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민족 영토

[동북아 한민족을 찾아서 .25] 독립운동기지 신한촌(1)

지식창고지기 2009. 5. 18. 12:30

[동북아 한민족을 찾아서 .25] 독립운동기지 신한촌(1)

 

 

1910년 한일합방을 전후하여 해외독립운동기지로 주목을 받던 두 마을이 있었다. 그 하나는 만주의 명동촌이고, 다른 하나는 연해주의 신한촌이다.

이 두 마을은 각기 만주와 연해주에서 이주한인들의 정신적 의지처로서 교육·문화·언론·정보의 중심지였으며, 독립운동의 요람이었다. 그러므로 이 두 마을은 민족사적 의의가 대단히 크며 연구의 대상이다. 그러나 안타까 운 것은 두 마을은 거의 폐허가 되었고, 역사적 유적지로서 잔형마저 찾기 어려운 점이다.

특히 신한촌은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 주당한 후 60여년 풍상을 겪는 동안 마을의 흔적도 없어진 채 러시아인들 의 아파트만 들어서 있을 뿐 선열의 숨결을 느낄 수 없다. 1995년 필자가 신한촌을 찾았을 때, 한민족의 애환과 선열의 얼이 어려있는 유서깊은 이 마을이 이렇게도 무참히 폐허가 되고 기념물 하나도 없이 방치될 수 있 는가 하는 생각에 북받치는 울분과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지금도 중 앙아시아의 타슈켄트, 알마아타 등지에 산재한 50여만 고려인들은 신한촌을 마음의 고향으로 간직하고 있다.

신한촌의 유래를 살펴보면 1863년 13호의 한인들이 연추(煙秋)의 지신헤 로 이주한 이래 뒤이어 이주해간 한인들은 연해주 동남부 지역, 포시에트 빨디산스크(水淸), 우수리스크(蘇王領), 블라디보스토크(海參威) 등지로 마을을 형성하여 정착했다. 이들 중 1874년 블라디보스토크시에 한인촌이 형성되었 는데 새 땅을 개척한다는 의미를 부여하여 개척리(開拓里)라고 불렀다.

그위치는 블라디보스토크 서남쪽 아무르만 변, 시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마을 형성 초기에는 한옥식 초가 몇 채가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시의 규 모가 커지고 현대적 도시로 면모를 갖추어가면서 거기에 따르는 도시 근로 자의 수요가 늘어나게 되자 이에 편승, 한인수가 증가하여 1911년 이 마을 이 폐쇄될 때는 400∼500호에 달했다. 러시아당국은 개척리를 그들의 기마병 영지로 책정하면서 겉으로는 한인촌에 만연된 콜레라를 근절한다는 이유를 앞세워 한인들을 강제 철거시켰다. 러시아당국의 명령에 따라 새로 옮겨간 곳이 블라디보스토크시 외곽의 변두리였는데 새로운 한인의 마을이란 뜻으로 신한촌(新韓村)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주한인들은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 토막나무로 러시아풍의 작은 집을 짓고, 큰 거리와 작은 골목을 닦으면서 신한촌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구개척리에 있던 한인사회의 운영기관들을 다시 설립하고 계동학교를 옮겨 가 한민학교로 개명하는 한편, 시설을 대폭 확충하여 교육기능과 아울러 시 민의 광장으로서의 기능도 겸하게 했다.

신한촌 마을 입구에 독립문을 세워 조국에 대한 정감과 현실을 인식케 하고, 학교 정문 현관에는 태극문양을 새겨넣어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또한 신한촌 한민회를 조직하여 한인사회 자치의 기반을 다져나갔다. 이렇듯 신한촌은 새로운 면모를 갖추고 활기를 되찾으면서 독립운동단체들이 결성되어 해외 최고의 독립운동기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더욱이 이 무렵 국내에서는 1905년 을사조약의 체결로 국운이 기울고 1910년 국권이 일제에 침탈당하자 나라를 걱정하는 많은 애국지사 들이 미주, 간도, 본국 등 각처에서 연해주로 결집함으로써 신한촌의 항일 투쟁의 열기는 한층 고조되었다.

뿐만 아니라 신한촌은 시간이 흐르면서 그 규모도 날로 커져 번성기에 는 주민이 5천500명에 이르렀고, 한민회는 블라디보스토크지역 거류한인 1만 여명을 관장하고 있었다. 교육기관도 초기에는 초등학교부터 시작하여 중등학 교가 병설되고 전문학교와 사범대학까지 설립하여 2세교육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또한 언론사도 ‘해조신문’ ‘대동공보’ ‘신한민보’ ‘권업신문 ’등 여러 개가 있었고, 잡지로는 ‘애국혼’이 있었다. 이 신문들은 연해 주 한인에게만 배포된 것이 아니라, 만주와 멀리 미주에까지 보급되었다.

이러한 사실에서 보듯 연해주지역의 모든 한인사회는 사실상 신한촌의 영향 권 안에 있었다. 신한촌을 중심으로 항일투쟁과 관련된 대소 사건들이 하루도 영일이 없 이 많이 일어났다. 안중근 의사의 이등박문 암살모의와 12인 단지회(斷指會) 조직, 13도의군(道義軍) 양성, 성명회(聲明會)의 한일합방 무효선언과 반일 투쟁궐기, 권업회(勸業會)의 결성과 민족역량 배양, 망명임시정부(대한국민의회 ) 수립, 신한촌 4월참변, 그리고 1917년 러시아 볼세비키혁명과 관련한 한인사회당 결성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이 사건들에 대한 논급은 잠시 접어서 후술키로 하고, 오늘의 신한촌에 관련된 이야기 몇 가지를 언급하는 것도 의의가 있을 듯 하다. 1989년 구소련권이 붕괴된 이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당했던 카자흐스탄, 우즈베키 스탄, 키르기스스탄 등의 고려인(이곳에서는 한인을 고려인이라 부른다)들 중 연해주로 다시 귀환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들은 농경에 뜻을 두 고 옛 농촌마을을 답사하고는 반드시 신한촌에 들러 선조들의 발자취를 찾 아본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신한촌의 흔적은 없고, 안내표지 판마저도 하나 없는 것을 보고는 눈시울을 적시며 비통한 심정으로 돌아선 다. 그들의 선조가 짐승취급 당하듯 끌려간 후 60여년이 지나도록 선조의 넋을 위로하고 역사 유적지를 기록한 기념물 하나 없다는 것은 오늘을 살 아가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역사인식과 함께 자성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본 해외한민족연구소에서는 1999년 신한촌 망명정부 수립 80돌을 맞아 신한촌기념탑을 세웠다. 탑 건립비를 마련하기 위해 고심하던 중 전국 경제인연합회에서 지원을 받고, 본 연구소 이사인 주백미(白眉)산업 이인기 사장이 거금을 쾌척하여 탑을 건립하게 되었다. 한 가지 첨언할 것은 탑 의 민족사적 의의를 더하기 위해 웅장한 탑신 3개와 판석을 한국에서 다듬 어 배로 수송하여 세운 점이다. 탑문에는 다음의 글귀가 새겨져 있다.

“민족의 최고 가치는 자주와 독립이다. 이를 수호하기 위한 투쟁은 민 족적 성전이며 청사에 빛난다. 신한촌은 그 성전의 요람으로 선열들의 얼과 넋이 깃들고 한민족의 피와 땀이 어려있는 곳이다. (중략) 3·1독립선언 80주년을 맞아 선열의 숭고한 넋을 기리고 재러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마 음의 상처를 위로하며 후손들에게 역사인식을 일깨워주기 위하여 이 탑을 세운다.” 이 탑은 지금 중앙아시아에서 귀환하는 고려인들에게는 큰 위로가 되고 그들의 마음을 잡아주는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이제 다시 신한촌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을 간추려서 논급해보자. 그 첫째 는 성명회 결성과 한일합방 반대운동이다. 회명은 ‘聲彼之罪 明我之’에서 딴 것이다. 1910년 8월23일 신한촌에는 비통한 소식이 전해졌다.

일본의 강압에 의하여 한일합방이 조인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이 비보를 접한 한인들은 한민학교에 700여명이 모여 성명회를 결성하고, 한일합방 반 대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사람들은 울분을 참지 못해 흐느꼈다. 선언서는 “오호라 해외재류동포여, 한번 머리를 들어 조국을 바라보라”로 시작하여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고 한일합방을 강력히 반대한다 는 요지로 끝을 맺고 있다. 이와 같이 시작된 성명회의 합방반대운동은 그 날 밤, 청년 50여명이 결사대를 조직하여 일본인 거류지를 습격하였다.

이에 당황한 일본 영사관에서는 러시아 군부와 경찰 당국에 일본인 보호를 요청하였다. 이튿날 한인들의 행동은 더욱 격앙되어 결사대의 수는 1천여명 으로 늘어났으며 부녀자들까지 가담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26일에는 러시아 군·경의 감시로 블라디보스토크시내에서 시위를 하지 못하게 되자 시 북 방 2km 지점에 있는 ‘친고개’에서 다시 모임을 갖고 조국 독립의 결의를 재다짐하며 이윤의 제의로 “두만강의 결빙기를 기다려 의병을 200명 단위 로 부대를 편성하여 국내진공작전을 벌이고 총병력 1만여명에 달하면 독립전 쟁을 개시한다”는 안을 의결하였다.

그리고 선언서와 격문을 만주와 극동노령지역의 한인들에 반포함으로써 그 활동 범위와 세를 확장하는 한편 선언서를 영어, 불어, 러시아어 등으로 번역하 여 세계 각국 정부와 신문사에 발송하였다. 이에 일본은 러시아에 성명회를 제재할 것을 강력히 요구함에 따라 8월30일 러시아 당국은 유인석, 이상설 을 포함한 성명회 주요 인물과 13도의군 간부 42명의 체포를 명하였다.

이때 이범윤을 비롯한 김좌두, 이남기, 권유상, 이규풍 등 8명은 시베리아 이르쿠츠크로 유형당했으며 유인석, 홍범도, 이종호 등은 다행히 피신하여 화를 면했다. 이로써 성명회의 활동은 더 이상 진척 못하게 되었지만 성명 회 선언서는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대변하는 최초의 합방무효선언으로서 그 이후 광복 때까지 줄기차게 전개된 항일독립선언의 원류가 되었다는 데 그 의미가 크다.

 

이윤기해외한민족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