전' 같은 일화집이 이루어지면서 야담의 초기 형태가 성립하고,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이르러 본격화된 것이라 본다.
성격
'계서야담'의 서문에 '야담자수기견문면기록 (야담자주기견문면기록 : 갖가지 견문을 기록한 것)'이라고 한 것과 같이, 그 내용이 사실적이든 허구적이든 흥미롭다고 여겨지는 온갖 견문을 기록한다는 데 특성이 있다고 하겠다.
영역
실제 인물의 생애에서 있었던 일을 평면적으로 전달하는 사실담도 있으며, 역사적 사건이나 일화에 약간의 윤색이 가해진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등장 인물의 실재성 여부가 어떻든 비상하게 날카로운 구성과 전형화를 통해 사회적 갈등이나 세태의 일면을 묘파한 작품이 있다. 이를 양분하여 보면 야담의 한 끝에는 실재했던 삶에 관한 사실적 진술이, 다른 한쪽 끝에는 한 시대의 사회상을 집약하여 생생하게 드러내는 허구적 형상으로서의 이야기가 있다.
주제
야담에 자주 등장하는 문제는, 재산의 축적, 사람의 본능적 요구, 세속적 이해 관계, 낡은 신분 질서의 붕괴, 주인과 노비사이의 갈등. 도적과 사기꾼들, 시정인들의 생활상, 특이한 삶을 살아간 기인. 일사(일탈한 선비)들의 세태에 대한 풍자와 해학 등이다.
야담 관련 서적
야사(野史)·패설(稗說) 이라고도 한다. 야담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지금은 전하지 않으나, 신라시대의 이야기를 박인량(朴寅亮)이 수집했다고 하는 〈수이전 殊異傳〉에까지 소급된다. 그뒤로는 14세기 최자(崔滋)의 〈보한집 補閑集〉, 15세기 성현(成俔)의 〈용재총화 齋叢話〉, 17세기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 於于野談〉 등이 대표적으로 꼽힌다. 야담이 가장 활발하게 집대성된 것은 18~19세기 〈계서야담 溪西野談〉·〈청구야담 靑丘野談〉·〈동야휘집 東野彙輯〉에 이르러서이다.
심화 자료
야담의 성격
1. 서사적인 요소가 강하다.
2. 한 두 가지의 삽화로 구성되어 있어 길이가 짧다.
3. 구전적인 것이 많다.
4. 확인되지 않은 사실에 근거한다.
5. 교훈적인 요소와 흥미성이 함께 결부되어 있다.
야담의 특징
야담은 주로 한문으로 기록된, 비교적 짤막한 길이의 잡다한 이야기들의 총칭이다. 그러므로 다양한 내용, 성격의 이야기들이 뒤섞이어 매우 방만한 군집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야담의 특징이다.
1. 야담의 영역 가운데 서사적 전형성이 높은 것을 '한문 단편'이라 하기도 한다.
2. 야담 중 상당수가 구전 설화의 기록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서 '문헌설화'라고 하기도 하나, 모든 문헌 설화가 다 야담이거나 모든 야담이 다 민간설화의 문헌 정착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야담(野譚(조선시대야사))
조선 건국에서부터 임진왜란 때까지의 주요한 사건들을 시대별로 수록한 야사(野史). 불분권 1책. 필사본. 필자 미상. 필자는 이 책 속에서 이 글을 ‘야사’라고 기록하지 아니하고 ‘야담’이라고 한 것은 겸손한 뜻에서라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처음 이 글을 ‘매산소설(梅山小說)’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신하가 되어서 사서(史書)를 정리하거나 왕에게 직간하는데 있어서 말을 부드럽고 겸손하게 하는 이유로는 왕에게 촉노(觸怒 : 윗자리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거슬러서 화를 내게 만듦)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라고 필자는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 글은 필봉이 날카롭고 강해서 읽는 사람의 감정을 움직이는데 충분하다.
태조 당시의 사실을 기록한 것을 보면, 명태조 주원장(朱元璋)이 조선 태조의 화상을 구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 때 태조가 자신을 과장시키기 위해 명나라 화공을 꾀어서 화상을 크고 장엄하게 그려서 보냈으나, 명태조가 그것을 알아차리고 화공을 처벌한 뒤 다시 그리게 하여 가져간 사실이 있다.
이는 정사에는 없는 사실로, 이밖에도 정사에 없는 사실이 많이 언급되어 있다. 맹사성(孟思誠)이 대사헌이 되고 박안신(朴安身)이 지평으로 있을 때 태종의 부마인 조대림(趙大臨)이 죄를 짓자 상감에게 보고도 없이 구속한 사실이 있었다.
이를 알아버린 태종이 화가 나서 맹사성과 박안신을 죽이고자 했으나, 조금도 기색을 변하지 않고 몸은 죽어도 바른 일은 후세 사가가 증명한다고 해서 풀려난 사실의 기록도 정사에는 없는 것이며, 관리의 기개를 보여주는 좋은 글이다.
특히, 단종애사(端宗哀史)에서 사육신의 충절과 종친인 금성대군(錦城大君)의 충절을 직필로 다루어 보는 사람들의 충의심을 고무하였다. 또, 연산군의 어지러운 정치를 비롯해 무오사화·갑자사화·기묘사화·을사사화의 사대사화 등 사림의 칠화(七禍)를 다룸에 있어서는 구체적으로 정리했고, 정미서벽옥사(丁未書壁獄事)와 기유옥사의 전말도 상세히 다루었다.
말미에 ≪동고집 東皐集≫이 있는데, 그 가운데 〈유차 遺箚〉는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왕에게 올린 글이다. 유차에서는 왕이 실시해야 할 4개 덕목을 열거하였다. 즉 ① 오직 학문에 힘쓰는 일을 가장 큰 것으로 생각하고, ② 아랫 사람을 대할 때에는 위의가 있어야 하며, ③ 군자와 소인을 구분해 군자는 친하고 소인을 멀리할 것이며, ④ 붕당의 사견을 파괴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또한, 〈녹견허태사조선풍속 錄遣許太史朝鮮風俗〉에서는 중국 사람이 우리 나라 풍속을 알고자 문의한 것에 대해 아름다운 풍속만을 골라서 알려준 글이다. 즉 ① 사대부의 상례와 제례, ② 혼인에는 육례를 갖출 것, ③ 선비의 아내는 남편이 죽어도 수절할 것, ④ 왕이 선농단(先農壇)에 친제(親祭)해 농사의 시범을 보일 것, ⑤ 2품 이상의 고관에게 연 2회 사연(賜宴)할 것, ⑥ 효우 및 의와 열을 가려서 시상할 것, ⑦ 종친과 대신의 죽음에 조회를 파할 것 등이 기록되었다. 그 밖에 오형제 이상 등과하면 세미를 지급할 것 등 38건의 미풍이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