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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시인, 송강 정철 (鄭澈, 1536 ~ 1593)

지식창고지기 2009. 7. 12. 11:37

불멸의 시인, 송강 정철 (鄭澈, 1536 ~ 1593)


가사문학의 대가
강직한 성격에 술을 좋아하다

이이와 동갑내기인 정철은 돈녕부판관을 지낸 정유침의 아들이다. 그의 큰 누이는 인종의 귀인이었으며, 둘째누이는 월산대군의 손자이며 계성군(성종의 셋째아들)의 양자인 계림군 유의 부인이었기에 그는 어릴 때부터 궁중을 자주 출입하며 명종(경원대군)과 벗으로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10세 되던 해인 1545년 을사사화에 계림군이 관계되자, 그의 맏형은 장형을 받은 후 유배 도중에 죽었으며, 그도 아버지를 따라 관북, 정평, 연일 등에서 유배 생활을 해야 했다.
1551년 아버지가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자 조부의 산소가 있던 전라도 담양의 창평 당지산 자락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10년을 보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임억령에게 시를 배우고, 김인후, 송순, 기대승 등
당대 최고의 학자들에게 학문을 익혔으며 이이, 성혼, 송익필 같은 또래의 유생들과 친교를 맺었다.
17세에 성산 지방의 부호였던 유강항의 땅과 결혼하여 4남2녀를 낳았다. 또 26세에 진사시에 일등으로 합격했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그가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자 어린 시절 함께 놀았던 명종이 그를 왕궁으로 불러들여 성대한 축하연을 베풀어주기도 했다.
그의 첫 벼슬은 사헌부 지평이었는데, 그기 이때 처음으로 다룬 일은 국왕의 사촌동생이 저지른 살인 사건이었다. 명종은 정철을 따로 불러 그에 대한 관대한 처분을 부탁하였지만 그는 왕의 부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사형에 처해버렸다. 이에 화가 난 명종은 그를 지방으로 좌천시켰다.
그 후 지방의 관직을 떠돌던 그는 능력을 인정받아 다시 중앙으로 올라왔으며, 31세에 이르러 정알, 직강, 헌납을 거쳐 지평이 되었다가 함경도 암행어사를 지낸 뒤 32세 때 이율곡과 함께 뭇 유생들이 선망하던 독서당에서 사가독서(유능한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는 제도)하였다.
이어 수찬, 좌랑, 종사관, 교리, 전라도 암행어사 등을 역임한 후 40세가 되던 1574년 벼슬을 내놓고 낙향하였다. 그가 벼슬을 내놓은 것은 자신의 주장을 결코 굽히지 않는 강직한 성격 때문이었다. 그의
강직한 성격은 가는 곳마다 논쟁을 불러 일으켰고, 그것은 곧 당쟁의 불씨가 되었다. 서인이었던 그는 동인의 영수 김효원을 맹렬히 비판하기도 하여, 친하게 지내던 이이로부터 조정을 혼란시키는 정쟁을 일삼지 말라는 충고를 받고 실망하여 낙향했던 것이다.
하지만 정철은 고향에 묻혀 지낼 위인이 아니었다. 조정의 부름을 몇 번 거절하다가 1578년 다시 관직에 복귀하였다. 동서의 정쟁이 날로 악화되는 가운데 그는 사간, 집의, 직제학을 거쳐 승지에 올랐으나 진도군수 이수의 뇌물사건으로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시 낙향해야 했다.
1580년 강원도관찰사에 제수되자 흔쾌히 수락했고 이때
<관동별곡>과 <훈민가> 16수를 지어 시조와 가사문학의 대가적 기질을 발휘하게 된다.
그뒤 전라도관찰사, 도승지, 예조참판, 함경도관찰사 등을 지내다가 48세 때인 1583년 예조판서로 승진했고, 이듬해 대사헌이 되었으나 동인의 탄핵을 받아 사직하고 4년 동안 향촌에서 은거한다. 이 은거 기간 동안 그는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등의 한문과 한글로 된 가사와 수많은 시조와 한시를 창작하여 한국 문학사에 빛나는 업적을 남기게 된다.
한편 54세 때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동인이 실각하자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동인을 치죄하고, 이듬해 좌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그를 포함한 서인의 집권은 오래가지 못했다. 56세 때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혼자서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건의하다 신성군을 염두에 두고 있던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유배되었다.
이때 선조는 정철을 향해 '대신으로서 주색에 빠졌으니 나랏일을 그르칠 수밖에 없다'는 말을 하며 그를 파직시켜 유배보낸다. 선조의 이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정철은 주색을 즐겼던 모양이다. 한때 이이도 그에게 '제발 술을 끊도록 하고 말을 함부로 하는 버릇을 없애라'고 충고했을 정도였다. 그는 술을 좋아했기도 했지만 어쩌면 그 취기를 바탕으로 빼어난 산문과 절편의 시들을 뽑아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유배된 그는 진주와 강계 등에서 이배되었다가, 57세 때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풀려나 평양에서 왕을 맞이하여 의주까지 호종하기도 했다.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의 체찰사를 지내고, 다음해 사은사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그러나 동인의 모함으로 다시 사직하고 강화의 송정촌에 우거하다가 1583년 58세를 일기로 죽었다.
 

-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