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민족 영토

[동북아 한민족을 찾아서 .24] 연해주 이주 한인의 교육

지식창고지기 2009. 5. 18. 12:28

[동북아 한민족을 찾아서 .24] 연해주 이주 한인의 교육

 

 

세계 어느 지역에서나 초기 이주민이면 다 겪는 일이지만 연해주 초기 이주한인의 최대 관심사는 의식주 해결과 자녀교육 문제였다. 그들은 땅을 개간하고 농사에 열중하면서 생활이 정착되어가자 자녀교육 문제로 고심하 게 되었다. 더구나 자녀 교육열이 높기로 세계적으로 정평이 나있는 한민족 으로서 그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도 자녀교육에 열성적이었다. 그 러나 이주 초기 농촌에서 불과 몇 가옥이 이곳저곳에 산재해 있을 뿐 제 대로 큰 규모의 한인마을이 형성되어있지 않는 상황에서 학교시설, 선생, 재정 등 교육환경을 조성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한인들은 그들이 이주하기 전의 조선에서와 같이 전통적인 한문 서당을 열고 천자문과 동몽선습을 가르쳤다. 그 방법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 그나마도 한문 훈장을 초빙할 수 있는 마을은 다행이었고, 그렇지 못한 마을에서는 상당한 먼 거리에 있는 서당에 자식들을 보냈다. 이러한 현상 은 후일 많은 이주민이 들어와서 여러 지역에 한인마을을 형성했지만 거의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초기 이주 한인들은 전통적인 가치관에 얽매 여 비교적 선진적이고 개화된 러시아인들과 접촉을 하면서도 재래의 습성에 서 벗어나지 못해 한문 공부만이 교육의 전부인 양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조선 조정에서마저도 세계의 변화상이나 신교육에 눈을 뜨지 못 하고 있는 실정이니 서당 공부에 열중할 수 밖에 없었다. 이처럼 이주한인들의 자녀교육이 한문공부에 치중하는 것을 간취한 러시 아당국으로서는 그들의 동화정책과 상반되는 현상을 곱게 볼 이가 없었으며 서당 교육을 허용하지 않았다. 러시아당국은 관립학교 외에 이주한인들이 독자적으로 교육하는 것을 강제로 단속하는 한편, 귀화를 조건으로 토지소유 를 비롯한 많은 특권을 부여한다는 회유책을 쓰면서 러시아 교육을 받을 것을 종용하였다. 그러나 한인들은 러시아당국의 비위를 적당히 맞추면서 비 밀리에 서당 교육을 계속했다. 서당 공부를 하다가 러시아 관리에 발각되면 곤욕을 치르게 되므로 관 리가 온다 하면 모두 헤어지든지, 문을 닫고 숨을 죽인 채 관리가 지나가 기를 기다리는 경우도 많았다. 어떤 부모는 러시아 교육을 기피하다가 당국 의 강요에 견디기 어렵게 되자 이웃집 자제를 대신 고용하여 입학시킨 일 도 있었다. 이주 한인들은 설령 자녀를 러시아학교에 입학시켰다해도 그 목 적이 인격 도야에 있지 않고 일상 생활을 편하게 할 수 있는 러시아어를 배우도록 하기 위해 학교에 보냈다. 이처럼 이주 한인들은 자녀교육 문제 로 갈등을 겪으면서도 반강제적으로나마 러시아학교에 진학하여 초등학교나 중학교까지만 졸업하면 그 자녀들은 대체로 하급관청 서기나 상점 점원이나 또는 통역을 맡는 직업을 구할 수 있었고 도시로 진출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러시아정부는 한인들을 러시아화하기 위하여 많은 공을 들였다. 그 첫 시도가 교육정책이었는데 1860년대말부터 1870년대에 걸쳐 민족학교를 세웠다. 이때의 민족학교라 함은 이주한인을 위한 민족학교로, 다시 말하면 한민족 학교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 학교에서 수업은 러시아어로 했으며 모국어로 교육하는 것은 금지시켰다. 또한 교과내용도 모두가 러시아에 관한 것뿐이었 다. 러시아당국은 이러한 교육시책을 확장하면서 한인들이 정착한 마을이면 학생 수가 불과 20∼30명밖에 되지 않아도 으레 민족학교를 세워 집요하게 러시아 교육을 장려했다. 이와같은 정책은 극동 노령지역을 정치적·군사적 수단 외에 교육적·문화적으로 완전히 장악하려는 의도였다. 요컨대 제정러 시아의 소수민족 정책의 기조는 대러시아주의에 입각한 동화정책이었다. 따라서 노령 이주한인에 대한 교육정책은 단적으로 표현하면 러시아화, 우민화, 예속민화정책이었다. 여기에다 러시아당국은 항상 러시아 교육과 국 적 취득 및 토지 분여를 연관지어 정책 고리로 활용했기 때문에 한인들의 마음을 동요시키는 데 충분했다. 러시아 교육을 받고 국적을 취득함으로써 땅을 분배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한인들 중에는 빨리 그쪽으로 마음을 돌려 러시아당국의 시책에 순응하여 혜택을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동화를 거부하고 한민족의 전통을 지키려는 사람도 있었다. 전자에 속 하는 사람들, 즉 귀화한인을 원호(元戶)라 하고 비귀화한인을 여호(餘戶)라고 불렀는데그 비율은 늘 여호의 수가 많았다. 원호 중에는 민첩하게 러시 아인들과 교제하여 토지와 부를 축적, 상류계층의 지위를 누리는 자들도 제 법 많았다. 그런가 하면 여호는 늘 생활이 어려웠고 원호의 소작인이 되어 일종의 한인계층 분화 현상이 일어났다. 이들은 후일 블라디보스토크시내의 신한촌(新韓村)에서 독립운동이 전개되었을 때와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 났을 때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즉 원호들은 시세에 영 합하려는 경향인데 반하여 여호들은 강한 민족심을 고수하려는 성향을 보였 다. 특히 극동 노령지역에서 러시아혁명전이 5년여 계속되는 동안에 원호는 백계, 제정러시아 편을 지원했고(이때 반혁명 제정러시아는 일본군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여호들은 혁명군에 가담하여 볼세비키혁명 성공에 한 몫을 했다. 한편 이주한인들의 러시아 정착 시간이 쌓이면서 여호들 간에도 그들의 자녀들이 앞으로 러시아에서 영주할 것을 냉철히 숙고할 때 현지 언어에 숙달하지 않으면 생활이 불편할 것이란 것을 터득하였다. 이주 후 20여년 이 경과한 1890년대에 접어들면서 그들은 자진해서 자녀들을 러시아 관립학 교에 진학시키는가 하면 한인들 스스로 한인학교를 설립하여 자체 운영을 하였다. 이 당시 학교를 설립할 때는 러시아당국의 허가를 받지 않았고 물 론 보조도 받지 않았다. 학교 재정은 한인들의 성금에 의존했으며 교실은 개인집을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시기 자녀교육에 대해서는 원호와 여 호가 혼연일체가 되어 민족의 결속을 다졌다. 러시아당국은 한인들의 이같은 자세 변화에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그들도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지 금껏 러시아어로 러시아 교과목만을 교육해 오던 강경한 태도를 다소 완화 하였다. 그리하여 한인 2세들의 모국어 교습을 위해 수업 종료후 매일 2∼ 3시간 모국어를 배울 수 있도록 학칙을 변경하였다. 극동 노령지역 이주한인들의 교육은 20세기초에 이르러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1904∼05년의 러·일전쟁과 을사조약 등의 국제적 대사건을 거치면서 일본세력은 강화되고 러시아세는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이러한 국제환경의 변화에 따라 일본의 침략의 손이 한반도와 연해주까지 뻗쳐와 연해주 한인들의 교육은 또다른 국면을 맞게 된 것이다. 1910년 일본에 의 해 국권이 침탈당하자 애국망명지사들이 연해주에 모여들었다. 연해주 지역은 두만강 바로 건너편에 위치하고 있을 뿐 아니라 러·일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가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품고 있어 조선 망명객들의 활동을 눈감아 주었기 때문에 다른 해외 지역보다 항일운동을 전개하는 데 유리한 점이 있었다. 한인들의 지도급 인사들이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결집하여 국권 회 복을 위해서는 동포 자녀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광복투쟁에 헌신할 수 있는 민족교육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독립운동의 분위기가 고조되 면서 이에 영향을 받은 이주한인들은 2세들에게 민족교육을 하지 않으면 민 족 역량을 기를 수 없고 조국의 국권회복도 불가능하다는 자각을 하였다. 한인들은 그들의 이주 초기 러시아당국이 세운 민족학교와는 완전히 성격이 다른, 2세들의 민족교육을 위한 순수한 한민족학교를 각 지역마다 여러 곳에 설립하였다. 모두가 한인 독지가들의 기부에 의해 세워졌다. 학교 재 정이 어려울 때는 교직원들이 무보수로 봉사했고 삯바느질하는 주부가 장학 금을 낸 미담도 많았다. 이때 설립된 대표적인 학교는 계동학교(啓東學校), 세동학교(世東學校), 신동학교(新東學校) 등이 있었는데 재정이 어려워 운영 난에 빠지자 1909년 이들을 합병하여 신한촌에 새로이 한민학교로 출범시켰 다. 이 한민학교는 제법 현대식 설비도 갖추고 학생수도 많았으며 단순히 학생들의 교육 기능뿐만 아니라 한민족의 만남의 광장 기능도 하였다. 이 당시 러시아측의 교육을 통한 러시아화정책은 한인 계몽운동가들의 민족교육과의 대결에서 뒤졌다. 수치로 비교해 보면 러시아어로 가르치는 공 립학교는 44개교로 교원 88명, 학생 2천599명인데 비하여 한인의 자금으로 설립한 민족학교는 182개교에 교사 217명, 학생 5천750명으로 나타나 있다. 여기에서 한인들은 민족의 위기 국면을 맞아 어떻게 대응했으며 또한 민 족정체성을 유지했는가를 검증할 수 있는 시험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