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기관/언론 기관

그곳에 가면 1400년전 러브스토리가 있다

지식창고지기 2009. 7. 31. 09:47

[경남일보]

그곳에 가면 1400년전 러브스토리가 있다
전북 익산 미륵사지를 찾아서
최창민 기자  

 ‘맛동이의 노래를 아시나요’
 권력투쟁의 희생양으로 왕궁을 떠나야 했던 소년 서동은 궐 밖 오금산 부근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마를 팔아 연명했다. 젊음이 재산인 서동은 간 큰짓을 한다. 신라 진평왕의 막내딸 선화공주를 탐할 목적으로 어머니 연미랑을 모시고 신라에 들어간다. 서동은 경주의 아이들에게 마를 주며 꿰어 자신이 지은 노래를 가르쳤다.


 이들의 입으로 전해진 노래는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시집가서 서동이를 밤이면 몰래 안고 간다.”는 허위 내용이었다. 이 노래를 들은 신라 진평왕은 크게 노하며 애꿎은 선화공주를 귀양 보냈다. 때를 기다린 서동이 귀양길에서 공주를 만나 이실직고하고 백제로 가서 함께 살았다.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전하는 서동에 관한 내용이다.


 믿기 어렵지만, 믿고 싶어지는 백제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의 러브 스토리이다. 맛동이(마캐는 아이)의 노래는 그들의 만남을 강제한 이른바 향가 서동요(薯童謠)이다. 이후 서동은 백제의 30대 무왕(武王·600∼641)에 등극한다. 그리고 훗날 선화공주의 간청으로 미륵사를 건립한다.
 
 베이징 올림픽을 앞둔 7월 말 익산에서 뉴스가 전해졌다. 미륵사지석탑 복원 해체작업 중 석인상이 발견됐다는 소식이다. 뉴스 사진으로 봐선 돌을 떡 주무르듯 했을 백제인들의 작품 치고는 너무도 토속적이었다.


 하지만 선화공주의 체취가 묻어 있는 석인상일 터. 미륵사지 출토, 석인상에 끌렸다. 정확히 말하면 미륵사지석탑에 이끌렸다.


 가로수 그림자가 더욱 짙어지고 길게 늘어지는 계절이다.
 1400년 전의 역사가 살아 있는 미륵세계, 마한 백제, 혹은 금마백제는 생각보다 우리 가까이에 있다.


 도내에서 익산까지 교통은 좋아졌다. 통영-대전고속도, 장수분기점에서 빠져 지난해 12월 개통한 익산-장수고속도를 이용하면 단숨에 갈수 있다.


 잃어버린 500년 한성백제(BC 18~475)를 지나→웅진(공주)→사비(부여)백제에 이어 말년 30대 무왕은 선화공주의 간청을 받아들여 마한천도로 백제번영을 꾀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 꿈은 실현되지 못하고 의자왕에 이르러 백제 멸망(660)을 가져온다. 무왕과 선화공주의 꿈이 서린 미륵의 세계, 마한백제(익산)에는 백제문화의 끝자락을 장식한 큰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국보11호 미륵사지 석탑


 미륵사지 서쪽에 있는 석탑으로 무왕 2년 때 건립했다. 높이 14m, 사각형의 다층석탑으로 현존하는 국내 최고, 최대의 조각품이자 건축물이다. 무너져 내리기 전 규모와 화려함을 짐작케 한다.


 석굴암을 조각한 신라인의 예술성 못지않은 정교함에 감탄을 자아내게 했던 석조건축물이었다. 톱으로 자른 듯, 대패로 다듬은 듯 바위를 제단해 목탑처럼 완성했다. 이 석탑은 번개와 전쟁, 인위적인 개축 등으로 1400년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는 못했다. 개탑의 흔적은 후백제 ‘혜거국사’의 비문에 나와 있다. ‘미륵사의 개탑(開塔)을 계기로…’


 탑의 붕괴에 대해서도 삼국사기에 신라 성덕왕 18년(719)에 ‘미륵사지가 벼락을 맞았다’ 는 기록이 있다. 이때 무너진 것인지는 몰라도 미륵사지석탑은 서남 부분이 무너진 채 지금까지 6층까지만 남아 있었다. 이 마저도 일제 강점기 때 서남쪽을 시멘트로 발라 버렸다.

 


 1998년 문화재 위원회의 해체 복원결정으로 탑을 둘러 싸 콘센트 막사를 지어 공사가 진행 중이다. 2014년까지 공사가 예정돼 있다.


 내부로 들어가 관람할 수 있도록 돼 있지만 일반인은 윗면과 동쪽면만 볼 수 있다. 석탑 1층 기단 하부까지 해체했는데 이번에 석인상(폭 59cm,높이 92cm)이 발견된 것이다. 1층 기단 남서쪽 모퉁이 석축 안에서 두상과 몸체가 온전히 발견됐다. 석탑 수호신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역시 관람객은 뒷면만 볼 수 있다.


 석탑 해체 중 나온 6,5,4,3,2층의 부자재들은 가람 앞에 복원을 위해 이름과 위치를 붙인 채 널려 있다. 미륵사지 관계자는 “첨단 과학을 동원한 해체 복원작업인데 그 끝이 어딘지, 그리고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복원작업이 쉽지 않음을 말한다.

 

 #사적 150호 미륵사지


 미륵사는 특이한 점이 많다. 보통 사찰은 1탑 1금당이나 미륵사는 3탑 3금당이다. 3원이 1가람인 것이다. 중앙에 목조탑을 중심으로 양옆에 동·서 석탑을 배치했다. 뒤로는 가람 터가 펼쳐져 있고 뒷산은 과거 용화산으로 불린 미륵산이다.


 이를 건립한 백제 장인들은 신라에 초청돼 거대한 황룡사 9층목탑을 세웠는가 하면 일본에 건너가 유명한 목조건물을 건축했을 정도로 위세를 떨쳤다.


 중앙 목조탑지에서 왼쪽이 복원 중인 미륵사 9층석탑. 오른쪽이 1991년 공사를 시작해 1년만에 ‘후다닥’지은 동원9층석탑이다. 일부 사학자들은 폭파해버리고 싶다는 말을 했다니 졸속이었던 것같다.


 #미륵사지 유물전시관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석제품을 비롯해 유리, 청동, 철제품 등 다양한 유물이 전시돼 있다. 특히 높이 1m가량의 치미는 보는 이를 압도할 정도다. 망새로 불리는 치미는 사찰이나 궁궐의 용마루 양쪽 끝을 장식하는 특수기와로서 이것만 봐도 미륵사의 규모를 가늠하기에 충분하다.

 #금동향로 특별전

 전시관 한쪽에는 이곳에서 출토된 ‘금동향로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오는 9월 30일까지 계속되는데 금동향로의 희귀성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향로는 4개의 다리가 있고 4면에는 정밀하게 새긴 짐승 두상이 붙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현재까지 발견된 것 중 유례가 없는 독특한 형태라고 한다. 이런 모양은 지리산 실상사에 부조의 형태로 나타났지만 입체 실물로는 금동향로가 유일하다고 한다. 절제된 화려함, 부드럽지만 강인함이 내재됐다고 한다. 통일신라 중기에 제작 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익산에는 이 외 마룡지, 익산 쌍릉, 왕궁리 5층석탑 등 백제문화 무왕과 관련된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