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오월의 햇살이 눈부시다. 눈부신 햇살을 받으며 돋아난 신록이 산마루를 타고 힘차게 정상을 향해 내닫는다. 벌써 짙은 녹음으로 변해버린 산자락에서부터 시작한 푸른빛이 훈풍에 실려 부드럽게 옅은 녹색을 붓질하며 캔버스를 채우듯 하루가 다르게 여름 산으로 변해간다. 우리강산 어디를 찾아도 신록이 눈부신 아름다운 오월이다.
#봄·여름을 함께 보듬은 흰구름 산
산이 푸른 숲으로 채워지면 봄 한철 숲속을 장식했던 꽃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얼레지 같은 화려한 꽃들이 시들면 산에는 그 뒤를 이어 밝은 빛깔의 여름 꽃들이 나타난다. 푸른 숲을 배경으로 하얗게 하늘을 향해 피는 꽃이 층층나무와 산딸나무라면 때죽나무와 쪽동백은 주렁주렁 가지에 매달려 땅바닥을 보고 핀다. 봄에 새로 난 가지 끝으로 달리는 향기로운 고추나무의 흰 꽃이 한창피어 나고 숲이 녹음으로 짙어지면 함박꽃도 한껏 부풀어 꽃봉오리가 주먹만 해진다. 이때쯤이면 봄도 깊어 계절이 여름으로 바뀌어 간다.
야생초산행은 봄과 여름 두 계절을 함께 느낄 수 있는 함양에 위치한 백운산(白雲山,1279m)을 찾았다. 백운산이라는 이름을 지닌 산은 전국 곳곳에 산재한다. 대부분의 백운산은 ‘흰 구름 산’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구름을 이고 있을 만큼 높고 겨울이면 눈이 많이 내린다.
#감미로운 향 가슴 깊숙이 파고든다
높은 산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함양에 위치한 백운산은 백두대간이 덕유산에서 지리산으로 건너기 전 크게 맺힌 곳이다. 정상에 서면 백두대간이 나아갈 길을 알려주기라도 하듯 남쪽에 위치한 지리산 주능선을 한눈에 살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북쪽을 병풍처럼 막아선 덕유산, 남덕유에서 흘러내려 산군을 이룬 금원·기백·월봉·거망·황석산, 백운산과 능선으로 이어진 동쪽의 괘관산, 그 너머 위치한 황매산과 가야산, 서쪽을 막고선 장안산도 눈을 돌려가며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산이 많은 함양답게 보이는 모든 산이 1,000m가 넘는 고산이다.
산행은 백운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대방마을을 출발하여 묵계암~상연대~중봉~정상~용소~백운암~대방마을로 되돌아오는 회기산행을 했다. 상연대까지는 포장된 찻길을 따라야하는 길이라 쾌적하지는 않았지만 주변에 핀 꽃이 즐비하니 쉽게 잊어버리고 오를 수 있었다. 개울가에 자리한 하얀 고추나무로부터 날아오는 달콤한 향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가까이 다가서 코끝에 꽃을 대어보니 감미로운 향이 가슴 깊숙한 곳까지 파고든다. 길가에 늘어선 키 작은 광대수염, 그 뒤 배경을 장식하는 키 큰 미나리냉이가 제철이다. 누군가가 일부러 가꾼 듯 즐비하다. 광대수염은 꽃보다 크고 거칠어 보이는 수염이 우스꽝스럽다.
#가꾸지 않아도 화려한 ‘으름덩굴’
경사가 급한 길이었지만 힘들이지 않고 묵계암까지 오를 수 있었다. 온갖 꽃들을 심어 정원을 가꾸고 있는 묵계암이다. 아쉽다면 주변에 흔하게 자라는 야생화보다는 외국에서 들여 온 원예종인 지면패랭이꽃(꽃잔디)과 흔히 영산홍이라 부르는 왜철쭉을 심어 화려하게 꾸며 놓았다.
길옆 숲 가장자리에는 가꾸지 않아도 화려한 ‘으름덩굴’이 수수한 꽃을 매달고 있어 대조를 이루고 있다. ‘으름덩굴’의 꽃은 암수한그루로서 잎겨드랑이에서 꽃대가 나와 주렁주렁 매달리듯 핀다. 자줏빛으로 피는 수꽃은 작고 암꽃은 커 구분이 쉽다. 암술과 수술을 감싸고 있는 3장의 꽃잎처럼 보이는 것은 꽃받침조각이 변형된 것이다. 가을에 열매가 익으면 껍질이 벌어지고 씨앗이 든 속살이 드러난다. 하얗게 드러난 과육은 먹을 수 있고 바나나 향이 난다.
#봄 기운 가득 느껴지는 야생초 즐비
묵계암을 지나면 길은 경사를 더하며 상연대(上蓮臺)까지 이어진다. 상연대는 고운 최치원 선생이 창건한 유서 깊은 사찰로 해인사 말사다. 상연이라는 이름은 기도 중에 나타난 관세음보살이 상연이라 하였음으로 얻은 이름이라 한다. 법당에는 조선 중기에 조성한 목조 관음보살좌상을 모시고 있다. 여기 약수터에서 물을 준비 하는 것이 좋다.
상연대를 지나면 본격적인 산길로 접어들고 한동안 가파른 길이 능선에 올라설 때까지 계속된다. 길가에는 벌써 노랑제비꽃이 씨앗을 매달고 있다. 이웃하여 자리한 ‘선밀나물’은 녹색 꽃을 터트려 폭죽처럼 매달고 있다. ‘선밀나물’은 산과 들에 자라는 백합과의 식물이다. 꽃은 암수딴그루로 피고 방사형으로 퍼진 꽃대 끝으로 여섯 장의 꽃잎을 펼치고 하나씩 달린다. 나물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니 먹을 수 있다. 새로 돋는 연약한 줄기는 찾기가 어려워 ‘어디어디 숨었니, 안 나오면 니 각시 데려 간다.’ 또는 ‘니 신랑 데려간다.’고 노래하며 뜯었다고 한다.
능선에 올라서면 아직도 봄기운을 느낄 수 있다. 개별꽃·애기나리·금강애기나리·천남성·풀솜대 등이 한창 꽃을 피우고 있다. 정상까지는 큰 오르내림 없는 편안한 능선길이다. 백두대간 상에 위치한 정상에는 어른 키만 한 정상석을 새로 세워두었다. 사방이 트인 곳이라 조망이 빼어나고 넓은 공간이 있어 쉬어가기 좋은 곳이기도 하다.
#폭포의 시원한 물줄기 산행 묘미 더해
하산은 백운암이라고 적힌 안내판을 따라 동쪽 능선으로 내려섰다. 길가에는 드물게 금강애기나리가 자생하고 더 내려서자 벌깨덩굴과 참꽃마리가 군데군데 자리 잡고 있다.
능선에서 계곡으로 내려서는 길이 만만찮다. 경사가 너무 급해 잘못 발을 헛디뎠다가는 굴러 뜨러지기 십상이다. 다행인 것은 곳곳에 밧줄을 길게 늘어뜨려 놓아 잡고 내려설 수 있다는 것이다.
울창한 숲속을 흐르는 계곡은 맑고 시원하다. 용소와 같은 소와 담이 있고 쏟아져 내리는 폭포의 시원한 물줄기가 산행의 묘미를 더한다. 백운암까지는 숲이 우거진 호젓한 등산로가 이어진다.
백운암을 지나 마을 어귀에 이르면 애기똥풀과 씀바귀·미나리아재비가 한창이다. 산 어귀 풀밭에는 솜방망이와 ‘금난초’도 예쁜 노란 꽃을 하늘을 향해 펼치고 있다. 모두가 화려한 노란 빛이다.
햇볕을 많이 받고 자라서 그런지 숲속에서 만났던 ‘금난초’ 보다 꽃잎이 두텁고 풍성하다. ‘금난초’는 꽃이 노란 황금색깔을 하고 있어 붙은 난초과의 식물이다. 여섯 장처럼 보이는 꽃잎은 그 중 3장만 꽃잎이고 나머지 3장은 꽃받침이다. 꽃받침도 꽃잎과 같이 화려한 색깔과 모양을 하고 있어 구분이 쉽지 않다. ‘금난초’가 꽃잎을 활짝 펼치진 않았지만 두터운 육질에 무늬가 있는 아래꽃잎인 설판을 내민 모습이 앙증스럽다.
농로 변에는 노랗게 늘어선 애기똥풀이 유난히 많다. 줄기를 자르면 애기 똥을 닮은 진노란 유액이 나오기 때문에 얻은 이름이지만 털이 많은 줄기에 붙은 샛노란 꽃은 더없이 예쁘다. 노란 꽃이 늘어선 농로를 따라 계속 내려가면 오래지 않아 출발했던 곳에 이른다. 이렇게 백운산 등산에 걸리는 시간은 점심과 휴식시간을 감안하드라도 5~6시간이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