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민족 영토

[동북아 한민족을 찾아서.28] 연해주 한인의 강제이주(1)

지식창고지기 2009. 5. 18. 12:46

[동북아 한민족을 찾아서.28] 연해주 한인의 강제이주(1)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과 그 외 여러 지 역에 무려 40여만명의 고려인(한인)들이 잊혀진 역사의 뒤편에 소외된 채 어렵게 살고 있다. 그들은 누구이며 어떤 연유로 중앙아시아의 반 사막지 대에 정착하게 되었는가. 여기에는 한민족의 한 맺힌 숨은 사연이 있다. 그들의 지금의 생활 상태는 어떠하며 앞으로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 물음은 21세기 한민족의 진로를 개척함에 있어 반드시 배려되어야 할 과제 들이다.

130여년 전 조선 말기의 사회.경제적 상황은 실로 어려웠다. 좁고 척박 한 땅을 경작하며 살던 농민들에게 밀어닥친 환경적 위협은 그들로 하여금 월강이라는 피맺힌 결단을 요구했다. 가렴주구에 시달렸고 설상가상으로 몇 년째 지속된 흉년은 가난한 서민들로서 감내하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1863년 겨울, 생활에 쪼들린 함경도 북단의 민초(民草) 13가구가 새 생활 의 활로를 찾아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 우수리강 유역에 주위 사정을 살 피면서 조심스레 봇짐을 내렸다. 그들은 모든 것이 낯설고 어려운 이국 땅 에서 인내와 끈기와 필사의 노력으로 새로운 삶의 터전을 가꾸었다.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이주를 억제하였으나 이주는 가속되어 1930년대에는 20만 명을 상회했다. 이주한인들은 토지 분여와 귀화 문제를 비롯하여 자녀교육 과 종교 문제, 조국 독립운동과 러시아혁명을 거치면서도 민족 정체성을 견지하며 자신들의 앞에 펼쳐진 신천지를 '약속의 땅'이라고 생각하고 열 심히 피땀을 흘려 생활 터전을 닦아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이들은 공산당의 청천벽력같은 명령에 의해 가축 을 운반하는 화물열차에 실려 이역만리 중앙아시아의 황량한 벌판에 내팽 개쳐졌다. 이주에서 또 이주하는 유랑의 신세가 된 것이다. 열차에 짐짝처 럼 실려서 한달여 동안 주야로 달리는 과정에서 이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힘없는 조국과 민족의 서러움을 절감하면서 서글픈 민족 유전(流轉)을 생각하지 않았을까.

근대 민족국가 성립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회 구성원들의 운명 은 조국과 민족의 명운과 결부될 수밖에 없었다. 인류가 보편적 가치로 추 구하는 휴머니즘이란 어디까지나 하나의 목표 문화(goal culture)로서 제 창되었을 뿐, 실제의 국제 관계에서는 엄연히 국가와 민족의 이해관계에 결부되고 그것도 힘에 의해서만 좌우되었을 따름이다. 근래 21세기에 접어 들면서 세계화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마치 세계화만이 시대적 조류이 며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주장한다. 이러한 담론 중에 민족의 위상과 정체성을 운운하면, 이는 시대착오적이고 국제사회에서의 소외를 자초하는 것이라고 일축한다. 과연 그러한가. 세계화만 추진하면 한민족이 당면한 통일 문제를 비롯한 국내외적 제반사가 해결될 것인가. 그러나 지 구 여러 곳에서 야기되고 있는 분쟁은 거의가 민족문제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향후 국제관계에 있어 행위의 주체는 국가가 아니라 민족임을 직시 해야 할 것이다.

1937년 9월부터 12월 사이에 극동 노령 한인들은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 시아로 강제이주 당했다. 그 인원수는 지금껏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대략 18만명 정도로 알려져 있다. 한인들은 불과 출발 4-5일전에 이주 통 보를 받았고 왜 떠나야 하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으며 물어볼 곳도 없 었다. 러시아 당국은 이주 통보를 한 후 한인들의 여행을 중지시켰고 마을 과 마을간의 교통을 차단시켰다. 경찰이 한인마을을 포위하여 한 사람도 이탈자가 없도록 강경조치를 했으며 만약 반항하거나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자가 있으면 엄벌에 처한다는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이에 앞서 한인 지도자급 인사 약 2천500명을 사전 검거하여 소요의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 하였고 수송열차가 떠난 후에 은밀히 이들을 처단하였다.

한인들을 실은 첫 열차는 9월21일에 블라디보스토크역을 떠났다. 막 추 수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한인들은 그동안 온 정성을 들여 알뜰히 일군 농 토와 농작물과 집과 가축과 농기계와 그 외 모든 재산을 다 버려둔 채 단 지 며칠간의 식량과 옷가지를 가지고 열차에 올랐다. 열차에는 가축 분뇨 냄새가 지독하여 코를 들 수 없을 뿐 아니라 차가 달리면 널빤지 사이로 찬바람이 들어와 추위가 말할 수 없었다. 거기에다 더욱 곤란한 점은 차가 달리는 사이 대소변을 봐야 할 때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생겼다. 특히 노인 과 어린이들의 경우에는 염치고 체면이고 차릴 수 없이 실례를 할 수밖에 없었다. 목적지까지는 대개 40여일이 걸렸는데 사람은 모두가 지쳤고 식량 도 떨어졌다. 겨울이 닥쳐오자 노인과 어린아이들은 병마에 시달렸고 추위 와 굶주림으로 많은 사람들이죽어갔다. 사람이 죽으면 흰옷이나 헝겊을 흔들어 사람이 죽었음을 알렸다. 위생 상태가 극도로 불량하여 전염병이 생겼고 여자들의 머리와 남자들의 옷에는 이가 득실득실했다. 열차가 역에 도착하면 여자들은 창을 열고 머리칼을 털었고 남자들도 속옷을 벗어 털었 다. 이가 하얗게 쏟아져 나왔다. 좀 큰 역에 열차가 서면 경비병들이 병자 를 조사하여 데려갔다. 완치하여 돌려보낸다고 약속을 하고 데려간 후로는 실종되었다. 이러한 소문이 나돌자 가족 가운데 환자가 생기면 알리지 않 았고 병자도 앓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이러한 강제이주는 실로 사 람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비인간적인 만행이었다. 수송 과정에서 왜 이주 하느냐, 어디로 가느냐를 따져묻거나 또는 비인도적 처우에 대하여 항의하 는 사람은 다음 역에 도착하면 연행되어 행방을 모른 채 실종되어 버렸다.

강제이주의 원인에 대해서 대체로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한인들을 일본의 스파이 내지는 적어도 잠재적 스파이로 간주하여 원동지구를 떠나 게 했다는 것이다. 극동에서 일본과 전쟁을 하게 되면 한인과 일본인을 구 별하기 어렵고 일본의 스파이가 암약하기 쉬운 토양을 근절하는 것이 최상 책이라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사실 러시아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 광대한 영토의 변경 지역에 굳이 적군의 식민지 출신 이민들을 신뢰해야만 할 어 떤 이유도 없었다. 또 한편으로는 스탈린은 극동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항 일운동이 일본의 대러시아 선전의 구실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할 가능성도 있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 지역에 한인들이 너무 밀집해 살고 있었기 때 문에 자칫 자치구를 요구하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감도 갖고 있었다는 추측 도 있다.

둘째는 중앙아시아에 버려져 있던 광활한 땅을 개척하여 식량을 생산하 기 위해서였다는 설이다. 영토에 비해 인구가 적었던 러시아로서는 국토를 개발할 인력이 필요했던 것도 사실이다. 연해주에서 한인들이 황무지를 개 간하여 옥토로 만들고 늪을 수전으로 만드는 한인들만이 가진 경작능력을 익히 보아왔었다. 이러한 근거를 종합해볼 때 러시아 당국으로서는 능히 이주 계획을 세울 만했었다. 그리고 후술하겠지만 이 계획은 적중하였다. 지금까지 강제이주의 원인에 대하여 한인 스파이설이 지배적이었으나, 근 래에 중앙아시아 현지 답사와 새로 발견되는 자료에 의하면 두 가지 이유 가 합쳐진 것임을 알 수 있을 듯하다. 한 자료에 의하면 강제이주 훨씬 전 1920년대 중반에 한인들이 산발적으로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기록이 있고 1924년에는 우즈베키스탄의 수도인 타슈켄트 교외에 최초의 콜호즈(집단농 장)가 성립되었으며 1928년엔 카자흐스탄의 크질.오다주에서도 집단으로 쌀 농사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중앙아시아의 버려진 황량한 벌판은 제정러시아 때부터 유배지로 유명한 곳이다. 여기에 내버려진 고려인들은 주택도 식량도 아무 대책 없이 바로 불어닥친 겨울을 나는 데 온갖 고생을 다 겪었다. 한인들이 연해주를 떠나 올 때는 모든 대책이 강구되었다고 선전했고 수확하지 못한 농작물 손해도 배상해 준다고 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전연 실천되지 않았고 어떻게 영하 20-30도의 삼동겨울을 넘기느냐 하는 생존의 문제만이 눈앞에 가로놓인 것 이다. 필자가 타슈켄트에서 만난 한 노인의 회상을 들어보면 참으로 눈물 겨웠다. 그의 일행이 들판에 하차한 것은 오후 6시쯤이었다. 들판 군데군 데 모여앉아 밤을 지새우는 것이 마치 양의 무리가 떼를 지어 서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인산인해를 이루어 밤새도록 우는 어린이의 울음소리와 노인들의 기침과 한숨소리로 한 숨도 자지 못하고 꼬박 밤을 새웠다. 이들 에겐 죽음만이 강요되었으며 살길이라곤 찾을 수 없는 적수공권 무원고도 의 상황에서 암담과 절망밖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절망 속 에서도 생존을 위한 성스러운 인간의 희구(希求)는 끊어지지 않았다. 무에 서 유를 창조하는 고려인의 끈질긴 인내와 근면과 필사적 노력은 죽음 앞 에서 생환할 수 있는 힘을 발휘케 하였다. 사지에서 소생하는 한민족의 저 력은 자연과 인간을 새롭게 조화시키는 역사의 장을 열게 하였다. 한민족 의 열정은 폭발했고 황무지는 옥토로 변해갔다. 도전에 대한 응전이었다. 이윤기해외한민족연구소장

우수리스크 중앙시장.한인 여자 상인의 얼굴이 인상적이다.

1911년부터 건설되기 시작하여 수많은 항일독립운동가들이 집결, 활동하 였던 블라디보스토크 아무르강변의 신한촌 전경.

시베리아 철도의 시발점인 블라디보스토크 역. 안중근 의사는 대한의병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동지 우덕순과 함께 의거 5일전인 1909년 10월21일 이 역을 출발, 하얼빈으로 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