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민족 영토

[동북아 한민족을 찾아서 .26] 독립운동기지 신한촌(2)

지식창고지기 2009. 5. 18. 12:36

 [동북아 한민족을 찾아서 .26] 독립운동기지 신한촌(2)

 

신한촌에서 일어났던 독립운동 중 가장 큰 비중을 지녔던 단체는 권업 회(勸業會)였다. 지난 회에서 논급한 바 있는 성명회는 일시적으로 섬광처럼 빛을 발하여 위세를 과시했으나 너무 급조된 조직체였고 지속적 행동이 따르지 못한 데다 러시아당국의 탄압을 받아 활동이 한 달도 채 넘기지 못하고 해체되었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하고 사태의 진전을 주시하던 한인 지도자들은 보다 현실적이고 장기적인 안목에서 독립운동의 방략을 강구하게 되었다. 그 강구책으로 결성한 것이 권업회였다. 권업회는 1911년 12월19일 이상설, 이종호, 이동휘, 최재형, 최봉준, 이 범윤, 유인석, 홍범도, 윤해, 정재관 등 당시 신한촌 한인사회에서 가장 신뢰를 받고 영향력이 있는 애국인사들의 여러 계열의 단합된 노력에 의하 여 결성되었으며 임원에는 회장에 이상설, 부회장에 이종호가 선출되었다. 여기서 여러 계열의 지도자들의 단합이라 함은 상당한 의의가 있다. 왜냐하 면 많은 애국지사들이 신한촌을 중심으로 운집해 있었으나 그들의 주장과 입장이 각기 달라 통일된 단일의견을 도출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 니었기 때문이었다. 그 대표적 계열로는 첫째 일찍이 연해주에 이주하여 원 호(原戶)의 신분으로 경제·사회적으로 안정된 지위를 가진 계열이다. 최재형 , 최봉준, 김학만, 김병학, 차석보 등이 이 부류에 속한다. 둘째는 국내와 간도에서 일본에 항전하다가 연해주로 들어온 의병 계열인 유인석, 홍범도 등이 이에 속한다. 셋째는 국내외에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던 계열이다. 헤이그 밀사로 활약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국민회 조직에 참여하고 그 총회장 정재관과 함께 연해주로 건너온 이상설과 국내 신민회에서 활동하던 이종호, 이동휘, 김하구, 윤해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 계열들이 권업회 결성에 단합하고 동일보조를 취했다는 것은 노령 한인사회에서 권업회의 위상과 비중이 얼마나 컸던가를 말해준다. 권업회는 그 명칭이 말해주듯 극동 노령 한인들에게 실업을 권장하고 근검절약정신을 기르며 교육을 장려하는 것이었다. 이 단체가 명칭을 권업이 라고 한 것은 일본의 방해를 피하고 러시아 당국의 허가를 얻어 합법적으 로 활동하기 위한 위장술이었고 실제는 독립운동이 주목적이었다. 따라서 권 업회는 급진적인 의병항전을 하거나 울분과 감정에 의한 극렬적인 항일시위 를 하기보다는 민족의 힘을 길러 장기적인 전략으로 독립전쟁을 해야한다는 데 역점을 두었다. 그리고 그 목표를 실천하기 위해 실업부, 교육부, 선 전부, 검사부 등의 부서를 두고 교육 진흥, 신문 간행, 한인 자치활동, 토지 조사, 귀화 문제 등의 업무를 추진하였다. 러시아 총독은 한인들의 이와 같은 활동이 극동 노령지역에 있어 정치·경제·군사적으로 도움을 주 는 요소로 간주하고 권업회 활동을 적극 권장하였고 한인들은 이에 고무되 어 힘을 얻었다. 그리고 극동 노령당국은 권업회로 하여금 연해주 한인의 자치기관의 지위를 부여하고 러시아당국의 행정 업무를 대행케 하였다. 권업회는 국내외 소식과 정보 교환 그리고 민족의식 고양 등의 필요성 을 절감하고 ‘권업신문’을 간행하였다. 이 신문은 순 한글로 간행한 것이 특징이며 1주일 1회 4면으로 일요일에 간행되었다. 필진은 신채호, 장도빈 , 이상설, 김하구, 윤해 등이 참여하여 민족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교육에 있어서는 권업회 본부 또는 지부의 관할 하에 있던 학교가 10개나 되며 학생 수는 1천명을 상회하였다. 신한촌에서 제일 규모가 크고 모범 교로 인정받던 한민학교는 신한촌 거류민회가 관할하였으나 거류민회가 권업 회에 통합됨으로써 권업회에서 관장하였다. 권업회는 회세가 꾸준히 확장되어 번성기에는 회원이 8천579명에 이르고 하바로프스크, 수이푼, 스챤 등 한 인사회가 있는 거의 모든 지역에 지회가 결성되어 10개 이상이나 되었다. 이처럼 권업회는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역동적인 활동을 함으로써 연해주 한인들의 구심체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1914년 제1차세계대전의 발발로 러 시아와 일본이 동맹국으로 제휴함으로써 권업회를 강력히 탄압하여 그 활동 이 위축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일본영사관에서는 이동휘, 이상설, 이종 호, 유동열, 이강 등 중요인사들을 연해주에서 추방할 것을 요구하고 러시 아 당국은 권업회를 해체시킴으로써 1914년 8월 단명의 비운을 맞았다. 한편 권업회와 신한촌민회에서는 이에 맞서 신한촌 내 일본인의 상점을 철수케 하고 일본인의 출입을 금지했으며 만약 출입하는 일본인이 발견되 면 한인 청년들이사정없이 위해를 가했다. 이러한 한인의 강렬한 의기의 소식이 만주로 미주로 본국으로 전해지면서 온 민족의 독립의지는 더욱 결 연해졌다. 1919년 3·1독립운동 직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망명임시정부-대한국 민의회가 수립되었다. 이 시기 임시정부는 한 달 사이에 블라디보스토크(191 9. 3.21)와 중국 상해 임시정부(1919. 4.11) 국내 한성임시정부(1919. 4.23) 등 세 곳에서 수립되었는데 블라디보스토크에 수립된 임시정부가 제일 먼 저 수립된 점과 대한국민의회란 명칭을 사용한 점이 이채롭다. 여기서는 지 면상 대한국민의회에 대해서만 기술하고 다음 기회가 있으면 세 곳 임시정 부의 특징과 통합과정을 언급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1918년 11월 제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전후 세계문제 처리에 있어 윌슨 미국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함에 따라 약소민족해방운동이 급속히 진 행되었다. 때마침 이듬해 1월8일부터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시작되자 피지배민 족들은 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호기로 판단하고 저마다 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기에 열을 올렸다. 한민족 역시 이러한 국제정치적 상황을 충분히 활용하고자 하였다. 중국에 결성되어 있던 독립운동단체인 동제사(同濟社)는 그 하부 청년조직인 신한청년당의 명의로 미국 윌슨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 열국대표들에게 진정서를 보내는 한편 김규식을 한국민족대표로 파리에 파견 키로 하였다. 그리고 선우혁, 김철, 서병호, 김순애(김규식의 부인), 백남규 등을 국내에 파견하여 파리강화회의 소식을 전하고 그 외 당원들을 만주, 러시아 등지의 한인들과 일본 유학생들에게 독립운동 봉기의 기회임을 알 려, 국내외의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이에 호응하여 1919년 2월25일 니코리스크(蘇王嶺:현 우수리스크)에서 전 로한인회의(全露韓人會議)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는 러시아 각지의 한인대표 는 물론 북간도 대표 김약연, 정재면과 상해에서 온 여운형 등 80여명의 대표가 참가하였다. 이 대회에서 문창범, 김하석, 장기영 등의 발의로 전로 한족중앙총회를 확대 개편하여 대한국민의회를 창립하기로 의결했다. 이를 위 해 각지의 대표들이 다시 집결할 때까지 이 회에 참석한 지방연회(聯會) 대표 15명이 임시연합 상설회의를 구성하여 임시국민의회 준비작업을 담당케 했다. 그리고 윤해, 고창일을 파리에 파견하여 김규식과 합류하도록 했다. 이러한 운동이 진척되어가던 중 1919년 3월1일 본국에서 독립선언과 만 세시위가 일어났으며 이 소식은 즉각 러시아 한인사회에 전달되었다. 이에 호응하여 1919년 3월17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국민의회를 개최하고 독립선 언 발표와 경축시가행진을 하였다. 이어 3월21일에는 대한국민의회 임시정부 의 각료 명단을 발표하고 5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임시정부 각료명단: 대통령-손병희, 부통령-박영효, 국무총리-이승만, 군무 (및 선전)총장-이동휘, 탁지총장-윤현진, 내무총장-안창호, 산업총장-남형우, 참모총장-유동열, 강화대사-김규식 결의문: 1.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한 한민족의 자주독립 2.일본통치철폐 3.파 리강화회의에 독립정부 승인 요구와 국제연맹 참가 4.독립운동의 실정과 정 부수립의 사실을 각국에 통고 5.이상의 목적이 달성되지 못할 때 대일혈전 포고 대한국민의회 임시정부는 소비에트체제를 참작하여 국민의회가 입법, 행정 , 사법을 모두 관장하도록 하고 그 안의 행정부를 임시정부로 설정했다. 국민의회 임시정부의 특징은 1.의회주의 성격이 강하고 2.극동노령과 간도의 수십만 교포를 배경하고 있으며 3.독립군에 의한 무장투쟁을 강조하고 있 고 4.행정부 조직에 산업총장과 참모총장을 별도로 두어 교포의 산업진흥과 독립군을 양성하여 무력투쟁을 적극 추진하려는 기구를 갖춘 것이다. 또한 각료선임의 특징을 보면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하여 3·1독립선 언 대표 손병희를 대통령으로 추대했고 부통령에는 국내와의 연락 관계를 고려하여 박영효를 추대하였다. 그러나 손병희는 감옥에 있었고 박영효는 국 내에 있었으므로 모두 명예직에 불과했다. 실질적으로 국정을 담당할 국무총 리에 이승만과 내무총장에 안창호를 선임한 것은 이들의 명성과 미주독립운 동과의 관련을 중시한 듯하다. 김규식을 강화대사로 선임한 것은 이미 상해 신한청년당에서 파견한 기정사실을 임시정부 대표로 추인한 것이라 하겠다. 대한국민의회 임시정부는 1919년 9월6일 3개 임시정부가 상해임시정부로 통 합될 때 이에 합류하였다.

 

이윤기해외한민족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