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용 東京明期月良 夜入伊遊行如可 入良沙寢矣見昆脚烏伊四是良羅 二 隱吾下於叱古二 隱誰支下焉古 本矣吾下是如馬於隱奪叱良乙何如爲理古
* 옛글자가 지원되지 않아, 아래아는 ㅏ 로, 반치음은 ㅈ 으로 표기함 *
● <처용가> 배경 설화 신라 제 49대 헌강왕 때에는 서울에서 지방까지 집과 담이 연이어져 있고 초가집은 하나도 없었다. 길거리에 풍악이 그치지 않고 비바람도 사철 순조로웠다.
● 문이나 지붕에 처용 그림을 붙이게 된 기원
● 처용은 무당이다?
● <처용가> 정리
|
천년 전, 죽음 앞에 뿌린 월명의 눈물
인간의 죽음을 노래한 향가에 <제망매가>가 있다. 작가 월명은 이 노래를 젊은 나이로 죽은 누이 동생을 위해 바쳤다. 많은 세월이 흐르고 왕조의 역사와 풍속은 변해도 '죽음'을 생각하는 인간의 비극만은 한결같다. 천년 전 죽음 앞에 뿌린 월명의 이 눈물이 여전히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감동적인 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신라인의 마음을 간직한 한국인일 뿐이다.
<제망매가>에서 보는 신라인의 사생관은 어떤 것이었을까? 인간이 살고 있는 자리를 월명은 '생사(生死)길'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그 두려움 속에서 생사길을 걷고 있다는 것이며, 할 말도 다하지 못한 채 죽음이 오면 그 길로 가야하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절실한 것만이 아니다. '말도 못다 이르고 간다'는 말에서 우리는 현세의 한계에 체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참으로 묘한 표현이다. 생을 하나의 이야기의 내용으로 본다면 그 말을 다하고 죽을 때는 한이 없는 것으로 보았다. 지금도 우리는 '여한이 없겠다'거나 '죽어도 억울하지 않겠다'는 말을 쓴다. 무작정한 생의 욕망, 끝없는 인생을 바란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생만을 다 살면 죽음이란 그렇게 두려운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신라인은 추상적인 죽음 자체에 공포를 느꼈다기보다 '제 명을 다 살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제망매가>에서도 '말도 못다 이르고 가야 하는가?'라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가을날 떨어지는 나뭇잎 자체에 설움이 있는 것은 아니다. 철 이른 바람에 떨어지는 그 잎 - 이른 바람에 떨어지는 나뭇잎처럼-을 애석히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월명사의 눈앞에 어른거리는 죽음이란 도끼와 사슬을 가진 검은 악마로서 그려진 서양인의 죽음과는 또 다르다. 죽음이란 가을에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하나의 계절로서 나타난다. 먼 곳에서 내습해 오는 적군이라기보다는 나뭇잎이 지는 현세의 한 조용한 질서였다. 저항이란 것은 있을 수 없다. 바람이 불면 떨어져야 한다. 다만 그 비장감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잎이 떨어진다는 것보다 똑같은 한 가지에서 자란 나뭇잎이면서도 떨어질 때는 제가끔 뿔뿔이 흩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가끔 가는 길을 알지 못한다는 괴로움이다.
그것은 '내가 죽는다'는 슬픔이 아니다. 내가 너와 같은 핏줄기(여동생- 한 가지)와 함께 죽을 수 없는 것의 서러움이었다. 월명사가 나무를 통해서 죽음을 파악했다는 것은 한 가족이라는 현세의 핏줄기를 통해서 그것을 인식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싣달타의 죽음은 '누구의 죽음인가'가 문제가 아니었다. 싣달타가 동문에서 본 시체는 아무런 속세적 관련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자로의 죽음을 보고 애통한 예수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월명사는 그러한 일반적인 생의 한 조건으로서의 죽음이 아니라, 또 나의 죽음이 문제가 아니라 누이 동생의 죽음이 문제가 된다. 나와 누이동생의 관계를 끊어 놓은 것으로서의 죽음, 이별로서의 그 죽음이 문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월명사는 마지막에 죽음의 비장감에 이러한 처방을 한다.
'미타찰에 만날 나는 도(道) 닦아 기다리겠다.'
죽음의 극복은 현세적인 것으로부터의 해탈이라기보다 만남에 있다. 만난다는 것은 현세의 관계를 지속시키려는 감정이다. 불도를 닦는 것도 바로 이 관계의 지속에 있다. 이별을 없애는 것은 만남이며, 그 만나는 장소는 내세든 지옥이든 현세 안의 것이다. 지금도 아녀자들은 임종의 무렵에서, 자기의 죽음보다는 그 죽음 때문에 일어나는 현세의 변화에 더 큰 두려움을 느낀다. 어린 자식들 때문에, 혹은 풀지 못한 원한 때문에 눈을 감지 못하겠다고 한다. 죽음은 이렇게 현세의 단절이 아니라 도리어 강력한 현세와의 또 다른 맺음(변화)의 형태로 파악되는 것이다.
- 이어령, <신화 속의 한국인>에서
'Blog·Cafe > 사오정국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향가 - 헌화가(獻花歌) (0) | 2009.07.04 |
|---|---|
| 향가 - 풍요(風謠) (0) | 2009.07.04 |
| 향가 - 찬기파랑가 (讚耆婆郞歌) (0) | 2009.07.04 |
| 향가 - 제망매가(祭亡妹歌) (0) | 2009.07.04 |
| 향가 - 원왕생가(願往生歌) (0) | 2009.07.0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