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민족 영토

[동북아 한민족을 찾아서 .23]연해주 한인 생활상

지식창고지기 2009. 5. 18. 12:27

[동북아 한민족을 찾아서 .23]연해주 한인 생활상

연해주 초기 이주한인의 생활상을 고찰해보는 것은 한민족 이주사 연구 에 또 한 측면의 의의가 있다고 생각된다. 생사를 걸고 이주해간 그들이 낯선 이국에서 타민족의 지배하에 어떤 생활을 했는가. 좀더 구체적으로 말 하면, 어떠한 주거환경에서 어떠한 옷을 입고 어떤 음식을 먹으며 어떤 생 각들을 하면서 살았는가. 그리고 또한 러시아인과는 어떻게 관계를 유지하면 서 현실에 적응해 갔는가. 이에 관한 연구는 이주한인들의 의식의 변화현상 과 민족정체성 연구에 기본이 되기 때문이다. 첫째, 의류와 복장은 이주 전 조선에서와 같이 남자는 흰 광목옷에 상 투를 틀었으며, 여자는 무명한복을 입었다. 신은 거의가 짚신 또는 삼으로 만든 미투리를 신었고, 갓과 탕건을 쓰고 출입을 하였다. 간혹 부유한 한인들 중엔 단발을 하고 양복을 입으며 중절모자나 러시아제 털모자를 쓰 기도 했다. 이주한인들은 이주 후 20∼30년이 지난 20세기초까지도 고래의 전통적인 복장과 생활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한인들이 이주하여 제일 처음으로 한인촌을 형성했던 '포시에트'지역의 한인생활상을 관찰한 어느 러시아인의 보고에 의하면, "여자는 옥색 치마저 고리에 가슴을 드러내고, 아무것도 쓰지 않은 머리에 물동이를 이고 등에는 아이를 업고 다녔다. 길거리의 2륜차는 모두 소달구지이고 마차는 드물었 으며, 소를 타고 가는 한인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라고 기술하였 고, 이어서 "생활의 기조는 순한국식이고 거의가 러시아어를 사용하지 않았 으며, 구습에 젖어 있었고, 여자는 바깥 출입을 하지 않고, 종교에 있어 외견상 공적으로는 희랍정교를 믿는 척 하면서도 속으로는 미신을 믿었다. 한인 여성들의 남자에 대한 태도는 지극히 순종적이며 길에서 통행인과 만나면 길을 비키고 대화를 할 때는 머리를 수그렸다. 방안에 남편과 친 구가 있을 때는 방문을 겨우 조금 연 채 밥상을 들여보냈다. 그리고 한인 들은 러시아인과 혼인은 하지 않으며, 먼 곳에서 며느리를 데려오는 것이 상례였다"라고 하였다. 만주 초기 이주민들이 중국당국으로부터 치발역복( 髮 易服)하도록 강요받은 것처럼, 특히 상투를 자르도록 권유받았으나 쉽게 응 하지 않았고 의류와 복장은 한민족의 전통 복식을 지켰다"고 했다. 둘째, 음식에 있어서는 대체로 조가 주식이었으며, 피, 수수, 콩, 팥 등과 야채를 많이 먹었고 육류와 어류도 즐겨먹었다. 중상류층은 쌀밥을 먹 었으나 보통 노동자는 쌀밥은 엄두도 못내고 조, 피, 콩 등 잡곡밥을 먹 었다. 이때의 쌀은 조선과 청나라에서 수입한 것이었으며, 벼농사는 성공하 지 못하고 있었다. 한인들은 이주 초기부터 벼 재배에 집착하였다. 한민족 은 옛부터 벼농사에 익숙하고 농산물 중 최고가치의 작물로 생각했기 때문 에 농사라면 으레 벼농사를 염두에 두었고 이주하여 정착하자 바로 벼농사 를 서둘렀다. 처음 벼농사를 시도한 곳은 남부우수리의 해안지대였는데 이곳은 4월경부 터 7월중순까지 짙은 안개가 끼고 일조량이 짧고 기후가 불순하여 벼재배에 어려움이 있었다. 한인들은 1870∼80년대에 걸쳐 시도와 실패를 거듭하다가 끈질긴 노력 끝에 1917년 그로데고보(Grodegovoe)역 부근에서 시험재배에 성공하였다. 볍씨는 이곳 기후조건과 비슷한 북해도에서 가져와 성공하였다. 이후부터 기후조건이 적합한 지역을 찾아 벼농사를 확장해나갔다. 벼농사는 이주한인이 독점하다시피했으며, 곡물 중 제일 고가품이었기 때문에 한인들 의 경제생활에 활기를 불러일으켰다. 이곳의 황무지를 논으로 개간하는 일은 비교적 쉬웠으나 강수량의 부족으로 애로를 겪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서 저수지를 만들어 가뭄을 극복해 갔다. 1920년대에는 이미 쌀 3만석 이상을 생산하고 볏짚 13만관 정도를 일본 군에 팔아 부수입을 올리기도 했다. 이와같은 극동노령에서의 벼농사의 성공 은 만주 이주 조선족이 수전을 개간하여 중국 영농의 대혁신을 일으킨 것 과 같은 현상이었다. 벼농사의 성공 이후 한인의 주식은 조에서 쌀로 바뀌 었고, 겨울에는 우반(牛飯)으로 부르는 소고기비빔밥을 애용하고, 여름에는 점심 대용으로 메밀국수를 즐겨 먹었다. 대체로 식기(食器)는 작은 그릇을 사용했지만 가난한 가정에서는 세숫대야나 큰 함에 밥을 퍼서 여럿이 둘러 앉아 식사를 했다. 술은 상류급에서는 보드카(러시아술)를 마시고 노동자는 쌀로 빚은 소주를 들었다. 당시 조선에서와 같은 탁주를 마시는 사람은 드 물었다. 담배는 거의가담뱃대를 사용했으며, 더러는 아편을 흡입하는 자도 있었다. 셋째, 가옥은 농촌과 도시가 확연히 달랐다. 농촌에서는 농가로 적합한 형태의 집을 지었다. 특히 설계에서 배려한 점은 겨울철의 혹한을 이겨내 기 위하여 방과 부엌의 구별없이 방안에 방바닥과 같은 높이로 솥을 걸고 부엌을 설치하여 보온이 잘 되도록 하였다. 함경북도 북단의 한옥과 흡사 했다. 집은 농촌의 특성상 거의가 자기 것을 가졌고, 셋집에 사는 사람도 있었는데 이는 갓 이주해온 사람들이 집을 마련할 때까지 당분간 이용하 는 경우였다. 도시 부근에 있는 한인가옥은 러시아식 구조의 목조로서 지붕 은 판자로 덮고 방바닥은 농촌집 같이 온돌을 놓아 한·러 절충식이었다. 변소는 상류층에 있어서는 집에 붙어있었으나 중류 이하는 공동변소를 이용 하였다. 도시 내에는 한인의 거주지역을 한정하고 한인의 중하급 노동자의 불결 함을 이유로 위생상 문제가 있다고 하여 타민족과의 혼거를 금했다. 시내에 비교적 자유롭게 주거가 허용된 한인은 러시아 국적을 가지고 시내에 부 동산을 가진 자와 영업감찰을 가지고 시내에서 상업을 하는 자 및 러시아 인에 고용된 자에 한해서였다. 특히 하바로프스크시와 같은 데서는 한인 노 동자의 시중통행까지 금지한 사례가 있었다. 한편 이주한인들의 생활풍속과 관습을 살펴보면 이주 전 조선에서의 그 것과 별 차이가 없었다. 관혼상제의 예식은 거의 다를 바 없었으며, 설에 는 1주일간 휴업하고 일가 친척을 찾아 인사하러 다니고 술을 마시며 이국 의 향수를 달랬다. 단오와 추석 때도 조선에서의 풍습이 그대로 행해졌으며 , 촌락에서는 점을 치고 액운을 막는 굿을 하기도 했다. 이처럼 이주한인 들은 자연환경에는 빨리 적응하면서 주재국의 제도와 러시아인과의 접촉 같 은 사회적 환경에는 쉽게 적응하려 하지 않았다. 다만 일상생활에서 변해가 는 점이 있었다면 러시아인들과 잦은 접촉을 함으로써 일상의 인사에서 악 수를 하고 한어와 러시아어를 혼용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한인 사회의 본질적인 변화는 아니었으며, 한민족의 전통문화는 계승되었고 민족정 체성도 유지되었다. 이렇게 된데에는 이주 1세들이 조국에 대한 확고한 인 식과 민족 전래의 윤리관을 견지했고 또한 끊임없이 새로운 이주자가 합류 했기 때문이다. 특히 1900년대 초부터는 많은 망명지사들이 이주하여 민족혼 을 일깨웠기 때문이었다. 이주한인들의 생활상에서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종교문제였 다. 종교문제는 그들의 생명줄인 토지와 직결되었기 때문이다. 토지를 얻기 위해서는 러시아에 귀화해야만 했다. 귀화자에게는 무상으로 15데샤티나의 땅을 분여하고 그 외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귀화하 기 위해서는 러시아정교로 개종하는 것이 선행조건이었다. 제정러시아는 정교 (政敎)일치로 정치권력과 종교가 통일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귀화조건에 그들 의 국교인 러시아정교를 강요하게 된 것이다. 한인의 입장에서는 러시아정교 수용, 귀화, 토지취득이 연관되어 있어 내심으로 거부하면서 겉으로는 정 교신자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뒤바보가 쓴 아령실기(俄領實記)에 보면 "극동노령에 이주한 한인들은 마 음에도 없는 러시아정교를 믿지 않으면 안되었고, 또한 세례를 받지 않으면 안되었다"고 기술하였다. 러시아정교에 귀의한 신자일지라도 결혼과 장례식 등은 조선 고유의 방식으로 거행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심지어 러시아정교 의식으로 결혼식을 거행한 뒤에 다시 조선 전통혼례를 거행하였다. 한인들의 러시아 귀화를 처음부터 부정적으로 보던 운테르베르게르(Unterberger)총독은 "비록 한인의 일부가 정교를 수용하였지만 이것은 표면적일 뿐이다. 한인 들은 러시아에 영구히 정착하려고 노력하면서도 동화되려고 하지 않고 러시 아에 한인 자신들의 사회를 만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시각은 정확했다. 이주한인들에게는 신앙보다는 빵의 해결이 급선무였기 때문이었다. 1910년 조국이 일제에 강점되자 한인들은 정신적으로 방황하게 되었다. 비귀화한인들은 러시아 국적을 취득할 것인가 아니면 일본 국적을 인정할 것인가라는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일본을 적대시하던 대다수의 한인들 사이에는 러시아국적을 취득하려는 경향이 급 속히 증대하여 희망자가 3만명에 이르렀다. 이때는 빵을 위해서가 아니라 호신책이었다. 힘없는 민족의 이주 생활은 이렇게 서러움이 겹쳤다.

 

이윤기해외한민족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