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민족 영토

[동북아 한민족을 찾아서.27] '러' 혁명 속 연해주 한인

지식창고지기 2009. 5. 18. 12:41

[동북아 한민족을 찾아서 .27] '러' 혁명속 연해주 한인

 

혁명이란 구제도와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체제를 수립하는 군사·정치 적 행위이다. 이 과정에서 야기되는 일련의 행동은 오직 물리적 힘에 의존 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새 질서가 확립될 때까지 전복과 반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광폭과 혼란의 소용돌이가 연속된다. 이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극동 노령지역 한인들은 휘말렸다. 1917년 2월 러시아혁명이 발발하여 볼셰비키혁 명이 성공하고, 1922년 10월25일 일본군이 블라디보스토크항을 떠날 때까지 5년7개월 동안 연해주와 흑룡주에는 내전상태가 계속되었다. 이 전쟁의 와중 에 러시아의 멘셰비키파(백군)와 볼셰비키파(적군), 연해주에 진주한 일본군, 그리고 한인들의 원호(原戶)세력과 여호(餘戶)세력이 서로 각기 입장과 권 익을 옹호하기 위해 합종연횡하는 투쟁이 전개되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러시아의 혁명은 어디까지나 내국 문제였는데 1918년 8월 일본군이 개입하여 멘셰비키파를 도움으로써 전쟁 양상이 복잡하고 치 열하게 되었다. 이곳 한인들은 제정 러시아의 기존 체제를 지지하는 원호세 력과 볼셰비키혁명파를 지지하는 여호세력으로 갈라서게 되었다. 혁명이 일어 나던 초기 이주한인들의 거의 대부분은 혁명 이념에 대해서는 잘 아는 바 가 없었고, 조선의 전통적인 유불사상의 영향을 받아 신사조의 사상적인 동 요도 없었다. 따라서 10월혁명이 폭발되고 원동지역에서 볼셰비키혁명파와 반 혁명 백파 간에 격렬한 전투가 일어났을 때까지 두 파간의 대립에는 별 관심이 없었을 뿐 아니라 러시아에 어떤 정권이 들어서든지 이주한인들에게 는 특별한 상관 관계가 없는 것으로 알았다. 다만 한인 지도자들간에 원호 인 중심의 고려족 중앙총회와 여호인 중심의 한인사회당(후일 고려공산당) 결성 과정에서 한때 대립했었다. 원호인들 가운데 1914년 구라파대전시에 징 집당해서 서부전선에 참가하고 후에는 러시아 내전에서 백군의 일원으로 싸 웠던 일이 있었다. 그러나 백군 측에서 활약한 한인의 수나 활동은 후일 적군 편에 가담한 세력에 비하면 아주 약했다. 1918년 봄 러시아의 혼란한 틈을 타서 일본군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 하였다. 일본은 볼셰비키를 섬멸하고 러시아에 구질서를 회복시킨다는 구실로 멘셰비키파를 도와 원동지역 도시들을 점령하고, 이곳 한인들을 일본의 식 민지 국민으로 간주하여 조선에서와 같은 식민제도를 실시하려고 하였다. 이 에 일본의 흉계를 간파한 한인들은 원호와 여호의 입장을 초월, 혁명과 반 혁명간의 내전 문제를 떠나서 항일투쟁이라는 명분으로 단합하고 일본군과 백군파를 배격하기 위해 볼셰비키파를 도와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볼셰비키 파에 가담한 무장세력 중엔 만주에서 연해주로 넘어온 대한독립군단(김좌진, 홍범도, 이청천 등이 지휘)과 러시아령 내의 혁명세력(한국독립을 위한) 및 일반 거류민 등이 포함된 실로 막강한 세력이 있었다. 이때 한인들은 정규군이라기보다는 주로 빨치산 부대를 조직하여 게릴라전으로 전과를 올렸 는데, 원동지구에서 활동한 한인 빨치산 부대만 47개나 되고 그 인원 수는 1만명이 넘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이렇듯 한인들이 백군토벌전에 참가한 동기는 사상적인 이유에서가 아니 라 이 혁명전을 이용해서 국내 진공을 위한 군사훈련을 쌓고 무장을 갖추 는 데 있었다. 아울러 일본군은 볼셰비키의 적인 동시에 한인의 적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는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한인의 전투 상대 는 백군과 직접 교전한 적도 있었으나 대체로 일본군과의 접전이 많았고 전과도 크게 올린 바 있었다. 볼셰비키혁명 이후 한인사회의 주목할 동향은 볼셰비키혁명을 적극 지지 하면서 “조선해방운동은 러시아의 공산주의자들이 달성한 사회주의 방법으로 투쟁하자”는 사회주의 혁명운동이 발흥한 것이다. 연해주 민족운동의 지도 자 이동휘는 1918년 2월 하바로프스크에서 원동 소비에트 인민위원장 크라스 노취코프, 원동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외교부장 김알렉산드라와 손을 잡고 한인 사회당 조직에 착수했다. 먼저 중국과 러시아 양국에 산재한 ‘조선인 정치 망명자’를 망라한 항일운동 망명자협의회를 개최하였다. 이 협의회에는 치타 에서 온 고성삼을 비롯하여 흑하(黑河)에서 이원해·한자문, 옴스크에서 김용 환·심백원,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신보 주필 김하구, 수청(水淸) 사범학교의 장기영·최태열 등이 왔다. 또한 훈춘에서 신민단 단장 김규면, 북경에서 온 유동열, 서간도 독립단 대표 양기탁, 그리고 북만 밀산에 잠시 피신 해 있던 홍범도·김성무 등이회집했다. 특히 국내외 항일민족운동가 중에서 신망이 두터운 한족회 대표 이동녕이 참가했으며, 그 외 김립, 박애, 이 한영, 안공근, 윤해, 오하묵, 이인섭, 오와실리, 임호 등 후일 공산주의운 동에 깊이 관여한 인물들이 참가했다. 이동휘의 사회로 열린 이 협의회는 러시아 볼셰비키혁명과 조국독립운동 과의 관계 설정과 이념 문제를 두고 양분되었다. 한 파는 민족주의적 입장 을 고수, 광한단(光韓團)을 조직하여 볼셰비키 원동집행위원회의 후원만을 받 자는 주장인 데 반하여 다른 한 파에서는 볼셰비키혁명을 적극 지지하고 이 연계선 상에서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자는 주장을 했다. 이러한 의견 대 립은 끝내 합일점을 찾지 못하고 결렬되었으며, 민족주의 입장을 견지하던 계열은 탈퇴하였다. 이동휘를 중심으로 한 김알렉산드라, 유동열, 김규면, 이인섭, 김립, 한 형권 등은 1918년 6월 하바로프스크에서 당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위원장에 이동휘, 부위원장에 김규면을 선출했다. 이동휘는 1919년 4월에 당본부를 블 라디보스토크로 옮기고 고려공산당이라 개명한 후 모스크바에 가서 레닌을 만나 당의 승인을 받은 다음 1919년 8월에는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 국무총 리에 취임하였다. 이러는 가운데 1920년 6월 레닌정부와 임시정부 간에 다 음과 같은 조약이 체결되었다. 1) 한국정부는 공산주의를 채택하고 선전활동 한다. 2) 소비에트 정부는 한국 독립운동을 지원한다. 3) 시베리아에 있어 서의 한국군 집결과 훈련을 허용하고 보급은 소비에트정부가 담당한다. 4) 한국군은 지정된 소비에트군 사령부에 예속된다. 이에 따라 레닌은 원조금 200만루블 지급을 지시했으며 제 1차 지원금 60만루블이 한형권에게 수교되 었다. 이 지원금의 사용에 대한 내용이 불명확하여 의혹이 쌓이는 가운데 파쟁이 생겨 고려공산당과 임시정부까지 분열을 초래하게 되었다. 한편 1920년 4월에는 이른바 4월참변이라는 대사건이 발생하였다. 1920년 3월12일 니콜라예프스크 항에 머물고 있었던 일본군과 일본 민간인들이 볼 셰비키군대의 습격을 받고 전멸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볼셰비키군이 이 습격 을 감행할 때 한인 무장독립군도 가담하였는데 한인부대의 공격이 치명적이 었다. 이에 일본의 시베리아주둔군은 이주한인에 대하여 격분, 4월5일 밤 블라디보스토크 시내 볼셰비키 기관을 모조리 섬멸하고 신한촌을 습격하여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신한촌 뿐 아니라 우수리스크, 하바로프스크, 포시에 트, 스챤 등지에서도 한인들을 공격하고 대량 검거, 방화, 파괴, 학살 등 의 만행을 자행하였다. 자료에 의하면 300여명이 살해되고 380여명이 체포되 었으며, 한민학교와 한인신보 건물을 불태우는 한편 한인단체들의 중요한 서 류와 기물을 파괴, 압수해갔다. 그리고 국민의회 사무소에 헌병대 분견대를 주둔시키고, 자위대라는 헌병보조기구를 설치하여 신한촌을 통제했다. 4월참변 후 신한촌 한인 지도자급 인사 조영진, 박대성, 이설, 함서인, 이동환, 이형욱 등은 민심의 동요를 진정시키고 새로운 활기를 진작시키기 위하여 그 수습책으로 민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최상위급에 있던 한인지 도자들은 신한촌을 탈출하였고, 일본군이 한인들 회유책으로 친일단체, 한인 거류민회를 조직하고 식량, 교육, 의료 등 선심책을 폄으로써 이에 동조하 는 원호 한인들이 있었다. 친일 거류민회원의 상당수는 한인 재산가층으로서 일본 주둔군의 통제에 대한 협조와 호의적인 생각을 가졌다. 그들은 연해 주가 공산화되는 사태를 저지하는 세력으로서 일본 주둔군의 역할을 이해하 고 있었기 때문에 지시하는 대로 협조하는 자세를 취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신한촌의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종전의 독립운동기지로서의 신한촌 의 기능은 쇠퇴하였다. 그러나 4월참변 이후 일본의 직접적인 감시와 집요 한 회유에도 불구하고 일부 한인들은 계속해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같은 해 5월 신한촌의 양주순, 윤병한, 김태준, 김봉식, 이동화, 장주섭, 김병 익, 심원회 등 15명은 암살단을 조직해 일본 고관, 친일한인, 독립운동 군 자금 헌납을 불응하는 한인들의 암살을 기도했다. 연해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이 볼셰비키와 한인유격대에 의해 1920년 10월 블라디보스토크항을 철 수하고 신한촌의 독립운동도 재기의 기회를 가지게 되었으나 연해주가 소비 에트화됨에 따라 독립운동의 형태가 직접적인 것으로부터 간접적으로 또는 실천적인 것으로부터 지원적인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윤기해외한민족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