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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충만을 통한 상한 마음의 치유

지식창고지기 2012. 1. 26. 08:36

성령충만을 통한 상한 마음의 치유

 

제1장. 내적 치유의 정의

1). 내적치유는 깊은 차원의 치유이다. 깊은 곳의 아픔,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다. 잠재의식, 무의식의 치유이다. 또 내적치유는 인간관계의 치유이다. 인간은 영적이고 심리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관계는 감정의 관계, 심리적인 관계이다. 그런데 감정이나 심리상태, 영적상태가 좋지 못하면 인간관계가 좋지 못하게 되며, 한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한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다. 내적치유는 이러한 관계성을 치유하는 것이다. 내적치유는 인간의 가장 내적인 부분인 영으로부터 시작하여 성품, 인간관계, 하나님과의 관계까지도 치유하며, 육신의 질병까지도 치유한다. 내적치유는 전인격적인 치유이다.
내적 치유 - -

창1:27-28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의미는 하나님의 대리자, 하나님과 같은 권세로서,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지배하고 보살피는 존재라는 것이다. 사람은 원래 이러한 존재로 창조되었다.
창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이를 위해서 하나님이 오직 사람에게만 영을 주셨다. 영을 가진 영적 존재가 된다는 것은 영에서 나오는 권세, 힘, 생명력으로 환경을 이기고 이 사명을 감당하는 존재가 되라는 것이다. 영으로 혼과 육, 환경을 지배하며 다스리는 존재가 되라는 것이다. 영으로 늘 하나님과 교제함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권세를 늘 소유하며, 하나님의 뜻을 받아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하여야 하는 것이다. 참으로 영적 존재인 사람은 주께서 내안에, 내가 주안에 늘 교제함으로 주님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것과(요15:4-10), 하나님 하신 일을 우리도 하는 존재(요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인 것이다.
그런데 아담의 범죄 이후 모든 인간의 영성이 잠들어버리게 되었고, 이 세상은 오직 육과 이성이 다스리는 세상이 되었다. 죄가 다스리는 세상이 된 것이다.
창15:13-14,16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리니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네 자손은 사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나님의 선민, 택한 백성,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이렇게 죄로 관영한 세상의 죄를 물리치는 사람으로 선택받은 신분이라는 것이다. 죄와 싸우고 죄를 물리칠 신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스스로는 그렇게 할 힘이 없다. 능력도 없다. 이러한 능력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다. 그러므로 이렇게 택한 백성에게 하나님은 “내가 이스라엘 백성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니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고 말씀하신다.(출29:45-46) 즉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은 이제부터 하나님을 우리중에 모시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시고 이 세상에 가득한 죄와 사망을 물리치고 생명과 축복을 만들어 가는 존재로 선택받았다는 것이다.
히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9:13-14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겠느뇨
이렇게 택한 백성일지라도 죄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대로는 그들 중에 거하실 수도 없고, 그들을 쓰실 수가 없으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들에게 피를 요구하셨다. 메시야의 피를 대신할, 모형의 피인 염소와 송아지의 피를 뿌림으로 이들은 하나님을 섬겼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음으로 (담보하여) 하나님을 그들 중에 모실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섬김은 어디까지나 잠정적이었고, 조건적이었으므로 그들은 세상에 만연한 죄와 싸워 이길 수도 없었고, 하나님을 그들중에 영원히 모실 수도 없었고,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와 사귐도 없었다.
요일1:3 우리가 보고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된 크리스챤은 아담 이후로 이제야말로 제대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하나님을 가장 깊은 속에 모시게 된 것이다. 이제는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며 영원히 하나님을 모시게 되었다.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영이 죽었던 사람이 다시 영이 살게 되었으므로 하나님과 교제하고 사귀는 영적인 사람이 된다. 영이신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며, 영이신 하나님을 닮아 간다는 것이다. 이제야말로 제대로 죄와 싸워 이기고, 저주와 싸워이기고, 환경을 지배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고전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을 우리 속에 모시고 늘 교제함으로만이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성도의 신분이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을 안에 모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벧전1:16) 하고 거룩함을 요구하신다. 피뿌림받고 죄사함받아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제부터 하나님을 모시는 생활,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 환경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생활을 하기 위해서 반드시 거룩해져야 한다. 우리 영-혼-육의 모든 더러움을 계속 씻어내야한다. 이것이 성화의 길이요, 이것이 바로 내적 치유이다.
살전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육 모든 부분이 온전하기를 원하신다. 가정의 화평함, 좋은 인간관계, 사회에서의 밝은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내적 치유는 이러한 하나님의 관심에 가장 가까운 치유이다. 인간의 지체는 영-혼-육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눈으로 보이는 부분의 상처만을 치유함으로 온전한 치유가 되지는 않는다. 원인이 되는 더 갚은 곳, 다른 부분까지도 치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적 치유는 하나님의 뜻에 가장 가까운 치유이다. 영적존재인 인간은 같은 영적인 존재인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성을 가지고 사는 존재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관계성이 잘되어 있지 않음으로 내적으로 문제를 가지게 된다. 인간이 갖고 있는 신체, 심리적인 질병중 대다수가 상한 감정이나 영적인 문제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적 치유는 이런 영역들을 중점적으로 다룬다. 내적 치유는 사람들에게 상처가 된 문제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치유되기를 구하는 것이다.

2). 사람들은 과거보다는 현실을 더 중시한다. 그러나 과거-현재-미래는 다 연결된다.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미래는 현재로부터, 현재는 과거로부터 쌓여져가는 것이다. 시간은 사건이 쌓여서 이루어진 것이다. 과거의 사건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현재의 밑에 쌓여 있다. 깊숙히 쌓여 있다. 과거는 우리의 깊숙한 곳에 무거운 짐으로 우리를 날아오르지 못하게 얽어매고 있다.
히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눈에 보이는 부분만이 나무가 아니라, 밑의 뿌리로부터 나무이다. 뿌리로부터 윗부분이 지탱된다. 뿌리가 우리의 과거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나는 과거가 쌓이고 모여서 된 것이다. 과거의 사건들은 나무의 뿌리처럼 어떤 형태로든 현재의 나와 연관을 맺고 있다. 비록 겉으로 보이지 않고 안에(내적으로) 감추어져 있지만, 이러한 사건들이 바로 오늘의 나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은 내일과 연결되는 것이다. 인간이 받는 모든 상처는 크건 작건 모든 것이 나무의 나이테처럼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잠재의식에 가라앉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래를 건축하기 위해서는 현재를 바꾸어야 하며, 현재를 바꾸기 위해서는 과거를 치유해야한다.
내적 치유는 과거의 치유이며, 이것은 오늘의 나를 변화시키는 것이며, 새로운 미래를 건설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시간을 거슬러 과거로 돌아가서 과거를 치유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내 속에 깊숙히 계신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우리 밑에 쌓여 있는 과거를 치유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엎지른 물을 다시 담을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할 수 있는 것이다.
날마다 성령의 도움을 받아서 인간의 가장 깊은 부분인 영에 쌓여 있는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내적 치유이다. 아무리 급해도, 가지에 영양주사를 놓아서는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뿌리로부터 올라오는 영양으로 맺은 열매가 좋은 열매이다. 자연스럽게, 단계적으로 나오는 열매를 맺게 해야 하는 것처럼 인간의 치유도 내적 치유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우리에게 과거는 지나간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에게는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다같이 바로 앞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를 건드릴 수 없지만,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 계신 성령님은 과거를 건드릴 수 있다. 깊은 곳에 계신 성령님은 과거를 이끌어내어 치유할 수 있다. 주님이 보실 때, 과거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계속 우리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주님은 과거를 고치실 수 있다. 내적 치유는 오직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고, 우리는 치유의 과정에 내가 내 자신을 들어냄으로 하나님을 도와드리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건강한 미래를 건설할 수 있다. 크리스챤은 시간을 초월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과거를 바로 세울 수 있는 존재이다.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뿌리를 바로 세울 수 있는 것이다.
과거의 쓰라린 기억을 포함한 정서적, 심리적인 상처들은 우리 자신이 저지른 죄, 또는 다른 사람들이 저지른 죄로 인한 피해 때문에 마음에 생기게 되며, 시간이 흐르면서 기억에서는 사라지지만 무의식, 잠재의식에 남는다. 세상의 상담에서는 “과거는 흘러간 것이다. 긍정적인 생각으로 앞으로 가자!”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해도 잠재의식 속에 있는 상처가 건강한 미래로 가는 길을 막는 장애물이 된다. 잠재의식은 엄청난 능력, 맹목적인 능력이다. 인간이 가진 진정 놀라운 능력이 여기에 감추어져 있다.
육체도 상처나 아픔을 기억한다. 감정도 기억이 있다. 감정의 기억은 나무의 나이테처럼 이성의 기억보다, 이성이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더 깊이 기억하고 있다. 예를 들어 과거의 사건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때의 감정은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의 기억용량은 이런 것보다 훨씬 더 크다. 예를 들어 임진왜란의 아픔들이 아직도 우리의 아주 깊은 부분에 기억되어 있다. 참으로 인간의 내적인 기억용량은 무한하다고 할 수 있을 만큼 크다. 이러한 것이 사건에 반응하여 나타나는 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정서이다. 그러므로 개개인의 성품은 다르지만, 우리나라의 사람의 공통적인 정서가 생겨난 것이다.
정서와 기억과 같은 우리의 내적인 부분이 영적인 부분과 아주 가깝게 연결되어있다. 그리고 우리의 영은 다시 하나님의 영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부모, 사회, 환경과도 역시 긴밀하게 연결되어있다. 즉 인간은 깊게, 넓게, 높게 연결되어서 사는 존재이다. 내적 치유는 이 모든 연결관계를 치유하는 것이다. 과거와 나와의 관계, 미래와 나와의 관계,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부모와 나와의 관계, 조상과의 관계 등에서 그 동안의 상처로 말미암아 비뚤어져 있는 부분을 바로잡아 주는 것이며, 조절하고 조정하고, 정리 정돈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비뚤어져서는 제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일을 감당하지 못하게 된다.
그런데 나의 의식으로는 이것을 길들이고 좋은 방향으로 바로잡을 수 없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으로 하여금 이것을 길들이고, 이것을 좋은 방향으로 이끌게 하는 것이 바로 내적 치유이다. 그러므로 내적 치유는 우리 안에 임마누엘 하시는 성령과 밀접한 관계를 가져야만 하고, 또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구원은 일회적이고 순간적이지고,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내가 변화받는 것은 지속적으로 늘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며 내 자신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하여야 한다. 구원은 거져 주어지는 것이지만, 성화는 우리를 변화시키려는 하나님의 의지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변화하려는 나의 의지가 만나야 한다. 이것을 위해서 성령님께서 우리와 임마누엘 하시는 것이다.
안에 들어있는 잠재의식이 밖으로 표현되는 것이 성품이고, 정서이다. 그러므로 성품의 변화는 즉 내적 치유이고, 성령의 열매이다. 이것은 내 힘만으로도 아니고, 가만히 있어서도 안된다. 하나님에게 내 깊은 것을 내어놓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과 나와의 협력으로 이루어진다. 우리가 마음을 열어놓아야 한다. 열쇠는 우리가 가진 것이다. 우리와 하나님이라는 두 인격체의 의지가 만나야 된다. 그곳에 치유가 일어나고 기적이 일어나고 변화가 일어난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우리가 그것을 구할 때, 그곳에 치유가 일어난다. 사람이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이 생기는 것이다.
육신의 문제, 가정의 문제, 사회의 문제, 밖으로 표현되는 이 세상의 모든 문제는 그 근원이 인간성품의 문제, 잠재의식의 문제이다. 이것은 또 죄의 문제이다. 즉 모든 문제는 죄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죄로 말미암아 상처를 받고, 죄의식이 자신에게도 상처를 주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처가 모든 아픔의 근원이 된다.
눅17:37 .. 주검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상처가 있는 곳에는 마귀가 모이게 되어 있다. 마귀는 우리의 상처를 그냥 두지 않는다. 자꾸 와서 건드린다. 피와 고름이 흐르게 만든다. 마귀는 상처에서 나오는 피와 고름을 먹고 사는 존재이다. 나쁜 병균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밖으로 표현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 근원이 되는 죄의 문제, 상처의 문제를 먼저 해결하려는 것이 바로 내적 치유이고, 예수의 구속사역이고, 성령의 치유의 역사이다. 죄사함과 회개와 속죄가 모든 문제의 해결의 알파와 오메가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 치유, 사랑을 쏟아 붓기를 원하시는 분이다. 그런데 상처투성이인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즉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요, 이것은 즉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쏟아 붓는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고, 그 이유는 마음에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다. 상처가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보혈은 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사랑의 묘약이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만이 이러한 상처를 치유하실 수 있다.

3). 내적 치유는 어떤 심리학적 원리나 치유기술을 성경에 접목시켜 치유하는 방법이 아니다. 분위기, 감정도취로 인한 일시적이고 표면적인 감정의 변화가 아니다. 인간의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치유하는 영적 치유이며, 이것은 성품의 변화로 나타난다.

4). 일회적인 기도에 의한 신유체험, 감정적 체험으로 울음이나 기쁨이나 마음에 평화가 임함으로 해결되는 분야가 아니다. 내적 치유는 한두 번으로 끝낼 정도의 얕은 부분을 다루는 것이 아니다. 지속적으로 해야만 치유되는 깊은 부분을 다루는 것이다. 내적 치유는 평생을 두고 계속되어야 한다. 너무 급하게 모든 것을 끝내려는 욕심, 한두번에 모든 것을 치유하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기대는 많이 하나 욕심은 버려야 한다. 살아 있는 한 호흡을 끝내지 않는 것처럼, 식사를 끝내지 않는 것처럼 내적 치유를 계속하는 개념을 가지라.
고후6:1 ...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내적 치유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받는 것보다, 잘 활용하고, 간수하고 열매를 맺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게서는 그런 사람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신다. 중요한 것은 이제 시작된 내적 치유를 귀하게 여기고 지속하는 것이다. 가꾸고 키우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는 흘러 넘치게 더 흘러 들어온다. 하나님의 은혜를 귀하게 여기는 자에게 은혜를 더 주신다. 있는 자에게 더 주시고, 아끼고 귀하게 여기는 자에게 더 주신다. 받은 은혜를 생명처럼 여기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도 자신의 생명처럼 귀하게 여기시고 더 은혜를 쏟아주신다.

5). 내적 치유는 신체의 질병의 치유, 마귀를 쫓아내는 축사사역과 다르며, 무조건 성령 충만하거나 기도를 많이 한다고 되지 않는 사역이다. 내적 치유는 육체적 질병의 치유보다 깊고, 축사사역도 포함되나, 보다 인격적인 사역이고, 부드럽고 따뜻한 사역이다. 거칠고, 권위를 세우고, 힘주는 자세로는 내적치유 사역을 할 수 없다. 또 부르짖기만 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원리를 알고, 능력을 가지고, 방법을 알고 사역해야하나, 그것만으로도 안되는 사역이다. 기본보다 기술에 치우치는 자세로는 안되는 사역이다. 기본이 되어야만 하는 사역이다. 목사나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기본이 되어야 하는 사역이다. 누구에게 먼저 사역하기보다, 먼저 내가 치유 받아야 하는 사역이다.

6). 기존의 기독교상담과도 다르다. 물론 여러 방법이 서로 중복되거나 보완하는 면은 있으나 내적 치유는 기본적으로 성경 속에 흐르는 하나님의 구원과 치유에 관한 방법을 발견하여 적용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훈련하는 과정 중에 내적 치유의 방법이 들어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방법이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이다. 구원받은 자 안에 계시는 성령님을 통하여 일어나는 치유사역이며, 치유 받은 자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성령님을 통하여 치유하게 되는 사역이다. 내적치유를 받은 사람은 다른 상처받아 고통하는 사람을 치유해주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성령님이 그런 마음을 주시는 것이다.

7). 성경의 가장 큰 치료의 매개체인 복음, 십자가와 부활, 하나님의 사랑, 성령님의 은사를 우리 내면의 치료에 적용하는 것이며, 사역에 있어서 가장 섬세하며 신중하며 보람있는 사역이며 전문성이 요구되는 사역이다.

제2장. 내적 치유의 필요성

요10: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 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구원은 얼마나 기쁜 사건인가. 우리는 구원받은 사실이 살아서 가슴속에서 늘 불붙어 있어야 한다. 구원의 기쁨, 확신, 사실이 나의 삶을 구석구석 지배해야한다. 어려움을 당해도 이 기쁨으로 이길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살아 있는 구원이다. 이렇게 구원받은 자는 그 다음에 치유를 받아야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 구원받은 것으로 머물러서는 안된다. 그런데 그렇지 못함으로 구원이 흔들린다. 구원의 확신이 점점 약해진다. 소망의 삶, 믿음의 삶, 능력 있는 삶을 살지못하게 된다.
이유는 치유를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면의 눌림이 영적 기쁨, 영적 능력, 영적 생명력을 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크리스챤이 세상에 밀리고, 하나님의 세력,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의 세력, 세상나라에 밀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 속에 흑암의 세력, 어두움의 세력이 밀려 들어와 우리 속에 있는 구원의 기쁨, 하나님 나라를 밀어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밀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세력이 밀린다고 하는 것이다. 나 때문에 하나님의 세력이 밀리고 있다. 우리 속에 있는 내면의 눌림 때문이다.
구원은 받았으나 기쁨이 없는 내 마음, 생명력이 없는 내 마음, 하루하루 적당히 살아가는 내 마음, 풍랑만난 내 마음을 가지고 살고 있는 것은 내적치유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내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를 채우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원은 은혜생활의 시작, 승리하는 생활, 풍성한 생활의 시작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다. 구원은 은혜의 시작이다. 매일매일 더 큰 은혜, 더 풍성한 은혜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더 풍성한 생명을 주님으로부터 얻는 것이다. 이 풍성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주님이 오셨기 때문이다.(요10:10)
그런데 우리는 생명을 얻었지만, 거기서 머물고 있다. 더 풍성한 생명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내면이 치유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열매, 구원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 구원받았다고 해서 저절로 풍성한 생명이라는 열매가 맺히는 것은 아니다. 구원받음은 풍성한 생명이라는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조건을 갖추게 된 것이나, 깊은 내면이 치유받지 못한 상태로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명력에는 부요, 강건, 기쁨을 주는 힘, 뛰어나게 하는 힘, 축복을 받게 하는 생명력, 세상을 이기는 능력, 변화시키는 힘.. 등등 무한한 생명력이 들어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받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생명력이 우리에게서 나타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 안이 막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누리지 못하는 원인을 찾아내어 치유하여야 한다. 이것이 내적치유이다.

1). 상처의 영향
돌이 날아와 맞으면 나는 상처를 입는 것처럼 우리 내면에도 감정의 돌이 날아와 상처를 입힌다. 또 돌이 호수에 빠지면 돌은 밑으로 가라앉고, 파도는 사방으로 퍼져나가게 된다. 이처럼 상처는 우리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치면서 잠재의식 밑에 가라앉아서 계속 우리에게 나쁜 영향을 끼친다.
외부의 상처는 쉽게 치유되나 마음에 받은 상처는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사라지지 않고 깊은 곳에 남아서 계속 나에게 영향을 주며, 나의 삶을 좋지 못한 쪽으로, 파괴적인 쪽으로 이끌어간다. 나이가 들어도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절제력이 약해짐으로 더욱 강하게 나의 삶에 역사 한다. 그래서 노인들이 더 섭섭해하고 고집을 부리는 것이다.
상처는 잠복기간이 지나면 꼬리를 들고 일어난다. 상처는 상처를 주는 상대방보다, 쉽게 상처를 받는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인정해야 자신을 치유할 수 있다. 평안과 행복은 환경이 이를 주거나, 느끼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느끼는 것이다. 주체는 나이다. 나의 마음이다. 나의 마음이 치유되어 있으면 늘 평안과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더 나가서 남에게 상처주지 않도록 주의하고, 또 다른 상처받은 이들을 치유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복음의 화평케 하는 의미이다. (고후18-19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우리는 누구나 무한하게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삶이 모든 면에서 풍성해 지기를 하나님은 원하신다. 우리는 내적치유를 통하여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다. 누려야 한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주님의 뜻이다.

(1). 하나님과의 관계(영적)
인간은 대개의 경우 아버지로부터 상처를 가장 많이 받는다. 근엄하고 권위를 내세우는 가부장적인 아버지로 말미암아 어릴 적부터 많은 상처를 입고 삶을 배운다. 그리고 스스로도 이러한 상처를 주며, 자신도 그러한 아버지가 되어간다.
이러한 아버지의 개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개념이 왜곡된다. 근엄하기만 하고 책망과 형벌을 주관하는 아버지의 개념이 하나님에 대한 개념에 강하게 반영되고, 또 후손에게도 대물림되어 전달된다. 이러한 잘못된 아버지의 개념이 유아기로부터의 계속되는 교육으로 말미암아 참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개념을 갖지 못하게 한다. 사랑이 빠진 신앙인, 막연한 종교인이 되어 버리고 만다. 말씀에 대한 불신, 죄에 대한 불감, 도덕감과 윤리감을 상실한 종교인이 되어버린다. 신앙의 성장이 없게 된다.
내적치유를 통하여 참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를 인격적으로 만나야한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야 한다. 사랑을 체험해야 한다. 인격체로 그분의 사랑을 느끼고 사랑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게 된다.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시고 축복해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늘 받아야 한다.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으로 우리를 채워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을 제대로 의식하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두려움과 염려를 내어 쫓게 된다.
요일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일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워놓지 못하게 되면 세상의 염려와 걱정과 근심이 우리의 마음을 채우게 된다. 내면이 너무 허약함으로, 쉽게 두려움을 느끼게 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허약한 종교인이 된다. 우리가 진정 두려워해야 할 것은 바로 이러한 두려움이다. 물질이나 건강이 없음으로 인한 두려움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음을 두려워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만 마음에 채워져 있으면 넉넉히 세상을 이길 수 있다. 이를 위해서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신다.(롬5:5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이것이 바로 내적치유이다. 내적치유와 함께 하나님의 사랑으로 내면이 채워지고, 풍성한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2). 자신과의 관계(심리적, 육체적)
상처가 많으면 자기자신을 이겨내지 못한다. 자기자신을 심하게 비하시키거나, 무가치하게 여기게 된다. 또는 자신에 대하여 거부감, 증오감, 혐오감, 용서 못함, 열등감을 가지거나, 반대로 극도의 자기사랑, 이기주의 , 배타주의를 가지게 되기도 한다. 심한 우울증이나 의존감을 가지기도 한다. 이러한 것은 성장기의 상처로 인하여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가치를 잘못 평가한 것이다. 부모가 어릴적에 자신을 그렇게 대했기 때문이다.
크리스챤은 새로운 아버지, 참 아버지를 가진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새롭게 자신의 가치에 대하여 배워야 한다. 마귀는 어릴 적 부모로부터 들은 “너는 왜 이렇게 못하느냐. 너는 못난 놈이다”라는 책망의 말을 자꾸 반복하여 내 마음에 들려준다. 참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실수하더라도 책망보다는 새롭게 나서도록 늘 위로와 용기와 격려를 주시는 분이다. “너는 할 수 있다. 한번 다시 해보자”고 하시는 분이다. 이러한 내면의 소리를 들어야한다. 어릴적 상처의 기억에서 되풀이도는 사단의 비난의 말이 아니라, 내면에서 새롭게 울려나오는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게 하는 것이 바로 내적치유이다.
기억이나 감정에서 나오는 소리는 욕심과 이성과 감정에서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보다 더 깊은 안에서 조용히 울려나온다. 이 위로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책망하고 비난하고 좌절하게 하는 소리가 들려오더라도 이 소리를 붙잡지 말고 안에서 울리는 위로의 소리를 붙잡고, ‘하나님, 도와주세요’ 라고 외치며 나서야 한다.
상처에 기억되어 있는 두려움, 아픔을 기본으로 하여 삶을 살아가서는 안된다. 새롭게 마음으로부터 솟아오르는 하나님의 힘, 하나님의 생명력을 기본으로 하여 삶을 살아가야 한다. 상처에서 올라오는 것들을 빼내어 버리고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하나님 아버지의 위로와 격려의 소리를 듣는 훈련을 하라. 하나님이 깊은 속에서 밀어올려 주시는 생명력을 부여잡는 훈련을 하라. 그리고 자기를 건전하게 사랑하는 자가 되라. 자기를 건전하게 사랑하는 자는 승리, 발전할 수 있고,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도움을 누리게 된다.
(3). 타인과의 관계(사회적)
자기를 무가치하게 여기는 사람은 남도 무가치하게 여긴다. 하나님의 말씀의 총강령(마22:37-40)은 하나님을 사랑해야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고, 자신을 건전하게 사랑해야 다른 사람도 제대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부부관계, 사회의 모든 인간관계에서 나타나는 모든 문제들 즉 반사회적이고 적대시함, 시기와 질투와 분쟁, 고압적 지배와 피지배적 근성, 믿지 못함, 불쾌하게 함과 같은 것들은 모두 하나님과 나, 그리고 이웃에 대한 수직적 관계의 개념에서 파생되는 것이다. 위에서부터 내리 누르는 수직적 사회에서 생긴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대하지 않으신다. 내리 누르고 억압하시는 분이 아니다. 묶어놓고 뿌리시는 분이 아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같이 걸어다니고, 인정하시고, 사랑하셨다. 수평적으로 대하셨다. 모든 사람을 끌어안고 용납하셨다. 그런데 세상은 그렇지 않다. 모든 것을 수직적으로 생각한다. 경쟁한다. 누르고 눌린다. 억압하고 지배하고 지배당한다. 교회에서조차 그렇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교회안에서도 똑같이 일어난다.
성도들은 그렇게하면 안된다. 우리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새로운 삶을 만들어야 한다. 수평적 삶을 만들고, 수평적 사회, 사랑의 사회를 만들 수 있다.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크리스챤이 되고, 풍성한 삶을 누린다는 것은 이러한 관계를 새롭게 창조해나가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나를 변화시키고, 이웃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내적치유이다.
사람들은 많은 칭찬은 쉽게 잊어버리는 반면에 단 한마디의 상처를 주는 비평은 잊지 않고 기억한다. 자신이 행한 일보다는 자신의 인간성에 대한 긍정적, 또는 부정적 말을 훨씬 더 깊게 받아드린다. 인간성을 깎아 내리는 말은 자존감에 심각한 영향을 준다.
사람들은 상처를 당할 때에 자기의 감정을 억누르고 상처를 빨리 싸매어 버리기 때문에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 그러나 그 상처는 소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곪게되고, 시간이 흐르면 싸맨 곳을 통하여 고름이 새어나오기 시작한다. 이것이 오래 전의 상처가 현재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상처를 받지 않고 살 수는 없지만, 치유는 하면서 살 수 있다. 상처는 일단 받으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게 되어있다. 상처의 악순환, 빈곤한 삶의 악순환이다.
상처를 받지 않을 수는 없지만, 상처를 치유할 수는 있다. 상처를 치유해야 이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상처권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드디어 풍성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상처가 별로 나에게 영향을 주지 않게 되고, 남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는 부드러운 성품이 되며, 상처가 주는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든든한 삶을 살게 된다.
크리스챤들끼리 주고받는 상처는 특히 크고 깊다. 영적 상처이기 때문이다. 악한 영이 강하게 역사 함으로 크리스챤들이 받는 상처는 깊이 들어가기가 쉽다. 악한 영은 우리의 상처를 그냥 두지 않는다. 더 강하게 역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상처를 치유 받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세상사람들이 찾는 것과 같은 그런 감정의 치유가 아니라, 깊은 내면의 치유, 온전한 치유를 받을 수 있다. 받아야 한다.

2). 우리가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음은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은혜로 치유를 받았기 때문이다. 예수를 영접함으로 병들고 상처받은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함으로 치유 받게 된 것이다. 대부분의 크리스챤들은 영적인 분야만의 치유, 즉 구원만을 받고 다음 단계인 마음, 성품, 상한 감정, 육체적 치유에 관해서는 무지하며,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육신의 어느 부분이 병들면 고통을 받기에 그 부분의 치유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진다.

3). 구원은 순간적인 사건이나, 성화는 평생을 두고 내면의 치유를 통하여 일어난다. 예수를 믿고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에 우리의 영이 거듭난다. 순간적이다. 그러나 그 후의 성화는 평생을 두고 이루어가야 한다.

4). 마음이 치유를 받아야 성령 충만을 받으며, 상한 마음이 치유 받지 못하기 때문에 신앙인은 되었으나 삶의 본질이 변화 받지 못한 종교인으로 머물게 된다.
상처를 받으면 제일 먼저 마음이 감정이 상처를 입는다. 그리고 감정의 상처는 마음을 굳게 한다. 유아기의 부드러운 마음이 성장하면서 상처를 받으므로 점점 굳게 된다. 점점 강퍅해진다. 그러면서 자기도 모르게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면서 산다. 이런 상태에서 찾아오신 주님이 믿음으로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오시는 것이 구원이다. 그러나 아직 마음은 굳어진 그대로이다. 굳어진 상태로는 하나님-나-이웃과의 관계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를 바꿀 생각이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있다. 그냥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세월이 약인 줄 알고 그냥 세월을 보낸다. 그럴수록 마음속의 상처는 더욱 굳어지고 치유가 어렵게 된다.

5). 우리 마음은 눈으로 볼 수 없으며, 만져지지도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총체적으로 지휘하는 마음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존재이다. 특히 신앙생활의 영역에 있어서는 절대적이다.
신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사랑하라.
사랑은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진정한 사랑이다. 하나님은 그러한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마음과 성품은 긴밀한 관계가 있다. 마음이 굳어지면 성품이 굳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돌같이 굳어진 마음, 굳어진 성품으로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사랑을 할 수 없다.
잠4:23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은 ‘마음을 지키라,’ 마음을 새롭게 하라’(롬12:2)고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마음을 지키지 못함으로 굳어지게 되면 사람들은 위로와 기쁨을 얻기 위해서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이렇게 밖으로 나간 마음은 다시 상처를 입고 더 굳어지게 된다.
마음을 지키지 못하면 스트레스가 쌓인다. 모든 질병의 원인이 마음에 쌓이게 된다. 사고의 원인이 마음에 쌓이게 된다. 가정과 육신이 건강과 모든 것에 대한 강건함이 마음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의 축복도 마음에서 시작된다. 마음이 굳어지면 하늘과 막히고, 사람과도 막히고, 나자신과도 막힌다. 그러면서 서서히 죽어간다. 자기도 모르게 마귀의 밥이 되어간다.
우리는 마음에 무엇을 담고 있는가? 상처에서 나오는 쓴 물을 담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사랑과 생명을 담는가? 마음을 부드럽게 해야한다. 평안함이 있게 해야 한다. 자유함이 있게 해야한다. 마음이 굳어지면 마음을 느끼지 못함으로 마음을 지키는 방법도 모르고 관심도 없게 된다.
우리는 영적인 존재이므로 하나님을 느낄 수 있다.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를 담고, 하나님의 평강을 담과 하나님의 사랑을 담고 생명을 담으면 하나님을 느낄 수 있다. 마음은 생명의 근원인 영을 담고 있는 그릇이다.
겔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 마음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새 마음을 주시려고 우리 속에, 우리 마음속에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들어 오셨다. 우리를 떠나지 않고 영원히 거기에 거하시면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부드럽게 변화시키려고 하신다. 마음을 부드럽게 함으로 우리속에서 역사하시는 이 하나님을 느껴야 한다. 육신은 날로 후패해져가지만 마음은 늘 새로워져야한다. 육은 내려가고 쇠해지지만, 마음은 늘 새로워지고, 늘 위로 올라가야 한다.

6). 마음은 감정, 기분, 지성, 애정을 느끼는 기관이 아니라, 이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인간의 육신과 정신의 궁극적 기반이며 근원이 되는 기관이다.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있기에 실감하기가 어렵다. 대부분 일상생활을 이성과 육체적 활동으로 하기 때문에 마음의 활동이 마비되어 있다. 마음을 깨워서 활발하게 활동하게 해야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인도와 지배와 보호와 축복을 받게 된다. 기도는 잠자는 마음을 깨워 그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마음은 인간에게서 가장 소중한 부분.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하나님의 은혜로 항상 가득하게 채우라.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여기를 마귀에게 빼앗기고, 마귀가 주는 쓴 물을 담으면, 인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추한 존재가 되어버린다. 마음을 지킴으로 하나님에게 빼앗기면, 하나님을 담으면,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으로 채우면, 인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가 된다. 마음은 마귀가 주는 파괴적인 에너지 또는 하나님이 주시는 무한한 생명의 능력과 에너지로 가득한 곳이다. 마음은 우리 생명의 중심이다. 건강과도 연관되고, 하나님과도 관계되고, 물질과도 관계되고, 모든 것이 마음과 연관된다. 마음이 살아야 내가 산다. 마음을 지키는 것이 재물을 지키는 것이요, 건강을 지키는 것이요, 가족을 지키는 것이요, 사회를 지키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도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시작된다(겔36:25-27). 하나님의 축복도 마음으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의 임하심도, 하나님의 은혜도 모두 마음으로부터 시작된다. 마음이 막히면 전부 다 막힌다. 내 삶이 막힌다. 하늘이 막힌다. 그러므로 마음을 풀어야 한다. 마음을 열어야 한다. 마음을 씻어야한다. 마음을 깨워야한다. 새 마음을 받아야 한다. 부드러운 마음을 받아야 한다. 육을 죽이고 마음을 살리라. 마음을 세우라.
마음을 온갖 더러운 쓰레기집합소로 만들지 말라. 온갖 더러운 것이 가라앉아 있는 구정물통으로 만들지 말라. 마귀는 수시로 마음을 뒤집어 놓는 존재이고 성령님은 씻어내시고, 평안하게, 맑게 하시는 분이다. 이 더러운 것을 차곡차곡 쌓아놓지 말라. 이것들을 주고받지 말라. 전파하지 말라.
상처가 무엇이 좋은 것이라고 그것을 움켜잡고 있는가! 우리가 이 상처를 움켜잡고 있으면 마귀는 이 상처를 가지고 온갖 좋지못하고 악한 것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이 상처를 내어 드리면 하나님은 이 상처를 치유하시고, 사랑과 위로와 소망이 넘치는 좋은 것으로 만들어 주신다. 상처가 오히려 축복의 근원이 되게 하신다. 마음이 가벼우면 인생이 가볍다. 발걸음이 가볍다. 마음의 상처를 치유받음으로 마음의 모든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리라.(히12:1 ...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
성령님은 내 마음속에 계시면서 내 영을 도와 모든 내적 상처를 치유하심으로 마귀가 역사하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의 주시는 사랑과 생명이 늘 넘쳐나게 하시는 분이다. 마귀는 상처, 특히 내적 상처에 역사 하는 존재이다. 상처가 있는 한 떠나지 않는 존재이다. 상처를 주고, 상처를 부여잡고, 치유 받지 못하게 하는 존재이다. 십자가의 보혈은 상처를 치유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성령님은 상처를 치유하시는 분이다. 성령님은 용광로처럼 고철을 가지고 새제품을 만드시는 분이다. 마귀는 바이러스처럼 좋은 것을 망치는 존재이다.
인간은 하나님에게 쓰임 받을 수도 있고, 마귀에게 쓰임 받을 수도 있는 존재이다. 상처를 주고, 상처를 움켜잡고 살면 마귀에게 쓰임을 받는 것이고, 치유 받고, 치유를 주는 것은 성령에게 쓰임 받는 것이다. 진정한 크리스챤은 내 속에서 오는 기쁨,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밖에서 오는 어떤 감정에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나아가는 사람이다. 하나님에 의해서 우리가 변화 받지 않으면 우리는 점점 마귀에 의해서 마귀쪽으로 변화된다. 점점 하나님답게 되지 않으면 점점 마귀답게 되어 가는 것이다. 치유받지 않으면 점점 더 마귀화 되어 간다.

7). 내면에 생기는 문제는 부흥회, 예배출석, 성경 읽기, 공부, 새벽기도회에 참석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실제로 상처난 부위를 치유해야한다.

8). 내적 치유란 딱딱해진 마음, 돌, 가시덤불로 가득 차서 말씀의 씨앗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되는 요인을 제거하여 결실을 맺게 하기 위함이다. 굳은 마음을 기경하는 것, 그 속에 있는 돌을 제거하는 것, 가시덤불을 뽑아내는 것이 내적 치유이다. 씨앗은 생명이다. 그러나 굳은 마음에는 이 씨앗이 들어가지 못한다. 귀로는 듣지만 마음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몸으로 선행한다고 해서 씨앗이 싹이나고 열매가 맺히는 것이 아니다.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부드럽게 풀어져야만 한다.
돌들이 가득한 마음은 걱정, 근심의 무거움, 답답함으로 가득한 마음이다. 이러한 것들을 다 뽑아 버리라. 그래야 생명이 마음이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땅은 스스로 돌을 뽑아낼 수가 없다. 오직 우리 속에 계신 성령님이 해 주셔야 한다. 걱정의 돌, 근심의 돌, 답답함의 돌을 빼내어 주신다.
가시는 상처이다. 이것이 나를 아프게 찌르는 것이다. 마음을 찌르고 감정을 찌르는 것이다. 나도 찌르고 남도 찌른다. 이것을 뽑아내라. 남이 나를 섭섭하게 하고, 아프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가시가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이다. 남이 나를 찌르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가시가 있는데, 다른 사람은 단지 그것을 살짝 건드릴 뿐이다. 남을 탓하기 전에 내속에 있는 가시를 뽑아내라. 내속에 있는 상처의 쓴 뿌리를 뽑아내라. 내가 치유받아 변하지 않으면 아픔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자신의 마음을 먼저 치유 받아서 옥토로 만들라. 땅은 돌과 가시를 스스로 뽑고 뱉어낼 수 없다. 주님이 오셔야 한다. 그분의 손은 정확한 위치와 손길로 모든 돌과 가시덤불을 빼내어준다. 그래야 우리의 마음이 옥토가 되고,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게 된다.
내적치유는 상하고 아픈 마음, 눌린 마음에 하나님의 평강이 임하는 것이요, 내 마음속에 있는 무거운 돌이 빼어지는 것이요, 속에 있는 가시가 뽑아지는 것이다. 이제는 누가 뭐래도 별로 아프지 않고, 남을 아프게도 하지 않는다. 이런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 돌이 가득하고 가시가 가득한 밭에는 아무리 씨를 뿌려도 싹이 나지 않지만, 이런 것들이 다 뽑아진 밭에는 풍성한 열매가 맺힌다.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해진다. 이런 것들이 그냥 내버려진 마음밭에는 마귀만이 충만하게 된다.
교회는 마음을 치유하기보다는 씨앗의 질에만 관심을 두고 씨앗의 개량에만 열심을 낸다. 문제는 씨앗이 아니고 마음 밭이다. 마음이 무거우면 인생이 무겁고, 마음이 가벼우면 인생이 가볍다. 마음이 행복하면 인생이 행복하다. 이런 마음에 물질이 따르고, 사람이 따른다. 돌이 가득하고 가시가 가득하면 마귀가 우글거리게 된다. 이것들을 뽑아내라. 이를 위해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라. 하나님이 이를 위해 우리 안에 오셔서 거하신다. 돕기 위해서, 치료하기 위해서, 우리 속에 있는 가시와 돌을 뽑아내시기 위해서 오셔서 기다리고 계신다. 그분에게 우리를 맡기라. 심령의 치유를 받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중심이 풀리면 모든 것이 풀린다. 중심이 풀리면 환경과 삶의 문제들이 하나씩 하나씩 풀려나간다. 이것이 자녀문제, 물질문제, 경제문제 등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겔36:25-27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그러므로 우선 자신의 마음부터 치유하라. 마음의 안을 치유하라. 잠재의식, 즉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모든 상처를 다 치유하고, 그곳에 하나님의 사랑을 담으라. 이를 위해서 내 마음을 귀중하게 여기라. 잘 때 마음에 손을 얹으라. 귀하게 여기라. 하나님의 은혜와 치유와 사랑을 담기 위해 하나님을 사모하라. 초청하라. 간구하라. 그러면서 자라. 마음을 풀라. 마음에 묶인 것을 다 풀라.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서. 마귀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마음에 묶게 만드는 존재이다. 마음에서 묶이면, 땅에서 묶는 것이요, 하늘에서도 묶이게 되는 것이다. 마음을 풀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자유로워지고 풍요로워지라. 악한 영의 역사를 다 뽑아내라. 악한 영의 역사를 공격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 우리에게 이 능력을 주셨다.
새 변화를 받으라. 능력을 받으라. 자유함을 받으라. 하나님은 얼마나 우리에게 풍성하게 주시기를 원하시는지 모른다. 우리 마음이 풀리지 않아서 그것을 다 받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풀고, 이 모든 것을 다 받으라. 그리고 모태에서부터 받았던 모든 상처와 쓴뿌리를 다 뽑아내고 치유받으라. 그리고 점점 하나님의 성품이 나의 성품이 되게 하라.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의 열매가 나타나게 되며, 그러한 사람의 삶에 성령님의 열매가 저절로 나타나게 된다. 이것이 삶의 목표, 사역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내적 치유는 열매가 궁극적 목표가 되어야 한다.
성령의 역사를 밖으로, 은사로, 능력으로 나타내려고 하기보다, 무엇보다도 먼저 내 마음을, 내 마음 깊은 곳을 치유하는 쪽으로 나타내려고 하라. 내 마음을 성령님으로 가득하게 채우라. 그러면 자연히 은사는 밖으로 나타나게 된다. 밖으로 나타나는 은사보다 내적인 치유에 더 관심을 가지라. 내적 치유에 집중하면, 나의 마음이 치유 받으면, 외적인 은사는 저절로 나타나게 된다. 내적 치유를 제대로 받지 못하면 외적 은사가 왜곡되고 잘못된다. 은사는 지나고 인격은 남는다. 인격(성품)을 갖춘 다음에 은사가 나타나야 제대로 은사가 나타난다. 은사는 지나가나, 그 은사를 역사한 인격이 그 뒤에 남아서 냄새를 끼친다.
내적 치유는 섬김의 자세, 마음이 중요하다. 이러한 마음을 가지는 것부터가 이미 내적 치유를 받는 것이다. 마음에 있는 상처를 치유 받으면, 그곳에 성령님께서 임재하실 수 있다. 그리고 성령의 지배를 받을 수 있게 된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 성령님과 교제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그러한 사람의 삶에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게 된다. 이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님에게 내 마음을 여는 것이다. 그분으로 하여금 나를 치유하게 하는 것이다. 성령님을 내 마음으로 초청하는 것, 늘 마음의 교제를 하는 것이다.

제3장 내적 치유의 목적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는 세력은 남이 아니고 환경도 아니고 오직 내 마음속에 있는 돌, 가시, 상처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막는 나의 최대의 적은 바로 나 자신이다.
1). 내적 치유는 해방되는 것이다. 내 속에 잠재되어 있는 악습, 습관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이다. 질병으로 묶이고, 물질로 묶이고, 인간관계에 묶인 것 등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천국의 자유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믿음생활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자유롭게 풀려야한다. 신앙생활을 통하여 삶의 성장을 막고, 묶고 있고, 누르고 있는 것들을 뽑아내고 치워버림으로 자유케 하는 것이다. 마귀는 묶고 방해하는 역사를 한다. 질투, 분노, 염려, 불평등은 우리를 묶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를 묶어 성장을 방해하는 마귀의 오랏줄이다. 출애굽한 유대인들은 비록 홍해를 건넘으로 바로라는 세상의 묶임으로부터 자유케 되었으나, 욕심, 분노, 두려움, 옛성품이라는 마귀의 묶임을 풀지 못함으로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일, 젖과 꿀이라는 풍성한 삶에 이르는 일에 실패하였다. 신앙생활에 실패하였다. 그러므로 내적 치유는 진정 중요한 사역이다.
2). 얽힌 것을 바르게 교정하는 것이다. 현재는 과거의 사건들이 모여 쌓인 것이다. 문제는 이것들이 제대로 정리되어, 성장하도록 쌓여있지 못하고, 얽히고 오해되어 풍성한 삶으로의 성장을 막고 있는 것이다. 내적 치유는 이러한 것을 푸는 것이요, 정리정돈 해주는 것이고, 바로 쌓아주는 것이다. 상처는 후회, 좌절, 분노, 미움과 같은 감정으로 말미암아 바르게 사물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인생관, 세계관을 비뚤어지게 만든다. 내적 치유는 과거의 얽힌 것을 바르게 교정함으로 잘못된 관점, 오해를 만들어 내는 고정관념을 해소하는 것이다.
3). 과거의 사건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밝게, 긍정적으로 재조명함으로 상처의 쓴 뿌리를 뽑고, 거기서 더 이상 쓴 물이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오히려 그곳에서 생명과 사랑과 축복이 흘러나오게 하는 것이다. 과거에 대한 원망, 미움이 있으면, 현재와 미래를 충실하게 건설해나갈 수가 없다. 원망, 미움은 썩게 하고, 부서지게 만드는 것이다. 부정적인 과거를 가진 사람은 건전한 미래를 건설할 수가 없다. 아무리 노력해도, 긍정적인 생각을 하려고 해도, 잠재의식에서 솟아오르는 부정적인 영향을 물리칠 수가 없다. 이것을 치유하는 것이 내적 치유이다. 이러한 치유를 통하여 과거가 밝아질 때, 비로서 미래에 대한 밝은 소망이 생겨난다. 이러한 소망이 있을 때, 현재도 살아나게 된다. 이러한 밝은 과거로부터 밝은 미래가 있을 것이라는 소망에 대한 믿음이 솟아 오른다. 과거가 밝아질 때, 믿음이 솟아오른다. 과거가 밝아져야 믿음도, 소망이 살아 나게 된다. 내적 치유는 과거를 치유하는 것이지만, 사실은 현재를 치유하는 것이며, 미래를 치유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전에라도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알고 계신다. 과거의 모든 사건도 하나님 앞에서는 늘 바로 앞의 사건이다. 어떤 과거의 사건에서라도 우리는 다시 거기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우리의 삶에서 생기는 대부분의 사건은 사건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 그 사건에 덤벼드는 마귀의 영향이 악한 것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사건이든지 그 사건에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이 역사하면 그 사건은 긍정적이고, 선하며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는 사건이 된다. 그 사건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과거의 사건의 부정적인 영향을 얼마든지 긍정적으로 바꿀 수가 있다. 거기서 나를 위해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감사하는 것이 내적 치유이다. 그리고 과거의 사건에 숨어서 현재에도 부정적으로 역사하고 있는 악한 세력을 예수의 이름으로 공격해 물리치는 것이 내적 치유이다.
4). 과거의 사건을 바꾸거나, 기억에서 지우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이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영향력을 긍정적인 영향력으로 바꾸어주는 것이다. 과거의 상처에 악한 영이 역사 하여 쓴 물을 내보낸다. 이것이 과거의 사건의 부정적인 영향이다. 모든 사건의 부정적인 면, 상처에는 악한 영이 붙어서 시공간을 초월하여 계속 아프게 하고, 상처를 부여잡게 하고, 상처를 퍼뜨리고 전달하도록 역사 한다. 상처에 숨어 있는 병균과 같다. 상처를 더 악화시키며, 전파한다. 그래서 점점 더 내 속으로 침투해 들어온다.
내적 치유는 그러한 사건이나 상처 속에서 아직도 살아 있는 세포, 즉 감사할 조건을 찾아내어 이를 살리는 것이며, 이를 기초로 하여 상처 전체를 치유하는 것이다. 미움과 원망이라는 쓴 물을 내보내는 사건이나 상처들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예수의 보혈이라는 묘약으로 말미암아 사랑과 감사와 긍휼이라는 단물나는 사건으로 바꾸어 주는 것이 바로 내적 치유사역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운명을 바꾸는 것이다.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것이다. 크리스챤에게는 이러한 능력이 축복으로 주어졌다.
이러한 축복이야말로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요, 진정 감사할 조건이다. 이러한 조건을 가지고 기도를 해야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요, 이러한 기도가 상달되는 것이다. 미움과 원망, 저주를 품고 하는 기도는 악한 마음을 품고 기도하는 것이요, 이런 마음으로는 아무리 달라고 소리쳐도 상달되지 않는다. 이것을 뽑아버리라. 빼내라. 이러한 것들로부터 멀리멀리 떨어지라. 자유케 되라.(유1:23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이라도 싫어하여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새로운 인생을 창조하며 나아가라. 이러한 마음으로부터는 무한한 창조력이 솟아 오른다. 부정적인 과거는 꽁꽁 언 땅이다. 이러한 과거로부터는 새생명이나 창조력이 움터 나오지 못한다.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사랑으로 이를 녹이고 풀어 버리라.
5). 전인적 치유이다. 영-혼-육을 맑고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신부처럼 단장하는 것이다. 내면, 정신, 육체, 삶, 삶의 모든 면의 더러운 부분을 씻어내고, 얼어붙은 부분을 녹여 씻어내는 것이다. 언제라도 주님 앞에 설 때, “왜 나를 이제야 부르십니까?” 이런 말을 할 수 있도록 늘 준비해놓는 것이다. 죽으면 더 이상 나를 단장할 내적 치유의 기회가 없다.
6). 하나님의 마음과 용서를 적용하는 것이다. 상처받은 사람은 마음이 좁아진다. 오해를 잘하게 된다. 남을 쉽게 상처를 준다. 용서하지 못한다. 상처 때문에 어린아이의 마음, 성장하지 못한 좁은 마음을 가지게 된다. 세상은 이러한 상처권에 살고 있는 것이다. 내적 치유는 이러한 상처권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상처를 받지 않고 주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다. 상처권 안에 있으면 나도 모르게, 본의가 아니지만, 남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한다. 어떻게 하든지 이러한 상처권에서 벗어나야 한다. 죄사함은 영의 내적 치유이다. 과거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미래를 치유하는 것이다. 죄사함, 속죄함, 십자가야말로 예수님의 내적 치유이다.
7). 은혜의 수단이다. 마음이 굳어져 있으면 마음이 닫히고,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 들어오지 못한다. 문이 닫히면 썩게 된다. 악한 것이 역사 하게 된다. 굳어진 마음을 풀고 열어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하는 것이 내적 치유이다. 치유가 바로 은혜이고, 은혜가 바로 치유이다.
8). 우리의 삶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적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역사하시는 주님의 능력과 우리에게 주신 은사를 내적 치유에 적용하는 방법이다. 감정은 스스로 전달시키는 능력이 있다. 이것이 바로 분위기이다. 치유로 이 분위기를 바꾸는 것이 환경을 바꾸는 것이다. 환경을 바꾸고 싶으면 먼저 치유를 통하여 내면을 치유해야 한다.
9). 예수님으로 하여금 과거의 상처들을 해결하시도록 그분에게 의탁 드리며 그 상처의 부정적인 결과를 치유해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기도는 외적인 것만 부여잡고 기도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외적인 것보다는 우리의 내면이 잘되는 것에 먼저 관심을 가지신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기도를 하는 것이 바로 내적 치유이다. 치유는 주님이 하시지만, 우리가 그분을 초청하고, 의뢰하고 의지하여야 한다.
10). 내적 치유는 축귀사역, 질병치유와 관계가 있다. 악한 영들은 상처에 붙어먹고 산다. 죄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상처에 붙어산다. 상처에 붙어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쓴 물을 먹고산다. 그래서 악한 영들은 상처에 쓴 뿌리가 나게 한다. 그리고 그 쓴 뿌리에서 끊임없이 쓴 물이 나오게 하고, 그 쓴 물(분노, 미움, 시기, 질투 등등)로 말미암아 더욱 자신의 상처가 깊어지고, 다른 사람에게도 상처를 입히게 된다. 그리고 악한 영은 바로 그 쓴 물을 먹고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 쓴 물이 닿는 곳마다, 접촉하는 곳마다 새로운 상처를 만들고 그곳에 전염되고 옮겨가서 다시 거기에 상처를 내게 하고, 그곳에 다시 쓴 뿌리를 나게 하는 것이다. 공기중의 병균들처럼. 악한 영들은 죄를 따라 움직이며, 죄는 인간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다. 죄를 미워하라. 상처를 미워하라. 온전한 성품이 되는 것은 이러한 쓴 물의 공격에 대한 나의 반응하는 모습에 나타난다. 이러한 것들에 의해 상처를 입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죄를 짓는 것은 이러한 공격에 스스로 상처를 입는 것이요, 스스로 상처를 내는 것이다. 마음의 상처, 영의 상처, 혼의 상처는 죄로 말미암는 것이며 이것은 악한 영들의 공격에 의한 것이다. 상처가 있으면 이러한 공격은 더욱 집요하고 아프고 무서운 것이다. 상처의 치유는 죄로 인한 영향을 없애는 것이며, 죄를 이기기 위한 필수과정이다. 구원은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속죄는 상처를 치유 받는 것이다. 회개는 상처를 치유 받기 위한 것이다. 구원받기 위함이라기 보다는 죄로 말미암은 상처를 치유 받고, 성령님을 모시고, 성령님과 교제하고, 성령 충만하기 위한 필수과정이다. 승리하는 삶을 위한 필수과정이다. 마귀는 자기가 있을 곳이 없으면 떠나게 된다. 상처가 치유되면 떠나게 된다. 마귀를 쫓아내는 것은 마귀가 있을 곳을 없애야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축귀사역이다. 내적 치유는 영적이며 동시에 심리적인 사역이다. 그래서 어렵다. 상처 치료와 함께 악한 영에 대한 축귀사역도 병행되어야 한다. 심리적이며 영적 사역이 되어야 한다. 죄-상처-마귀의 역사는 떼어지지 않는 일관적 역사이다. 내적 치유하면 육체적 질병도 자연스럽게 치유되는 경우가 많다. 질병과 내적 아픔은 깊은 관계가 있다. 질병을 볼 때, 질병을 유발시키는 내적 아픔을 보려고 하라. 그리고 내적 아픔을 치유하려고 노력하라.
11). 내적 치유는 성품 치유이며 상처로 인해 내면에 생겨진 쓴 뿌리를 제거하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게 하는 치유이다. 성품과 인생, 성품과 인간관계, 성품과 목회 등등 인간의 모든 면에서 성품이 결정적인 요소이다. 성품이 좋아야 하나님 앞에서 성공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시는 진정한 성공은 얼마나 많이 끌어 모았는가, 가졌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이 주었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는가, 도와주었는가, 다른 사람들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었는가 하는 섬김의 크기로 판단하신다.
세상의 문제는 잘못된 성공의 기준에서 생긴다. 진정한 크리스챤이란 하나님의 성공의 기준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다. 우리 나라의 문제는 이러한 하나님의 성공기준으로 사는, 세상의 빛이 되는 진정한 크리스챤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 크리스챤의 특권은 남보다 많이, 먼저 움켜잡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다. 인생은 수많은 만남의 계속이다. 이러한 만남에서 얼마나 많이, 그리고 어떻게 주고 섬기면서 사는가? 이것이 빛과 소금이 되는 인생이다. 내 생명의 빛을 비추어 주는 것, 삶의 맛을 나누어 주는 것이다. 인생의 성공의 목표, 삶의 목표는 바로 이러한 성품의 변화가 되어야 한다. 내적 치유는 이러한 성품을 가지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자기중심의 삶을 타인 중심의 삶으로, 자기성취의 삶을 타인의 성취를 돕기 위한 삶으로 만드는 참으로 위대한 사역이다.
마음이 변화되면, 이의 외적표현인 성품도 변화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해주시지 않고, 못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성품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이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속에 있는 나쁜 것을 쏟아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 살아있는 믿음은 성품의 변화, 마음의 변화이다.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영을 우리 속에 담는 것이다. 내적 치유는 마음에 들어있는 좋지 못한 것, 더러운 것을 쏟아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마음을 담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과 교통하고 대화하고 교제하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하나님으로부터 무한한 능력이 임하게 된다.
내적 치유는 외적인 표현이 아니라 중심의 변화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에 관심을 가지신다. 중심을 변화시키기 원하신다. 마음의 변화는 자꾸 심어주는 것으로 이룬다. 입으로, 생각으로 자꾸 반복함으로 이룬다. 이것은 훈련과 노력이다. 내적 치유는 죽는 날까지 지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내적 치유는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인바, 이것은 생명이 있는 한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내적 치유는 성령님의 도우심에 나를 묶어놓는 것이다. 성령님의 품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다. 어린 아이가 되는 것이다. 작은 일도 성령님과 의논하고, 그분의 도우심을 자꾸 이끌어내는 것이다. 성령님의 뜻을, 도우심을 자꾸 내안에 담아놓는 것이다. 육체의 관리에는 많은 시간이 소모되나 영의 관리, 내면의 관리에는 그보다 적은 시간으로도 된다. 가능하다.
12). 내적 치유는 영혼의 치유이다.
(1). 내적 치유란 속사람의 치유이며 영혼을 강건케 하는 사역이다.
(2). 내적 치유는 원한, 거부감, 자기연민, 우울, 죄의식, 공포, 슬픔, 열등감, 죄책감, 무가치함 등의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과정이며, 이러한 부정적인 감정은 인격의 형성에 피해를 준다. 내적 치유는 이러한 비뚤어진 성품을 교정시키며 변화를 주는 것이다.
(3). 내적 치유는 성령의 역사를 저해하고 있는 요인들을 치유함과 동시에 우리 안에서 제거해버리는 일을 주님과 협력하여 수행하는 것이다.
(4). 내적 치유는 손상된 감정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성령이 역사하심으로 죄의 용서와 정서의 회복을 통하여 곤경에 빠져 있는 우리의 존재와 삶에 복음의 능력이 실제적으로 역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13). 내적 치유는 정신 치료, 심리치료법이 아니다. 내적 치유는 심리보다 더 깊은 단계인 영적인 치료이며, 치료의 주체는 예수님이다. 주님께 과거의 상처를 치유해주시도록 요청하는 것이다.
14). 내적 치유는 명상이나 적극적 사고방식도 아니고, 현실도피도 아니다. 과거의 상처를 부인하거나 도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나아가 상처를 직면하고 용서하는 사역이다.
16). 내적 치유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상한 감정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게 하고 죄에 대한 충동을 억제하며 인간관계를 재조명하고 믿음을 견고케 할 수 있지만, 오직 내적 치유만이 성화나 성품의 변화의 유일한 길이라고 말할 수 없다. 내적 치유가 예배, 성경공부, 성도의 교제, 선행, 기도에 대한 필요를 대신할 수는 없다.
제4장. 인간의 본질

내적 치유의 과정에서 대수술도 중요하지만, 매일의 삶속에서 늘 치유가 일어나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수술도 중요하지만, 매일의 건강관리도 치유이다. 이것은 삶의 자세를 바꾸어주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가치관을 바꾸어줌으로 가능하다.

1). 인간의 인격은 본능(육)-이성(혼)-영성(영)이라는 셋으로 구분되나, 이 셋이 합하여 ‘나’라는 하나의 인격을 형성한다.
본능(육): 육신의 욕구충족, 현재만을 추구한다.
이성(자아, 혼): 자아실현, 자기중심적이다. 현실만족을 추구하며, 어느 정도 미래를 추구한다.
영성(영): 하나님을 추구하고, 영원을 추구한다.
여기서 어느 부분도 무시할 수 없으나, 어느 부분이 주체가 되는가 하는 것이 삶의 방향을 결정하게 된다. 본능이 주체가 되는 삶은 짐승같이 살게 되는 것이다. 영성이 주체가 되는 삶은 영원한 삶,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하는 삶이요,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이다. 영성이 이성과 본능을 지배하고 억제하고 이끌어 가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 내적 치유이다. 내적 치유는 마음의 치유로서, 영이 활발하게 활동하게 하는 것이다. 마음이 굳은 사람은 이성과 본능의 지배를 받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시31:9-10 여호와여 내 고통을 인하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근심으로 눈과 혼과 몸이 쇠하였나이다.
잠15:30 눈의 밝은 것(긍정적으로 매사를 보는 것)은 마음을 기쁘게 하고..
잠14:30 마음의 화평은 육신이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
잠17:22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
영은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가장 부드럽고 만져질 수도 없는 것이고, 뼈는 가장 단단한 것이다. 그러나 영이 근심하면, 그 영향이 뼈를 부스러뜨리게 된다. 인간은 어느 한 부분이 잘못되면 다른 부분도 같이 손상된다. 질병의 근본적인 원인은 육체적일 뿐 아니라, 심리적, 영적인 경우도 많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육체의 문제, 현실의 문제의 해결보다 심리적, 영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를 위해 인간관계, 하나님과의 관계를 풀어야 한다. 이러한 관계에 숨어 있는 죄, 미움, 용서하지 못함, 근심, 염려, 두려움 등등 가시와 같은 것들을 뽑아내고 풀어내야 한다. 이러한 것들을 쥐고 있는 것은 스스로를 자해하는 것이다.
두려움도 하나의 믿음이다. 두려워하는 믿음대로 되는 것이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늘 인식하고 주장하고 마음에 심어주라. 이에 대하여 육도, 이성도 딴 소리 하지 못하게 해놓으라. 원칙을 세워놓으라. 하나님 최고주의의 원칙을 세우라.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과의 동행에 대한 확신을 심어 놓으라. 이 확신으로 의심을 눌러 버리라. 그리고 이것으로 육과 이성을 길들여 놓으라. 이성은 그대로 두면 육신의 편이다. 영으로 강하게 이성을 이끌어야 한다. 이성이 딴 소리 못하게 하라. 영성을 세우 놓으라. 영성이 늘 고삐를 잡게 하라. 영성으로 늘 하나님을 선택하게 만들라. 하나님을 위해서 살게 하고, 하나님이 앞서게 하고 하나님과 동행하게 하라. 하나님 쪽에 모든 것을 투자하게 하라. 이것이 습관이 되게 하라. 육과 이성을 그 방향으로 훈련시켜 놓으라. 그래야 늘 평강을 부여잡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내적 치유이다. 잠잘 때마다 이것을 하라. 이성에게 심어놓으라. 훈련시켜 놓으라.
잠18:21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권세는 혀가 가지고 있다. 혀가 마음에 생명과 죽음을 뿌릴 수 있다. 손으로 때려서는 몇 명밖에 영향을 못 끼치지만, 혀로는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거나 살릴 수 있다. 말은 내속 깊은 곳에서 나오고, 또 나의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누구보다도 먼저 나에게 하는 것이다. 내 마음에 심는 것이다. 그 말로 누구보다도 먼저 나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치유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혀의 말이 인생의 방향을 결정한다. 육신과 이성의 방향인가, 영성의 방향인가를 스스로의 입의 말로 결정하는 것이다.
입에 영성의 말,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에 관한 말, 하나님의 축복을 담으라. 혀에 하나님을 담으라. 하나님의 권세를 담으라. 그리고 그 혀의 권세로 악한 영들을 공격하라. 그렇지 않으면 마귀가 혀를 사로잡는다. 혀에 마귀의 권세가 임하게 된다. 그리고 그 마귀의 권세로 내 자신의 인생을 망치고, 내 자녀의 삶을 망치게 된다.
혀의 권세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마음에 하나님을 담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담게 하는 것이 내적 치유이다. 마음에 담은 하나님을 순수하게 혀에 그대로 담아내는 훈련을 하라. 중간에 다른 어떤 더러운 것도 끼어들지 못하게 하라. 마음과 혀 사에에 어떤 악한 것도 끼어들지 못하게 하라. 마음에서 나오는 순수한 것을 순수하게 혀에 담아 전달하라. 이것이 내적치유이다.

2). 영혼은 비가시적이나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며, 생명의 원천이며, 인간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들의 근원이다.
시16:7 ... 밤마다 내 심장이 나를 교훈하도다...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잠자는 시간을 잘 활용하라.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으로 활용하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에게 안기고,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은혜를 내 마음에 담는 시간으로 만들라. 그러면서 점점 하나님의 은혜권속으로 들어가라. 자면서 기도하라. 자다가 조금이라도 깨면 다시 기도하라. “영적으로 약해지지 않고, 더러워지지 않게 해주세요.” 계속하라. 노력하라. 남이 자는 시간을 이용하라. 골리앗을 이기는 다윗의 힘은 바로 이러한 훈련에서 생긴 것이다. 다윗은 이처럼 늘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훈련이 되었기에, 늘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훈련을 받았기에 골리앗을 향하여 나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골리앗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을 내 우편에 끼고 하나님과 짜고 무엇이든지 하는, 살아가는 훈련을 하라. 그래야 요동치 않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해서 늘 목말라하라.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마음이 합한 사람으로 인정하며 들어 쓰시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 하나님과 합한 마음을 가지게 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내적치유이다.

제5장. 내적 상처와 감정

1). 감정이란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 환경의 변화에 대한 내적 반응을 말하며, 내면에서 일어난 반응은 다시 신체에 강력한 자극을 주어서 물리적 변화를 준다. 예를 들어 부끄러움을 당했을 때,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나,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위장장애가 생긴다.
2). 감정이 일련의 사건의 충격으로 감정이 생기면 그 감정은 기억이 되어서 사건을 회상만 하여도 그 때와 같은 감정이 반복되며, 심리적, 신체적으로 이전에 충격을 받던 상황의 반응이 재현된다.
3). 감정은 심리적인 동력의 역할을 하며, 행동의 강력한 동기가 된다. 감정이 자극을 받으면 자극이 지성으로 전달되어 지성이 감정을 어떤 방법으로 표현할 것인가를 결정한 후 그에 따라 감정이 밖으로 표현된다. 이렇게 감정이 밖으로 표현되는 것을 정서라고 한다. 같은 자극이라도 사람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반응하는데, 이는 교육, 성격, 신앙, 당시 상황, 상대방에 의하여 차이가 생긴다.
4). 인간은 본능적으로 불쾌한 감정(불안, 미움, 슬픔, 두려움, 증오, 분노)보다 유쾌한 감정(기쁨, 자유함, 편안함, 사랑, 희락)을 요구한다. 그리고 불쾌한 감정이 생기면 유쾌한 감정을 소유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그러나 유쾌한 감정을 소유하기 이하여 부도덕적, 비윤리적 행동을 하면 양심에 가책을 받게된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중심적이기에 자신을 유익하게 하기 위하여 비록 양심을 어기는 행위라도 서슴치 않는다.
5). 이러한 감정에 대하여 건강한 감정을 가진 사람이라면 도덕적, 양심적 기준에 의하여 다른 감정과 지성으로 대적하고 다른 방향으로 유도하거나 절제하여야 한다. 감정은 감정으로 다스릴 수 있다. 악한 감정은 선한 감정으로, 미움은 사랑의 감정으로 절제 해야한다. 절제가 되지 않으면 죄와 쉽게 연결된다. 감정의 자극에 이끌려 분별력, 자제력을 잃으면 죄를 짓게 된다.
6). 감각에는 심리적 감각과 신체적 감각이 있다. 이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 예: 정신적 상처를 받음으로 혈압이 오르거나, 숨이 가빠진다.
(1). 심리적 감각은 자극을 주는 상황에 대하여 그 상황을 느끼고 이해함으로 반응하기 직전의 상태이며, 이는 그 사람의 정서와 직접적 연관이 있다.
(2). 신체적 감각은 인간의 신경계통으로 느껴지는 본능적 감각이다.
7). 감정은 감각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였는가에 따라 반응한다. 또 똑같은 감각이라도 상황, 분위기, 그 때의 건강상태, 기분에 따라서 다르게 반응한다.
8). 감정은 감각이 없더라도 기억에 의하여 스스로 반응할 수 있다. 과거 어떤 상황에서 심한 감정의 상처를 입었다면, 그 상황을 다시 기억함으로도 그때의 감정과 자극과 반응이 생기게 되며, 이러한 반복이 심하게 디면 신체적 질병, 심한 노이로제에 이르게 된다.
9). 감정은 신체의 상처처럼 멍이 들거나 칼에 베이는 것처럼 상처를 받으며 흉터가 남는다. 그리고 오랜 후유증과 합병증이 생긴다.
10). 상한 감정의 치유
사61:1-3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메시야의 하실 일은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는 것이다. 현시대는 하나님이 상한 자들로 가득하고, 내 마음도 상처로 가득하다. 세상이 썩은 것은 마음이 썩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한 심령에 성령 하나님이 오셨다. 성령 하나님이 오신 것도 역시 똑같은 사역, 즉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기 위하심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치유를 받아야 하나님의 일을 하며, 그래야 고통에서 벗어나며, 기쁨을 누리며, 근심에서 벗어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상한 마음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 상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면 오히려 방해하게 된다.
구원을 받고 나서 우리가 무엇인가 하려고 노력할 가장 급한 것은 우리 자신의 상한 마음을 고치는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이 내게 이해되고, 하나님의 일을 이해하고,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고 동행하고 기도하고 찬양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된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하기보다 마음을 먼저 고치라. 마음을 새롭게 하라. 상한 마음을 고치게 되면 내가 무슨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안에 하나님을 모심으로 그분이 나를 통해서 무슨 일이든지 하시기 때문이다. 일을 하기보다 마음을 고치라. 그래야 하나님이 쓰신다. 하나님이 일을 시키신다.
성령님을 물고 늘어지라. 성령님을 붙잡으라. 성령님도 우리를 붙잡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동행하기를 원하신다. 성령님이 우리의 마음을 고치셔야 우리와 동행하고 일을 함께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상하면 자신과 사람과 하나님을 오해함으로 제대로 아무런 일도 못하게 된다. 오해하는 상황에서는 하나님의 일을 바르게 못한다. 편법을 쓰게 된다. 내가 잘되기 위해서 거룩함과 순결함을 버린다. 내가 잘되기 위해서 남이 어떻게 되던 관심이 없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이 쓰실 수가 없다.
마음이 상하는 것은 감정이 상하는 것이다. 감정이 상처를 받으면 이성을 잃게 된다. 감정이 좋아지면 정신을 잃는다. 감정이 이제 나의 조절을 받지 않게 되는 것이다. 내가 감정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이요, 이성을 잃게 되는 것이다.
상처를 입게되면 거기서 나오는 분노의 감정을 통하여 더 깊은 상처를 입고 남에게도 상처를 입히게 된다. 상처를 치유 받지 못한 사람에게도 물론 성령님이 내재하시지만, 성령을 체험하기는 하지만, 성령님이 상처받은 마음속에 갇히게 된다. 성령이 활발한 활동을 하실 수가 없게 된다. 상처로 인하여 우리의 마음이 굳어지고, 강퍅해짐으로, 우리 속의 성령님이 역사 하실 수가 없게 된다. 상처는 우리 속에 계신 성령님이 역사 하시지 못하도록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게 만든다. 상처가 있는 한, 마귀는 더욱 강하게 역사하고, 성령님은 점점 더 갇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나의 대에서 끊어야 한다. 자녀에게 흘러 들어가지 못하게 해야한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주는 일을 끊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치유를 주어야 한다. 예수님도 제자들의 마음을 고치심으로 제자를 만드셨다. 그들의 마음의 변화를 통하여 인생을 변화시켰던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고쳐야한다. 그러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마음을 통해서 주어진다. 마음에 주어진다. 마음을 통과해야 하나님의 은혜가 전파된다. 마음이 닫히고 굳어지면 하나님의 은혜, 은총이 막히게 된다. 성령님의 사역에는 은사주심, 병을 고치심도 있으나, 성령님은 무엇보다도 먼저 심령을 고치시기를 원하신다. 이것을 하려고 하라. 이것에 관심을 가지라. 이것을 위해서 늘 성령께 목말라하라. 성령을 구하라. 모든 고통의 문제를 밖에서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해결하려고 하라.
상처의 치유도 중요하지만, 쉽게 상처받지 않는 내성도 길러야 한다. 강건함, 담대함, 기쁨, 감사함, 온유함,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놓음으로 내성이 키워진다. 마음을 이런 것으로 채워놓으면, 늘 상처로부터 자유케 된다. 나도 자유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게 된다. 치유 받은 마음을 늘 이런 것으로 가득 채워놓으라. 우리가 마음을 이러한 것으로 채워놓지 않으면 악한 것들이 미움, 시기, 질투, 욕심, 정욕, 불안, 염려, 두려움과 같은 온갖 더러운 것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워버린다. 그리고 거기서 쓴 뿌리가 나고, 쓴 열매가 올라옴으로 삶이 고통스럽게 된다. 이러한 것을 쏟아내고 성령님이 주시는 것으로 내 속을 채워놓으면, 온갖 좋은 것이 속에서 올라오게 된다. 기쁜 일이 없어도 기쁨이 솟아 올라온다. 어려움이 찾아와도 평강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혜가 속에서 솟아 오른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내적치유이다.
내안에 계신 성령님은 나하나만을 치유하기 위해서 내 속으로 들어오신 분이다. 나를 위한 전속 심령의사이시다. 이분의 도움을 받으라. “내속에서 용서의 마음이 일어나게 도와주세요. 치유해주세요.” 하고 요청하라 성령님은 도움을 요청한 만큼, 우리가 그분에게 다가선 만큼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치유하신다. “모태에서의 상처, 유아기에서의 상처, 성장기에서의 상처를 치유해주세요. 나의 어그러진 성품의 원인을 기억나게 하시고, 치유해주세요.” 하고 자꾸 성령님에게 자신을 열라. 의지하라. 조그만 것이라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나타내 보여드리라. 꼬치꼬치 다 풀어놓고 도움을 요청하라. 이것이 상처를 치유받는 유일한 길이다. 아무리 성령님은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지만, 우리가 풀어놓고 도움을 요청하지 않으면 치유하지 못하신다. 풀어놓고 치유 받으면서 성령님과 친해진다. 그러면서 차츰 성령님과 연합이 된다. 하나님이 쓰시게 된다. 하나님과의 교제와 연합은 이론이 아니라, 치유를 통한 실제이다. 체험이다.
그러므로 상처가 많다는 것은 축복이다. 상처의 치유를 통하여 주님과 내가 하나가 되고, 내가 그분 안에, 그분이 내안에 연합하게 된다. 치유를 위하여 하나님에게로 나아가기만 하면 상처가 많다는 것은 축복의 조건이 된다. 상처를 품고 마귀에게 가면 저주와 아픔이지만, 주님께 나가면 엄청난 축복이요 기쁨이다. 그러므로 늘 성령님을 찾으라. 성령님에 대하여 목말라 하라. 상한 마음을 씻김받으라. 매일매일 새로워지는 역사를 체험하라. 더더욱 성령님을 사모하라.
마음을 치료받는 것은 새생명을 얻는 것과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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