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현재중국 정치론]제3부 제3장 중국정치의 특징 : 파벌주의 사례연구

지식창고지기 2009. 6. 30. 01:08

[현재중국 정치론]

제3부 제3장 중국정치의 특징 : 파벌주의 사례연구

 

 

(1) 중국공산당의 파벌정치

 

지난 1987년 중국공산당 제 13차 당대회 직후 기자회견 석상에서 조자양 당시 총서기는 파벌의 존재 여부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대하여 단호하게 중국공산당 내부에는 어떠한 파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정하였다. 조자양 뿐만 아니라 중국의 지도자들은 당내 파벌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파벌이 존재해서도 안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러나 정치개혁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과정에서 일부에서 ‘당내 다파제’에 관한 주장이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중국공산당 내에 서로 다른 관점과 정치노선을 가진 파벌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를 공개화하는 것이 당내 민주화를 위하여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같은 주장에 대해서 지난 1990년 7월 23일자 「인민일보」는 소희승(蘇希勝)의 ‘당내 다파제’에 대한 논문을 통하여 “당내의 파벌활동과 중국공산당의 성격은 근본적으로 조화될 수 없다”고 강조하면서, “당내의 파벌을 공개화, 합법화하고 중국공산당내에 상이한 관점과 정치노선을 가진 집단을 허용해야 한다는 것은⋯중국공산당의 성격을 변화시키고 중국공산당의 영도를 부정하는 자산계급 자유화 이론으로서 철저하게 비판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처럼 중국의 지도자들은 파벌의 존재와 파벌정치를 강력하게 부인하면서도 과거의 잘못된 정책과 노선에 대해서는 일부 당내 파벌들의 과오로 돌림으로써, 간접적으로 파벌의 존재와 파벌정치를 인정하고 있다고 하겠다. 예를들면, 문화혁명과정에서 좌파는 당내에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소수의 당권파”를 타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또한 임표와 문화혁명 4인방이 제거된 후 개혁파 지도자들은 이들이 당내에서 “최고권력 탈취를 음모하는 두 개의 반혁명집단을 만들고, 모택동 동지의 오류를 이용하였으며, 모택동 동지의 등 뒤에서 나라와 인민에게 막대한 재앙을 끼치는 수많은 범죄행위를 저질렀다”고 비난하였다.

 

이와같이 중국공산당의 지도자들도 당내에 정치적 관점과 권력이익이 다른 정치집단들이 존재하며, 중국정치는 이러한 파벌정치로 점철되어 왔음을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공산당의 지도자들이 파벌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중국공산당이 노동자 계급은 물론, 모든 인민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유일, 통일, 집중, 단결된 정당이기 때문에 소수인의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파벌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다는 논리에서 출발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파벌정치는 전체 노동자 계급과 인민대중들의 근본적인 이익을 대변하는 중국공산당의 성격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공산당의 지도자들은 항상 소단체주의, 파벌주의의 경향성에 대하여 경계하였고 당의 단결과 통일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이 전개하고 있는 각종 정풍운동과 정치투쟁의 과정에서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바로 파벌의 존재와 파벌정치라는 점에 주목한다면, 중국정치가 공식적인 차원에서 당의 통일과 단결을 강조하면서도 비공식적인 차원에서는 파벌정치의 특징을 띠고 있다는 루시안 파이 (Lucian Pye)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

 

(2) 파벌과 파벌정치의 특징

 

루시안 파이는 중국정치는 이중적 정치문화를 반영하고 있다고 한다. 즉, 중국정치는 한편으로 합의와 단결을 강조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개별적이고 사적 특수이익을 추구하는 중국 정치문화의 이중성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정치는 중국공산당의 단결과 지도부의 합의를 강조하면서 모든 집단들이 표면적으로 순응하는 것 처럼 보이면서도, 실질적으로 다양한 집단들이 자신들의 사적 권력이익을 추구하는 파벌정치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때 파벌이란 ‘어떤 이유로든 서로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상호 신뢰와 충성심을 공유하고 있다고 믿으며, 공동의 적대세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관계망이라고 정의할 수 있으며, 파벌이 형성되는 동기는 자신들의 ‘지위의 보존과 상승’에 대한 사적 욕구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중국에서 사적 관계에 기초하여 개별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파벌이 형성되고, 파벌정치가 전개되는 배경에는 중국의 정치문화, 중국정치의 낮은 제도화의 수준, 그리고 중국공산당의 인사정책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흔히 중국은 사람들과 사람들의 사적 ‘관계’가 다른 사회에서 보다도 중요시되고 있다는 점에서 ‘관계주의’ 사회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중국사회는 血緣이나 地緣, 學緣, 또는 공동의 경험을 매개로 형성된 사적 인간관계가 공식적이고 조직적인 관계보다도 더 중요시되는 문화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와같은 비공식적 인간관계는 어느 사회에서나 찾아 볼 수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미국이나 일본사회에서 보다도 중국사회에서 상호의존적인 ‘관계문화’가 더욱 중요시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중국의 파벌정치는 중국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관계문화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파벌정치를 산출하게 하는 요인으로는 중국정치의 유동성과 낮은 제도화의 수준도 간과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중국정치가 법과 제도에 의한 정치라기 보다는 인치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기 때문에, 정치 엘리트들이나 관료들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권력이익이나 지위를 보호하고 향상시키기 위해서 다양한 비공식적인 인적 관계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도 파벌정치를 만연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정치엘리트들이나 관료들을 일정한 지역이나 기능및 조직체계내에 특화시키는 중국공산당의 인사정책도 파벌 형성에 간접적으로 기여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일정한 지역과 일정한 직책에 오랫동안 배치하고 있는 인사정책의 부작용도 파벌형성의 주요 요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의 파벌은 혈연과 지연, 또는 학연도 중요한 요인이지만, 동일한 직종에 종사하면서 형성되는 경우도 많다고 하겠다.

 

예를들면, 중국 군부의 파벌은 혁명시기에 형성되었던 4개의 야전군 조직체계에 기초하고 있으며, 이때 형성된 인간관계가 건국 후에도 지속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와같이 혁명시대에 4개 야전군 조직을 바탕으로 형성되었던 인적 관계가 그 후에도 계속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은 건국 후 군부조직의 표면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4개 야전군체계의 골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중앙과 지방군구의 인사정책을 추구하였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또한 중국의 민간 정치 엘리트들이나 관료들의 경우도 그들의 경력을 살펴보면 대체로 일정한 지역이나 직종에 오랫동안 복무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즉, 모택동이나 주은래, 또는 등소평과 같은 전국적인 지도자들을 제외하면 대체로 대부분의 간부들이 일정한 직책이나 조직, 또는 지역에서 상당기간 복무하면서 나름대로의 정치적 기반을 쌓고 있다는 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모택동이나 유소기, 등소평과 같은 전국적인 지도자들도 최고 지도자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일정한 지역과 업무를 특화한 경력이 있으며, 나름대로의 파벌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예를들면 모택동은 농촌 게릴라운동의 전문가로서 홍군과 소비에트지구에서 활동하던 간부들에 대하여 더 많은 친화력.이 있는 반면에, 유소기는 국민당이 지배하던 지역, 이른바 백구지역에서 지하당운동을 하던 간부들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주은래는 건국 이전부터 중국공산당의 대외관계를 담당하였고, 건국 이후에는 그가 사망하기 전까지 국무원 총리를 역임하였기 때문에 자연히 중국의 관료사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고, 등소평과 진운도 마찬가지로 일정한 지역과 직종에 장기간 종사하면서 방대한 파벌망을 구축하고 있다. 등소평의 군부인맥은 그가 오랫동안 정치위원으로 근무했던 제 2 야전군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으며, 지난 40여년간 중국의 주요 경제정책을 담당하고 경제기구를 장악해 온 진운은 경제관료를 중심으로 광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문화혁명 4인방의 주인공인 장춘교와 요문원 등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전부터 상해지역의 문화계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면서 나름대로 지역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고, 호요방도 그가 담당했던 공산주의 청년단을 매개로 형성된 이른바 공청단 인맥을 개혁과 개방정책 과정에서 동원, 활용하였다.

 

이와같이 간부와 관료들을 일정한 지역과 직종에 장기간 종사하게 하는 중국공산당의 인사정책은 중국혁명 과정에서 자력갱생을 강조할 수 밖에 없는 혁명적 상황에서는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하겠다. 또한 중국과 같이 방대하고,지역적으로나 조직적으로 다양하고 복잡한 사회에서 간부와 관료들의 잦은 교체와 이동은 행정의 일관성과 장악력을 저해하기 때문에, 행정조직의 전문화와 안정을 위해서는 그와같은 인사정책이 필요한 것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관계주의’문화가 지배적인 중국사회에서 이러한 인사정책은 파벌 형성이란 부작용을 낳고 있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이처럼 지역적, 조직적 연고를 매개로 하여 형성된 간부와 관료들간의 인간관계는 기본적으로 어떤 정책이나 이데올로기의 동질성을 전제로 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사이의 응집력의 기초에는 동일한 지역, 동일한 직종에 종사하면서 자연스럽게 생성된 친밀감도 있으며, 동시에 그들이 공유하고 있는 정치적 자원을 이용하여 상부상조하면서, 자신들의 지위와 이익을 보호하고 확충하려고 하는 사적 욕구를 무시할 수 없다고 하겠다. 따라서 파벌은 일반적인 이익집단과도 구별되어야 하며, 또한 파벌정치에서 정책이나 노선상의 차별성은 그렇게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견해도 있다.

 

네탄(Andrew Nathan)과 같은 학자들은 중국정치 과정에서 나타나는 파벌간의 정책적, 이데올로기적인 차별성은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지적하면서, 파벌간의 갈등을 근본적으로 권력이익의 충돌이란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문화혁명기간에 강조되었던 문화혁명 좌파와 실용주의파간의 정책적, 이데올로기적인 대립은 실제로 사회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차이점에서 비롯되었다기 보다는 사회주의 사회 건설과정의 속도와 방법에 대한 견해차이가 권력투쟁 과정에서 지나치게 과장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개혁과 개방정책과 관련하여 흔히 말하는 보수파와 개혁파간의 정책적, 이데올로기적인 차별성도 역시 개혁과 개방이란 기본적인 정책에 대한 합의를 유지하고 있으면서 개혁의 속도와 범위 등에 대한 의견차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파벌을 형성하게 하고, 파벌간의 갈등을 촉발하는 것은 파벌간의 정책이나 이데올로기의 차별성에서 파생된다기 보다는 파벌간의 권력이익의 갈등이란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파벌정치의 깊숙한 배경에는 권력투쟁이 숨어 있으며, 바로 이와같은 권력투쟁의 측면이 파벌간의 정책적, 이데올로기적 차별성을 과도하게 부각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루시안 파이도 파벌정치가 추구하는 이익은 기본적으로 파벌을 구성하는 개개인의 사적 권력이익이란 차원에서 파벌은 특정한 지역이나 조직의 이익을 대변하는 통상적인 이익집단과 구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특정한 지역과 조직체계가 파벌 형성의 근거가 되고 있지만, 파벌이 자신들의 권력기반이 되고 있는 지역이나 조직의 이익을 대변하거나 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들면, 문화혁명기간 동안에 상해를 근거로 형성된 문화혁명 좌파의 정책과 이데올로기적인 성향이 중국 최대의 상공업도시이며 국제도시인 상해의 지역적 이익을 대변한다기 보다는 그들 자신의 좌파적 성향과 이익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문화혁명 좌파의 등장은 오히려 상해의 지역적 이익에 불리하게 작용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한 문화혁명 기간 동안 임표를 지지했던 공군지도부는 군의 전문화와 현대화를 모색하는 공군의 조직적 이익을 무시하고 임표의 인민전쟁론을 추종한 것을 보더라도 파벌과 이익집단은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파벌정치의 가장 중요한 특징중의 하나는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파벌을 구성하는 성원들의 개별적이고 사적 권력이익의 추구에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비공식적인 파벌간의 갈등이 공식적인 정치과정에 투영되면서 파벌간의 정책적, 이데올로기적인 차별성이 강조되지 않을 수 없고, 따라서 파벌투쟁이 정책논쟁이나 노선투쟁과 복합적으로 결합된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고 하겠다. 특히, 파벌들간의 권력투쟁이 심화되면서 파벌간의 연합과 대결구조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정책과 이데올로기적인 차별성은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런 점에서 도메스(Jurgen Domes)는 파벌정치에서 권력이익과 더불어 정책과 이데올로기적 차별성이 동등하게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다시 말해서 파벌간의 권력투쟁이 심화, 확대되면서 잠복되어 있던 파벌간의 정책적, 이데올로기적인 차이점이 부각되고, 문화혁명 좌파와 실용주의파, 그리고 개혁파와 보수파와 같이 상이한 정책적, 이데올로기적 성향을 대변하는 파벌연합이 형성되기 때문에 파벌정치에서 정책과 노선의 문제를 권력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3) 중국정치와 상해 인맥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상해는 중국 최대의 도시이다. 1990년 현재 상해의 총면적은 약 6100 평방 킬로미터, 공식적인 인구통계에 따르면 상해는 1천 1백만의 인구를 가진 중국 최대의 도시이다. 상해시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1840년대의 아편전쟁이후 개항도시로 출발하여, 상해에서 서방과 일본의 租界가 형성되면서 근대도시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상해는 제국주의 세력의 중국침략의 상징이기도 하였지만, 동시에 근대적인 서구문명을 수용, 전파하는 중국의 국제적 창구의 역할도 수행하였다.

 

따라서 상해를 중심으로 중국 최초의 근대적인 기계제조업, 방직공업, 출판업, 영화제작업등이 발전 보급되었고, 중국 최초의 신문사도 상해에서 시작되었으며, 개방적인 근대교육도 상해를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다시 말해서 상해는 1949년 이전에 이미 중국의 공상업과 금융의 중심지였고, 근대적인 문화와 문명의 발상지였다. 이런 점에서 상해는 정치와 행정의 도시, 보수적인 관료들이 지배하는 북경과는 차이가 있었다. 특히, 1920년대와 1930년의 상해는 북경이나 다른 중국의 대도시보다는 개방적이고 자유로왔기 때문에 기회를 찾아 모여드는 모험가의 도시로 알려졌고, 기업가들의 도시였으며, 동시에 서구문명을 수용하려는 개혁지향적인 지식인들과 혁명파들의 활동무대가 되었다. 손문이나 진독수와 같은 1920년대의 혁명적인 지식인들이 군벌들의 지배가 비교적 이완된 상해를 중심으로 신중국의 건설을 모색하는 사상운동과 정치운동을 전개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중국공산당의 창당과정에서 북경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이대교보다 상해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진독수의 인맥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 것도 바로 이와같은 상해의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성격과 무관하지 않다고 하겠다.

 

이처럼 상해는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중국의 근대화와 혁명운동의 중심지로 등장하면서 중국의 지식인 사회와 기업계, 그리고 혁명파들 사이에서 상해인맥이 형성되었다고 하겠다. 상해 인맥이란 상해출신이란 뜻보다는 상해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상해를 근거지로 형성된 인적 관계를 의미한다고 한다면, 중국공산당이나 국민당의 초기 혁명운동과정에서 상해인맥의 영향력은 대단히 컸다고 하겠다. 그러나 1927년에 장개석의 상해 쿠테타를 계기로 국공합작이 붕괴되고, 중국혁명의 성격이 본격적으로 무장투쟁의 양상으로 변화되면서 상해의 정치적 중요성은 급속하게 쇠락하게 되었다고 하겠다.

 

특히, 중국공산당의 혁명운동이 1930년대 이후 농촌지역에서 홍군과 소비에트의 건설을 중심으로 발전하면서 중국공산당의 권력 엘리트중에서 상해인맥의 역할과 영향력은 거의 무시해도 좋을 만큼 위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상해의 좌파 지식인들이 중심이 된 항일구국운동을 통하여 중국공산당 내의 상해인맥이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하겠다. 이러한 상해인맥의 쇠락은 1949년 이후에도 여전히 계속되었다. 특히, 사회주의 개조를 추진하는 신중국의 건설과정에서 공상업과 문화의 중심도시인 상해의 중요성은 그다지 강조되지 않았다. 오히려 자산계급의 영향이 깊이 뿌리 박혀 있는 상해는 개조와 개혁의 대상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상해의 정치적 위상은 북경과 비교할 수 없었으며, 중국공산당의 권력 엘리트 내부에서도 상해인맥의 영향력은 그다지 중요시되지 않았다.

 

이와같은 현상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상해 시당위원회 서기들의 정치적 비중을 살펴보아도 알 수 있다. 해방 이후 문화혁명이 발생하기 직전까지 상해 시당위원회 제1서기는 요수석(饒潄石)(1949-1952), 진의(陳毅)(1952-1954), 가경시(柯慶施)(1955- 1965)이었는데, 이들 중에서 요수석은 이른바 “고강-요수석 반당음모”로 일찍이 숙청되었고, 진의의 경우는 상해에서 근무한 기간도 짧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인적 관계가 상해를 근거로 형성되었다기 보다는 해방전 양자강 이남지역에서 활동했던 신4군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상해와는 그렇게 긴밀한 관련성이 없다고 하겠다. 다만 가경시는 혁명기간 동안에 상해를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10년간의 상해 시당위원회를 책임지고 있는 동안에 상해인맥을 형성했지만, 가경시의 영향력은 상해와 인근 화동지역에 국한되었고, 전국적인 차원까지 확산된 것은 아니었다. 이런 점에서 상해인맥이 중국공산당의 권력엘리트 내부에 진출하여 전국적인 차원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은 문화혁명이후 4인방이 등장하면서 부터라고 할 수 있다.

 

(4) 문화혁명과 상해인맥의 진출

 

당과 국가에게 대재난을 초래했다는 문화대혁명이 왜 폭발하였고, 문화혁명의 결과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각도에서 분석될 수 있다. 그러나 파벌정치란 관점에서 본다면, 문화대혁명은 기존의 권력 엘리트들의 혁명적 변혁과 더불어, 임표를 중심으로 하는 군부세력과 문화혁명 4인방과 같은 이질적인 권력 엘리트들을 등장시킴으로써 권력 엘리트 내부의 동질성이 파괴되었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사실, 문화혁명 이전까지 중국의 권력엘리트들은 오랜 혁명과정을 거치는 과정에서 비교적 높은 동질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문화혁명이란 대시련을 거치면서 유소기를 중심으로 형성된 이른바 백구(白區)지역에서 활동하던 간부들과, 모택동을 정점으로 형성된 게릴라지역 출신의 간부들의 차별성이 부각되기도 하였지만, 이들의 혁명경험의 차이는 그다지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 이들은 모두 생사를 건 중국혁명 과정에서 동지적인 유대감을 가지고 있었고, 공동의 목표을 위하여 투쟁한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혁명경험의 차별성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합의에 입각한 정책결정과정의 중대한 장애요인이라고 인식하지 않았다. 따라서 1949년 이후 신중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권력 엘리트들 내부에서 정책적인 견해의 차이가 노출되기도 하였지만, 그것은 혁명경험을 공유하고 있으며, 비슷한 세대로 구성된 중국공산당의 권력엘리트들이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견해차이에 불과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이와같은 권력엘리트 내부의 동질성과 합의에 입각한 정책결정의 패턴은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파괴되었다. 특히, 문화대혁명은 강청, 장춘교, 요문원, 그리고 왕홍문과 같이 과거의 중국 지도층과는 전혀 다른 경험을 가진 집단을 등장시킴으로써, 권력 엘리트 내부의 동질성은 사실상 파괴되었고, 따라서 문화혁명 이후 파벌간의 갈등은 권력투쟁과 정책논쟁, 그리고 노선투쟁이 복합적으로 증폭되는 심각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처럼 중국정치의 질적 변화를 초래한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기존의 권력 엘리트와 이질적인 상해인맥이 어떻게 중국정치의 중앙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약진운동 이후, 특히, 1960년대초에 중국의 지도부 내부에서 전개되었던 ‘숨은 노선투쟁’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즉,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말미암아 당내외에서 모택동의 리더쉽에 대한 회의가 확산되고, 모택동의 좌경적 노선과 정책에 대한 수정 작업이 추진되면서, 유소기와 등소평 등이 중심이 된 이른바 당내의 실권파들은 암암리에 모택동의 계급투쟁론과 계속혁명론을 비판하는 지식인들의 활동을 지원하였다. 더구나 유소기와 같은 백구지역 출신의 팽진이 장악하고 있는 북경시당위원회의 간부들은 당시 비판적인 지식인들의 활동을 백화제방정책으로 간접지원하는가 하면, 일부 시당위원회 문화, 선전부문의 책임자들은 직접 모택동의 리더쉽과 정책노선을 비판하는 내용의 컬럼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예를들면, 당시 북경 시당위원회 서기로써 문화사상공작을 총괄하던 등척(鄧拓)의 「연산야화(燕山夜話)」가『북경만보』에 게제되었고, 오남성(吳南星)이란 필명으로 모택동시대를 풍자하는 「삼가촌례기(三家村禮記)」가 북경시 위원회의 이론지 『전선』에 발표되었다. 특히, 당시 북경시 부시장이었던 오함은 명조(明朝) 가정제(嘉靖帝) 시대의 해서를 민중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권력에 반항한 대표적인 청관(淸官)으로 묘사한 역사극 「해서파관(海瑞罷官)」을 발표함으로써, 모택동의 대약진운동을 비판하다 숙청된 팽덕회를 암암리에 찬양하였다.

 

이와같은 ‘수정주의적 경향’은 비단 문화분야에서만 전개된 것은 아니었다.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초래된 경제적, 정치적 재난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인민공사운동과 같은 급진적인 정책은 모두 철폐되거나 정비되었다. 따라서 모택동을 중심으로 하는 좌파세력들은 대약진운동의 실패를 부분적으로 인정하면서도 이와같은 수정주의적 경향을 견제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한편으로 팽덕회가 숙청된 이후 국방부 부장에 등용된 임표를 중심으로 군부 내부에서 모택동사상에 대한 학습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고, 또 다른 한편으로 강청을 중심으로 혁명가극을 대중적으로 보급하려고 하면서, 동시에 당시 문화예술계에 풍미하고 있던 ‘수정주의적 경향’에 대한 비판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북경 시당위원회를 중심으로 하는 기존의 문화사상분야는 이와같은 모택동과 강청의 의지에 순응하려고 하지 않았다. 후에 모택동이 술회한 바에 의하면, 당시 “북경시는 바늘 하나 찌를 틈이 없고, 물 한방울 스밀 틈이 없다”고 할 만큼, 북경시당위원회와 중앙당 선전부는 실권파에 의하여 장악되고 있었다. 이와같은 상황에서 모택동과 강청은 상해의 지식인들에게 주목하게 되었다.

 

1965년 11월 10일, 상해의 『문회보(文匯報)』에 게제되어 문화대혁명의 도화선이 된 요문원의「평신편역사극 <해서파관>(評新編歷史劇 <海瑞罷官>)」이 작성, 발표되는 과정은 어떻게 상해의 급진적 지식인들이 모택동의 반수정주의노선과 연계되면서 중앙의 정치무대에 등장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후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오함의 「해서파관」의 정치적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강청은 모택동의 동의를 얻어 당시 문화사상계의 수정주의적 경향성을 비판하기 위한 작업을 추진하면서 상해의 문화선전부문의 지식일인에 주목하게 되었다.

 

강청이 상해를 선택한 것은 당시 상해의 대부적 역할을 하던 상해시 제1서기인 가경시가 모택동과 친숙한 관계에 있는 혁명동지였을 뿐만 아니라, 강청 자신도 1930년대에 상해지역에서 좌익운동에 종사하면서 당시의 좌파 문인들과도 인적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론된다. 따라서 강청은 당시 상해 시당위원회 서기이며, 동시에 선전부장을 역임하고 있던 장춘교와 협의하여 요문원을 추천받았다. 따라서 강청, 장춘교, 요문원은 약 7, 8개월간 비밀리에 오함의「해서파관」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준비하였고, 모택동의 승락을 받은 후, 장춘교와 요문원의 영향하에 있는 상해의 『문회보』를 통하여 발표하였다. 동시에 이들은 이 글을 『인민일보』를 비롯한 중앙의 언론매체에 전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팽진이 장악하고 있던 북경시당위원회와 유소기의 영향하에 있던 당 중앙선전부의 반발로 약 10일동안 중앙지에 전제되지 못하다가 모택동의 강력한 지시에 의하여 1965년 11월 29일에 『북경일보』와 『해방군보』에 전제되었고, 다음날인 11월 30일에 『인민일보』도 학술연구난에 전제하였다.

 

그러나 팽진이나 중앙의 당선전부는 요문원의 문제 제기를 학술적인 차원에서의 논쟁으로 처리함으로써, 강청과 장춘교, 요문원이 제기한 문제가 이데올로기적이고 정치적인 논쟁으로 발전하는 것을 저지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모택동은 마침내 북경시당위원회의 개혁과 더불어 팽진이 주도하는 문화혁명소조를 개편하였다. 즉, 1966년 5월에 정치국 확대회의를 개최하고 문화대혁명의 강령적 문건인 「5‧16통지」를 통과시키고, 정치국 상무위원회 산하에 새롭게 진백달(陳伯達)을 조장으로 하고, 강청을 제1부조장으로 하는 중앙문화혁명소조를 구성, 본격적인 문화대혁명을 추진하게 하였다. 이때 장춘교는 3인의 중앙문화혁명소조 부조장 중의 1인으로 임명되었고, 요문원도 11명의 조원 중 1인으로 임명됨으로써, 마침내 상해파가 중앙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다.

 

이처럼 강청을 매개로 모택동과 연계하여 문화혁명을 주도하기 시작한 장춘교와 요문원 등 상해인맥은 주로 언론과 사상분야에서 맹렬하게 당권파를 공격하였다. 특히, 문화대혁명이 홍위병 활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조반파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탈권투쟁의 양상으로 발전하면서, 이들은 상해의 조반파를 후원하면서 새로운 정권기구의 모델로서 ‘상해 코뮨’을 수립하려고 하였다. 특히, 장춘교는 상해 국영 방직공장의 노동운동가인 왕홍문이 중심이 된 상해공인혁명조반 총사령부(上海工人革命造反 總司令部) 등 노동자 조직의 지원을 받아 상해시에서 처음으로 당과 정권기구를 장악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른바 1967년 1월에 발생했다고 하는 ‘상해 1월혁명’은 문화혁명의 일대 전기가 되었다.

 

장춘교, 요문원, 왕홍문이 중심이 된 상해 1월 혁명은 이른바 조반파에 의한 최초의 탈권운동의 성공사례이었으며, 탈권과정에서 표방한 ‘상해코뮨’은 문화대혁명의 이상을 구현할 수 있는 새로운 정권기구로서 인식되었기 때문에 상해는 전국적인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물론 상해 콤뮨의 이상은 현실적인 혼란을 우려한 모택동의 번의로 무산되고, 이른바 군인과 혁명적 간부, 그리고 대중단체의 대표자로 구성된 3결합의 혁명위원회로 변질되었지만, 문화혁명은 장춘교, 요문원, 왕홍문을 중심으로 하는 상해인맥이 중앙과 지방에서 급속하게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 준 것은 사실이다. 즉, 장춘교와 요문원, 그리고 새롭게 부상한 왕홍문은 상해 1월 혁명 이후 구성된 상해의 정권기구인 상해혁명위원회를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중앙문화혁명소조를 중심으로 중앙의 당지도부에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하였다. 문화혁명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하여 소집된 1969년의 중국공산당 제 9기 전당대회에서 장춘교와 요문원은 강청과 더불어 나란히 권력의 핵심부인 중앙정치국 국원으로 선임되었고, 왕홍문은 중앙위원에 진출하게 됨으로써, 중앙에서 상해파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더구나 임표사건이후 1973년에 개최된 중국공산당 제 10기 전당대회에서 문화혁명을 지지하는 세력들이 상당수 당 중앙위원회와 정치국에 진출하였을 뿐만 아니라, 왕홍문은 일약 당의 부주석으로 선임되었으며, 장춘교는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그리고 요문원은 정치국원으로 선출됨으로써, 상해파는 중앙정치 무대에서도 막강한 세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부터 장춘교, 요문원, 왕홍문은 강청과 더불어 중앙정치국안에서 4인방을 결성, 당과 국가기구의 최고 권력을 장악하려는 본격적인 ‘반혁명 음모’를 추진했다.

 

(5) 권력투쟁과 상해인맥의 몰락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상해파는 문화혁명 과정에서 모택동과 강청을 매개로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문화혁명 좌파의 중심적 세력을 형성, 급속하게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 문화혁명 좌파세력이 중국의 당과 국가기구, 그리고 군부를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임표사건 이후 주은래와 등소평을 중심으로 구관료세력들이 다시 결집되면서 문화혁명 좌파들에 대한 견제가 강화되었고, 기존의 군부 지도자들도 문화혁명 좌파를 불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좌파의 영향력은 당시의 언론매체들에 의하여 보도된 것보다 피상적이고 제한적이었다.

 

1970년대의 중국정치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당내의 어느 세력도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점유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중국정치는 권력이익과 정책적인 성향이 서로 다른 다양한 파벌들의 경쟁과 대립이 여전히 계속되었다. 임표사건 이후 1973년 8월에 개최된 10차 당대회에서 선출된 중앙위원들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이 당시 중국의 지도부 내부의 다양한 파벌들의 세력균형 상태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도메스(Jurgen Domes)에 의하면, 10차 당대회 직후 중앙위원회에는 다음과 같은 7개의 파벌적 집단들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즉, 10기 중앙위원중에는

(1) 주은래, 이선념과 같이 문화혁명 과정에서 별다른 피해를 받지 않은 구관료가 약 39명,

(2) 등소평과 같이 복권된 당정 간부가 약 15명,

(3) 엽검영, 유백승(劉伯承)과 같은 중앙군부의 대표들이 25명,

(4) 지방군구의 대표자들이 35명,

(5) 상해시당위원회와 문화혁명 기간에 등장한 좌파 지식인 집단이 약 15명,

(6) 진영귀와 같은 모범적인 노동자와 농민대표자 및 대중단체 좌파집단이 35명, 그리고

(7) 화국봉과 같은 공안계통 대표자들이 15명이 있었다.

 

물론, 이와같은 중앙위원회의 인적 구성이 반드시 여러 파벌들의 정치적 입장과 세력관계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체로 주은래와 등소평이 중심이 된 관료조직들은 문화혁명 좌파에 대하여 적대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고, 이들은 아직도 상당부문 중앙과 지방정부와 당기구를 장악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또한 중앙과 지방 군구의 지도자들도 이덕생(李德生) 심양군구(瀋陽軍區) 사령관 처럼 좌파를 지지하는 소수를 제외하면, 대체로 모택동의 리더쉽에는 순응하면서도 문화혁명 좌파의 이데올로기와 정책에 대해서는 냉담하거나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하였다.

 

따라서 문화혁명 좌파세력들은 진영귀와 같은 모범적인 노동자와 농민의 지원과 화국봉과 같은 공안계통 대표자들의 협력을 바탕으로 주은래와 등소평이 중심이 된 구간부 세력들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였다. 특히, 1970년대에 들어와 모택동과 주은래의 와병이 알려지면서 후계자 문제와 같이 파벌의 권력이익과 직결된 문제가 제기되었기 때문에, 더욱 격렬하고도 복잡한 파벌간의 대립과 연합구도가 형성되었다. 무엇보다도 상해파를 중심으로 한 문화혁명 좌파세력들은 그들의 영향하에 있는 각종 집단들과 언론매체들을 이용하여 주은래와 등소평에 대한 비판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이를테면, 1973년의 10차 당대회 직후 좌파세력들은 임표를 비판하고 공자를 비판한다는 비림비공운동을 전국적으로 추진하면서, 당과 국가 기구내에 좌파 지지세력을 중심으로 비공개적인 비판조를 결성, 여러가지 필명으로 각종 언론매체를 통하여 주은래와 등소평을 간접적으로 비판, 비난하는 작업을 전개하였다. 예를들면, 북경대학과 청화대학의 대비판조는 양효(梁效)란 필명으로 ‘당내의 대유(大儒)’인 주은래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하자는 식의 논문들을 북경일보와 인민일보 등에 발표하는가 하면, 상해시당위원회는 1973년에 『이론과 학습(理論與學習)』이란 잡지를 창간하고 본격적으로 좌파의 이데올로기와 정책을 선전하기 시작하였다.

 

이와같이 구관료와 구정책노선의 부활을 비판하고 문화혁명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좌파들의 비판에 대하여, 주은래와 등소평 세력은 정치안정과 경제발전을 표방하면서 당과 정부의 정돈을 추진하였다. 특히, 1975년 1월에 개최된 제 4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주은래는 “금세기 말까지 농업, 공업, 국방, 과학기술의 4개 현대화를 전면적으로 실현하여 중국 국민경제를 세계의 전열에 서게 하자”고 제안하고, 등소평이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작업을 추진하면서 문화혁명 좌파와의 대립은 더욱 첨예하게 발전하였다. 좌파들은 등소평을 중심으로 하는 실무관료들이 표방하는 현대화와 경제발전론에 대하여 자본주의의 부활과 수정주의의 위험성을 경고하면서 공개적이고 노골적으로 비판하였다.

 

이처럼 문화혁명 좌파와 주은래, 등소평의 실무관료파들의 대립이 격화된 이유는 정책노선의 차이에서도 유래하지만, 모택동과 주은래 이후 누가 당과 국가의 최고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가 걸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당시 주은래는 회복 불능의 중병을 앓고 있었고, 모택동의 수명도 예측할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강청을 비롯한 4인방은 모택동이 생존하고 있는 동안에 확실한 권력의 우위를 점유하려고 여러차례에 걸쳐 모택동에게 4인방을 중심으로 당과 국가의 지휘부를 개편할 것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예를들면, 강청은 모택동 이후 당 주석직을 차지하고자 하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고, 왕홍문을 전인대 위원장으로 추천하였으며, 장춘교와 요문원 등이 당과 정부의 실무기구를 장악하려고 했다.

 

물론, 이와같은 4인방의 ‘권력 찬탈 음모’에 대한 1981년의 기소내용을 모두 믿을 수는 없지만, 여러가지 정황을 미루어 볼 때, 4인방들이 권력의 핵심부을 장악하려고 하였으며, 이와 같은 과정에서 4인방이 가장 경계했던 점은 주은래 이후 등소평이 당과 정부기구를 장악하는 사태를 방지하려고 했다는 것은 명백하다고 하겠다. 사실 등소평은 1973년에 복권된 이후, 당 부주석겸 국무원의 제1 부총리, 그리고 군사위원회 부주석이며 총참모장이란 직책을 이용하여 정력적으로 당과 정부, 그리고 군부의 일상적 업무를 관장하고 있었고, 1975년경에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4개 현대화와 경제발전을 추진하기 위한 당과 정부의 전면적인 정돈과 정풍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문화혁명 4인방이 등소평의 등장을 가장 경계하였고, 4인방과 등소평의 갈등이 갈수록 치열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러한 파벌간의 치열한 권력투쟁에 대하여 모택동은 비교적 중도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던 엽검영과 화국봉 등을 중용하면서, 세력균형을 유지하려고 하였지만, 1976년 1월 8일의 주은래 사망과 1976년 9월 9일의 모택동의 사망으로 중국정치는 엄청난 변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6) 등소평시대의 상해와 상해인맥의 재구성

 

주은래 사망 이후 4월 청명절을 전후하여 주은래를 추모하는 군중들이 천안문에서 모여, 4인방과 모택동을 비난하는 시위를 벌이는 사태가 발생하자, 이를 빌미로 좌파는 격렬한 등소평의 반당음모를 비난하고, 마침내 등소평의 숙청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모택동은 주은래의 후임으로, 문화혁명 기간 동안에 중앙 정계에 진출한 혁명 간부이면서도, 4인방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던 화국봉을 주은래의 후계자로 지명함으로써, 문화혁명 좌파의 득세를 견제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화국봉은 모택동이 사망한 직후, 엽검영을 중심으로 하는 군부세력들의 지원을 받아, 일거에 좌파세력을 제거함으로써, 상해인맥을 중심으로 형성된 문화혁명 좌파세력들은 중국정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문화혁명의 수혜파이며, 문화혁명 좌파들과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던 화국봉이 문화혁명 4인방의 숙청을 결심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아직도 불투명한 점이 많다. 그러나 여러가지 정황을 고려해 본다면, 모택동 이후의 권력구도를 둘러싸고 벌어진 좌파 연합세력 내부의 분열과 암투, 그리고 군부의 반좌파 정서가 결합되어 산출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주은래의 사망과 등소평의 숙청으로 최고권력을 쟁취하려는 4인방의 활동이 더욱 노골화되자, 이에 불만을 품고 있던 화국봉을 중심으로 하는 공안세력과 엽검영의 군부세력들이 4인방의 제거에 합의, 군사 쿠데타의 방식으로 4인방과 그 일당을 체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1976년 10월 7일, 화국봉과 엽검영 등은 북경 경비구와 중앙경위단 (8341부대)을 동원하여 4인방을 체포하고, 동시에 그들이 장악하고 있던 선전부문과 교육부문 등에 군사통제를 실시하였다. 즉, 인민일보와 신화사와 같은 주요 언론매체를 접수하고, 문화혁명 좌파의 영향하에 놓여 있던 북경대학과 청화대학에 군대를 파견하여 4인방의 지지세력들을 제거하였다. 또한 이들은 중앙당과 정부기관은 물론이거니와 각급 지방당과 정부차원에서도 4인방의 주요 지지 세력들을 신속하게 숙청하였다. 특히, 4인방의 거점지역인 상해에 대해서는 등소평과 같이 제2야전군 출신이며, 상해지역의 군부대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해군 정치위원 소진화(蘇振華)의 지휘하에 군사통제를 실시하였다. 소진화는 군부의 강력한 지원을 받아, 4인방의 체포 직후 상해지역에서 일부 노동자들과 민병조직을 중심으로 추진되었다는 총파업과 무장폭동 계획을 제압하고, 4인방의 지지세력들이 장악하고 있던 상해시 당위원회와 시정부를 개편하는데 성공하였다. 즉, 1976년 10월 27일, 상해시는 당원대회를 소집하여, 장춘교, 요문원, 왕홍문등을 상해시 당과 정부의 모든 직책에서 파면하고, 소진화를 상해시 당위원회 제1서기겸 혁명위원회 주임으로 선임하고, 예지복(倪志福)과 팽충(彭沖)을 각각 상해시당위 제2, 제3 서기겸 혁명위원회 제1, 제2 부주임으로 임명하였다.

 

이처럼 짧은 기간동안에 4인방의 숙청에 성공한 화국봉과 엽검영의 연합세력은 당과 정부, 그리고 군부의 모든 권력을 독점하는데 성공하였고, 이른바 ‘두개의 범시(凡是)’ 즉 모택동이 내린 모든 결정을 굳게 지키고, 모택동의 모든 지시를 끝까지 준수하겠다고 선언하였다. 다시 말해서, 화국봉은 모택동의 사상과 정책을 계승한다는 차원에서 문화혁명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문화혁명 좌파에 대한 비판과 숙청의 범위를 축소하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같은 화국봉의 ‘두개의 범시론’에 대하여 등소평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혁명 수해파들이 격렬하게 반발한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따라서 화국봉은 1977년 10월에 개최된 중국공산당 제10기 3중전회에서 등소평의 완전 복권을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 부주석, 국무원의 제1부총리, 그리고 인민해방군의 총참모장으로 복귀한 등소평은 곧 ‘진리의 기준’에 관한 논쟁을 촉발하여 화국봉의 ‘두개의 범시론’을 공격하면서, 모택동사상과 문화혁명의 과오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요구하였다. 특히, 등소평을 중심으로 결집한 문화혁명 수해파들은 문화혁명 좌파의 영향을 철저하게 청산하고, 문화혁명으로 박해를 받은 모든 구간부들의 복권을 주장하였으며, 당과 국가의 역사적인 노선전환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이들이 당의 주도권을 장악한 가운데 개최된 1978년 12월의 중국공산당 11기 3중전회에서 4개 현대화와 경제발전을 달성하기 위한 새로운 역사적 대장정이 선언됨으로써, 모택동시대와는 전혀 다른 등소평의 개혁시대가 개막되었다.

 

사상해방과 체제개혁, 그리고 문호개방을 표방하면서 시작한 등소평시대는 첫째, 모택동사상과 문화혁명 좌파의 이데올로기와 조직적 영향을 철저히 배제하고, 둘째, 문화혁명으로 박해를 받은 구간부들의 복권을 추진하는 동시에, 셋째, 4개 현대화와 경제발전을 추진하기 위한 대담한 체제개혁과 문호개방을 추진하였다. 따라서 등소평시대의 개막과 더불어 좌파세력들은 물론이거니와 화국봉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이른바 범시파들도 각급 당과 정부, 그리고 군부내에서 숙청되기 시작하였고, 구간부들의 복권이 추진되었는가 하면, 4개 현대화와 경제발전을 추진할 수 있는 신진세력들의 등장도 동시에 모색되었다. 특히, 1982년 12차 당대회와 1985년의 임시 당대회에서 호요방과 조자양을 주축으로 하는 개혁세력들이 당과 국무원을 장악하면서 체제개혁과 지도부의 세대교체가 본격적으로 실천되기 시작하였다.

 

물론 이와갚은 등소평체제가 추진하고 있는 체제개혁과 세대교체에 대한 반발과 논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모택동과 모택동사상에 대한 평가문제와, 개혁과 개방의 속도와 범위 문제를 둘러싸고 반좌파 연합세력 내부의 의견대립이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이른바 급진개혁파와 보수파들 사이에 전개된 치열한 정책논쟁과 권력투쟁은 1979년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중국정치의 핵심적인 변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소평시대에 추진된 체제개혁과 세대교체로 말미암아 중국의 권력 엘리트들의 성격이 변화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특히, 중앙과 지방의 권력엘리트들 중에 젊고, 학력수준이 높은 테크노크라트가 상당 수 등장함으로써 중국의 파벌정치의 성격과 세력판도에도 변화를 주고 있다.

 

이와같은 중앙정계의 미묘한 파벌적 갈등과 변화는 상해인맥의 변화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문화혁명 4인방이 숙청된 이후 상해 시당위원회를 비롯하여 주요 당정기구에서 4인방의 추종세력은 철저하게 배제되었지만, 새로 구성된 蘇振華, 倪志福, 彭沖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지도부는 중앙정계의 복잡한 파벌들의 세력관계를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이들의 경력을 살펴보면, 4인방이 몰락한 직후에 성립된 상해시의 신지도부는 등소평과 화국봉의 지지세력들이 안배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소진화는 이미 언급한 것처럼 군부내의 등소평파를 형성하고 있는 제2 야전군 출신인데다가 일찍이 공청단에 가입 활동을 한 점을 미루어 보아, 호요방과도 연계되어 있는 인물이 인데 비하여, 예지복과 팽충은 모두 화국봉이나 엽검영 세력을 대변하고 있다고 추론할 수 있다.

 

예지복은 상해에서 태어난 노동자출신으로 1958년에 공산당에 입당하여 문화혁명 이전에 이미 홍전겸비(紅專兼備)의 대표적인 인물로 알려졌던 인물이고, 문화혁명기간 동안에도 “혁명간부”로 활동하였다. 이런 배경을 고려하면 예지복은 4인방이 등장하기 이전에 이미 전국적으로 알려진 노동운동가란 점에서 문화혁명 좌파의 지원으로 등장한 것이 아니란 점에서 4인방이 숙청되기 전에는 화국봉과 마찬가지로 범좌파세력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4인방 숙청이후 화국봉이 그를 상해시당위 서기로 추천한 것은 상해시의 노동자계층의 동요를 무마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동시에 그가 화국봉을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범시파들의 지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팽충은 당시 남경군구 사령관인 許世友에 의하여 대표되는 제3 야전군 출신이며, 문혁기간 동안 별로 피해를 보지 않고 활동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엽검영과 같은 계열의 정치군인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예지복이나 팽충의 영향력은 중앙정치무대에서 화국봉과 엽검영의 연합세력이 와해되기 시작한 1980년을 전후로 점차로 쇠락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화국봉이 대표하는 범시파가 몰락하고 등소평-호요방-조자양체제가 들어서면서 상해시의 권력엘리트들의 성격도 현저하게 변화되었다. 즉, 1980년대 들어와 상해시당위원 제1서기로 선임된 인물들의 경력을 살펴보면, 거의 모두가 개혁과 개방시대를 대표하는 새로운 엘리트들로 충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진국동(陳國棟, 1980-1985), 예행문(芮杏文, 1985-1987), 강택민(江澤民, 1987-1989), 주용기(朱鎔基, 1989-1992), 오방국(吳邦國, 1992- )의 경력을 분석해 보면, 이들은 거의 모두가 젊고 학력이 높은 전문적인 실무관료들이란 점을 알 수 있다. 특히, 예행문(1927년 강소성출신), 강택민(1926년 강소성 출신), 주용기 (1928년 호남성 출신), 오방국(1941년 안휘성 출신)은 모두 제2, 제3세대를 대표하는 신진 엘리트들이고, 과학기술과 경제부문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성장한 실무관료들이다. 이들의 정치적인 색채와 관련해서 주목되는 점은 진국동과 예행문은 호요방의 이른바 공청계에 속하는 인물들이고, 나이가 젊은 오방국을 제외하면 모두 문화혁명이나 좌파에 의하여 숙청당했거나 불이익을 받았던 전문관료들이란 점이다.

 

(7) 강택민 총서기의 등장과 새로운 상해인맥의 형성

 

4인방이 몰락한 이후 등소평시대의 상해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상당기간 정체된 상태를 면하지 못했다. 정치적인 차원에서 상해는 4인방의 거점지역으로 끊임없는 감시와 통제의 대상이 되었고, 상해를 대표하는 인물들도 중앙 정치 무대에서 별다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경제적인 차원에서도 등소평의 개혁, 개방정책이 광동지역이나 심천 등 남부 중국에 집중되고, 상당기간 상해는 제외되었기 때문에, 1980년대 후반까지 상해의 경제발전 속도는 이들 개방지역에 비하여 낙후되었다.

 

그러나 이와같은 상황은 1989년 천안문사태가 발생하고 강택민이 일약 당총서기로 등용되면서 변화되었다. 경제적인 차원에서도 상해 포동지역의 개발이 추진되면서 상해에서 파격적인 개혁조치가 실시됨으로써, 상해는 다시 개혁시대의 총아로 등장하고 있으며, 동시에 강택민, 주용기, 오방국 등 상해시당 위원회의 제1서기 출신들이 중앙의 정치무대에 진출하여 새로운 상해인맥을 형성하게 되었다. 1992년에 10월에 열린 중국공산당 제 14기 당대회는 이와같은 점에서 새로운 상해인맥의 출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중국공산당 제 14기 전당대회는 등소평 이후의 새로운 시대를 준비한다는 점에서 비상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다시 말해서 14전대회는 1978년 11기 3중전회 이후 등소평체제가 추진해 온 개혁과 개방정책의 업적을 평가하고 앞으로 당과 국가의 정책방향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1989년 천안문사건 이후 다시 재연된 보수파와 개혁파간의 정책논쟁과 권력투쟁을 정리하면서 등소평 이후의 새로운 지도부를 구성해야 한다는 점에서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14전대회에서는 무엇보다도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도입을 결의함으로써 앞으로 더욱 개혁과 개방을 심화, 확대해 나 갈 것이란 점을 분명하게 선언했다는 점에서 개혁파의 승리를 확인하였고, 또한 대대적인 인사개편을 통하여 온건개혁세력이 중심이 된 등소평의 후계체제를 구축하려 하였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특히, 14전대회의 인사개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점에서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예측할 수 있다.

 

첫째, 과거의 보수세력이 쇠퇴하고, 온건개혁인사들이 대거 중용되었고, 둘째, 당 원로들의 퇴진으로 주요 지도부의 세대교체와 年輕化가 현저하게 진척되었으며, 셋째, 실무형 관료집단들이 중용되었고, 넷째, 상해를 비롯한 개혁, 개방지역을 대표하는 인물들의 진출이 두드러진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와같이 14전대회를 계기로 온건 개혁세력이 주도하는 새로운 지도부가 형성되어가는 과정에서 주목되는 것은 강택민, 주용기, 오방국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상해인맥이 중앙정계에 진출하고 있다는 점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강택민은 1987년 13차 당대회 이전에는 중앙정계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던 실무관료였다. 그러나 13차 당대회에서 상해 시당위원회 서기겸 중앙정치국원에 선임됨으로써 주목을 받았고, 1989년의 천안문사건으로 조자양 총서기가 사임하면서 일약 총서기로 선출되었다. 제14기 당대회에서 강택민은 다시 당 총서기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에 유임됨으로써 등소평 이후의 중국공산당을 대표하는 주도세력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주용기도 역시 1989년 천안문 사건 이전에는 중앙정계에 알려지지 않았던 경제관련 실무 관료이었다. 그러나 강택민과 함께 상해시의 당과 정부를 관장하다가 1989년 천안문사태이후 상해의 경제적, 정치적 안정을 주도하면서 전국적인 인물로 부상하여 중앙당 정치국원이며 국부원 부총리로 활동하면서 개혁파의 기수로 주목받게된 인물이다. 오방국은 강택민과 주용기가 모두 중앙 당과 정부로 진출한 이후 상해시를 대표하는 신진세대이다. 14전 대회에서 선임된 정치국원중에서 금년 50세인 호금도(胡錦濤) 티벳트 자치구 당위 서기와 더불어 51세인 오방국은 최연소의 지도자 그룹을 대표한다고 하겠다.

 

이처럼 14전대회에서 선임된 총 20명의 정치국원중에서 상해시를 대표하는 인물인 강택민, 주용기, 오방국 등 3인이 모두 포함됨으로써, 상해는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과다 대표되었다고 하겠다. 특히 강택민과 주용기는 7명으로 구성된 정치국 상무위원에 선출됨으로써 중국공산당의 핵심세력 중에서 상해파가 차지하는 비중을 과시하였다.

 

상해파와 연계될 수 있는 인물들은 더 있다. 20명의 정치국원들중에서 교석 정치국 상무위원과 전기침(錢基琛) 정치국원겸 외교부 부장등이 상해인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특히, 이들은 해방전 상해지역에서 항일구국학생운동을 주도하면서, 당시 교통대학 재학중 중국공산당의 지하당운동에 관련했던 강택민의 상급자로 인연을 맺은 바가 있어서 강택민을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범상해인맥으로 구분될 수 있다.

 

14전대회를 계기로 중앙정계에 다시 등장한 상해인맥의 특징은 고학력의 전문기술 관료들이란 점에서 개혁, 개방시대의 인사정책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강택민, 주용기, 오방국은 모두 상해교통대학과 청화대학을 졸업하였고, 중앙정계에 진출하기 전에 모두 실무관료로서 전문적인 직종에 종사한 경력의 대표적인 테크노크라트라고 할 수 있으며, 모두 등소평의 개혁, 개방시대에 급성장한 인물들이란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특히, 강택민과 주용기는 모두 좌파세력들에 의하여 박해를 받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정치적인 차원에서 반좌파 성향이 뚜렷하고, 1989년의 천안문사건에 대한 대응 과정에서 급진적인 개혁에 반대하면서 정치안정과 경제발전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등소평노선의 충실한 실천자라고 할 수 있다. 강택민과 주용기가 중앙정계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1989년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흔들리지 않고 등소평노선을 견지하였기 때문이었다. 강택민과 주용기는 천안문사건이 상해로 확산되는 조짐을 보이자, 상해지역에서 급진개혁파의 대변지 역할을 하던 㰡”세계경제도보(世界經濟導報)㰡•에 대한 개편을 단행하고, 공안규찰대를 조직하여 상해지역의 학생과 지식인의 동요를 사전에 봉쇄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강택민과 주용기, 오방국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상해인맥의 특징은 정치안정을 바탕으로 대담한 경제개혁을 추구하는 등소평의 ‘중국적 사회주의’를 대표한다고 하겠다.

 

(8) 강택민 상해인맥의 장래

 

문화혁명과정에 형성된 장춘교, 요문원, 왕홍문으로 대표되는 좌파의 상해인맥과 1989년의 천안문사건을 전후하여 중앙정계에 급부상한 강택민, 주용기, 오방국의 상해인맥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성향이 정반대이면서도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고 하겠다. 즉, 이들은 모두 기존의 정치질서에 불만을 품은 최고 권력자의 변혁의지에 힘입어 일거에 중앙에 진출하였다는 점이다.

 

문화혁명 좌파는 모택동의 계속혁명론에 대한 기존 당권파의 저항을 분쇄하는 과정에서 모택동과 강청의 지원으로 중앙에 진출하였으며, 강택민의 상해인맥도 등소평의 개혁, 개방정책에 대한 보수세력의 반발과, 천안문사건을 전후로 하여 호요방과 조자양으로 대표되는 기존 개혁세력의 동요와 이탈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등소평의 정치구도를 대변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모두 기존의 당과 국무원, 그리고 군부의 거대한 관료조직내에 자신들의 고유한 권력기반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다. 특히, 중국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군부내에서 자신들의 지지기반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는 점이 문화혁명 좌파와 강택민의 상해파가 공유하고 있는 결정적인 약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문화혁명 좌파가 몰락한 직접적인 원인도 바로 이와같은 취약점을 보완하지 못했기 때문이란 점을 고려한다면, 강택민, 주용기, 오방국의 상해파의 장래도 등소평이 사망이후 어떻게 될 지 대단히 불투명하다.

 

그러나, 강택민체제는 14차 당대회에서 공식적으로 등소평을 승계한 이후 그의 후원에 힘입어 단계적으로 당-정-군 내부의 지지를 공고히해왔다. 강택민은 우선 군부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89년 당중앙군사위 주석에 임명된 이후 3대 총부 (총참모부, 총정치부, 총후근부) 및 7대 군구 주요 지휘관을 자파 인사로 교체하고 총 29명의 상장중 25명을 직접 임명함으로써 군부내에 지지세력을 구축하고, 군의 처우개선과 장비 현대위한 국방예산을 대폭적으로 증액하였다. 아울러 지난 93년말 이후 군간부의 전문화와 세대교체를 내걸고, 고위군간부들을 대거 교체하면서 군부에 대한 강택민체제의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하였다.

또한 당과 국가기구내에서도 지지기반을 강화하기 위하여 1994년 9월의 14기 4중전회에서 황국(黃菊) 상해시장을 정치국원으로 임명하고, 오방국을 중앙 서기처 서기로 임명하는 등 상해파는 당내의 핵심적 지위를 획득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주용기는 개혁개방 이후 인플레를 억제하기위한 정책을 주도하면서 경제관료를 비롯한 정부내의 지지기반을 확대해 나갔다.

 

따라서 등소평의 사망에도 불구하고 강택민은 정치체제의 안정을 확고히 유지하고 있으며, 오랜 숙원이었던 홍콩반환문제 역시 성공적으로 해결함으로써 중국국민들이 자긍심을 회복하였으며, 국민적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따라서 상해파 중심의 강택민체제는 겉으로는 안정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져온 곳 : 
카페 >내 사랑 중국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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