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민족 영토

[동북아 한민족을 찾아서.21] 연해주 정착

지식창고지기 2009. 5. 18. 11:54

[동북아 한민족을 찾아서.21] 연해주 정착

 

연해주 한인의 정착 문제는 러시아의 이주민 정책과 궤(軌)를 같이한다. 러시아는 연해주 개발을 위해 많은 인력이 필요했고 한인들은 새 생활의 터전을 찾아 이주해가게 됨으로써 쌍방은 상호 필요 보완관계로 시작되었 다.

한인 이주 초기 러시아정부는 매우 우호적이며 여러가지 혜택을 주었다. 까다로운 절차나 규제를 하지 않았고 오히려 식량을 지원하고 빈번한 중 국 마적단의 만행으로부터 보호해주었다. 이주민의 대부분은 얼마 되지 않 는 재산마저 버리고 조선을 떠났기 때문에 아주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그 들은 연해주에 닿자마자 러시아의 구조 없이는 지탱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딱한 사정을 고려하여 연해주 총독의 예비비로 그들에게 원조를 해야만 했 다.

1865년 여름 총독이 티진헤(地新墟)에 있는 최초(1863년)의 한인 정착지 를 방문함으로써 이 지역 이주민 실태를 좀더 잘 알 수 있게 되었다. 첫 이주민들이 열심히 농사를 지어 성공적인 정착이 가능함을 예견하고 또 앞 으로 이주해올 사람들도 극동 노령지역 개척에 매우 유익할 것이라는 전망 을 하였다

연해주 총독이 노브고르드초소(국경초소)에 지시한 최초의 명령서에서 이주 한인을 도우려는 의도가 잘 나타나있다.

첫째, 한인이 이주를 신청할 때에는 무조건 허가하고 협조하라. 둘째, 국경에서 좀더 떨어진 곳에 정착하게끔 그들을 설득하고 만일 원하지 않으 면 다른 정착지를 선택하도록 하라. 셋째, 이주 한인들은 러시아의 법률 하에 동등하게 보호하고 중국관리의 어떠한 간섭도 허용하지 말라.

위의 정책 지시에서 러시아의 두 가지 측면을 읽을 수 있다. 첫째는 이 주 한인을 환영하며 최대한의 편의 제공과 보호책을 세운 점이다. 러시아 영토에서의 보호 뿐 아니라 조선정부의 박해로부터도 보호하려는 정책적 의지를 표명하며 이주한인들을 러시아 국민으로 입적시키려 하였다. 두번 째 의도는 연해주에 한인이 쇄도함으로 인해 발생할지 모를 불상사를 예방 하기 위하여 가급적 한인의 정착지의 한계선을 설정하려 하였다. 처음에는 그 한계선을 티진헤와 수찬계곡으로 정했다가 후에는 나훗트카만과 블라디 보스토크 사이의 연안 내륙 지방에 정착시켰다. 그 다음에는 한인 이주민 수가 증가하게 되자 수이푼과 포시에트 변방 지역의 기존 한인들과 연결시 키도록 하였다. 이주한인들은 이러한 러시아정부의 호의에 감사하고 신뢰 하며 그 시책에 잘 따랐다.

그러나 조선정부와 러시아정부 간에는 한인 이주에 따른 어떤 협정도 없 었다. 러시아 당국은 모든 외국인들에게 자기나라 정부의 허락 여부에 관 계없이 러시아국적을 부여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조선 또는 중국관리 들이 러시아영토 내의 한인들에게 문제를 삼는 일에 대해서 이를 받아들이 지 않으며 더욱더 한인을 보호할 것이라고 하였다. 러시아정부는 한인들을 러시아농민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러시아 경제발전에 유익한 일이라고 확신 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한인들의 정착해 가는 형태를 주의깊게 관찰한 러시아관리들은 한인들을 연해주에 이주시키는 것이 일반 러시아 거주민이 생각한 것처럼 그렇게 위험하지는 않다고 파악하였다. 왜냐하면 조선의 법 은 국경을 넘어가는 것을 금지하고 있어 한번 법을 어긴 사람은 조국과 일 생동안 분리될 수밖에 없고 따라서 러시아당국의 지시에 순종하는 길 외에 는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만일 한인들이 경제.사회적으 로 불안의 영향을 미칠만큼 증가하면 그때 가서 이주를 금지하거나 다른 민족과 혼거케 함으로써 서로 견제책을 세우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주 한인들의 직업 실태를 보면 이주민의 80%가 농업에 종사하였다. 그 외 20% 가운데는 도시도로공사와 건축에 종사하는 도시 근로자와 어로업, 벌목공, 광산노동자, 또는 극소수이기는 하지만 러시아의 하급관청에서 보 조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러시아인들의 한인 평가는 겸손하고 도덕적 수준이 높으며 예의바르고 근면한 민족으로서 신뢰성이 있다고 좋은 평가를 했다. 그러나 이주 한인 들은 머리를 기르고 상투를 틀고 한복을 입고 한인 풍습과 생활양식을 그 대로 지키면서 다만 생계를 위한 토지만을 요구할 때 러시아 당국의 눈초 리는 고울 리 없었다. 러시아당국은 이주 한인의 러시아 귀화를 종용하면 서 모발과 의복과 생활양식의 현지화를 유도했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한 인들은 러시아국적을 취득하면 토지 소유권을 비롯하여 여러가지 우대를 받는 줄 알면서도 조상 전래의 한인 풍습을 쉽게 버리지 않았다. 생활고로 인해 비록 이국에서 살고 있지만 민족정체성을 유지하려는 의지는 생활의 여러 모습에서 엿볼 수 있었다.

러시아당국은 이주 한인에 대하여 두 가지 측면에서 우려를 표명했다. 첫째, 이주 한인들이 러시아정부가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쉽게 동화하지 않는 점이었다. 앞으로 한인 수가 증가추세인데 이들이 동화를 거부하고 한인들의 전래의 풍습과 생활방식을 그대로 견지한다면 거대한 이질 집단 을 양성하는 결과를 초래하여 언젠가는 민족적 문제를 야기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둘째는, 해를 거듭하면서 한인 이주가 급격히 증가하는 점이었다. 여권과 비자는 말할 것도 없고 서류 한 장 없이 불법적으로 국 경을 넘었던 한인들은 어디에서 국경을 넘고 어디에서 일자리를 얻는 지를 잘 아는 경험많은 안내자의 통솔 하에 봄에 무리를 지어 밀입국하였다가 겨울이 되어도 돌아가지 않고 그 지방에 정착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인들의 이주가 많아질수록 러시아화의 속도는 느려졌다. 왜냐하면 한인이 많으면 한인끼리 생활이 가능하기 때문에 러시아어를 배우지 않고 한인 고 유의 관습을 유지하게 되어 동화 속도가 늦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 는 대단위 한인 집거지를 형성하게 되고 후일 한인 자치향(自治鄕)을 구성 하는 계기가 되었다.

러시아 당국은 한인의 계속적인 대량이주를 염려하여 원칙적으로 한인 이주를 금지시키려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연해주 지역의 개발을 위한 정책 적인 차원에서 한인들의 정착에 도움을 주었다. 이러한 양면성의 양상을 띠게 되는 것은 연해주 총독의 시정 방침에 따라 좌우되기 때문이었다. 예 컨대 코르프 총독은 연해주 지역 개척에 한인들을 활용하는 것은 적합지 않다고 하여 이주를 제한하였는가 하면 그 후임자인 두호프키 총독은 노령 지역 개척에 있어 한인의 유용성을 인정하여 한인 이주를 적극 도왔다. 대 신 한인의 러시아화 정책을 병행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러시아측의 태도에 대한 조선정부의 항의와 이주 한인의 계속적인 증가로 종전의 구호적이고 방임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점차 제약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방침의 선회로 지금껏 한.러간에 이주 한인에 대한 아무런 협정 도 없이 지내오던 것을 1884년에 조.러 수호통상조약(朝露修好通商條約)을 체결하여 처음으로 이주 한인들의 생명 및 재산의 안전과 보호를 받을 권 리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법적 지위가 확정된 것은 4년 후인 188 8년 조.러 육로통상장정(章程) 체결에 의해서였다. 이 장정은 연해주 한인 들을 세가지 부류로 분류하였는데 그 기준은 다음과 같다.

첫째 부류는 1884년 6월25일 이전에 이주해온 사람으로서 러시아 국적 취득 예정자이다. 이들에게는 러시아인과 동등한 지위를 부여하며 가족 당 15데샤티나(1데샤티나:1.092ha)의 토지를 분여해주고 러시아 농민과 같이 납세의무를 부과했다. 두 번째 부류는 1884년 이후에 이주한 사람, 또는 1884년 이전에 이주한 사람들 중 러시아 국적을 갖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 그리고 첫번째 부류의 사람들을 위해 제정한 법규를 이행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연해주 거주를 희망하는 한인들에게는 2년간의 유예기간을 주고 매년 러시아의 사증을 발급받도록 하였다. 셋째 부류는 이 지역에 일시적으로 거주하고 있거나 혹은 장사를 하기 위해 머 무는 사람들이다. 세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은 그 부류에 따라 권리와 의무 가 달랐다. 첫째 부류의 사람들은 가족 명부를 작성하여 지방관청에 제출 해야 하고 최소 20년 이상 살아온 지역 농민들과 똑같은 납세 및 부역과 군역의 의무를 지며 단발까지 강요당하였다. 대신 토지 분여의 특혜를 받 았다. 둘째 부류의 한인들에게는 약정서를 몰수함과 동시에 러시아 국경에 서 더 이상 국유지를 이용할 권리를 박탈하고, 2년 유예기간을 주어 농토 를 정리케 하고 조선으로 귀환할 것을 권유받았다. 그러면서도 2년 유예 기간 동안에는 납세의 의무를 지게 했다. 세번째 부류의 한인들은 러시아 거주증이 있어야만 잠정 거주를 할 수 있게 하였으며 그들이 여태까지 해 왔던 식으로 국가 소유지에서 자유로이 정착하거나 사업할 권리를 갖지 못 하게 하였다.

 

이윤기 해외한민족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