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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추린 중국의 역사 (6) : 五代·宋·遼·金 時代
1. 송의 약사
907년에서 960년까지는 군벌간의 전쟁이 끊이지 않은 시기였다. 이 시대의 54년 동안 황하의 유역에는 양(梁)·당(唐)·진(晋)·한(漢)·주(周) 등 명이 짧은 왕조가 일어났다가는 망했다. 또 지방에서는 전후 14개의 여러 나라가 역시 일어났다가는 이내 망했는데, 그 가운데서 가장 강대한 것이 북한(北漢), 오(吳), 남당(南唐), 오월(吳越), 초(楚), 남한(南漢), 민, 전촉(前蜀), 후촉(後蜀), 형남(荊南)의 열 나라이다. 그래서 이 시대를 오대십국(五代十國)의 시대라고 한다.
960년에 오대(五代) 마지막 나라 주(周)의 중신이었던 조광윤(趙匡胤)이 장병들에게 추대되어 송나라(宋)를 세워서 다음 태종(太宗)의 대에 이르러 천하를 통일했다. 송은 문치주의를 채택하여 문관관료정치기구를 확립했다. 그러나 국초 이래의 문관주의는 한편으로 군대의 약체화와 조정 대신들간의 당파싸움이라는 폐단을 낳았다. 내치와 외교상의 폐해가 누적되어 힘이 약해진 송은 1127년 여진족이 세운 금(金)의 침입을 받아 남부로 수도를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보통 이 때까지의 송을 북송(北宋)이라고 칭한다. 북송이 금에 멸망한 후 강왕(康王) 조구(趙構)는 유민과 군대를 이끌고 남방으로 내려가 황제로 즉위했다. 도읍은 남경(南京: 하남성 商丘)에 정했다가 임안(臨安:杭州)으로 옮겼다. 역사에서 이를 남송(南宋)이라 한다. 남송은 1279년 몽골족이 세운 원(元)에 의해 멸망당했다.
송(宋)은 유교에 근본한 문관우위의 체제를 통해 중앙정부의 군사력을 구축했고 복수합의제를 채택하여 권력의 관료집중화를 억제하기도 했다. 학문적으로는 이상주의적 학설인 신유교주의 곧 송학(宋學)이 성립했다. 그 중에서도 주자는 북송이래 이학을 집대성하고 객관적 유심주의 사상체계를 정리했는데 그의 학설은 한국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신종(神宗) 때에 등용된 왕안석(王安石)은 차례로 부국강병의 새 법을 시행했으나 보수파의 큰 반발을 불러 일으켜 실패하고 말았다. 송은 문(文)을 숭상했기 때문에 서화(書畵), 시문(詩文), 불교(佛敎), 유학(儒學) 등 문화면의 발전도 상당한 성과를 가져왔다.
2. 송대의 문화
송대에는 사회적·경제적 변화와 발달에 따라 유학도 새로운 양상으로 발전하였다. 과거시험을 통하여 관리가 된 사대부계층은 경전의 字句해석에 치우친 종래의 훈고학(訓古學)에 만족하지 않고 우주의 근본원리를 추구하여 인간의 근원을 탐구하려는 새로운 학풍을 일으켰다. 송학(宋學) 또는 성리학(性理學)이라고 하는 이 새로운 학풍은 북송의 주돈이로부터 비롯되어 남송의 주자(주희)가 완성하였으므로 주자학(朱子學)이라고도 한다. 주자학은 군신과 부자간의 도리와 화이(華夷:중국민족과 이민족)의 차별 등 이른바 대의명분을 강조하여 군주독재정치를 옹호하였다. 주자학은 오랫동안 국가의 보호를 받으면서 발전하여 우리 나라와 일본 등 주변 국가에 큰 영향을 끼쳤다. 주자학의 대의명분이 강조된 것은 이 시대에 송이 이민족의 압박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송대에는 중국인의 민족의식이 고양되어 왕조의 정통성을 밝히기 위한 많은 역사책이 편찬되었다. 사마광의 <자치통감>은 송의 대표적인 역사책이다. 사대부들은 시보다는 산문을 좋아하여 구양수·소식 등의 뛰어난 문장가가 나타났다. 소식의 아버지인 소순과 동생 소철도 모두 문장에 뛰어나 이들을 묶어서 3소(三蘇)라고 불렀다. 또 사대부들은 수묵화(문인화)를 즐겼는데, 송대의 수묵화는 자유롭고 개성적이며 담백한 맛을 지니고 있다.
이 시대에는 각종 산업이 크게 발달하였으므로 상공업자를 비롯한 서민의 생활이 향상되어 서민들도 문화활동에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가요문학의 일종인 사(詞)와 잡극인 곡(曲)이 민간에서 유행하였고 일반 민중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구어체(口語體) 소설도 나왔다. 종교적으로는 교단조직에서 떨어져 나온 민중도교인 전진교가 크게 유행하였고 불교도 염불을 주로 하는 정토교(淨土敎)와 선종(禪宗)이 민중 사이에 널리 퍼졌다. 한편, 송대에는 과학기술도 놀랍게 발전하였다. 목판인쇄술은 이미 당대에 비롯되었으나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서적의 필요성이 한층 높아진 송대에는 비약적으로 발달하였다. 또한 화약을 무기로 사용하고 화약화살과 화포를 제작하였으며 나침반을 발명하여 항해술이 발달하였다. 목판인쇄술, 화약, 나침반은 한대에 발명된 종이와 함께 중국의 4대 발명이라고 일컬어진다.
3. 고려와 송과의 관계
송나라가 일어난 960년 전후의 고려는 제4대 광종(光宗)의 치세(治世)로서 대외적으로는 국경을 맞댄 중국 동북지방의 요(遼:契丹)와는 긴장관계를 지속하고 중원(中原) 국가로서는 후주(後周)와 우호관계를 유지하여 오다가 후주가 송나라에 멸망하자 962년 광평시랑(廣評侍郞) 이흥우(李興祐)를 송나라에 사신(使臣)으로 보내 이로부터 양국의 교류가 시작되었다. 양국은 이후 사절(使節)·예물 교환, 유학생 파견, 송상(宋商)의 출입 등으로 정치적·문화적 관계가 밀접하게 되나 송과는 남서로 대립되어 적대관계를 가지게 되고 고려와는 남북으로 국경을 맞대어 침략세력으로 도사리고 있던 요(遼)가 고려와 송의 국교에 변수(變數)로 작용하게 되었다.
979년 요를 침공하였다가 대패한 송은 고려에 우호적 손길을 뻗쳐 986년(성종 5년) 다시 대규모의 정토군(征討軍)을 일으키면서 고려에도 원병(援兵)을 청하여 군사를 발하였으나 역시 패하였다. 요는 이로부터 더욱 고려와 송의 연합적 동태를 주시하면서 고려의 서북면(西北面:평북)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993년(성종12년) 거란의 제1차 침략을 받은 고려는 거란과 강화를 맺고 994년부터 요의 연호(年號)를 사용하고 이 해 6월에 성종은 요에 보복코자 사신을 송에 보내 원병을 청하였으나 출병을 거부하자 30년만에 국교를 단절하였다.
목종(穆宗)이 즉위한 뒤 999년(목종2년)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이후 양국은 소극적이나마 교류를 하였으며, 고려는 송을 거란 배후 견제세력으로 이용하려 한 것에 대해 송은 고려·요와의 문제에 개입을 회피하고 중립을 견지하였다. 거란의 제2차 침략(1010)을 거쳐 제3차 침략(1018)을 받은 고려는 거란과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요의 압력에 따라 목종 이래 재개하였던 송과의 국교를 다시 단절하였다. 그러나 국교의 단절에도 여상(麗商)과 송상(宋商)에 의한 무역거래는 활발하여 특히 송나라 상인들의 빈번한 내왕은 고려에 세계의 이질적인 문화요소를 전달하여 주었는데 이 당시 아랍(대식국:大食國) 상인이 고려에 내왕할 수 있었던 것도 송상의 중개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후 송나라에서는 신종(神宗)이 즉위(1067)하면서 연려대요책(聯麗對遼策)이 대두되어 고려에 국교재개를 요구하여 왔고 고려에서는 송나라의 문화를 깊이 흠모하였던 문종(文宗)이 즉위한 뒤 매우 친송적(親宋的)이어서 1071년 양국은 약 반세기 동안 단절하였던 국교를 다시 텄다. 양국의 국교는 서로 요나라의 자극을 꺼려야 하는 입장이어서 정치·군사적인 관계보다는 경제·문화적인 측면으로 기울었으나 이 또한 요나라의 이목을 피해야 했기 때문에 왕래하는 항로도 동로(東路)에서 서로(西路)로 변경하여야 할 정도였다. 여하튼 양국의 무역거래는 1078년 송나라에서 새로 건조한 거선 2척에 막대한 예물을 싣고 고려에 보낸 이래 절정기를 맞았다. 당시 송은 무역장려책과 더불어 고려에 친선책을 써서 고려사신과 고려상인에 대하여는 극진한 우대를 하여 이들이 통과하는 연로(沿路)에는 고려관을 세워 숙식을 제공하였다. 고려에서는 예성강(禮成江) - 자연도(紫燕島:仁川) - 마도(馬島:海美) - 고군산(古群山) - 죽도(竹島) - 흑산도(黑山島) - 중국 명주(明州:절강성 밀파부:浙江省密波府)에 이르는 항로를 송선이 오고 갈 때 관리를 항구에 보내 이를 영송(迎送)케 하였다. 또한 야간에는 송선이 통과하는 항로 연변의 산정(山頂)에 순차로 봉화를 올려 예성강까지 인도하는 등 접대에 정성을 다하였다.
고려와 송나라는 이와 같이 국교의 단속(斷續)에 구애됨이 없이 공사무역(公私貿易)을 통해 막대한 수량의 물물을 교류하였는데, 특히 고려는 송나라의 서적을 수집하는 데 많은 힘을 기울여 국초 이래 구경(九經)을 비롯하여 제자서(諸子書)·사서(史書)·역서(曆書)·형법서(刑法書)·의서(醫書)·도가서(道家書)·불서(佛書) 등을 광범위하게 수입해서 이를 재소화(再消化)하는 작업을 게을리 하지 않아 문화적인 부(富)를 축적하였다. 또한 송의 사악(詞樂)이 들어와 고려에서 송악(宋樂)이 떨쳤고, 1116년(예종11년)에는 휘종(徽宗)이 《대성아악(大晟雅樂)》을 보내와 이로부터 우리의 음악은 종래의 향악·당악에 아악이 새로운 음악으로 첨가되어 국악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요의 동태를 주시하며 국교관계를 유지한 고려와 송은 1115년(예종15년), 요군을 격파하고 쑹화강(송화강:松花江) 이동의 땅을 장악한 여진 완안부(完顔部)의 아구타(阿骨打)가 황제를 칭하고 금국(金國)을 세움으로써 다시 그 관계는 흔들리게 되었다. 금나라가 일어나자 송은 금과 연합해서 1125년 요를 멸망케 하였으나 2년 후에는 송나라 자신도 금에게 수도를 빼앗기고 휘종·흠종이 납치되어 북송시대는 막을 내리고(靖康의 變) 임안(臨安:杭州)의 남송시대가 열린다. 이를 전후해서 송은 고려에 자국의 위급을 알리고 금을 협공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금에 사대정책(事大政策)을 결정한 고려는 이를 거절하여 양국의 관계는 소원한 사이가 되었다. 송나라는 1142년 금에 세공을 바치고 신(臣)을 칭하게 되었고, 이후 고려도 주로 금나라와의 외교에 주력하게 되었다. 고려와 송나라가 주로 문화적인 교류를 하면서 서로 많은 귀화인을 맞이하여 고려에서는 이들에게 벼슬을 주어 우대하였는데, 이 중에는 문예·음률로써 이름을 떨친 사람도 많고 남송이 멸망할 무렵에는 많은 송나라 사람이 고려에 귀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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