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화홍련전> 본문 읽기
/장화와 홍련/억울한 누명/죽음/담이 큰 자가 살아남으리라/원한을 풀다/환생/
장화와 홍련
세종 대왕 시절 평안도 철산에 배무룡이라는 부유한 양반이 있었다. 그는 성품 이 온화하고 재물이 많은데다 좌수(座首, 조선 시대 향소(鄕所)의 우두머리)를 지내 남 부러울 것이 없었지만, 단 한 가지 슬하에 자식이 없는 것이 한(恨)이었다. 부인 장씨는 이 점을 항상 미안해 하였다.
그러다 장씨는 연이어 딸 둘을 낳았다. 배 좌수는 아들이 아니어서 섭섭하긴 했 지만, 큰딸을 장화(薔花), 작은딸을 홍련(紅蓮)이라 이름 짓고 소중히 길렀다. 두 딸이 자라니 용모가 선녀처럼 어여쁠 뿐만 아니라 효성이 극진하였다. 배 좌수 부부는 두 딸을 지극히 사랑하였고, 특히 배 좌수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두 딸을 귀여워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불행이 닥쳐왔다. 장씨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어미를 잃은 두 딸의 슬픔도 대단했지만, 배 좌수는 장씨를 생각하며 몇 시간이고 멍하 니 있을 때가 많았다. 그러나 양반으로서 후사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어 다시 혼처를 구해야만 했다. 그렇게 해서 배 좌수의 집으로 들어온 이가 허씨(許氏) 이다.
허씨는 그 용모를 보면, 두 볼은 한 자〔尺〕가 넘고, 눈은 퉁방울(품질이 낮은 놋 쇠로 만든 방울) 같고, 코는 질병 같고, 입은 매기 같고, 머리털은 돼지털 같고, 키 는 장승만 하고, 소리는 이리 소리 같고, 허리는 두 아름이나 되는 것이 게다가 곰배팔이(팔이 꼬부라져 붙거나 팔뚝이 없는 사람)요, 수중다리(병으로 퉁퉁 부은 다리)에 쌍언청이를 겸하였고, 그 주둥이를 썰어 내면 열 사발은 되고, 얽기는 콩멍석(콩 을 털어 놓은 멍석) 같으니, 그 모습은 차마 바로 보기 어려운 데다 그 심사가 더 욱 불량해서 못할 짓만 골라서 하고 다녔다. 그래도 꼴에 여자라고 허씨는 시집 온 그 달부터 태기가 있어 아들을 줄줄이 셋이나 낳았다.
배 좌수는 이제 대를 이을 아들도 얻었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하지만 배 좌수는 새로 얻은 아들들보다는 장씨가 낳은 두 딸을 더욱 아꼈다. 그리고 틈이 날 때마다 두 딸 방에 들려 장씨 얘기를 주고받곤 하였다.
계모 허씨는 이 점이 몹시 못마땅하였다. 더군다나 못생긴 자신에 비해 장화와 홍련은 나이가 들수록 예뻐지니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계모 허씨는 날마다 장화와 홍련을 박대하였고, 그럴수록 장화와 홍련은 세상을 떠난 친어머니를 그리워하였다. 배 좌수도 허씨가 두 딸을 미워하는 줄 짐작하 고 은근히 딸들을 불쌍히 여겼다. 그것이 더욱 허씨의 심보를 자극해 더욱더 장 화와 홍련을 미워하며 없앨 궁리를 하게 되었다.
억울한 누명
어느 날 배 좌수가 외출했다가 평소와 마찬가지로 딸들 방으로 먼저 갔다. 그 때 장화와 홍련은 계모 허씨에게 온갖 구박을 받은 서러움에 서로 안고 울고 있었다. 배 좌수는 두 딸이 우는 것을 보고 그 이유를 짐작했지만, 집안이 조용 하기 바라는 마음에 내색하지는 않았다.
“너희들이 또 죽은 모친이 생각나서 우는구나.”
두 딸은 아무 대답을 하지 않고 그저 울면서 배 좌수를 볼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니 배 좌수는 한편으로는 측은하고 한편으로 허씨의 심보에 화가 치밀었다.
“너희들이 구박을 심하게 받는 것을 다 안다. 앞으로 너희가 우는 일이 없도록 할 테니 어서 눈물을 거두어라.”
배 좌수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 배 좌수는 즉시 허씨를 찾아갔다.
“당신은 어찌하여 장씨 소생의 두 딸을 미워하는가? 두 딸을 미워하는 것은 곧 나를 미워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모르는가?”
“내가 아이들을 미워한다니, 누가 그럽디까? 당신도 딱하우, 그런 말에 혹해 죄 없는 사람을 나무라다니 당신은 대체 누구 편이에요?”
장씨는 오히려 쇳소리를 지르며 배 좌수에게 대들었다. 배 좌수는 화를 억누르 며 조용히 말했다.
“오늘 이렇게 우리가 부유하게 사는 것은 내가 원래 재물이 많아서가 아니라 전처 장씨가 시집 올 때 거금을 가져왔기 때문이오. 그러니 죽은 장씨에게 고마 워하고 앞으로 다시는 그 아이들을 괴롭히지 마시오!”
허씨는 더 대들려 하다가 무슨 생각이 들어서인지 그만두었다. 허씨가 배 좌수 의 말을 들어서가 아니었다. 어차피 장화와 홍련을 없애려면 그 전에 다른 사람 들에게 잘못 보여 이로울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며칠 후 배 좌수가 밖에 볼일이 있어 나갔다가 밤늦게 돌아왔다. 방에 들어서니 허씨가 배 좌수를 보고 딱하다는 듯이 혀를 쯧쯧 찼다. 배 좌수는 이상한 생각 이 들었다.
“어째서 혀를 차는 거요?”
“아니에요.”
허씨는 무언가 감추는 것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배 좌수는 약이 올라 다시 캐 물었다. 서너 번 물은 후에야 허씨는 조심스러운 듯 입을 열었다.
“당신이 불쌍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내가 불쌍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허씨는 더욱 모를 소리만 했고, 그럴수록 배 좌수는 궁금증이 들었다.
“사실은…….”
“사실은 어쨌다는 거요?”
“사실 오늘 저녁 때 장화가 몸이 좋지 않다며 식사를 하지 않더군요. 그래서 어미 된 마음으로 어디 아픈가 해서 찾아갔지요. 저도 좋은 어미가 되려고 얼마 나 노력하는지 당신은 모를 겁니다.”
“잔말은 빼고 그래서 어찌 됐소? 혹시 장화가 많이 아픈 건 아니오?”
“아니에요. 장화는 깊은 잠에 빠졌더군요. 그래 이불이나 덮어 주려고 이불 속 에 손을 집어 넣었더니 글쎄 이런 물건이 나오더군요.”
허씨는 배 좌수 앞에 피가 뭉쳐진 덩어리 하나를 보였다. 배 좌수는 그 물건을 보고 눈앞이 캄캄해졌다.
“설, 설마……. 장화는 그럴 애가 아니오.”
“쯧쯧. 시집도 안 간 처녀가 멀쩡히 아이를 배서 이렇게 낙태까지 한 증거가 있는데도 당신은 계속 그 애만 감싸고도실 모양이구려. 정말 딱하신 분이네.” 배 좌수는 어쩔 줄을 몰라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착한 장화가 남자를 끌어들여 애까지 배고, 거기에 낙태까지 하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모른 척하자니 이 소문이 혹시라도 밖에 퍼지면 배씨 가문에 먹칠을 하는 셈이었다. 배 좌수는 식은땀이 흘렀다. 그리고 목이 버쩍버쩍 탔다.
허씨는 배 좌수가 딱한 듯 이런저런 계책을 말해 주었다. 배 좌수는 선택의 여 지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허씨의 말대로 잠든 장화를 깨워 외갓집에 다녀오라 고 일렀다. 그리고 허씨가 낳은 큰아들 장쇠더러 누이를 따라갔다 오라 하였다. 장화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앞뒤 사정을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아버지 가 무슨 일로 자기를 한밤중에 깨워 외가에 보내려 하는가? 더군다나 아버지 배 좌수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도 엄했다. 장화는 아버지의 명이라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눈알을 부라리며 재촉하는 장쇠를 따라 말을 타고 서둘러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장화의 얼굴에는 이유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쩐지 이것이 마 지막일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죽음
달도 없는 밤에 장쇠는 말을 급히 끌고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갔다. 얼마나 갔을 까, 인적은 끊기고 하늘도 어두운데 커다란 연못이 하나 보였다. 장쇠가 주위를 둘러보고 난 후 장화보고 내리라 하였다. 장화는 덜컥 겁이 났다.
“장쇠야, 여기는 외가가 아닌데 어찌 내리라 하느냐?”
“누이는 자신의 죄를 잘 알텐데 무슨 변명을 그리하오? 어서 내리오!”
장쇠는 억지로 장화를 끌어내렸다. 장화는 이유를 알지 못해 답답하고 무서웠 다.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는 것이냐?”
“누이는 외간 남자를 불러들여 애까지 배지 않았소? 이것이 세상에 알려지면 우리 가문의 수치니 누이는 이 곳에서 알아서 자결하오!”
분명히 무언가 잘못 된 것이 있었다. 하지만 장쇠에게 사정한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장쇠야, 그게 무슨 말이냐? 내가 태어나서 아직껏 밖에 나가 본 적이 없고, 남자라고는 집안 하인들도 보지 못하였는데, 그게 무슨 망발이냐?”
“에이, 그런 변명일랑 저승에 가서 하오!”
장쇠는 다짜고짜 장화를 연못 속으로 밀어뜨렸다. 장화는 소리를 질렀지만 깊은 산 속에서 구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잠시 후 물결이 잠잠해지고 장화가 떠오르지 않자 장쇠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 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갑자기 호랑이 한 마리가 장쇠를 덮쳤다. 장쇠는 기절해 버렸고, 놀란 말은 발광을 하다가 줄을 끊고 어디론가 도망가 버렸다.
며칠 동안 배 좌수 집에는 흉한 일이 겹쳤다. 장화와 장쇠가 외가에 가다가 호 랑이가 나타나 장화를 죽이고, 장쇠의 두 귀와 한 팔, 한 다리를 물어 갔다는 소문이 근처 마을에 파다하게 퍼졌다.
장화가 타고 갔던 말이 주인도 없이 혼자 배 좌수댁으로 들어온 것은 새벽 무 렵이었다. 배 좌수댁이 발칵 뒤집혔고, 허씨는 장쇠가 무슨 일을 당했나 보다 하며 집안 사람들을 모두 깨웠다. 배 좌수는 하인들을 풀어 두 사람을 추적하게 했는데, 날이 밝아올 무렵에야 산 속 연못 옆에 쓰러진 장쇠를 발견하였다. 나 중에 깨어난 장쇠는 호랑이가 장화를 물어 가고 자신도 쓰러져 기절해 버렸다 고 말했다. 그런데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배 좌수의 둘째 딸 홍련이 가 깊은 산 속의 연못에 빠져 자결한 일이 일어났다.
배 좌수는 깊은 시름에 잠겨 장화와 홍련을 애타게 찾았다. 비명에 횡사한 장화 와 홍련은 오랫동안 마을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고, 그 얘기를 할 때마다 마음 약한 이들은 눈물을 짓곤 하였다.
사실 홍련이 죽은 것은 사정이 있었다. 장쇠가 하인들 등에 업혀 돌아온 다음날 부터 허씨는 무섭게 홍련이를 구박했다. 장쇠가 다친 것이 모두 홍련이 때문인 것처럼 굴었다. 홍련은 그 구박을 견디다 못 해 울다 쓰러져 잠들기가 일쑤였 다.
그러던 어느 날 홍련의 꿈에 장화가 나타났다. 꿈속에서 장화는 자신이 억울하 게 죽었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죽은 장소를 가르쳐 주었다. 홍련은 어머니도 없 고 언니도 없는 세상에 더 이상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그래서 아버지 앞 으로 편지를 한 통 써 놓고 밤중에 혼자 연못을 찾아가 몸을 던졌던 것이다.
담이 큰 자가 살아 남으리라
궁중에서 어전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상(上)의 용안(龍顔, 임금의 얼굴)에 근심이 어렸고 조정 대신들의 얼굴이 밝지 못했다.
“도대체 무슨 연고(緣故)인가? 벌써 몇 번째 새로 부사를 보냈는데 그 이유를 밝히지 못하다니…….”
“망극하옵니다.”
“과인의 덕이 부족한 탓인가?”
대신들은 머리를 조아릴 뿐 말이 없었다. 한참 정적이 흐른 후에 한 신하가 앞 으로 나섰다.
“전하, 이번 일은 담이 크고 용력이 대단한 자만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인 것 같 습니다. 마침 정동호라 하는 장사가 그 곳에 부사로 가기를 자원하니, 그를 보 내심이 마땅한 듯싶습니다.”
“그래? 하지만 그 자가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어쨌든 그를 부사로 임명하 여 철산으로 보내도록 하여라.”
상의 용안은 여전히 걱정과 근심으로 어두웠다.
몇 해 전부터 평안도 철산 땅은 해마다 흉년이 들고 사고가 빈번히 일어나 갈 수록 인심이 사나워졌다. 더군다나 철산에 부임해 간 부사들이 부임한 다음날이 면 어김없이 시체가 되어 나오니 철산은 자연 폐읍이 되다시피 했다. 사정이 그 러니 백성들도 철산을 떠날 뿐만 아니라, 부사들도 그 곳에 부임하길 꺼려하였 다. 그런데 그 곳 부사를 자원한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상감께서는 그를 임명 하면서도 적지 않게 걱정이 되었다.
정동호는 철산에 도착하자마자 이방을 불렀다.
“듣자 하니 이 곳에 부임한 관장들이 부임한 다음날이면 죽는다는데, 그게 사 실인가?”
“황송하오나 그렇사옵니다. 어떤 이유인지 오륙 년 전부터 이 곳 관장으로 오 시는 분은 다음날 이유도 없이 돌아가시는 변괴가 있었습니다.”
“음…….”
부사는 깊은 신음 소리를 냈다. 이방은 부사에게 아뢰면서도 내일 아침이면 또 송장 치울 일이 생겼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방은 듣거라. 오늘밤 모든 군졸들을 조용히 대기시켜 놓도록 하여라!” 이 때가 벌써 초저녁이라 신임 부사는 촛불을 돋우고 주역을 꺼내 천천히 읽기 시작하였다. 밤은 점점 깊어져 주위에는 개미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부사는 그 래도 큰 칼을 옆에 두고 전혀 흔들림이 없이 계속하여 글을 읽었다.
그 때였다. 갑자기 찬바람이 부는 듯하더니 부사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부사가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칼을 집고 보니, 눈앞에 여자 귀신 둘이 나란히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부사는 간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정신을 더욱 가다듬었다.
“너희는 어떤 여자기에 이 깊은 밤 관청을 소란하게 하는가?”
부사의 호령 소리에 두 귀신은 오히려 기쁜 듯 웃더니 나비처럼 부사에게 절을 하는 것이었다. 부사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저희는 이 고을에 사는 배 좌수의 딸 장화와 홍련입니다.”
“죽은 귀신이면 저승으로 갈 것이고, 양반집 처녀면 엄연히 그 법도를 지킬 것 이지, 이 무슨 해괴한 장난인가?”
부사의 호령에 귀신들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며 전후 사정을 털어놓았다.
“저희가 사또께 이렇게 나타나 심기를 불편하게 해 드린 것은 억울한 사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껏 이 곳에 관장으로 오신 분들을 만나 억울함을 아뢰려 해도, 모두 저희의 용모를 보고 놀라 돌아가시는 바람에 소원을 풀지 못했습니 다. 이제야 사또 같은 분을 만나니, 저희들의 원한을 꼭 씻어 주옵소서.”
원한에 찬 귀신이 되어 나타난 장화와 홍련. 그들과 얘기를 나누며 정 부사는 반드시 그 억울함을 해결해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원한을 풀다
다음날 부사가 방 문을 열고 나타나자 관속(官屬)들은 모두 놀라고 말았다. 그 중에는 귀신이 나타난 줄 알고 기절하는 자도 있었다. 어쨌든 부사는 이방을 불 러 배 좌수의 가족들과 하인들 모두를 잡아올 것을 명령하였다.
이른 아침부터 동헌에는 배 좌수 가속들로 북적거렸다. 부사는 우선 배 좌수에 게 물었다.
“내 들으니 그대에겐 전처의 두 딸과 후처의 세 아들이 있다 하니 그러하 냐?”
“그러하외다.”
“다 살았는가?”
“두 딸은 죽었사옵고 다만 세 아들이 살았나이다.”
“두 딸이 어찌 죽었는지 바른 대로 아뢰어라. 만약 거짓을 아뢰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부사는 서릿발 같은 영을 내렸다. 그러자 배 좌수는 겁에 질려 두 딸이 죽은 이 유를 아는 대로 말하였다. 장화의 행실이 좋지 못하여 낙태를 한 일, 그 사실을 알고 가문을 위해 자결하도록 한 일, 또 홍련이 죽은 언니를 그리워하다 따라 죽은 것 등을 아뢰었다.
부사는 배 좌수의 말을 모두 듣고 엄한 얼굴로 다시 말하였다.
“네 말이 사실이라면 낙태한 증거가 있을 것이다. 그 증거를 가져오너라!”
부사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허씨가 웃으면서 나섰다.
“제가 친어미가 아니어서 오늘과 같은 일이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 낙태한 것을 보관하고 있다가 오늘 이렇게 가져왔나이다.”
허씨는 당당하게 증거를 제출하였다. 부사가 그것을 보니 아무래도 낙태한 증거 가 분명했다. 어쩔 수 없이 배 좌수 가족을 모두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 부사 앞에 다시 장화와 홍련의 원혼이 나타났다. 장화는 울며 억울함을 호소하더니, 그 낙태한 것의 배를 갈라 보면 알 것이라고 하였다. 부사도 언뜻 짐작되는 것이 있어, 다음날 날이 밝기가 무섭게 다시 배 좌수 가족들을 불러들 였다. 그리고 다시 증거를 올리라 하였다. 허씨는 여전히 당당하게 그 증거물을 바쳤다.
“낙태한 것의 배를 가르라!”
부사의 갑작스런 명령에 허씨의 얼굴은 흙빛이 되었다. 사령들은 달려들어 즉시 증거물의 배를 갈랐다. 그런데 그 증거물의 뱃속엔 쥐똥이 가득했다. 배 좌수는 그제야 그것이 낙태한 것이 아니라 쥐의 시체인 것을 알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허씨의 소행인 것을 깨달았다. 배 좌수는 그런 줄도 모르고 허씨의 말에 속아 장화를 죽게 했으니 아비로서 차마 못 할 짓을 한 것이다.
배 좌수는 큰 소리로 통곡하며 두 딸의 이름을 불렀다. 부사는 쥐똥이 가득한 그 뱃속을 보고 노하여 소리쳣다.
“간특한 계집! 네가 천고에 흉측한 죄를 짓고도 방자하게 교묘한 말로 나를 속 이려 들다니!”
허씨는 이제 모든 것이 틀린 줄 알고 머리를 조아리고 벌벌 떨 뿐이었다.
“네 도대체 어떤 생각으로 무죄한 전실 자식을 죽였는가? 그 이유를 바른 대 로 아뢰어라!”
“소첩의 집안은 대대로 명문 거족이었으나 가세가 기울어 하루 아침에 좌수의 후처가 되었사옵니다. 전실이 낳은 두 딸은 모두 용모가 뛰어나고 행동이 아름 다워 내 자식같이 키우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두 자매가 저를 모해하는 말 을 일삼고 불미한 일을 입에 올리니 제 가슴속에 원망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이 말을 해도 남편은 듣지 않을 듯하여 부득이 쥐를 잡아 피를 묻히고 장화의 이불 밑에 넣어 남편을 속였습니다. 그리고 장화가 죽은 후에 다시 홍련을 심하 게 나무랐더니 홍련이 독한 마음으로 그 언니를 따라 죽어 이렇게 된 것입니다. 부디 사또께선 제 사정을 굽어살피시고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정 부사는 허씨의 말이 교묘하고 사건 또한 기가 막힌 일이라 감영에 보내어 일을 처리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즉시 조정에 닿아 상께서도 보시게 되었다.
“허씨는 천하에 흉녀라. 허씨를 능지 처참(陵遲處斬, 머리·몸·팔·다리를 토막 쳐 서 죽이던 극형)하고, 그 아들 장쇠 또한 교(絞, 교수형)하여 죽이도록 하라. 그리고 비(碑)를 세워 장화와 홍련의 혼백을 위로하고, 그 아비는 풀어 주도록 하여 라.”
철산 부사 정동호는 어명에 따라 그대로 시행하였다. 그리고 두 처녀가 죽은 연 못의 물을 퍼내고 시신을 꺼내어 양지바른 곳에 묻어 주었다. 그날 밤 정 부사 의 꿈에 장화와 홍련이 나타나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했다. 그리고 앞으로 정 부 사의 벼슬 운이 트일 것이라 하였다. 과연 정 부사는 훗날 벼슬이 통제사에 이 르렀다 한다.
환생
집에 조석 공양할 사람이 없어지자 배 좌수는 새로 윤씨를 맞아들였다. 얼마 지 나지 않아 윤씨에게 태기가 있었다. 그런데 유독 그 배가 불러 모두들 쌍둥이를 낳을 것이라 하였다. 과연 열 달이 지나 윤씨는 쌍둥이를 낳았다. 모두 딸이었 다.
하루는 배 좌수가 꿈을 꾸니 오색 구름을 타고 선녀가 나타나,
“그대가 얻은 두 딸은 바로 장화와 홍련입니다. 두 사람이 모두 비명에 죽은 까닭에 옥황 상제께서 불쌍히 여기사 다시 지상에 내려 보내셨으니 소중히 기 르시길 바랍니다.”
하고는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배 좌수가 문득 꿈에서 깨어나 포대에 싸인 두 딸을 보았다. 과연 선녀의 말대 로 두 아이는 장화와 홍련을 많이 닮은 것 같았다. 배 좌수는 그 꿈 얘기를 윤 씨에게 하였고, 이후로 두 딸을 장화와 홍련이라 하며 소중히 길렀다.
두 딸이 자라 십오 세가 되자 배 좌수는 두루 혼처를 구하였다. 마침 평양에 이 씨 성을 가진 양반댁에 적당한 혼처가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사실 이 집안은 재산이 많았지만 자식이 없었는데, 명산(名山)에 기도하여 늦게야 쌍둥이 아들 을 얻은 집안이었다. 이 두 사람과 배 좌수의 두 딸을 맺어 주니 보는 이마다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신랑들은 옥골 선풍(玉骨仙風)이요, 신부들은 꽃보 다 더욱 어여뻤다.
이씨의 두 아들은 모두 과거에 나아가 동시에 장원 급제하였다. 상감께선 두 형 제에게 모두 한림 학사를 제수하셨고, 항상 곁에 두고자 하셨다.
이후 장화는 이남 일녀를 낳았고, 홍련은 아들 둘을 두어, 가문이 모두 번성하 고 대대로 복록(福祿, 복과 녹)을 누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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