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민족 영토

[동북아 한민족을 찾아서.29] 연해주 한인의 강제이주(2)

지식창고지기 2009. 5. 18. 12:48

[동북아 한민족을 찾아서.29] 연해주 한인의 강제이주(2)

 

대장간에서 많이 달구어진 쇠가 더욱 단단하듯이 이주 한인들은 민족 유 전(流轉)의 역경을 거치면서 더욱 강인하고 끈질긴 생명력을 발휘하였다. 중앙아시아의 허허벌판에 내던져진 한인들은 슬퍼하고 분개할 겨를도 없이 눈앞에 닥친 겨울을 어떻게 넘기느냐에 여념이 없었다. 땅굴을 파고 갈대 를 베어 움막집을 지었다. 겨울을 나는 동안 추위와 굶주림으로 많은 사람 들이 죽어갔다. 극도로 불결한 위생상태와 아무런 의료대책이 없는데다 전 염병마저 만연되어 병에 걸렸다하면 속수무책으로 죽음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죽어가는 어린이를 안고 애절하게 몸부림치는 어머니의 모습은 차 마 볼 수가 없었다.

이 당시 이주한인들이 첫 겨울을 나는데 얽힌 이야기는 말과 글로는 다 표현할 수 없고, 오늘날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도 없는 생지옥이었다. 필자가 타슈켄트 교외의 고려인 집거촌에서 한 노인과 만나 밤을 지새우며 강제이주와 정착과정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메모를 하는도중에 눈물이 흐르고 또 흘러 메모지가 다 젖었다. 차마 들을 수 없는 사연들을 들으면 서 왜 우리 민족은 이토록 고통과 수모를 겪어야 했던가. 어질고 착하게 평화를 사랑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한민족이 단지 힘없는 이유 때문에 이리 내몰리고 저리 내쫓겨야 했던가. 비정한 국제사회에 오직 힘만이 정의인가 하는 상념에 잠기면서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불운의 역사를 되뇌게 하였 다.

잔인했던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자 한인들은 물을 찾아 강가에 모여들어 수로를 만들고 황무지를 개간하여 논을 일구었다. 조상들이 "굶어죽어도 종자벼는 베고 죽는다"고 했던 속담대로 그들은 이주 당시 관헌들의 눈을 피해 볍씨를 몰래 숨겨 가져갔었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이곳 토양은 다행히도 몇 천년 묵은 초원지대라 땅이 비옥하여 비료 없 이도 농사를 잘 지을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을 제공해 주었다. 이러한 자연 의 덕분으로 한인들은 첫해 추수 후에 가옥을 마련할 수 있었고, 이듬해에 는 상당한 수준의 생활 기틀을 닦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해를 거듭하면서 관개시설을 갖추고 드넓은 초원을 개간하여 4-5년 사이에 중앙아시아 벼농 사 주역의 위치를 확보하였다.

예로부터 중앙아시아의 토착민들은 쌀을 주식으로 하고 있었으나 관개시 설을 제대로 개발하지 못해 논벼를 재배할 줄 몰랐고, 밭벼농사에만 의존 했다. 쌀을 주식으로 하는 토착민들이지만 쌀은 귀한 식량으로 생일이나 귀한 손님이 올 때가 아니면 쌀밥을 먹지 못했다. 벼농사에 숙달되어 있던 한인들은 중앙아시아의 광활한 황무지를 비옥한 논으로 전환시켜 벼농사에 박차를 가했다. 빠른 시간 내에 생활의 터전을 닦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다른 토착민족들과 공존할 수 있는 위치를 굳혔다. 한인들은 콜호스(집단 농장)를 형성하여 최고의 벼 수확 기록을 세웠고, 이러한 한인들의 우수한 수도작 농법은 모스크바를 통해 전 러시아권에 알려졌으며, 러시아 당국으 로부터 영웅칭호를 받은 사람도 많았다.

한인들의 중앙아시아 첫 기착지는 카자흐스탄의 우슈토베지역이었는데 벼농사에 성공하면서 자신감을 얻게 되자 점차 중앙아시아 전역으로 확산 되어 갔다. 이 확산추세는 러시아 당국에게는 쌀농사지역의 확대와 증산이 라는 좋은 측면과 함께 원래 강제이주의 주목적이었던 한인들의 보안문제 가 뒤따랐다. 러시아 당국은 한인들의 경제.사회적 활동에 굴레를 씌웠다. 그것이 바로 전 한인에게 부여된 '조건부공민증'이다. 이 조건부공민증 소지자는 거주공화국 이외의 지역에는 주거를 옮기거나 여행을 할 수 없으 며, 국가기관에 취업할 수 없음은 물론 군에 입대하는 것도 금지되었고, 은행에서 돈 대출도 금지되었으며 취학에도 제한이 있었다. 또한 한인학교 는 모두 폐쇄당했고, 한국어는 소수민족어로 인정받지 못하였으며 이로 인 해 한민족의 문화와 정체성을 유지하는데 큰 타격을 받았다.

이러한 고려인에 대한 민족적 불평등과 제약들은 1953년 스탈린 사망 후 에 겨우 해제되었다.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한인들은 비록 정착과정에 서 엄청난 고난과 역경을 감수해야 했지만, 그러나 천혜의 자연조건에 힘 입고 천성적 근면성으로 낯선 사회.문화적 풍토에서 성공적으로 적응할 수 있었다. 이들이 중앙아시아에 뿌리를 내린 지 60여 년이 지나면서 지금은 중앙아시아 속의 '한국인 사회'를 이루고 있다. 처음에는 우선 농사에 손 을 대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의 직업분야도 다양해지고노동자, 전 문기술직, 또는 교원, 의사, 그 외 사무직에 종사하는 사람도 많아져 195 0년대 이후에는 한인들이 도시로 많이 유입되었다.

도시로 유입되는 큰 이유 중의 하나는 한인 특유의 자녀 교육열이 높기 때문이었다. 한인들이 자녀교육에 대한 열성은 고국에 있을 때나 연해주로 이주한 후나 또는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 후에나 그 열의가 식지 않 았다. 자녀교육을 위해 도시로 전입해야 했고, 또 교육을 받은 자녀들은 농촌으로 돌아가지 않고 도시에서 직업을 구하고 체재함으로써 한인들의 도.농간의 거주구성비는 역비례 현상이 일어났다.

우즈베키스탄의 수도인 타슈켄트시의 코일륙가(街)는 전 주민의 60-70% 가 고려인으로서 '고려 서울'이라고 불리고 있다. 이 거리에 가면 한국음 식을 만들 수 있는 재료들을 파는 가게가 있고, 고려식당이라고 하는 한국 음식점도 있다. 이러한 거리가 형성되고 한국 고유의 전통적인 풍경을 볼 수 있는 것은 한인 집단농장의 영향 때문이었다.

일상생활에서 항시 접촉하고 공동작업을 요하는 집단농장에서 수 천명의 한국인들이 집단적으로 살고 있음은 한민족의 문화와 한국어를 유지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주 초기 거의 모두가 수많은 집단농장 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외부와의 접촉은 별로 없었고, 따라서 한국어 가 일상생활 용어가 되었으며, 한인의 생활풍속도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 은 채 그대로 유지될 수 있었다.

설.추석 때의 절차를 지내는 풍습이라든가 자녀 돌, 결혼식, 회갑연, 장 례식 등은 한국에서와 별 다름없는 행사를 치렀다. 복장도 전통한복을 차 려 입었고, 음식은 평일에도 쌀밥과 김치를 빼놓을 수 없고 국수, 식혜, 떡, 그 외 한국전통 음식을 즐겨 먹었으며, 개장국도 선호하는 음식이었다. 고려인들에겐 이 모든 것들이 전래된 관습에 의한 것일 뿐, 그들의 가슴 속에 조국을 크게 의식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두 번의 이주생활에 서 조국과는 연계가 끊어졌고, 나이가 든 분들의 희미한 기억 속에 아련히 떠오르는 추억 정도가 고작이었다. 길게는 한 세기, 짧게는 반세기 이상 이국에서 생활하면서 조국에 의지해 본 일도, 구원을 받아 본 일도 없는 이곳 고려인들이 생활 속에서나마 옛 풍속을 간직하고 문화를 계승하며 잡 혼을 거부한 채 한민족의 순수성을 지켜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던 중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에게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들이 펼쳐 졌다. 1988년 서울에서 올림픽게임이 개최되어 조국에 대한 새로운 사실과 인식을 갖게 된 것이다. 가난한 조국, 외국의 반식민지 상태로만 인식되어 있던 조국이 올림픽을 주최할 만큼 국력이 신장하고 잘사는 조국으로 변해 있었던 것은 전연 상상 밖이었다. 그들은 이 새로운 사실에 눈을 뜨면서 자랑스런 조국과 민족적 자긍심을 가지게 되었다.

세계 속에서 한국의 위상이 높아짐에 따라 지난 세월 비극의 과거를 가 슴속에 간직한 채 인고의 삶을 살아온 고려인 사회는 이제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고 있다. 그들은 한 민족구성원의 행.불행이 그 민족 공동체 자체 의 번영에 의하여 좌우된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다. 특히 고르바초프 집 권 이후 러시아 내의 변화와 아울러 한국과의 문호가 개방되면서 한국의 물질적 정신적 영향력은 중앙아시아 고려인사회에 물밀듯 밀려들어갔다. 사고의 대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알마티(알마아타)와 타슈켄트에 대기업이 진출함으로써 경제.사회적 인식의 변화는 가속화 되었고, 이곳 고려인들과 한국과는 정신적 시간적 거리를 단축시켜 놓았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이 러시아로부터 독립하 면서 또다른 국면을 맞게 되었다. 신생국가들이 독립하게 되면 거의가 하 나같이 그들의 역사를 찾고 언어를 부활시키며 자기 민족의 종교를 지키려 고 한다. 이러한 신생국의 건국적 과제에 고려인들이 적응해야 하는 것이 다. 거주국의 역사를 배우고 언어를 배우며 그들의 종교를 믿도록 강요당 하고 있다. 지금껏 러시아 역사와 러시아어에 익숙해 있으며 종교문제에는 별 관심을 갖지 않고 살아온 고려인들이 이제와서 또다시 러시아 국적을 가질 것이냐 거주국 국적을 가질 것이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선 것이다.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은 끝없는 시련의 연속에서 고뇌하고 있다. 이러한 그 들의 처지에 대해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대책을 강구할 것인가의 과제를 함께 고뇌해야 할 것이다.

 

이윤기해외한민족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