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중국 정치론]
제6부 제1장 탈사회주의에로의 다양한 길
1. 서론: 체제변혁의 몇가지 이론적 문제
이제 ‘현실 사회주의’의 위기에 대하여 더 이상 의심하는 사람들은 없다.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국가들의 몰락과 중국을 비롯한 기존 사회주의국가들의 변혁과정은 현실 사회주의가 당면한 위기의 심각성을 웅변으로 증명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 탈사회주의의 과정은 비록 현실 사회주의체제의 일반적인 한계와 문제점에서 비롯된 것이기는 하지만, 각국의 역사적 조건과 사정에 따라서 다양다기한 경로와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다양성과 차별성 보다는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과 같은 사회주의의 필연적인 붕괴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로의 체제이행이라는 단선적 사고가 팽배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첫째, 현실 사회주의의 위기는 모든 사회주의국가들이 공통적으로 당면하고 있는 일반위기이며, 둘째, 현실 사회주의국가들이 당면하고 있는 위기는 기본적으로 체제내의 개혁적 방식으로 극복할 수 없는 총체적 위기이고, 셋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기초한 자본주의를 대치할 만한 제 3의 대안이 없으며, 따라서 넷째, 현실 사회주의국가들은 우여곡절의 과정을 거치겠지만 결국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체제에로 이행하게 될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현실 사회주의체제의 필연적 붕괴와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체제에로의 이행론은 어느 정도 사실성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즉, 모든 현실 사회주의체제가 심각한 위기국면에 당면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며, 그것은 기존체제의 근본적인 변혁을 수반하는 총체적 위기라는 점이 소련과 동구의 붕괴로 증명되었고, 중국에서도 등소평의 중국식 사회주의는 고전적인 사회주의체제와는 상당한 정도의 차별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기존의 사회주의체제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현실 사회주의의 대안으로 제시되었던 사회민주주의, 또는 민주사회주의 역시 현실적으로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대치할 만큼의 설득력을 입증하지 못한 상태라는 사실 등이 바로 사회주의 필망론과 자유민주주의에로의 이행론을 정당화시키는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같은 사회주의 필망론과 자유민주주의에로의 이행론에는 결정론적 역사인식에서 파생될 수 있는 단순성과 획일성의 위험이 잠복해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이행이란 개념에는 이미 논리적으로 추론된 출발점과 종착점을 상정하고 있으며, 역사와 사회의 변화과정에 내재된 불확정성의 원리를 배제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이행론에는 어느정도 결정론적인 경향성이 내재하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를 들면, 맑시스트들이 주장하는 자본주의의 필연적 몰락과 사회주의에로의 이행이나, 또는 근대화론자들이 주장하는 전통사회의 해체와 근대사회에로의 이행, 그리고 우리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로의 이행론에는 모두 최종 목표가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결정론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행의 과정에서 우여곡절은 있을 수 있지만, 결국 모든 나라들은 동일한 방향으로, 동일한 목표지점을 향하여 변화한다고 가정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러한 이행론은 흔히 결정론적이고 단선적인 역사인식을 조장하고 있다.
더구나 이행론자들이 설정하고 있는 최종목표와 이행과정에 대한 이론적 가설은 대부분 선행국가들의 구체적 역사경험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이행론은 이들 선행국가들의 특수한 역사적 사례를 일반화하고 있다는 비난까지도 받을 수 있다. 예를 들면, 근대화론에서는 서구의 특수한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추론된 이론을 비서구사회의 변화과정에 적용하면서 근대화와 서구화를 흔히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현실사회주의의 몰락과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로의 이행론도 대부분 소련과 동구의 혁명적 대변혁을 모델로 삼고 있기 때문에 모든 현실 사회주의체제는 동구와 소련과 같이 종국적으로 혁명적 파국의 형태로 탈사회주의의 길을 답습하게 될 것이라고 암묵적으로 가정하고 있다고 하겠다.
즉, 중국이나 북한 사회주의사회의 역사적 특수성과 이행과정의 차별성을 인정하기 보다는 이들도 소련이나 동구와 마찬가지로 궁극적으로 몰락할 것이며, 그것도 혁명적인 단절의 형태로 붕괴할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이들 현실 사회주의국가들은 우여곡절의 과정은 겪겠지만, 결국 서구적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의 확립이란 최종목표를 향하여 변화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이행론, 그것이 근대화론이든, 소비에트화론이든, 또는 탈사회주의론이든 간에, 모든 이행론에 내재하고 있는 암묵적인 이론구조의 문제점에 대하여 좀 더 조심스럽게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즉, 이행론이 함축하고 있듯이 모든 역사적 변화는 출발점이 있고, 최종 도착점이 있으며, 따라서 인류의 역사는 일정한 방향과 경로를 거쳐서 변화하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역사적 변화과정의 도착점으로 설정하고 있는 목표는 과연 어떤 것인가를 검토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적 변화가 일정한 방향성을 내포하고 있고, 일정한 목표지점을 향하여 합목적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가설을 수용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곧 모든 나라들이 동일한 역사적 과정을 거쳐서 동일한 체제에로 귀결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역사가 합목적적으로 변화한다는 가설을 수용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구체적인 사실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인류 역사의 일반적인 경향성을 서술하는 것이란 점을 인식해야 한다.
이를테면, 토크빌( Alexis de Tocqueville)이 프랑스혁명이란 역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민주주의에로의 변혁이 거역할 수 없는 인류역사의 발전 방향이라고 하였을 때, 모든 나라들이 프랑스 혁명의 방식으로, 그리고 프랑스식의 민주주의를 지향할 것이란 의미가 아니라, 자유와 민주주의의 추구는 인간의 보편적인 목표이며, 따라서 역사는 이와 같은 보편적인 인류의 목표를 향하여 여러가지 형태와 다기한 경로를 거쳐서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변화하게 될 것이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사실, 근대의 역사는 장기적인 안목에서 본다면 민주적이고 개방적인 가치와 제도, 그리고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인류의 투쟁의 결과로 끊임없이 진보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으며, 자유와 민주주의의 확대, 그리고 경제적인 번영이란 인류의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현실 사회주의체제의 부적합성이 노출됨에 따라서 체제변혁의 과정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탈사회주의의 이행과정에서 모든 현실 사회주의국가들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확대, 그리고 경제적 번영의 추구라는 일반적인 목표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곧 모든 현실 사회주의국가들이 소련이나 동구에서 처럼 혁명적 붕괴의 방식으로 몰락하게 될 것이며, 그리고 그들이 모두 서구식의 정치제도와 경제체제를 최종적인 목표로 삼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이들은 모두 자유와 민주주의의 확대, 그리고 경제적 번영이란 공통의 목표를 추구하고 있지만, 그와 같은 공통적인 목표에 도달하는 경로와 그것들을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 형태에는 상당한 차별성을 보여 주고 있다고 하겠다.
그러면, 이와 같은 다양성, 차별성을 낳는 요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각각의 현실 사회주의국가들이 당면하고 있는 역사적 상황과 객관적 조건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베링턴 무어(Barrington Moore Jr.)는 근대화과정에서 왜 어떤 나라는 부르조아 민주주의로, 그리고 어떤 나라는 파시즘과 좌파독재의 길로 갔는가를 설명하기 위하여 각국의 계급구조와 정치적 조건의 차별성을 강조하였다. 이와같이 객관적, 구조적 조건의 차별성은 이행의 경로와 이행의 구체적 형태의 차별성을 설명하는데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
그러나 객관적 조건만을 강조한다면, 그것도 역시 역사의 발전과 변화과정에서 인간의 주체적인 역할을 배제한 역사관이기 때문에, 구조결정론적이란 비판을 받을 수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오도넬 (Guillermo O'Donnell)과 슈미터(Philippe C. Schmitter), 그리고 쉐보르스키(Adam Przeworski) 등은 이러한 객관적, 구조적 조건들이 주는 제약속에서도 여전히 ‘불확정성’의 상황에서 행위자들의 ‘전략적 선택’이란 관점에서 구체적인 변혁과정을 설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이행과정의 다양성과 차별성을 설명하는 요인으로는
첫째로, 개별 사회주의국가들의 역사적 환경을 구성하는 객관적, 구조적 조건의 차별성에 주목하고, 둘째로 주관적 요인, 즉, 행위자들의 ‘전략적 선택’이란 측면을 동시에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상의 논의를 다시 정리해 본다면, 첫째, 자유와 민주주의, 그리고 경제적 번영의 추구가 인류의 보편적인 목표라고 할 때, 현실 사회주의체제는 더 이상 이와 같은 인류의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역사발전과의 적합성을 견지할 수 없기 때문에, 변화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불가피한 역사적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체제변화의 요구는 사회주의사회에서만 제기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헌팅턴(Samuel P. Huntington)의 표현을 빌린다면,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는 민주화를 지향하는 ‘제3의 물결 (The Third Wave)’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1980년대에 들어와 과학기술의 비약적인 발전과 더불어 세계경제는 과거와는 다른 차원에서 발전하기 시작하였고, 그에 따라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에도 현저한 변화가 발생하면서, 기존의 권위주의적인 가치체제와 경제 및 사회구조, 그리고 정치제도에 대한 시민사회의 불만과 다양한 욕구가 분출하고 있다. 따라서 거의 모든 사회에서 보다 민주적이고 개방적이며 인간적인 가치와 제도를 모색하는 밑으로 부터의 시민운동과 위로부터의 개혁운동이 갖가지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획일적이고 경직된 가치와 제도를 견지하고 있는 권위주의적 사회, 예를 들면, 스탈린주의적 현실 사회주의체제와 개발독재형의 권위주의 국가에서는 다원적인 사회에서보다 더 심각하고, 폭발적인 양상으로 변혁운동이 표출되고 있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이처럼 범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민주화를 지향하는 제3의 물결로 말미암아 거의 모든 현실 사회주의국가들은 어떤 형태로든 과거와 같은 체제를 더 이상 효과적으로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 졌지만, 이와 같은 체제위기의 심각성이 모든 현실 사회주의국가들에게 있어서 동일한 것은 아니다. 또한 개별 사회주의국가들의 역사적 환경과 조건에 따라서 체제위기에 대응하는 양식, 즉 탈사회주의에로의 이행양식은 각기 다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탈 사회주의의 과정이 급진적이고 단절적인 체제의 붕괴 형태로 진행될 수도 있고, 또는 비교적 오랜 시간을 끌면서 점진적이면서도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위로부터의 변혁이란 형태로 진행될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는 단순하게 사회주의체제의 종국적인 종말을 주장하기 보다는, 이행의 다양한 경로와 형태를 규명할 필요가 있으며, 또한 현실 사회주의가 점진적으로 체제변혁에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안되겠다.
셋째, 비록 보편적인 시대적 요구와 현실 사회주의국가들의 객관적인 조건들이 체제이행의 양식을 거의 규정한다고 하더라도, 구체적인 이행의 과정과 결과를 결정하는 것은 역시 중요한 정치적 행위자들의 ‘전략적 선택’이란 점을 간과할 수 없다. 따라서 개별국가들의 정치체제의 성격을 분석하고, 정치사회에 등장한 행위자들의 선택의 범위와 정치적 결정을 분석하지 않으면 안된다. 여기서 우리는 이론적으로 동일한 객관적인 조건에서도 행위자들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이행의 과정이 상이할 수 있다는 가정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2. 현실 사회주의체제의 특징과 다양한 이행의 유형
1987년 현재 현실 사회주의국가로 분류할 수 있는 나라들은 지구상에 모두 26개국에 달하였고, 이들은 전체 인구의 34.4%를 점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1993년도에 현실 사회주의국가로 분류할 수 있는 나라들은 중국, 베트남, 북한, 쿠바 등으로 급속하게 축소되었다.
이와같이 20세기 초반에는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대치할 수 있는 새로운 문명으로까지 인식되었던 현실 사회주의가 1980년대에 들어와 급속하게 쇠락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 대한 논쟁은 다양한 차원에서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 논쟁에서 공통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것은 현실 사회주의국가들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 이를테면 장기적인 경제침체라든가 민주주의의 결여와 관료주의,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인 정통성의 상실 등은 개별 국가들의 정책적 실패에서 유래하는 국부적, 일시적 위기라기 보다는 현실 사회주의체제의 핵심적 특징으로부터 연유하는 것이며, 따라서 모든 현실 사회주의국가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될 수 있는 체제적 위기이다. 그렇다면, 개별 사회주의국가들의 경제발전의 정도, 사회문화적 전통, 그리고 정치적 상황이 상당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이와같이 공통적인 체제적 위기의 증후군을 산출하게 하는 현실 사회주의체제의 핵심적 특징은 무엇인가?
현실 사회주의국가의 체제적 특징과 공통점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이를테면, 전체주의론의 견지에서 프리드리히(Friedrich)와 브레진스키(Brzezinski)는 현실 사회주의국가의 ‘이상형’을 6개의 특징으로 정의하였다. 즉, 공식적인 이데올로기, 단일한 대중정당, 테러에 입각한 통치체제, 대중매체의 독점, 무력의 독점, 그리고 중앙집권적인 지령성 경제체제 등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같은 전체주의적 체제의 이상형은 스탈린체제의 특징을 극단적으로 확대 해석한 측면이 있지만, 대부분의 현실 사회주의국가들이 단일한 공식 이데올로기, 공산당의 영도권을 보장하는 당국가체제, 그리고 공유제의 원칙에 입각한 계획경제를 표방하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사실, 소련이나 중국의 지도자들도 현실 사회주의국가들의 이와 같은 공통적인 특징을 강조하고 있다. 이를테면, 소련 공산당의 이데올로기 담당의 정치국원이었던 수스로프 (Suslov)는 1956년의 헝거리혁명과 관련하여 모든 사회주의국가는 다음과 같은 4가지 원칙을 견지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가 있다. 즉, 노동자계급의 전위대인 공산당의 지배, 노동자와 농민의 연합에 기초한 국가체제, 자본주의적 소유제의 철폐와 공유제및 계획경제의 실시, 사회주의 세계혁명의 수호 등이 바로 사회주의국가와 비사회주의국가를 구별하는 중요한 기준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등소평도 1979년에 중국의 개혁정치가 반드시 견지해야 할 이른바 4항 기본원칙을 강조한 바가 있다. 즉, 등소평은 개혁과 개방정치는 사회주의체제의 포기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중국적 사회주의는 반드시 사회주의의 길, 무산계급의 독재, 공산당의 영도, 마르크스-레닌주의 및 모택동사상을 견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현실 사회주의국가들의 공통적인 특징에 대해서는 관점에 따라서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고 있지만, 대체로 현실 사회주의국가들의 원형, 또는 이상형은 다음과 같은 4가지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첫째, 현실 사회주의국가들은 모두 마르크스-레닌주의, 또는 그것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는 사상을 공식적인 당과 국가의 지도이념으로 삼고 있다.
둘째, 당의 영도권이 이념적인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정치적, 제도적인 차원에서도 보장되어 있는 당국가체제를 견지하고 있다.
셋째,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의 현실 사회주의국가에서는 공유제의 원칙하에서 사적 소유와 사적 경제활동이 제약을 받고 있으며, 기본적으로 통제경제의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넷째, 프롤레타리아트 국제주의를 표방하면서, 기본적으로 양대진영론적 세계관에 입각한 국제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물론 모든 현실 사회주의국가들이 이와같은 4가지 특징을 모두 공유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 상황과 현실적 조건에 따라서 현실 사회주의체제는 앞의 4가지 특징을 어느 정도 수정 보완하는 다양한 형태의 사회주의체제를 발전시켜 왔다. 예를 들면, 현실 사회주의체제에는 앞에서 말한 4가지 특징을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견지하고 있는 고전적인 스탈린주의와 그것의 변형이라고 할 수 있는 모택동의 중국적 사회주의와 김일성의 ‘우리식 사회주의’가 있는가 하면, 브레즈네프 시대의 소련체제와 같이 이완된 형태의 스탈린주의도 있으며, 또한 고르바초프 시대의 소련과 등소평의 중국, 그리고 유고슬라비아와 헝가리 등에서 시도되었던 개혁사회주의도 있다.
그렇다면 고전적 스탈린주의, 이완된 스탈린주의, 그리고 개혁 사회주의체제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특히, 개혁 사회주의는 다른 두가지 형태의 현실사회주의와 무엇이 다른가. 고전적 스탈린주의와 이완된 스탈린주의 체제는 앞에서 말한 4가지의 특징을 모두 공유하면서도 그와같은 특징을 강조하는 정도와 표현양태의 차이에서 구별될 수 있지만, 개혁 사회주의는 이들 4가지 특징중에서 일부를 포기하거나 그 내용에 대하여 심각하고도 의미있는 변화를 시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유고슬라비아의 노동자 자주관리제도, 헝거리의 시장사회주의, 그리고 고르바초프와 등소평에 의하여 추진된 개혁 사회주의는 양대진영론적인 세계관과 계급투쟁론을 포기하였고, 공유제의 원칙을 견지하면서도 실질적으로 사적 소유와 시장경제를 활성화함으로써 다양한 소유형태를 발전시키려고 하였으며, 노동자들과 대중들의 정치참여의 폭을 확대할 수 있는 제도적 개혁을 시도함으로써, 고전적인 사회주의 체제와 중대한 차별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 사회주의국가들을 현실 사회주의의 범주안에 포함시키고 있는 이유는 현실 사회주의체제의 핵심적 내용을 구성하는 이데올로기와 정치 및 경제구조의 특징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개혁 사회주의체제에서도 여전히 마르크스-레닌주의, 또는 그것의 변형된 사상을 공식적인 이데올로기로 삼고 있으며, 당의 지도적 역할을 인정하고, 공유제의 원칙이 여전히 견지되고 있기 때문에 개혁 사회주의도 현실 사회주의체제의 범주에 속한다.
현실 사회주의체제의 변화과정은 고전적 스탈린주의에서 출발하여 이완된 스탈린주의와 개혁사회주의, 그리고 탈사회주의의 단계를 거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탈사회주의 과정은 현실 사회주의의 핵심적 내용, 즉 공식적 이데올로기, 당의 지도적 역활, 그리고 공유제의 경제구조를 포기하는 단계를 뜻한다고 하겠다.
그러나 모든 현실 사회주의국가들이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고전적 스탈린주의 - 이완된 스탈린주의 - 개혁사회주의 - 탈사회주의의 단계를 차례로 밟아 변화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동구 사회주의국가들 가운데에서도 헝거리와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와 같은 나라들은 고전적 스탈린주의체제 - 개혁 사회주의 - 탈사회주의의 단계를 거쳐 체제변혁이 진행되었지만, 동독이나 루마니아의 경우는 고전적 스탈린주의체제를 견지하다가 현실 사회주의체제가 붕괴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모든 현실 사회주의체제가 다 붕괴되고, 모든 개혁 사회주의가 실패로 끝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현실 사회주의체제가 존속하고 있는 나라들이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경우는 스탈린주의의 변형된 형태인 모택동의 중국적 사회주의가 등소평의 등장과 더불어 개혁사회주의체제로 전환되었고, 등소평의 개혁 사회주의는 소련이나 동구의 그것에 비교하면 상당한 생존력과 적응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한편, 북한의 경우는 현재까지 고전적인 사회주의체제의 특징을 그대로 견지하고 있다.
이와같이 현실 사회주의체제에도 여러가지 유형이 있으며, 이들의 체제변화도 좀 더 세밀하게 관찰한다면, 체제변혁의 과정에서 다양한 차별성이 발견된다.
특히, 동구 사회주의국가들의 체제변혁과정이 보여주는 이중적인 특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모든 동구 사회주의국가들은 개별국가들의 역사적 정치적 조건과 상황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1989년에서 1990년 사이에 거의 일시에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라는 혁명적인 이행과정에 돌입하였다는 공통성을 보여주고 있는데 , 이것은 동구 사회주의체제가 소련에 의하여 외삽된 것이었으며, 소련에 의하여 단일한 소비에트 블록을 형성했던 공통적인 역사적 조건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이런 점에서 동구 사회주의권의 붕괴를 단일한 형태의 이행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구 사회주의국가들의 체제변화 과정을 좀 더 면밀하게 검토한다면, 개별국가들의 차별성에서 비롯되는 이행과정의 다양성을 또한 발견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동구와 소련의 사회주의체제는 결국 모두 붕괴하였지만, 체제붕괴와 이행과정에서 집권 엘리트들과 반대세력들간의 상호관계를 중심으로 분류해 본다면, 다음과 같은 3가지 유형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위로부터의 급진적인 개혁으로 체제변혁이 실현되는 유형이 있다. 이런 유형의 특징은 집권엘리트 내부에서 개혁적인 세력이 등장하여 현실 사회주의체제의 개혁과 개방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체제의 구조적 위기에 대한 대응전략과 관련하여 급진적인 개혁파와 보수파의 갈등이 심화되고, 시민사회의 압력이 가중되면서, 마침내 급진 개혁파들의 주도하에 현실 사회주의체제의 핵심적 내용을 포기하게 됨으로써, 탈사회주의에로 평화적 이행이 실현되는 것이다. 소련이나 헝거리, 그리고 불가리아가 이런 경우에 해당된다.
둘째, 현실 사회주의체제의 핵심적인 내용을 고수하려는 권력 엘리트와 조직화된 반체제세력들간의 첨예한 대립과 갈등이 반복되다가, 이 두 세력간의 타협과 협상을 통하여 평화적인 방식으로 반체제세력들의 주도하에 체제변혁이 수행되는 경우가 있다.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 등이 이런 경우에 해당된다.
셋째, 기존의 현실 사회주의체제를 완강하게 고수하다가 아래로부터의 저항으로 현실 사회주의체제가 급진적으로 붕괴되는 경우가 있다. 동독과 루마니아, 그리고 알바니아등에서 집권세력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현실 사회주의체제를 수호하려고 했지만, 밑으로부터의 저항으로 급진적이고 심지어 폭력적으로 현실 사회주의체제가 붕괴되었다.
이와같이 현실 사회주의체제는 체제적 위기상황에 직면하여 다양한 형태로 체제변화와 적응을 모색하고 있다. 그것을 현재의 싯점에서 간략하게 도표화해 본다면, 다음과 같다.
현실 사회주의체제의 위기
사회주의체제의 붕괴 사회주의체제의 견지
(1)유형 (2)유형 (3)유형 중국유형 북한유형
소련 폴란드 동독
헝거리 체코 루마니아
불가리아 몽고 알바니아
3. 역사적 적합성의 위기와 이행의 다양성
앞에서 현실 사회주의체제가 당면한 위기는 기본적으로 체제적 위기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현실 사회주의체제의 변화는 불가피한 역사적 현상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러나 현실 사회주의체제의 변화가 장기적인 차원에서 볼 때 불가피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곧 모든 사회주의국가들이 동일한 경로와 동일한 형태로 탈사회주의의 이행과정을 밟아 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 사회주의체제가 당면한 공통적인 체제적 위기에 대하여 다양한 변화와 대응양식이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런 문제에 접근하기위해서 먼저 현실 사회주의체제가 당면한 체제적 위기의 성격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흔히 현실 사회주의체제의 위기 증후군으로 공식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믿음의 상실, 당국가체제의 비민주성과 관료주의에서 비롯되는 정치적 대표성과 정통성의 위기, 그리고 장기적 경제침체로 부터 파생되는 대중들의 불만등이 집중적으로 거론되고 있다. 이와같이 다양한 일반적 위기의 증후군 중에서도 특히 장기적 경제침체와 그에 따른 대중들의 누적된 불만들은 현실 사회주의사회의 허구성, 억압성, 폐쇄성을 더이상 은폐할 수 없게 함으로써, 혁명적인 변혁운동을 촉발하게 한 가장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동인을 제공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련과 동구의 현실 사회주의체제가 대담한 개혁, 개방정책을 추진하게 된 배경에도 이러한 경제위기가 대단히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고, 또한 소련과 동구의 개혁사회주의가 실패한 이유도 개혁, 개방정책에도 불구하고 고질적인 경제적 침체상태가 계속되어 대중들의 불만이 심화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같이 현실 사회주의체제의 장기적인 경제침제와 정통성의 위기의 근원은 무엇인가. 대체로 서구학자들은 앞에서 지적한 현실 사회주의의 핵심적 내용, 즉, 공식적인 이데올로기, 공산당의 영도와 당국가체제, 그리고 공유제에 입각한 통제경제체제의 경직성, 획일성, 비민주성등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특히, 현실 사회주의체제의 장기적 경제침체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는 계획경제와 관료주의적 관리체제의 비효율성은 경제개혁만으로는 극복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현실 사회주의체제에서 이데올로기-정치-경제는 상호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고 경제의 비효율성을 낳는 근원은 궁극적으로 현실 사회주의체제의 정치구조와 이데올로기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사회주의체제의 근본적인 변화를 모색하지 않고서는 장기적인 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 전체주의론자들에 의하면, 현실 사회주의체제는 본질적으로 억압적이고 획일적인 체제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고 다양한 시민사회의 발전을 저해함으로써 체제의 비효율성의 문제뿐만 아니라 정통성의 위기도 시간이 지날수록 심화, 확대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요컨데 사회주의체제를 포기하지 않고서는 경제적 위기는 물론이거니와,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정통성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현재의 싯점에서 보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현 단계에서 현실 사회주의체제의 경제적 비효율성과 관료주의, 그리고 비민주성이 너무나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사회주의체제의 효율성과 정통성을 근원적으로 부정하는 이러한 논리에는 약간의 문제점이 있다고 하겠다. 즉, 만일 현실 사회주의체제가 처음부터 인간사회의 자연스러운 발전을 억압하는 기제로 작동하였다면, 소련이나 중국의 현실 사회주의체제의 형성과 발전단계에서 보여 준 비교적 자발적인 대중적 지지와, 현실 사회주의체제가 이룩한 업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제기된다. 물론, 보수적인 서구학자들은 현실 사회주의체제가 광범위한 대중들의 자발적인 지지를 확보한 적이 없었으며, 그들의 업적이란 것도 대부분 과장된 것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이와 같은 문제 제기를 원천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소련이나 중국, 그리고 심지어 북한의 현실 사회주의체제까지도 역사의 일정한 시기에 어느 정도 대중적 지지를 확보했던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소련의 볼세비키혁명의 성공과 중국혁명의 승리는 상당한 정도의 대중적 지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의 경우도, 소련이나 중국, 그리고 다른 자생적 사회주의 정권과는 달리, 소련군의 지원에 힘입어 사회주의정권이 수립되었다는 점에서 동구의 사회주의정권과 마찬가지로 외삽적이며, 의존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고 출발했지만, 몇가지 계기와 혁명적인 정책수행에 성공함으로써, 북한정권의 대중적 정통성을 획득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북한정권은 정권 초기단계에 과감한 토지개혁정책을 집행하고, 각종 민주적 개혁을 단행함으로써 대중들의 지지를 획득하였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분단과 냉전적 분위기에서 강렬한 민족주의적 경향성을 강조함으로써, 북한 사회주주의체제에 대한 정통성을 강화하려고 했다.
이처럼 소련이나 중국, 그리고 일부 국가에서 현실 사회주의체제는 처음부터 강요되었다기 보다는 어느 정도의 암묵적인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이들 나라에서 현실 사회주의체제는 민족국가 건설과 경제발전이란 차원에서 어느 정도 업적도 이룩했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경제적인 차원에서 현실 사회주의체제는 비록 대중동원의 방식에 의존하기는 했지만, 급진적인 산업화와 공업화를 추진함으로써, 일정 기간 대단히 비약적인 경제성장과 경제발전을 이룩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사실, 소련이나 북한은 1960년대초까지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을 기록하였고, 중국도 대약진운동 이전까지는 대단히 빠른 속도의 공업발전을 성취하였다. 따라서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소련이나 중국, 그리고 북한의 경제성장과 발전속도는 다른 비사회주의국가들보다 뒤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급진적인 산업화를 지향하는 제 3세계 국가들에게 소련이나 중국의 경제발전 전략과 경험은 모델이 되었다.
그러나 이처럼 초기단계에서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을 이룩했던 소련과 중국, 그리고 북한의 사회주의경제는 1970년대에 발전의 동력을 상실하고, 장기적인 침체국면으로 접어들었고, 그것은 마침내 1980년에 들어와 체제위기로까지 심화되었다. 이와같은 사실은 아래에서 제시한 사회주의국가들의 GNP 성장률에 관한 도표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아래의 도표는 사회주의국가들의 경제성장 추이를 시기별로 보여주기 위하여 개별 사회주의국가들이 공식적으로 발표한 순물질생산(Net Material Product)와 서구 학자들에 의하여 계산된 GNP의 성장율을 동시에 제시하였다.
소련, 동구및 중국의 경제성장 추이 (1961-1989)
시기 1961-70 1971-80 1981-85 1986 1987 1988 1989
소 련 NMP 6.9 5.0 3.2 2.3 1.6 4.4 2.4 GNP 4.9 2.6 1.9 4.0 1.3 1.5 --
불가리아 NMP 7.7 7.0 3.7 5.3 4.7 2.4 -2.0 GNP 5.8 2.8 0.8 4.9 -0.9 2.0 --
체 코 NMP 4.4 4.7 1.8 1.8 2.7 2.6 1.2 GNP 2.9 2.8 1.2 2.1 1.0 1.4 --
동 독 NMP 4.3 4.8 4.5 4.3 3.6 2.8 2.0 GNP 3.1 2.8 1.9 2.2 1.1 1.1 --
헝거리 NMP 5.4 4.6 1.2 0.9 4.1 -0.5 -1.6 GNP 3.4 2.6 0.7 2.2 1.1 1.1 --
폴란드 NMP 8.4 5.4 -0.8 5.2 2.0 4.8 0.1 GNP 4.2 3.6 0.6 2.7 -1.7 2.1 --
루마니아 NMP 8.4 9.4 3.0 3.0 0.7 -2.0 -7.9 GNP 5.2 5.3 -0.1 2.9 -0.9 -1.5 --
중 국 NMP 4.0 5.8 10.0 7.7 10.2 11.1 3.5 GNP -- 5.8 9.2 7.8 9.4 11.2 --
출처: Janos Kornai, The Socialist System: The Political Economy of
Communism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2), pp.194-195
위의 도표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현실 사회주의국가들이 처음부터 경제적으로 침체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1950년대와 1960년대의 통계를 살펴 보면, 소련이나 동구 사회주의국가들의 경제성장률은 자본주의국가들에 비하여 낮은 것이 아니었고, 제 3세계국가들과 비교하면 사회주의국가들의 경제성장을 대단히 괄목한 것이었다. 그런데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왜 현실 사회주의국가들의 경제성장율이 급격하게 둔화되기 시작했는가.
이런 질문에 대하여 일부 학자들은 외연적 경제발전 단계에서 대중동원 방식의 경제발전전략과 계획경제체제가 효과적이지만, 과학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내연적 경제발전을 추구해야 하는 단계에서는 비효율적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경제발전의 심화와 성숙단계에서 사회주의 경제체제는 오히려 생산력의 발전에 족쇄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간베기얀과 같은 소련의 경제학자도 1966년에서 1970년사이에 소련의 국민소득 성장률은 41%이었지만, 1981년에서 1985년 사이에는 16.5%로 하락하였다고 지적하면서, 이같은 경제적 침체 현상을 극복하기 위하여 경제적 페레스트로이카가 필요하며, 경제발전전략도 내연적 경제발전전략으로 전환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같이 경제적인 측면만 보더라도 현실 사회주의체제가 처음부터 억압적이고 비효율적인 체제였다기 보다는 1970년대 이후의 싯점에 이르러 현실 사회주의체제의 체제적 한계와 문제점이 들어나기 시작하였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현실 사회주의체제의 ‘역사적 적합성’의 문제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역사적 적합성’이란, 모든 체제의 형성과 발전은 일정한 정도로 역사적 환경의 제약을 받는다는 전제에서 출발하여, 상부구조로서의 체제의 특징과, 그것의 토대에 해당되는 역사적 환경과의 적합성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역사적 환경과 체제와의 적합성이 유지되면, 체제의 안정성과 진보성이 담보되지만, 반대로 체제와 역사적 환경 사이에 심각한 괴리가 발생할 때, 체제의 불안정성과 반동성이 노출된다. 물론, 체제와 역사적 환경 사이에는 끊임없는 상호작용이 있고, 그 결과 상부구조인 체제가 역사적 환경의 변화와 발전을 선도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역사적 환경의 변화와 발전에 족쇄로 작용하기도 한다는 것이며, 동시에 변화된 역사적 환경에 체제가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에 체제의 변혁과 붕괴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20세기 후반의 시점에서 현실 사회주의체제가 당면한 위기는 바로 이와 같은 체제의 역사적 적합성의 위기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20세기 초엽의 소련이나 중국에서 현실 사회주의체제는 당대의 소련이나 중국 사회의 역사적 환경과 상당한 정도로 그 적합성을 유지할 수 있었고, 그것은 당시의 사회적 발전과 진보를 담지하는 것이었지만,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역사적 환경에 대하여 현실 사회주의체제가 제대로 적응하지 못함으로써, 현실 사회주의체제는 역사적 변화의 족쇄로 작용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사회주의체제의 근본적인 변혁에 직면하게 되었다.
물론, 이와 같은 체제와 역사적 환경의 변증법적인 상호관계에 대한 가설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왜 자본주의체제는 끊임없는 역사적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면서 발전할 수 있는데 비하여 현실 사회주의체제는 그렇지 못한가라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20세기 후반이라는 특정한 역사적 환경에서 다원적인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체제에 비하여 집중성, 통일성, 획일성의 특징을 지닌 현실 사회주의체제의 적응력이 뒤떨어진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현실 사회주의체제, 특히 고전적인 스탈린주의체제는 냉전적 상황에서 급진적인 산업화와 근대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에, 체제의 이데올로기, 정치 및 경제구조는 상당한 정도의 구조적 집중성과 통일성, 그리고 획일성을 강조하게 되었다. 이러한 체제적 성격과 특징은 산업화와 근대화의 초기단계에서는 효율적으로 작동하였지만, 산업화와 근대화의 후기 단계에서는 심각한 역사적 적합성의 위기를 산출하게 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근대화와 산업화의 초기 단계에서의 성공이 오히려 오늘날 현실 사회주의의 위기의 근원이 되고 있다고 하겠다. 다시 말해서 급진적인 산업화와 근대화로 말미암아 시민사회적 성격이 강화되면서 기존의 권위주의적인 체제는 더 이상 효율적이고 정통적인 체제로 작동할 수 없게 되었다.
이처럼 현실 사회주의체제는 산업화와 근대화의 성공으로 말미암아 시민사회적 요구가 확대, 다원화되고 있는 역사적 환경에서 기존 체제의 부적합성이 더욱 노정됨으로써, 심각한 체제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지만, 모든 현실 사회주의체제가 다 같은 정도의 체제적 위기상황을 경험한다고 할 수는 없다. 개별 사회주의국가들의 역사적 환경이 다르며 개별 사회주의체제의 적응력도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이와같은 맥락에서 천안문사건 직후에 중국공산당의 신임 당총서기로 선임된 강택민은 중국에서 동구와 같이 사회주의체제가 붕괴하는 사태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강택민에 의하면, 중국공산당은 오랜 혁명과정을 거치는 동안에 인민대중들과 혈육의 관계를 형성, 유지해 왔으며, 중국의 군대는 시종일관 당의 절대적 지도하에 있었으며, 중국의 문화전통과 역사, 그리고 지리적 조건들도 동구와는 전혀 다르기 때문에 중국에서 동구식의 변혁을 기대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었다.
물론, 강택민의 주장을 전적으로 수용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중국과 북한, 그리고 베트남과 같은 아시아 사회주의국가들에 있어서 현실 사회주의체제의 역사적 적합성의 위기는 동구와 소련에서 보다 덜 심각하기 때문에 그만큼 현실 사회주의체제의 적응의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와같이 지역적, 개별 국가적 차원에서 체제변혁의 다양성을 산출하게 하는 역사적 적합성의 위기의 정도는 어떻게 측정할 수 있는가.
이런 문제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그 타당성을 입증할 수 있는 기준이나 측정방법을 제시할 수 없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두 가지 차원에서 체제의 적합성 정도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즉, 현실 사회주의체제의 역사적 환경을 구성하는 것으로는 개별 사회의 경제발전의 정도, 시민사회적 전통, 그리고 대외 개방도와 의존도 등이라고 할 때, 이러한 지표를 분석함으로써, 역사적 적합성의 위기를 어느 정도 측정할 수 있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체제의 적응력과 생존력을 가름하기 위해서는 자생적 혁명전통, 개혁정치의 역사, 그리고 정치적 리더쉽의 역할 등을 고려할 수 있다.
이와같은 관점에서 소련과 동구가 아시아의 사회주의국가들 보다도 더욱 심각한 체제적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는 이유로는 소련이나 동구의 사회주의국가들이 아시아의 사회주의국가들보다도 산업화와 근대화에 있어서나, 시민사회적 전통의 측면에서, 그리고 서구와의 연계성등에 있어서 모두 앞서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사실, 동구 사회주의국가들의 경우에서도 알바이나와 루마니아와 같이, 다른 동구 사회주의국가들보다 경제발전의 정도가 낙후한 나라에서 훨씬 더 현실 사회주의체제의 강고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경제발전과 근대화의 정도만이 다양한 탈사회주의의 경로에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다. 문화적 전통에서도 헝가리와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와 같이 기독교적 전통을 배경으로 가지고 있는 나라와, 비잔틴문화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나라들과의 차별성이 나타나고 있다. 일반적으로 비잔틴문화의 전통이 남아 있는 발칸지역에서는 정치와 종교의 결합에 바탕을 둔 중앙집권적인 권위주의적 통치문화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현실 사회주의체제에 대하여 비교적 쉽게 순응하고 있지만, 기독교적 문화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는 사회에서는 국가로부터 자율적인 교회의 존재, 사적 소유에 대한 강한 전통 등으로 말미암아 현실 사회주의체제의 역사적 적합성의 위기가 더욱 심화되고 있었다.
이처럼 경제발전의 정도와 시민사회적 전통, 그리고 외부세계에 대한 개방도등으로 현실 사회주의체제가 당면한 역사적 적합성의 위기의 심각성을 간접적으로 측정할 수 있지만, 동시에 개별 사회주의국가들의 생존력과 적응력에 따라서 다양한 위기의 대응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즉, 자생적 혁명전통을 가지고 있거나 또는 개혁전통이 있는 사회주의체제의 이행과정은 기존의 권력엘리트들 중에서 개혁적인 엘리트들이 등장하여 체제이행을 주도하는 경향이 있으며, 대체로 탈사회주의 이후에도 현실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세력이 비교적 강력한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하겠다. 앞에서 지적한 소련이나 헝거리, 그리고 불가리아는 모두 위로부터의 개혁을 통하여 체제변혁이 진행되었고, 탈사회주의과정에서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세력이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는 처음부터 현실 사회주의체제를 지양하려는 의도에서 시작된 개혁은 아니었다. 오히려 사회주의 강화론의 입장에서 현실 사회주의가 안고 있는 역사적 적합성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의욕적인 목표를 가지고 출발하였다. 이런 점에서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는 후루시초프 이후 간헐적으로 전개되었던 개혁정치의 전통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라고 하겠다.
그러나 페레스트로이카가 진행되면서 현실 사회주의가 안고 있는 위기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이 새롭게 제기되면서 권력엘리트 내부에서 개혁파와 보수파의 분열과 대립이 심화되었다. 여기에 페레스트로이카를 계기로 분출된 시민사회적 압력이 작용하여 급진개혁파와 보수파의 대립은 더욱 첨예화하였고, 마침내 1991년 8월 보수파의 쿠데타가 좌절되면서, 급진 개혁파와 보수파간의 세력균형을 모색하던 고르바초프의 개혁정치와 소련의 개혁사회주의는 붕괴되었다.
동구권 국가들 중에서 비교적 일찍부터 변혁과정에 돌입한 헝거리도 공산당 내부에서 개혁에 대한 논쟁이 재연되고, 포괄적인 개혁정치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체제가 붕괴되었다는 점에서 소련과 비슷한 이행의 경로를 통하여 탈사회주의에로 전환되었다. 헝가리는 1956년 혁명이 소련군의 무력개입으로 좌절되고, 임레 나지(Imre Nagy)정권이 붕괴된 이후 소련의 지지를 받은 카다르(Janos Kadar)정권이 등장하지만, 카다르 정권도 비교적 진보적인 개혁정치를 지속적으로 추구하였다. 특히 1963년경부터 헝가리는 시장사회주의라는 실험을 계속하고 서구와의 관계도 확대하면서 다른 동구 국가들 보다 훨씬 유연한 현실 사회주의체제를 발전시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와 소련의 압력으로 헝가리의 제한적인 개혁에 제동이 걸리고, 헝거리의 경제가 악화되면서 당내외에서 카다르 정권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와같은 당내외의 비판적 분위기에서 1988년에 카다르가 퇴진하고 당내 개혁연합세력을 대표하는 그로스(K. Gross) 서기장이 등장하면서 고르바초프의 묵시적인 동의를 바탕으로 포괄적인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위로부터의 개혁은 소련에서처럼 아래로부터의 급진적 개혁요구를 분출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였고, 이에 대하여 집권엘리트들 내부의 분열이 심화되면서 헝거리는 마침내 1989년에 복수정당과 자유선거를 통하여 탈사회주의의 길로 가게 되었다.
불가리아에서도 소련과 동구권의 변혁운동의 와중에서 1989년 11월에 개혁에 반대하던 지브코프 (Todor Zhivkov)가 축출되면서 개혁파의 주도하에 탈사회주의에로의 이행을 단행하였다. 불가리아 공산당은 당명을 사회당으로 개명하고 복수정당제를 인정하면서, 1990년 6월에 국민회의 선거를 실시하였다. 불가리아 사회당은 이 선거에서 47% 이상을 득표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집권당으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것 처럼 보였다. 그러나 1990년 6월 선거 이후 야당과 학생들을 비롯한 반정부세력의 공세가 강화되면서 불가리아 사회당의 대통령이 퇴임하고, 1991년 10월에 실시된 총선거에서 민주세력연합에 패배함으로써, 불가리아 사회주의체제는 종식되었다.
이와같이 소련과 헝거리, 그리고 불가리아에서는 조직적인 반대세력이 개혁과 체제이행을 주도했다기 보다는 공산당 내부로부터 개혁세력들이 등장하여 현실 사회주의체제의 변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위로부터의 개혁과정에서 권력 엘리트들 내부에서 급진 개혁파와 보수파의 대립과 갈등이 확대되고, 그동안 잠복되었던 시민사회의 압력이 분출하면서, 체제위기가 심화되자 복수정당제도와 자유 선거를 도입, 탈사회주의에로의 평화적인 이행을 실현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소련, 헝거리, 불가리아에서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하게 된 배경에는 집권 엘리트들 내부의 갈등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 정치적 리더쉽의 문제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하겠다.
이에 비하여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그리고 몽고에서는 현실 사회주의체제를 수호하려는 권력엘리트들과 조직적인 반대세력이 날카롭게 대립하다가 체제옹호세력과 반체제세력간의 타협과 협상을 통하여 자유선거와 복수정당제도를 수용하고, 반체제세력의 주도하에 평화적인 체제이행이 실현되었다.
폴란드의 개혁운동은 연대노조운동(Solidarity)의 등장과 더불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따라서 1980년대의 폴란드의 개혁정치는 대폭적인 체제개혁을 요구하는 연대노조운동과 현실 사회주의체제를 옹호하려는 야루젤스키 정권간의 대결과 타협으로 점철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야루젤스키 정권은 연대노조의 도전에 대하여 때로는 타협적이고 유화적인 정책으로, 때로는 계엄령의 선포 등 강경한 탄압정책으로 맞섰으나 1988년에 대규모 노동자 파업에 직면하여 마침내 연대노조운동을 합법화하고 자유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약속함으로써, 점진적으로 탈사회주의에로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경우도 1968년의 ‘프라하의 봄’이라고 일컫는 개혁운동이 바르샤바조약 5개국의 무력개입으로 좌절된 이후, 체코 공산당 정권은 밑으로부터의 개혁운동에 대하여 강경한 입장을 견지하였다. 따라서 1987년에 체코슬로바키아를 방문한 고르바초프가 조심스럽게 변화의 필요성을 역설하였지만, 체코슬로바키아의 집권세력들은 여전히 개혁에 대하여 반대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꾸준히 성장한 밑으로부터의 개혁운동은 마침내 1989년에 대규모 군중시위로 폭발하였고, 체코 공산당은 밑으로부터의 압력에 굴복하여 연방의회선거에 동의함으로써 역시 평화적인 탈사회주의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렇다면 왜 소련을 비롯하여 헝거리, 불가리아는 위로부터의 개혁을 계기로 체제변혁이 실현되었고,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 등은 밑으로부터의 조직적인 반대세력들이 체제변혁을 주도하게 되었는가. 이와 같은 차별성은 이들 나라들의 현실 사회주의체제의 자생력과 적응력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소련이나 불가리아에서 공산주의운동의 뿌리는 상당히 깊고, 따라서 사회 저변에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면, 헝거리의 경우는 카다르 정권 이후 온건한 개혁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면서 시민사회와의 공존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헝거리의 사회주의체제는 다른 동구권의 사회주의체제보다 유연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와 같은 공산당의 자생력과 적응력이 위로부터의 개혁과 평화적 체제이행을 가능하게 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의 현실 사회주의체제는 오랫동안 시민사회와의 공존을 실현하지 못하고, 체체옹호세력과 반체제적 시민사회와의 대립이 지속되다가 결국 집권세력이 밑으로부터 성장한 조직적인 반대세력의 압력에 굴복함으로써, 체제변혁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하겠다.
이런 점에서 체코슬로바키아와 동독은 유사하다고 하겠다. 즉, 동독과 체코슬로바키아는 모두 동구 사회주의국가 중에서도 상당히 경제발전과 산업화를 이룩했으면서도,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현실 사회주의를 견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특히, 동독의 호네커 정권은 분단상황이란 특수성을 강조하면서 사회주의권의 대변혁에 대하여 대단히 경계하였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개혁에 대하여 비타협적인 자세를 견지하였다. 만일 동독이 분단국가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체코슬로바키아와 마찬가지로 시민사회에 바탕을 둔 조직적인 반대세력에 의하여 탈사회주의에로 이행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루마니아와 알바니아의 경우도 사회주의체제가 밑으로부터의 저항운동에 의하여 붕괴된 경우인데, 특히, 루마니아에서는 폭력적인 방식으로 사회주의체제가 붕괴된 것이 특징이다. 알바니아와 루마니아는 비잔틴문화의 전통에 영향을 받아 가부장적 정치체제를 견지하였고, 서방세계에 대해서는 물론이거니와 소련에 대해서도 상당히 독자적인 입장을 고수함으로써, 동구식 주체형 공산당 지배를 견지하였다. 따라서 다른 동구 사회주의국가들보다 훨씬 더 완강하게 체제개혁에 저항하다가 결국 돌출적인 민중봉기에 직면하여 붕괴되는 운명을 겪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루마니아와 알바니아에서는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처럼 시민사회에 바탕을 둔 조직적인 반대세력에 의하여 체제변혁이 주도되었다기 보다는, 식량폭동과 인종분규 등과 같은 돌출적인 사건을 계기로 민중들의 불만이 일시에 폭발하면서 기존 지도부 내부의 불만세력들의 반란으로 급격하게 몰락한 것이다.
이와같이 탈사회주의의 다양한 경로를 결정하는 요인으로는 경제발전과 근대화의 정도, 전통문화와 대외 개방도 등과 같은 구조적 요인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개별 사회주의국가들의 체제적 특징과 성격, 그리고 정치적 리더쉽 등도 구체적인 탈사회주의의 형태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고 하겠다.
4. 아시아 현실 사회주의의 장래
앞에서 현실 사회주의체제는 역사적 적합성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것은 급진적인 산업화와 근대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현실 사회주의체제의 집중성, 획일성, 경직성이 근대화와 산업화가 성숙하면서 체제의 효율성과 정당성의 위기를 산출한다는 가설에 근거하고 있다. 만일 이러한 가설이 옳다면, 후기 산업사회로 이행하는 역사적 단계에서 현실 사회주의체제의 변화는 불가피하다고 하겠다. 따라서 현실 사회주의체제의 장래와 관련하여 주요 관심사는 현실 사회주의체제의 ‘대실패’ 를 증명하려고 하기 보다는 현실 사회주의체제가 어떤 형태와 경로로 변화할 것인가에 있다고 하겠다.
이런 관점에서 아시아의 현실 사회주의체제도 역사적 적합성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으며, 어떤 방식으로 체제변혁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겠다.
북한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고전적인 스탈린주의의 북한식 변형인 ‘우리식 사회주의’을 고수하고, 오히려 그것을 강화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물론 북한도 1980년대에 들어와 부분적인 개혁과 개방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북한의 부분적인 개혁과 개방은 북한식 사회주의의 기본틀을 변경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강화하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북한도 다른 현실 사회주의체제가 당면했던 체제적 위기의 증후군을 안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북한의 지도부는 유일사상체제인 주체사상, 수령론에 입각한 당국가체제, 그리고 공유제의 원칙이 관철되는 계획경제체제를 아직도 고수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북한은 동독이나 루마니아, 알바니아와 비슷하다고 하겠다. 북한도 이들 동구의 강경 보수정권과 마찬가지로 체제변혁의 압력에 강력하게 저항하면서 현실 사회주의체제를 고수하려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북한도 동독이나 루마니아, 알바니아와 마찬가지로 결국 밑으로부터의 저항에 부딪쳐 마침내 동독과 같이 흡수통합의 길로 가거나, 또는 루마니아에서 처럼 유혈사태를 경험하면서 북한식 사회주의체제가 붕괴되고 말것인가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북한과 루마니아는 여러가지 점에서 유사하다. 북한과 루마니아는 모두 독자노선을 표방하면서 소련을 포함한 외세의 간섭에 완강하게 저항하였고, 고르바초프의 개혁과 개방노선에 비판적이었으며, 국내적으로도 철저한 일인 지배체제에 바탕을 둔 강력한 정치체제를 구축함으로써 내부적으로 조직적인 불만세력이 등장할 수 있는 여지가 없는 것 처럼 보였다는 점에서 루마니아와 북한은 유사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루마니아의 몰락과정에서 증명된 것처럼, 표면적으로 안정된 것 처럼 보였던 차우세스쿠 정권 내부에서도 권력승계문제에 대한 불만과, 차우세스쿠 친위부대인 보안대에 대한 정규군부의 불만들이 잠복해 있다가, 동구권의 대변혁과 식량폭동과 같은 민중봉기의 와중에서 이들 불만세력들이 무력으로 정권타도에 나선 것처럼, 북한에서도 김정일에로의 권력승계와 국내적 경제실패에 대한 불만이 어떤 계기에 일시에 폭발할 수도 있다고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반드시 루마니아와 같이 어느 날 갑자기 붕괴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할 수 없는 이유는 첫째, 북한의 김일성-김정일체제의 강고성 때문이고, 둘째, 북한사회가 루마니아보다 훨씬 더 국제적인 압력에 저항할 수 있는 위치와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 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루마니아는 북한과 마찬가지로 일찍부터 독자노선을 고집해 왔지만, 루마니아사회는 유럽과 소련과의 역사적, 정치적 연계성을 무시할 수 없는데 비하여, 북한은 서방세계나 소련을 비롯한 다른 사회주의국가들과의 관계에서도 어느 정도는 자립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북한은 루마니아와 같은 인종적 분쟁요인이 없고, 북한사회에 대한 강력한 통제체제를 구축하고 있어서 불만세력의 조직적 저항운동이나, 또는 집권 엘리트 내부의 분열도 현재로는 기대할 볼 수 없기 때문에, 당분간 북한식 사회주의는 지속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 사회주의가 당면한 체제적 위기의 성격을 고려해 볼 때, 북한식 사회주의가 장기간 지속되기 어려운 점도 많다고 하겠다. 김일성의 사망과 같은 돌발적인 사건은 북한식 사회주의를 근본적으로 동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으며, 동시에 지속적인 경제위기로 말미암아 루마니아에서와 같은 식량폭동이 발생하여 북한지도부의 단결과 안정을 위협할 수도 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런 돌발적인 요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북한식 사회주의의 체제적 변화가 없이는 북한이 당면한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고 하겠다. 사실, 북한의 제한적인 개혁과 개방은 별다른 성과를 산출하지 못했다는 판단을 이미 북한의 지도부가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북한식 사회주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과거와 같은 사회주의 강화론적 접근보다는 중국과 같이 적극적인 위로부터의 개혁, 개방을 모색할 수도 있다고 하겠다.
다시 말해서 북한식 사회주의의 기본틀을 유지하면서, 대남관계와 대서방관계, 그리고 대외경제정책 등에 있어서 과감한 개혁과 개방을 단행함으로써 북한식 사회주의가 당면하고 있는 경제적 침체와 정치적 경직성을 극복하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같이 북한에서 개혁사회주의를 실천함으로써, 체제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와같은 기회를 이용하여 북한이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는 탈냉전시대에 생존할 수 있을 것인가는 전적으로 북한 지도부의 리더쉽에 달려 있다고 하겠다.
반면, 중국은 1978년에 등소평 정권이 들어선 이후 대담한 개혁과 개방정책을 추진함으로써, 현실 사회주의체제의 위기를 극복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베트남도 역시 1987년 이후 적극적으로 개혁과 개방을 시도하고 있다. 과연 중국이나 베트남의 개혁과 개방정책이 현실 사회주의체제가 당면한 체제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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